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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69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密陽 天皇山 第二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어찌 꿈엔들 기대했으랴. 의원으로서 절실하게 열망했던 인체해부의 기회가 이토록 가까운 시일 안에 자신에게 닥쳐오리라는 것을 ...
여자일지 남자일지 소년일지 늙은이일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의태는 호언했었다.
무덤에 묻히어 이미 여러 날이 경과한 부취나고 오장육부가 졸아든 그런 사체야 어찌 배움에 도움이 되리요 하고.
혈행이 아직 생생하게 관류하는 인간의 몸.
살인이라는 범법이 아니고서는 방금 목숨을 거둔 그런 사체를 과연 어디에서 만나볼 수 있으랴 의문을 지니면서도 그 장담하는 이가 유의태였음에서 허준은 유의태의 장담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천금을 주고 살 수는 있되 그 산 목숨을 해부한다는 행위만은 만금을 주고도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주선하는 이가 유의태인 것이다.
생사경계를 오락가락하는 무수한 중병자들을 조석으로 다루는 유의태가 의약으로는 도저히 구치할수 없는 막다른 생명 하나를 뒤에 남는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아주리라며 죽어가는 목숨 하나를 만금을 주고 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월 모시에 죽을 것을 약속한 생명을 이 세상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손가...
추측은 허준의 머릿속에서만 맴돈게 아니었다.
허준을 불러들이는 장소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특이한 장소이기에 동행해오는 김민세도 안광익도 유의태의 초대를 반드시 인체해부와 연결짓는 눈치였다.
"이 복중에 단지 자연의 신비한 현상이나 구경하라고 먼길을 불러들이도록 유의태는 호사가가 아니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김민세가 재차 물었을 때,
"사람은 부술을 잠시 하루 한나절 헤쳐본대서 그 몸속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볼 순 없어. 첫째 목숨이 떨어진 몸뚱이가 이 염천에선 하루도 못 가 썩네. 그걸 감안하여 그 사람은 이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시례빙곡을 찾아낸 게 틀림없어. 아마도 병자는 이 여름을 못 넘길 중한 병자일 터이고!"
'... 오는 보름날 밤.' 하고 유의태는 분명 시한을 두었었다.
그렇다면 유의태에게 죽음을 약속한 그 생명은 이미 목숨을 떨구었는지도 모른다.
자살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목을 매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치사량이 넘는 음독의 방법 또 촌철로 급소를 자해하는 방법 등 ...
그러나 지금 허준의 머릿속에 비치고 있는 영상은 너무도 섬뜩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목숨을 향해 구원의 손을 뻗치기는커녕 빈사의 생명이 죽음의 고비를 맞아 마지막 몸부림치는 그 단말마적인 광경을 냉엄하게 지켜보는 유의태의 모습이 연상되어 허준의 등줄기엔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바라는 품성이 아니기에 자식과도 조강지처와도 인연을 끊은 유의태가 아니던가?
지리를 물어물어 점차 천황산이 다가올수록 허준의 뇌리에는 유의태의 얼음장 같은 눈빛이 다가와서 떨어지지 않았다.
밀양 부내로부터 60리. 밀양과 울주의 군계를 이룬 천황산의 수려한 능선을 발견한 것은 일행이 산음을 떠나온 다음날 밤중이었다.
그러나 시각도 시각이려니와 길이 초행인 일행은 쉬 빙곡을 찾지 못한채 오히려 지름길을 찾는다는 것이 가지산 줄기를 가로질려 석남재를 방황하다가 표충사로 찾아들고서야 밤중에 깨어 나온 사미승으로부터 얼음골의 정확한 위치를 전해듣고 사자평 고원을 타넘었다.
얼음골에 이른 시각이 별자리로 어림잡아 오경.
마치 백골의 더미인양 유난히도 횐 바위가 널브러진 골짜기는 과연 들어서면서부터 섬뜩한 냉기가 끼쳐왔고 그것은 산속 새벽의 한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미 서천 높이 뜬 달빛이 가파른 계곡의 동쪽 비탈을 파랗게 비추고 맞은편 달그림자 속에선 부엉이 소리가 마치 버려진 아이의 피를 토하듯한 울음소리로 심산의 정적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기는 제대로 온 듯하오만 집도 절도 보이지 않으니
이 사람이 어디쯤에서 기다리는지 짐작할 길이 없구먼."
발밑으로 오싹오싹 기어오르는 냉기에 자꾸만 옷깃을 여미던 김민세가 입을 열었다.
"일기는 말짱한데 저건 안개인가 구름인가?"
하고 안광익이 골짜기 위쪽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과연 골짜기를 타고 어디서부터 퍼어나는지 자욱한 안개가 감돌며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가 여긴 듯하니 좀더 올라보시지요."
터져나간 신들메를 다시 죄어묶으며 허준이 말했다.
다가온 안개가 세 사람을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속 같다가 문득 눈앞이 다사 트이고, 그 자욱한 안개의 물방울들이 허준의 이마와 목덜미에 생물처럼 휘감겼다.
"정말 기이한 장소군."
안개 속에서 김민세의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저기 불빛이 있습니다."
허준이 가리키는 골짜기 안에 횃불 하나가 마치 귀화처럼 소리 없이 타고 있었다.
"지세로 보아 암벽 사이에 암자라도 하나 있는 게로군."
안광익의 대꾸였다.
그러나 횃불을 앞세워 세 사람이 널브러진 바위틈을 비집으며 머리 위의 횃불을 찾아 올랐을 때 그곳은 두어 채 초가집이라도 들어앉을 듯한 거대한 바위굴 입구였고 암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눈길을 끈 횃불은 굴 입구에 타고 있었고 또다른 횃불 두 개가 굴벽에 꽃혀 물기가 번들거리는 암벽을 비추고 그 아래 한 사내가 느긋이 왕골자리를 깔고 그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누워 있네."
"스승님올시다."
안광익의 말에 허준이 대답했다.
"사람이 장난이 우심하구먼!"
그것이 한눈에 유의태임을 알아챈 김민세가 웃음을 물며 앞장서 다가가다 흠칫 섰다.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피냄새였다.
허준도 안광익도 그 냄새를 맡고 걸음을 세웠다.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유의태였다.
그리고 그 모습, 마치 술취한 자가 제 집 안방에 드러눕듯 두 팔 벌려 큰 대자로 누운 그 왼손이 대야에 담겼는데 그 손목이 담긴 대야가 온통 피였다.
김민세가 유의태를 부둥켜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보시게! 이보시게!"
"스승님!"
허준도 뛰어들며 외쳤고 안광익이 물통 속에 담긴 유의태의 피투성이의 손을 잡아챘다.
예리한 칼날이 손목의 동맥을 잘라낸 모진 상처 자국이 보였고 피는 아직도 배어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자진했어!"
김민세가 숨이 떨어진 그러나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유의태의 시체에 눈을 부릅떴다.
식지 않은 건 체온뿐이 아니었다. 체내의 피를 쉬 뽑아내기 위하여 대야에 담은 물 또한 아직 다 식지 않은 채 따뜻했다.
"미쳤어!"
안광익이 일변 유의태의 허리춤에 손을 넣었으나
멎어 있는 심장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허준이 절규하며 유의태의 가슴 위에 무너졌다.
자결한 유의태의 의도는 곧 알게 됐다. 유의태의 머리맡에는 그가 미리 준비해온 물건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겉에 먹점 하나도 찍지 않은 두툼한 서찰은 유서였고 상화에게 지어오게 했다는 상자 속에는 유의태가 직접 챙겨온 부술에 사용할 허준이 오늘날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작고 가느다란 톱, 그리고 십여 가지가 넘는 여러 형태의 칼들이 어린아이의 기저귀와 같은 헝겁에 일일이 싸져 있었다.
그밖에 치험록이라 적은 네 권의 두터운 책 그리고 장부도와 12경락과 침혈을 그린 신체도 외에 팔뚝만한 황초가 십여 개가 들어 있었다.
"이미 늦었어. 아마도 우리가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는 걸 보고서야 일을 저지른 듯하이."
죽음의 고통을 이기려는 의지였을지 아직도 허공을 카악 지켜보고 있는 유의태의 눈꺼풀을 조용히 쓸어주며 안광익이 탄식했다.
김민세가 유의태가 남긴 봉서의 알맹이를 꺼내 읽다 말고 소스라치듯 허준을 돌아보았다.
"읽게. 그대에게 보내는 것이네."
허준이 떨리는 손으로 유의태의 서찰을 받아들었다.
낯익은 글자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날 병사에서 병자들의 처방을 휘갈겨쓴 그 글자들과는 다른 한자 한자 혼과 기백이 담긴 힘이 어린 행서체의 정자들이었다.
"허준은 보아라. 내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할 사람이 너임을 알고 유의태는 허준에게 이 글을 쓰노라!"
허준의 눈이 붉어왔다. 눈을 부릅뜨며 허준은 계속 읽어갔다.
"나는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보았고 기꺼이 그 죽음을 맞이하려 했을뿐 ... 그건 모든 생명의 예정된 길이라
어찌 서러운 일만이리."
57년 전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바로 이 유의태의 모습이요 57년이 지난 오늘 죽어가는 자가 또한 이 늙고 병든 유의태라는 생사윤회의 법칙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겪어야 할 죽음은 곧 태어나던 때 이미 결정된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아니리.
운다 하여 어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운명일 것이리요.
그 운명이라는 것. 소리없이 서서히 어김없이 닥치는 그 죽음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라.
60평생을 살다 가는 나 같은 자에게야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을까마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로부터 이 세상에 유용한 젊은이, 평생 타인을 위해 덕을 쌓은 귀한 인물, 평생 호강을 모르고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측은한 인생까지 마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만병의 정체를 캐고 밝혀서 남을 해치고 악업을 일삼는 자가 아니거든 그들로 하여금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무병하게 오래오래 생명을 지켜줄 방법은 없을까 하고.
이는 의원이 된 자의 본분이요 열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아니리. 하나 나 또한 내 몸속에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사람의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다섯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머리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피어 그로써 네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
읽기를 마친 허준은 복받치는 감동과 비통함이 다시 유의태에게 엎드려 울부짖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사오리까. 버려진 시체가 있다하여 기대한 것이옵지 어찌 그것이 스승님인 줄 알았으 ... 리 ... 까."
무너진 허준의 손에서 안광익이 유의태의 유서를 뽑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허준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유의태! 유의태!'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스승의 손목을 움켜쥐고 허준은 숨이 막힐 듯했다.
지난날 그가 아들 도지에게 말했던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이제야 새삼 허준의 가슴 복판에 마치 불덩이처럼 되살아나 뜨겁게 뜨겁게 담금질하고 있었다. 배워서 흉내내는 재주도 아니며 한 권 책 속에 담긴 지식도 아니다. 스승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죽여 자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계속 ~~
著者: 放松作家 故 李恩成
<小說 허준(許浚) 第70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密陽 天皇山 第三
골짜기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굴 밖 건너 가파른 비탈에 돌출한 낙락장송의
늘어진 가지들이 생물의 머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날이 새는 바람일세. 마냥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안광익이 동맥이 잘려나간 유의태의 손목에 지혈의 묶음질을 마치며 말했다.
허준은 보고 있었다.
유의태의 사체에서 체온이 사라지고 사후 경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고인의 뜻이 확연하거늘 더 이상 망설이지 말게."
유의태의 머리맡에 죽은 이가 손수 마련해놓은 해부에 소용되는 연장들을 벌여놓던 김민세가 또 한번 채근했다.
"이 사람이 굳이 이곳에 와서 숨을 거둔 의기를 헛되이 하려는건가!"
"하오나 ..."
"작은 인정에 얽매인 운운 말게!"
안광익의 눈도 다그치듯 허준을 향해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비록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기를 열망하오나 그렇기로 제 손으로 어찌 스승님의 몸을 갈가리 칼질을 하오리까. 난 못하오."
"해야 하리!"
"이 사람이 지금 그대가 느끼는 그런 작은 인정으로 죽었던가? 이 사람은 그대에게 마지막 자기 몸으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려 한 걸세. 그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외면할 셈인가!"
"그것은 아옵니다. 그러나 소인은 ..."
"지금 이 자린 그대가 소인이라 스스로 낮추어 부를 사람도 없으며 자네는 유의태와의 인연에만 얽힌 단순한 문도가 아니네. 그대가 이곳에 불려온 것은 유의태가 그대를 가장 촉망하는 의원으로 선택한 때문일세. 모르시겠는가?"
"그 말도 아옵니다. 하오나 ..."
김민세의 다음 말이 허준의 말허리를 끊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는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일세. 자기 자식과도 비교하여 특별히 선택된 사람."
김민세의 손이 허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난 죽은 이가 생전에 즐겨 뇌던 한마디를 기억하네. 비인부전이란 그 말, 비기자부전이란 그 말, 분명 그대도 들어본 말일 터."
"기억은 하옵니다. 하오나 ..."
"유의태 이 사람은 자신의 소신대로 자기가 지닌 마지막 가진 것을 특히 그대를 골라 물려준 걸세. 자기의 목숨, 자기의 몸뚱이를."
"그것은 그대의 의원으로서 자질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일세."
"소인도 이제야 그 뜨거운 기대를 절절히 느끼옵니다. 하나 ..."
"안다면 남은 뒷얘길랑 일을 마친 뒤에 하여도 늦지 않으리."
허준은 딴때없이 강한 김민세의 그 눈빛을 보았다.
안광익이 유의태가 준비한 장부도를 그린 족자를 굴 벽에 나뭇가지를 꽂아 걸고 그 눈빛도 허준에게 향해왔다.
"죽은 이의 뜻을 저버리지 말게. 어찌 이것이 소소한 인정에서 비롯된 일이리요. 보다 큰 뜻이 아니어든 어찌 이런 흉낸들 내리. 이 사람의 죽음은 작게는 그대에게, 크게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베푸는 은혜일세."
"그대의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갈라 의원으로서의 그대의 오랜 숙계(宿計~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계획)를 풀고 그로써 그대의 의술이 더욱 정통하고 그대의 손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자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의 바람은 그것이었으리. 그걸 안다면 스승의 배를 가르고 몸 안을 헤쳐보는 그대의 행동이 어찌 잔인한 행동이라고만 하리요."
허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날이 새기 시작했어."
해부 연장을 하나하나 점검하던 안광익이 허준에게 또 한번 소리쳤다.
이윽고 허준의 입이 열렸다.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
"그렇고말고."
김민세가 허준에계 강하게 끄덕였다.
"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대가 사모하던 스승 유의태의 몸을 가르는 것이 아니요, 이 사람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여겨야 하리."
허준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갔다.
눈앞에 유의태의 백랍처럼 창백한 사체가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말을 걸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 모든 병든 이들을 대신한 죽음 ...'
"칼을 잡게."
허준이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하오리다."
"그리고 마음을 먹게."
"... 마음을?"
"칼을 드는 것은 사람의 몸속 생김새를 알고 그 속에 찾아드는 어떤 작은 병도 낫우리라는 결심이노라."
"명심하오리다."
"그렇게 하여야만 이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요. 유의태는 영원히 사는 것이노라."
"... 명심하오리다."
잠길 듯하던 허준의 말꼬리가 굳게 악물어졌다.
이윽고 그 허준의 어깨에서 손아귀를 푼 김민세가 유의태에게 합장했다.
"극락왕생하시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안광익도 문득 젖은 눈을 들었다. 그러고 지그시 유의태를 바라보는 것으로 친구와의 이승에서의 작별을 마친 후 유의태의 피가 담긴 물통을 들고 굴 밖으로 나갔다.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지혈이 된 스승의 손을 공손히 잡아 염원했다.
'이 세상 병고에 시달리는 모든 이의 가슴에 스승님이 영원히 살길.'
안광익이 물통에 새 물을 담아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민세도 허준의 곁에 무릎 굽혀 앉으며 자신의 승복을 벗어 친구의 얼굴을 덮은 다음 연장을 담은 함을 새워 그 속으로 촛불 두 개를 옮겼다.
바람에 일렁이던 촛불들이 불꽃을 곧추 세우면 그 환한 빛을 유의태의 시신 위에 비췄다.
안광익이 허준의 곁에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 또한 작은 미물이나 가축의 속은 갈라보았을 것이네만 난 일차 수의를 입었던 송장들 몇은 갈라본 적이 있네. 혹 손이 막히면 나도 곁에서 도우리."
'스승님이 영원히 사는 길.'
바람소리가 일고 있었다.
첫햇살을 보고 울어대는지 뻐꾸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허준의 손이 마침내 스승 유의태의 옷자락의 매듭을 하나둘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예도를 쥔 허준의 손끝은 이미 떨리지 않았다.
얼음골에서의 사흘이 지나갔다.
그 첫날은 함께 밤을 새운 뒤 김민세는 굴 안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그날 밤 관재를 지고 나타나 관을 만들어 굴안에 넣어준 뒤 굴 밖에 나가 끝도 없는 송불을 허공에 보내며 목탁을 두드려댔다.
이틀째 밤.
허준의 곁을 떠난 안광익이 저 아래 계곡에 요기를 차려놨노라, 잠시쉬어 계속할 것을 권했으나 허준은 굴 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고 그 허준에게 김민세도 안광익도 굳이 요기를 할 것을 채근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황혼녘 허준이 혼자 유의태의 시신을 수습할 제에야 두 사람이 굴속으로 들어왔다.
허준은 웃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자기 옷을 벗어 유의태의 시신을 덮어 드린 것이다.
안광익이 자기의 옷을 벗어 그 허준을 감쌌고 보고 있던 김민세가 조용하게 물었다.
"다 마쳤소?"
"..."
"..."
"마쳤사옵니다."
김민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보았소?"
"... 사람을 보았습니다."
"..."
"겉으로만 보던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람이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 애썼느니."
김민세가 허준을 쓸어안았다.
순간 허준이 유의태의 관 앞에 꿇어앉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
"..."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 ... 를 벌 ... 하소 ... 서.
이 고마 ... 움 ... 맹세 ... 코 ... 영원히 잊지 않으 ... 오리 ... 다."
말을 마친 허준이 이제야 유의태의 관을 잡고 몸부림쳐 통곡했다.
"애비 아적 안 일어났느냐?"
허준이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 유의태의 유언을 실천하고 돌아온지 나흘째.
해가 기울었건만 오늘도 자기 방에서 한마디 기척도 없는 아들의 심기가 궁금하여 손씨가 며느리에게 물었다.
아직도 젊디젊은 부부다.
사나흘씩 헤어져 있고 보면 없던 정분도 냄직하건마는 돌아온 후 '혼자있게 해주오.' 한 아들의 당부를 좇아 자기 방으로 건너와 있는 며느리가 손씨는 안타까웠다.
"아직 너무도 혼곤히 자고 있습니다."
며느리의 눈가에 웃음이 잡혀 있자 손씨는 혀차는 소리를 낼 뻔했다. 아무리 서로가 믿어 의심치 않는 부부간이기로 수삼 일 집 비우고 돌아온 남편에게 궁금증조차 없느냐 싶어서였다.
"대체 밀양까지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돌아와서는 사흘씩 나흘씩 잠만 잔단 말이냐."
"오늘은 일어나 나오겠지요."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도 모르고 자기만 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워 있고 싶어서 누워 있을 것이다. 게으른 남자가 아닌 걸 안다. 그래서 작은 기척 한번 더 내보다가 말없이 돌아 나왔을 뿐이다.
"어디 몸이나 탈난 눈치는 아니더냐?"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복 더위 속에 밥 한끼 청하지 않고 잠을 자누. 내 잠시 들어갔다 오마. 뭐 가지고 들어갈 게 없느냐?"
"... 없습니다."
손씨가 부엌으로 나섰다.
"애비야 애비야."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허준은 깨어 있었다.
"원 방문조차 첩첩이 닫고."
하며 들어온 손씨는 뜻밖에 아들이 깨어 있는 눈을 보자 오히려 당황했다.
"아니 깨 있었더냐?"
"예."
하고 아들이 대답했다.
그 방문 밖에 자지러질 듯이 장난웃음을 문 남매가 닥쳤고 뒤따라 아내의 얼굴이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아부지 깼다! 와아, 아부지 수염 봐라."
하고 숙영이가 문지방에 매달리며 허준에게 웃었다.
허준은 어머니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많이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걱정이야 에미가 더 했지. 혹 갔던 일에 몹쓸 일이라도 있었던 것 아니냐?"
"몹씁 일이라니요?"
"너는 제 얼굴도 볼 수 없어 모르는 모양이다만 바짝 야위었어. 눈빛부터가 전과 같지 않구."
-눈빛이 다르다?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 자기의 이 손은 무엇을 한 손인가. 아무도 상상할수 없는, 세상 그 누구도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을 한 손이다.
그 피! 온몸에 달라붙던 그 스승의 피!
떠들썩한 남매를 말리며 방에 들어온 김씨도 딴때없이 무거운 눈빛의 남편을 건너보았다.
순간 허준의 입에선 변명 아닌 예상치 않은 말이 독백처럼 나왔다.
"사람이란 정말 대단한 것올시다.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사람은 위대한 존재올시다."
"무슨 일이 있었사오니까?"
"무슨 소린지 난 ..."
허준의 대답은 또 엉뚱했다.
"세상에 사람처럼 크나큰 존재가 없습니다."
"대체 누구를 만났기에?"
허준의 퀭한 눈이 잠시 허공을 쏘아보았다.
"... 좁쌀처럼 잔망스런 인간도 많을 것이요 평생 뜻을 품지도 세우지도 못하는 인간도 있을 것이오. 일차 뜻을 세운 인간은 ..."
"누구 얘기를 하고 계시오니까?"
"우리가 알아서는 아니 되는 일이냐?"
허준이 잠시 어머니와 아내를 건너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어라고! 설마 ...?"
"사실올시다."
"언제오니까!"
"그분이 왜!"
"자진했사옵니다."
고부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자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씀이오니까?"
"나를 위하여 ..."
"예?"
"이 허준을 위하여. 내 의술이 더욱 정통해질 기회를 주고자 ... 짐을 졌사옵니다. 너무나 커다란 짐을, 뜻이 나약한 저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소상히 말씀해주소서. 너무도 궁금하옵니다."
"유의원의 정정한 모습을 뵌 것이 불과 바로 며칠 전이어늘 ..."
"꿈결 같은 일이옵니다. 제가 보고 겪은 일 소자의 입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하옵니다. 오로지 한마디 그분이 아니라면 영원히 꿈꾸지 못했을 너무도 귀한 체험을 했다는 그 말 한마디 외 지금일랑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
"그 은혜 ... 열 번 다시 태어나도 또 의원이 되리라는
그 높은 뜻 저 또한 이어받아 명심하고 명심할 뿐.
언젠가 이번 길에 제게 있었던 일 조용히 말씀드릴 날이 있사오리다."
"그렇거든 네가 입을 열기까지 더 묻지 않으마. 하나 유의원의 장사는?"
"제 손으로 치렀습니다, 밀양 천황산 양지바른 곳에."
문득 허준의 목이 잠겼다. 나흘 전 천황산을 떠나을 때 허준은 한사코 유의태의 관을 산음으로 모시고 오려 했었다.
하나 김민새가 말렸다. 안광익도 반대한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얼마 전 안점산에 찾아와 스스로 자신의 묏자리를 보러 다닌다 얘기하며 유의태가 지정한 무덤자리는 그런 소박한 장소였음도 두 사람에게 들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부는 양지바른 언덕,
생전의 그의 바람이 그러했다 하매 그제야 허준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천황산 그 이름없는 언덕이 굳이 부조가 묻힌 산음땅보단 유의태에게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여겼고 언젠가 도지가 찾고자 하면 쉬 찾을수 있도록 스승이 묻힌 지형을 뇌리에 새기고 돌아왔었다.
생전에 그가 세상에 베푼 인술에 비하면 그 무덤은 너무나 적적한지 모르나 생전의 유의태를 아는 그로서는 온산 가득 만장과 조객이 뒤덮인 호사스러운 장례보다 천황산의 조용한 장례가 고인이 바라는 바라고 느꼈다.
일차 안점산으로 돌아갔던 김민세가 산음 허준의 집으로 다시 나타난 것은 약속대로 열흘 후였다.
유의태를 묻고 산음으로 돌아오는 귀로에서 김민세가 허준에게 강경하게 권했던 것이다.
"의업에 바탕이 될 세상 구경이라니요?"
처음 허준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듣고 반문하자 안광익도 기다렸다는 듯이 허준에게 권했다.
"춘하추동 계절을 따라 각도의 특산 약재가 무엇이며 향약이라 일컫는 각 지방 전래의 처방도 알아보고."
"그보다 중요한 까닭이 또 있네. 그것은 넓지도 않은 내 땅, 내가 죽도록 살아야 할 이 땅에, 조선팔도 안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 구경을 해 두라는 것일세."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
"그밖에 소득이 또 있으리. 동서의 지형에 따라 물맛이 다르고 남북의 기후가 다르니 그 산줄기와 강변과 곳곳에 사는 내나라 사람들의 인심 풍속은 어떠한지, 그 민생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겪으며 세상의 견문을 넓히는 일 또한 장차 세상을 넓게 살아야 할 사람의 빠뜨릴 수 없는 공부로세."
"진실로 소인도 원하는 바올시다마는."
"마음만 정해지면 앞장일랑 내가 서리. 한 일년 식구들과 헤어져 살수 있겠는가?"
"일년이오니까?"
절간을 찾아 잠을 자고 인근 마을에 내려가 의술을 베풀어 의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덧붙자 허준은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길을 떠난 허준이 멀리 함경도 경원땅에서 내의원 취재 소식을 들은 것은 일년 작정한 그의 여정에 아홉 달을 넘긴 이듬해 봄이었다.
허준은 그 길로 한양으로 남하, 취재에 응했다.
그 허준의 태도는 딴때없이 조용했다.
김민세와의 9개월의 동고동락의 여행에서 세상 물정에 대한 끊임없는 토구가 그가 아는 의술에 관한 지식 외 인간사에 관한 두텁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시켜 주었던 것이다.
허준은 등방했다. 성적은 수석이었다.
그때의 허준의 나이 스물아홉, 선조 8년 4월의 일이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
<小說 허준(許浚) 第 71話>
- 이은성 지음 / 소설 동의보감
內醫員 第一
내의원이란 태조 초년에 설치한 전의감을 개칭한 것으로 임금이 복용하는 어약화제를 관장하여 궐내에서도 가장 조용한 예문관 서쪽에 위치한다.
직책들이 임금과 왕실의 건강을 살피고 지키는 막중한 것이매 일명 내국이라고도 부르는 이 내의원의 진용 또한 삼엄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시임 의정이나 전임 의정 중의 정 1품 한 사람이 맡으며 그 아래에 종1품 또는 정2품의 제조 한 사람이 있고 다시 그 아래 정 3품의 당상으로 부제조를 삼는데 이 제조는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가 겸임한다.
이 세 정식 문관을 정점으로 실무의 서열과 분담에 따라 내의원정(정3품), 첨정(종4품), 판관(종5품), 주부(종6품) 등이 1명씩이며 그 밑에 직장(종7품) 3명, 봉사(정8품) 2명, 부봉사(정9품) 2명, 참봉(종9품) 1명과 차비대령 할 의녀10명과 종약서원과 도약사령이 각각 2명씩 소속한다.
이 진용이 매일 번을 맡되 도제조는 5일마다 의관들을 인솔하고 계사로 임금을 비롯 각궁에 문안을 아뢴다.
의원으로서 취재에 뽑힌 자는 이 내의원 외에 일반 서민백성들의 의약과 치료를 전담하는 궐외의 혜민서가 있으나 갓 취재에 뽑힌 허준은 확정된 부서를 지시받지 못하고 일차 내의원에 속했다.
그러나 그가 취재의 수석합격자임에서 18품계 제일 꼴찌인 종9품에서 두 품계를 올라 뛴 종8품 봉사직에 제수받았고 구임원으로 지정되었다.
구임원이란 특정한 기술이나 경험 또는 자격을 인정받은 인물에게 함부로 그 보직의 이동을 금하고 그 임기에 관계없이 재직을 보장하는 취재나 과거의 최고 득점자에게만 해당되는 특혜인 것이다.
그리고 춘하추동 4절기로 나누어 지급하는 종8품 허준의 춘기의 녹은 쌀과 보리 수수가 넉 섬, 콩 두 섬, 포 한 필, 저화 두 장이었다.
그 저화는 조선조의 지폐로서 때의 가치가 저화 한 장에 쌀 닷 되를 바꾸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어의의 길을 별러 8년 만에 도달한 길이요 그 첫 녹봉이라는 데서 허준 일가의 감격은 컸다.
밀양 천황산에서의 유의태의 자결 이후의 지난 1년, 그 허준을 데리고 함께 전국을 유력하던 김민세가 허준의 등방을 축하하며 아들 길상이와 함께 멀리 산음으로부터의 이삿짐을 나누어지고 상경했고 여축이 없는 허준 일가가 도성 밖 애고개와 만리재 중간의 황량한 언덕배기에 삼개 선군들이 살다 버린 움막집을 내 집으로 정하자 그들 부자도 굳이 함께 남아 허준과 함께 강변 갈대를 꺾어지고 와 일변 돌과 흙을 발라 벽을 두르고 내려앉은 구들장을 세우고 토담을 쌓아올리는 등 마치 친자식의 분가나 돕듯이 도왔던 것이다.
그 여름 한철 지리한 장마가 잇따랐고 빗발이 굵어질 적마다 애고개 쪽에서 황황 홀러내리는 흙탕물들이 허준의 집 토담을 허물고 마당 한귀퉁이도 쓸어나갔으나 그 여름이 지나자 그런 대로 허준의 집도 사람 사는 훈기가 감돌았다.
노모와 아내가 날이면 날마다 돌을 고르고 언덕을 다져 손뼘만한 밭뙈기들이 개울 주변으로 생겨났고 하절 녹봉의 반으로 삼개 조선소에서 쓰다 남은 목재를 사서 손을 본 것이 드디어 아래윗간 버젓한 방 모양이 둘이 나왔고 잿간 곁으로도 겸이의 공부방을 하나 달아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초가을.
봄철내 산비탈에서 옮겨온 돌배나무며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집 주위에 생생하게 살아올라 해질녘 밥짓는 연기라도 나무 사이로 피어오를라치면 멀리 길 가는 행인들이 건너보기에 제법 그 허준의 집은 누대를 살아온 집인 양 정감스럽게 비쳤다.
"대궐이 저기다! 대궐 봐라."
상경 반 년이나 되어서 새 옷은 못해 입고 추석빔으로 새 댕기 하나씩을 머리에 묶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겸이와 숙영이가 웅장한 남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기가 죽어 있다가 육조 앞 넓은 길로 들어서자 전개된 광화문과 그 뒤로 휘황한 대궐 전각을 발견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저쪽에도 대궐있다!"
내닫는 오라비를 뒤쫓아가던 딸 숙영이도 딴 쪽을 가리키며 뛰었다. 애고개 밤나무숲에 밤도 따러 가고 그 골짜기 바위 밑창에서 가재도 잡는 두 남매에게 유일한 놀이터인 애고개에서 도성은 바로 눈앞이었다.
그 줄줄이 이어간 도성의 성벽과 경고소리를 아침 저녁으로 들으면서 '서울구경 서울구경' 하고 아이들이 보챘으나 정작 구경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남대문 칠패(장터)에서 다시 감주와 떡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고 아내는 아이들을 건사하고 일변 소채라도 한 다발 더 일궈먹을 밭뙈기를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준이 타오는 녹봉은 일가가 근근이 계량이나 하는 게 고작이니 아직은 겸이에게 한철에 쌀보리 서말짜리 서당에 보낼 처지도 못되었다.
그토록 그리던 내의원.
취재에 오르기만 하면 당장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대는 산음에서나 바라보던 허황스런 꿈이었다.
상감과 왕실의 고귀한 이들의 병을 맡아 그 명예가 하루 아침에 달성될 듯이 여긴 것도 착각이었다.
나라 안 저마다 내노라 하는 수재와 준재들이 기라성처럼 모여 저마다 와신상담 자기의 재주를 갈고 벼르며 의원 최고의 영예인 어의의 자리를 넘보는 보이지 않는 암투의 격전장이 내의원이었다.
"저자가 허준일세!"
돌아보지 않아도 하얗게 눈흘기는
그 질시의 수군거림이 허준의 등뒤에서 늘 들려왔다.
"역대 수석자 중에 동인경 말고 구급방과 부인대전까지 배강했다는 건 저자가 처음이라네."
"... 음 ..."
듣고 있던 상대가 신음했다.
내의원 취재의 과목에서 동인경의 배강(책을 펴놓되 돌아앉아 외우는 것)은 필수과목이다. 그러나 다른 고사서인 창진집 직지방, 구급방, 부인대전, 득효방, 태산집요는 임문이라 하여 외우지 못하면 그 일부를 보고 읽는 것을 허용한다.
"한데 저 허준이란 자가 모두 배강으로 꿰뚫었단 말인가?"
"시관으로 임석해 있던 이공기의 말이니 거짓일리 없지, 그리고 이건 정예남 그분한테서 나온 얘긴데 지난해 봄 한양 연도에 퍼졌던 소문, 충청도 진천땅에서 웬 시골의원이 빈민들의 병을 그냥 돌봐주었단 얘기 ..."
"그 얘긴 나도 알지. 그자의 이름도 허 무엇이었는데!"
"허 무엇이가 아니라 바로 저 허준이 그때의 그자였다네."
"그래!"
"순 미친놈 한 놈이 내의원에 나타난 걸세. 게다가 수석 특혜를 받아 우리보다 3, 4년이나 늦게 들어온 놈이 품계는 맞먹게 8품을 받았으니 앞으로 우리 앞길에 꽤나 걸리적거릴 놈이 틀림없어."
"글 잘 읽는 놈이거든 사역원 취재나 보고 역관으로나 풀릴 것이지 어쩌다 저런 놈이 내의원에 들어온 건지."
말끝에 사내가 잇새로 침을 찍 갈겼다.
"저기가 혜민서요."
하고 허준이 우측 종로로 꺾이는 길목에서 서소문 쪽으로 선 건물을 가리켰다.
허준의 아내가 남편이 손짓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에는 혜민서란 커다란 현판 외에 또 하나 작은 현판에 뛰어난 달필의 글씨로 의약동참이라는 넉자가 보였다.
"전에는 오가며 지리를 알았는데 한양도 하도 오랜만이라서 ..."
김씨가 행인이 멀어지자 남편에게 말했다.
한양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생각하면 모두 낯익은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은 다시는 못 오리라 여긴 한양거리에 관복 입은 남편과 나란히 서 있다는 감격에 또 다른 감개가 담겨 있었다.
"이편 작은 현판의 글씨가 개국하고 이 나라 최초로 의원 취재의 고시관이던 정도전의 필체요."
"저는 잘 모르는 성함올시다."
"태조를 도와 개국의 일등공신이던 사람이오. 이 도성과 궁궐의 이름들도 그 사람이 짓고 명명했다 하오. 하나 그뒤 그 사람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태종이 역적의 흔적을 모두 없애려 했으나 용케 남아 있는 몇 개의 현판 중의 하나라 하오."
넓은 길을 뛰닫고 있던 두 아이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직처까지 가보려오?"
"그러고 싶습니다."
"가야 대궐담에 가리어 지붕밖에 보이지 않소만!"
김씨가 두 아이를 손짓해 불렀으나 마침 요란한 벽제소리와 함께 고관의 행차가 길을 가로지르자 남매는 다시 넋을 빼고 그 행차를 구경하다가 행차가 지나자 달려왔다.
허준이 앞장서고 4, 5보 뒤에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조용히 따랐다.
오랜만에 일가의 행복한 나들이였다.
선조 8년 10월.
허준이 내의원의 일원이 된 지 어언 반 년,
궐내는 추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가을빛이 아름답게 물든 조정은 평화롭지 못했다. 전년 7월 당쟁 발생의 씨앗의 한 사람인 김효원이 전랑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를 반대하는 심의겸과의 대립이 1년여에 이르러 마침내 조정을 동서로 붕당케 하는 사건이 표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태의 심각함과 당쟁의 폐해를 우려한 조정 원로들인 우의정 노수신과 부제학 이이 등이 양파에 대한 조정책으로 양파의 핵심인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의 외직으로 내보내 사태 수습을 꾀했으나 서로 떠난 지역이 누구는 멀고 누구는 더 가깜다 하여 조정 안의 분위기는 아직도 소란했다.
그러나 조정 안의 그 '대사건'도
출신 신분이 어엿한 잘난 문관들의 세계다.
내의원에 소속하여 6개월.
아직 확실한 보직을 받지 못한 허준은 허구헌날 내의원 안팎 청소와 수목 가꾸기 그리고 궐내 지리, 궐내 법도, 궁중 법도, 그밖에 상감 이하 각궁의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종친부에 속한 분들을 대할 때의 예의범절과 궁중에서만 사용되는 용어 익히기에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궁중의 용어에 있어선 허준이 처음 접하는 어렵고 난감한 말들이 많았다.
상감을 비롯 왕비, 세자 그 붙이들에게는 으레 마마가 붙어 '상감마마' '중전마마' '세자마마'였다. 그 마마란 중국에서 건너온 왕족의 남녀에게 붙는 최대 최고의 존칭임도 허준은 알았고 그 '웃전마마'들에게 얽힌 모든 난삽한 표현 또한 새로 배워야 했다.
귀는 이부, 눈은 안정, 눈썹은 안정썹, 눈물은 옥루로-
이마는 액상, 손은 어수 또는 옥수, 손가락은 수지, 발은 족장, 콧물은 비수, 머리는 마리, 여성의 월경은 환경, 방귀는 통기 ...
또 그 육신에 걸치는 물건들 또한 어렵기 그지없는 말들로 옷은 의대, 옷감은 의대차, 바지는 봉지, 옷고름은 대조, 버선은 족건, 이불은 기수, 이불잇은 기수잇, 왕의 신은 치, 땀은 한우. 피는 피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혈로 부르며 오줌은 지, 똥은 메우, 왕과 왕비의 식사는 수라인데 아침은 아침수라, 점심은 점심수라 혹은 낮것이라 부르고 김치는 젖국지, 숟가락은 시저, 젓가락은 저, 약은 탕제.
그밖에 수없이 어려운 표현은 계속되어 '약을 드시다'는 '탕제를 진어하시다', '양치질하오시다'는 '수부수하오시다'이고 '세수듭시다'가 '세수하신다'이며 '기노하시어'는 '화가 나시어'이며 '왕이 편찮으시다'를 '상후가 미령하시다' 또는 '문안이 계오시다', 임금의 표정이나 기색을 일러 사색, 화난 표정을 엄색 등 말 한마디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비록 엄숙한 왕실이라 하나 그 어려운 말과 표현은 내의원 취재 때의 성적보다 더욱 중시하여 의술은 인정이 되었어도 처음 6개월 동안의 유예기간 중에 이 궐내 생활의 규범과 언동을 익히지 못하거나 이수하지 못한 자들은 가차없이 등방이 취소되며 궐밖으로 축방되었다.
그 유예기간의 6개월을 허준은 하루같이 여느 관원들과 꼭같이 묘시(상오 5시부터 7시)에 출근하고 유시(하오 5~7시)에 퇴근했고 등방자 8명 중 3명이 쫓겨나는 속에 끼지 않고 무사히 유예기간을 통과하여 정식 내의원 관원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6개월 동안 허준은 지난해 내의원에 들어온 스승 유의태의 일점 혈육인 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임해군의 처소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았으나 서로 오갈 길이 없어 만나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같은 내의원 소속이요 제법 근년에 없이 과장이 떠들썩했던 자신의 등방이었으므로 그가 자기의 상경을 못 들었을 리 없으련만 도지 쪽에서 찾아와 주지 않고서는 자신이 함부로 도지를 만날 수 없음을 알았다.
임해군의 처소 중 그가 상주하다시피 하는 별궁이 궐 밖 수진방에 위치해 있음을 들었으나 같은 내의원이라 해도 자기 같은 신출내기 의원이 사사로운 일로 찾아가봤자 함부로 문을 통과할 수 없도록 왕자궁의 경비가 지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좋은 얼굴로 헤어진 사람도 아니요 그가 찾아와 주지 않는다면 당장은 만날 길은 없을 것이로되 그러나 허준은 그가 허락한다면 도지와의 교분을 두터이 하고 싶었다. 그 부자가 헤어진 연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부자지간에 생사는 알아야 하지 않는가 싶어 지난해 김민세와 나라 안 유력을 떠날 제, 한양을 지나치면서 허준이 방자를 사서 아버지의 타계를 전해준 바 있으나 도지가 그 서찰을 받았다는 반신은 아직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인 자기보다 허준에게 있음을 알았을 때의 친자로서의 도지의 절망이 어떠했을까를 왜 짐작하지 못하리요마는 그러나 아버지의 유고를 마냥 모른체 하도록 독할 수 없는 것이 부자의 인연이 아닐는지.
그가 자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허준은 도지에게 알려야 할 것과 전할 것이 있다.
첫째는 밀양 천황산에 묻힌 스승의 무덤자리요 또 하나는 그 유의태의 몸으로 이루어진 해시지를 나누어주고 싶은 것이다.
죽은 유의태의 몸을 소재로 이루어진 그 해시지.
도지로서는 죽은 아버지의 그 구석구석을 학문으로 읽고 새겨갈 심정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허준은 그 귀한 기록만은 설령 그것이 죽은 이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스승의 아들에게 한 부 필사하여 보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그토록 온몸을 던져 의술의 눈을 더 높이 뜨게 한 스승의 아들과 하나의 정의로서도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
자신의 유예기간인 지난 6개월간 도지를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새로 들어온 의원들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새 보직을 내릴 때면 이를 기회로 지난 1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내의원의 정례 인사이동이 실시되기 때문이다. 일단 정식 임명된 관원들의 기본 근속기간은 최소 45개월로 묶은 것이 국법이다.
본인의 실수나 사사로운 사정에 의하여 그 45개월 전에 직위를 떠날 경우 그 직위의 경력은 인정되지 않으니 내의원 의원이었노라 혹은 대궐에 드나든다 하여 자랑도 섞어 자칭 궁의라고도 뻐기는 그 경력을 자타 공히 인정받기 위해선 싫어도 45개월 근속의 실적이 있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그 기본 45개월만 지나면 보다 높은 어의에의 출세를 단념한 인물들 중엔 부모의 상을 당했느니 자신의 건강이 어떠하니 하여 내의원을 떠나는 자들이 속출한다.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하고 환향하여 궁의였노라는 자랑과 명예로 돈방석에 올라설 수가 있기 때문에 ...
그러나 그 45개월을 채우기 전의 내의원 생활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 있으니 어전에 드나드는 명예는 결코 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병하고 대우 좋은 왕자궁이나 공주궁에 배치되리란 행운도 흔한 것이 아니다.
그 내의원 의원들이 지옥으로 표현하고 기피하는 혜민서 근무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말 많은 병자들, 왕자궁 공주궁에서 수시로 내려주는 귀한 음식에 온갖 별식은커녕 계란 한 개 따로 들고 오지 않는 백성이라 불리는 무지렁이 온갖 병자들이 찾아와 낮이나 밤이나 득시글거리고 매달리며 울부짖는 소란한 혜민서를 맡아보는 것도 내의원 의원들이고 보면 1년마다 실시되는 이 인사이동은 내의원 의원들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가장 긴장된 날이었다.
자연 그날을 앞두고 누가 어디로 가며 누가 어디로 오고 그리곤 누구 누구는 혜민서로 떨어진다고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에 가슴이 철렁거리고 기대에 부풀어보는 날이기도 했다.
"그럼 그날은 내의원에 소속된 의원들은 모두 이 자리에 모이오니까?"
"물론이지. 양대감의 방침으로 삼의사라 일컫는 전의감, 내의원, 혜민서의 모든 6품 이하의 의원들이 그날은 모두 모여 누가 누구다 얼굴을 익히는 날이자 새 보직을 받아 천당과 지옥으로 갈려가는 이별의 날이기도 하지."
웃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아직도 열흘 후의 일인데도 너나없이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