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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명 수필 릴레이(32)
늘 푸른 소나무의 기상(氣像)
해담 조남승
겨울을 알리는 입동이 지나고 보니 진짜 겨울은 겨울인가보다. 며칠 전에 겨울비까지 내려서인지 날씨가 꽤 추워졌다. 올해엔 유난히 추위가 일찍 시작된 것 같다. 지난달 상강(霜降)도 되기도 전에 한파주의보가 발령되었었으니 말이다. 기상청에 의하면 시월의 한파는 64년 만이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단풍도 다 들기 전에 몰려온 추위에 놀라 두꺼운 겨울옷을 꺼내 입어야만 했다. 나무들도 때 이른 시월한파를 맞아 낙엽이 일찍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여름철에 그 무성했던 녹음이 다 사라져버리고 가지만이 앙상한 나무들을 보니 계절 따라 흐르는 세월이 참으로 빠르고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엊그제가 봄이었던 것 같은데, 여름은 간데없고 힘없이 떨어지는 오동잎을 보면서 가을인가 하였더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왔다. 문득 옛 선사(禪師)의 글이 떠올랐다. 선사는 “매화가지에 꽃 한 송이 피어남에 천하에 봄이 왔음을 알 수 있고/오동나무 잎 하나 떨어짐에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梅枝片白 足知天下春/매지편백 족지천하춘) 梧桐一葉 可知天下秋/오동일엽 가지천하추).”라고 춘추(春秋)를 읊었다. 이 글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으로 불교에서 유교로의 종교적 전환기를 맞게 되었을 때, “불교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 하고, 유교에서도 천지만물사일기(天地萬物寫一己)라 하니 양교(兩敎)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억불(抑佛)정책에 논리적으로 맞섰던 함허득통화상(涵虛得通和尙)의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글을 보면서 ‘마당가의 나무에서 우는 매미소리에 천하에 여름이 되었음을 알고(庭樹鳴蟬 可知天下夏/정수명선 가지천하하), 숲속의 나무 중에 소나무만 보이니 천하에 겨울이 왔음을 안다(見林衆松 感知天下冬/견림중송 감지천하동).’라고, 선사의 춘추(春秋)에 대한 시에 외람되이 하동(夏冬)의 댓 구(句)를 달아본다.
바야흐로 추광추색(秋光秋色)이 상강입동(霜降立冬)의 찬바람에 밀려가고 나면, 온갖 초목들의 잎들도 모두 메말라 떨어져 내리고 만다. 하지만 온 산야에 눈이 뒤덮인 겨울삼동의 혹한에도 푸른 잎을 바꾸지 않고 당당한 모습으로 고고(孤高)히 산을 지키고 있는 신성한 나무가 있으니, 이름 하여 소나무인 것이다. 이렇게 사철 푸르른 소나무를 생각하니 어릴 적에 천자문(千字文)에서 소나무송(松)자를 배우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문으로 소나무 송(松)자는 나무목(木)변에 공변될 공(公)자를 합해놓은 글자이다. 공변되다는 것은 사사롭지 않고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글자인가.
그래서 내가 젊은 시절 우리 문중의 공무원모임을 조직하여 운영할 때, 회의명칭을 풍송회(豐松會)라고 정하였다. 관향(貫鄕)이 풍양(豐壤)이니 풍년 풍(豐)자와, 나무의 뿌리는 조상을 의미하고, 줄기와 잎은 자기 자신을 뜻하며, 꽃과 열매는 자손을 상징하는 나무 목자에, 공무원으로 표현되는 공변될 공(公)자가 합쳐진 소나무 송(松)자의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일이 전화를 하여 회원을 찾아 조직하고 직접 운영을 할 때는 모임이 아주 잘 되었다. 그러나 나의 역할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 나니 한해가 다르게 조직이 와해되어 이젠 유명무실화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세상만사가 책임정신을 가지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지 않고는 이루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탱해갈 수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아주 잘 보여준 사례인 것이다.
천자문은 우리가 어릴 적만 해도 학교에 입학하기 전 초학(初學)의 교재(敎材)로 흔히 읽고 배우던 책이다. 천자문에서 소나무와 관련된 글귀를 찾아보면 “사란사형(似蘭斯馨) 여송지성(如松之盛)”이란 글귀가 있다. 즉 덕을 지닌 군자의 아름다운 인품은 난초와 같이 향기롭고, 군자의 절개는 사철 푸르고 성(盛)한 소나무와 같이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또 ”비파만취(枇杷晩翠) 오동조조(梧桐早凋)“란 구절이 있다. 그 뜻은 글자 그대로 비파나무의 잎은 사철 푸르고, 오동나무의 잎은 일찍 시들어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여일곱살의 어린나이에 천자문에서 이 구절을 배울 때 선친(先親)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친께서는 ‘천자문의 글이 중국의 글을 본으로 하여 만들어져서 그렇지, 우리나라엔 비파나무가 그리 흔하지 않다. 그에 비하여 전국 어느 산이나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기 때문에, 자고이래로 오동조조(梧桐早凋)하고 송백만취(松柏晩翠)라고 말하여왔다.고 하셨다. 또 ‘송백(松柏)이 이렇게 사철 푸르름을 지키기 때문에 지조(志操)와 절개(節介), 그리고 변함없는 우정이나 충절(忠節)을 말할 때면 송백(松柏)과도 같다는 표현으로 칭송을 하였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천자문을 띠고 소학(小學)을 배워야 하는데 난 그리하지 못하였다. 다만 부친으로부터 수시로 경서(經書)에 대한 토막글을 듣고 배우며 자랐다. 그리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나서는 소학은 건너뛰고, 경서(經書)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관한 글들을 주로 읽었다. 또 불경과 옛 선사들의 말씀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난 결혼 후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어렵사리 여식(女息)을 보게 되었다. 귀하게 태어난 딸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여식을 소학(小學)의 글대로 가르치고 키워 보고자하는 욕심과 절실한 마음으로 뒤늦게 소학을 읽었다. 그러나 누가 소학대로 여식을 잘 키워냈냐고 묻는다면, 소이부답(笑而不答)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학(小學)에도 가언(嘉言)10장(章)에 소나무의 늘 푸른 만취(晩翠)에 대한 글이 있다. 본문의 전체내용은 옛 중국 송나라의 범노공(范魯公) 질(質)이란 재상이 그의 조카가 임금에게 높은 벼슬자리를 주청하고 나서자, 시를 지어 조카에게 훈계를 한 내용이다.
모두 열두 가지의 훈계사항 중에서 만취(晩翠)란 말이 들어간 마지막부분만을 소개해본다. 만물은 성(盛)하면 반드시 쇠(衰)하고/흥(興)함이 있으면 망함이 있으며/빨리 이룬 것은 견고하지 못하고/급히 달리면 엎어짐이 많다/곱디고운 정원의 꽃은(灼灼園中花/작작원중화)/일찍 피어서 먼저 시들고(早發還先萎/조발환선위)/더디고 더딘 시냇가의 소나무는(遲遲澗畔松/지지간반송)/울창하게 무성하여 늦게까지 푸르르다(鬱鬱含晩翠/울울함만취)/운명을 타고남에는 빠르고 더딤이 있고/입신출세는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 어렵다/제군에게 한 말을 일러 보내노니/승진을 조급히 서두름은 부질없는 것일 뿐이리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도 특권층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부모의 찬스를 쓰는 등, 자신만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서 대중의 지탄은 물론, 사회적으로 좋지 못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로 인하여 정당한 방법과 절차적 과정을 거쳐 정상적으로 성장하고자하는 질서와 기다림의 의식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마침내 청소년들이 꿈과 희망을 잃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성공할 수는 없을까라는 허황된 꿈을 찾기에 이르렀다. 소위 권좌(權座)에 올랐다고 하는 사회지도층의 사람들과 그의 자녀들이 소학(小學)의 가언(嘉言) 10장을 꼭 읽어보고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으면 좋겠다.
또 정부에서도 젊은이들이 이성과 양심에 따라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삶을 통하여 성장해나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선 비상식적이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성공을 시도하거나 일확천금의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등의 반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책임의 최 정점까지 단호히 단죄하도록 하는 사회적 룰(rule)과 문화가 정착되어야한다.
소나무는 송수천년(松樹千年)이란 말처럼 수명이 아주 긴 나무여서 예로부터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꼽혔다. 그래서 임금의 옥좌(玉座)뒤에 있는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에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또한 사후의 왕릉에도 가장 많이 심는 나무가 소나무이다. 궂은비가 내리거나 흰 눈이 뒤덮인 쓸쓸한 날에도 언제나 무덤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기에 묘의 주변에 병풍을 치듯 소나무를 심어왔던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사철 푸른 소나무를 선비의 굳은 절개와 충정의 상징으로 여기며 소나무를 아주 각별히 좋아하고 사랑하였다. 몇 년 전 산림청에서 한국갤럽에 의뢰하여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를 조사한 결과, 많은 종류의 나무들 중에서 소나무가 무려 46%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소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나무가 지니고 있는 선비다운 기상(氣像)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만사 중에서 가장 신성하다고 할 수 있는 전통혼례식장인 초례상에도 양쪽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꽂은 화병을 올려놓고 혼례를 치렀다. 소나무는 잡신을 물리치고 장수(長壽)를 빌며 사철 푸른 소나무처럼 부부의 정이 변치 말라는 뜻이며, 대나무는 대의 뿌리처럼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으로 초례상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또 아기를 출산하게 되면 외부에 출산을 알려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부정(不淨)한 사기(邪氣)를 물리치기위하여 새끼줄에 생솔가지를 끼운 금(禁)줄을 대문 위쪽에 좌우로 걸쳐놓았다. 그리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동구 밖이나 마루턱에 소나무로 만든 장승을 세워놓기도 하였다.
특히 나이테가 좁아 송진을 많이 머금고 있는 금강송(황장목)은 내구성이 강하고 곧게 자라기 때문에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솔 향이 강하여 많은 사람들이 칼도마로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여왔다. 그야말로 소나무는 우리한민족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어떠한 철학적인연이 있는 것 같다. 곧게 잘 자란 소나무를 베어다 집을 짓고 소나무가지로 불을 때어 밥을 해먹고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되면 황장목의 관에 시신이 입관되어 결국 청송(靑松)이 우거진 솔숲에 묻혀 소나무의 그늘에서 영면(永眠)의 길에 들게 되니 말이다.
소나무의 이용가치는 참으로 다양하다. 솔밭에선 송이버섯과 뿌리에선 ‘백 복령’이란 보약재를 얻는다. 또 옛날엔 흉년이 들어 곡식이 떨어지게 되면, 소나무어린가지의 속껍질인 송기(松肌)로 죽과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솔잎은 발효시켜 차를 만들고 송편을 찔 때도 사용하였으며, 송화는 다식을 만들어먹었다. 솔 숯은 장 담글 때 띄워 장의 불순물을 빨아들이게 하여 장을 달고 맛있게 하는데 요긴하게 쓰였으며, 송순으론 송순주와 솔가지 마디로는 송절주(松節酒)를 담그기도 하였다. 나도 풋 송화, 솔잎, 앳된 송자(松子/솔방울)등으로 술을 담아보았다. 술에서 풍기는 향기가 아주 그만이었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송향주(松香酒)의 맛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관솔불(松明/송명)은 어둠을 밝혀주고, 관솔이 탈 때 발산하는 그을음은 송연묵(松煙墨)을 만들어 붓글씨를 썼으며, 솔뿌리는 칡넝쿨보다도 더 질기기 때문에 농촌에서 사용하는 각종생활도구를 만들 때 끈으로 사용해왔다. 이렇게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일상생활과 함께해오면서 자연히 우리의 삶과 정서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야말로 아주 먼 옛날부터 인연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어느 산엘 가나 산정(山頂)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서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파 속에서도 모진 바람과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사시사철 청청(靑靑)함을 지키고 있는 천년의 기암창송(奇巖蒼松)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소나무의 기상에서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 투쟁하면서, 오직 끈질긴 근성과 의지로 이 나라를 지켜온 우리 한민족의 꿋꿋한 불굴의 정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불굴의 정신으로 우리 한민족의 앞날에 그 어떠한 상황이 닥쳐온다 해도,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행복의 원천인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최선을 다하여야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애국가 2절에서도 “남산 위에 저 소나무/철갑을 두른 듯/바람서리 불변함은/우리 기상일세.”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소나무에 대하여 강인한 의지, 굳은 절개와 지조, 충절과 기상, 그리고 변함없는 의리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왔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에 대나무와 매화를 포함시킨 송죽매(松竹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아주 즐겨 그렸다. 특히 인간의 이상향인 신선의 세계를 그린 신선도를 보면 신선들은 언제나 소나무 아래에서 자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신선도엔 언제나 신선보다도 더 맑고 고고한 만취(晩翠)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 선조들이 소나무를 얼마나 신성시하였으며, 철학적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만취(晩翠)의 기상을 지니고 있는 소나무의 절개를 간결하고 소박한 묵화 하나로 아주 잘 표현해낸 그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추사(秋史) 김정희선생의 작품인 세한도(歲寒圖)인 것이다. 세한도는 추사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역관(譯官)이자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이란 사람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이다.
중국 수나라의 철학가인 왕통의 말로서 안씨가훈(顔氏家訓)에 이르기를 “세력을 위해 교제하는 사람은 세력이 기울면 관계를 끊고(以勢交者勢傾卽絶/이세교자세경즉절), 이익을 위해 교제하는 사람은 이익이 없어지면 흩어진다(以利交者利窮卽散/이이교자이궁즉산).”고 하였다. 중국역사의 대가인 사마천도 “세리지교(勢利之交)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멀어진다.”고 하였다. 세상의 인심이 이러하거늘 이상적은 권세와 잇속을 찾지 않고, 한낱 죄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소홀히 하고 있는 추사에 대하여, 변함없는 공경의 마음을 가지고 중국에서 어렵게 구한 서책(書冊)을 전해주었던 것이다. 세한도를 보면 오른쪽 아래 구석에 오랫동안 서로가 잊지 말자는 뜻이 담긴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고 새겨진 네모난 관지(款識)가 찍혀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낙관과 같은 이 관지하나만으로도 두 사람의 사제지정(師弟之情)과 변함없는 의리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된다.
추사선생은 세한도의 발문(跋文)에서 “세상의 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듯 하는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씨가 추워지기 전이나 추워진 뒤에도 한 결 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어 칭송하셨다.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이전이나 이후나 더하고 덜함이 없으니 이후의 그대는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송백(松柏)을 칭송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날씨가 추워진 때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 그 당시 추사선생이 얼마나 쓸쓸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또 이상적의 변함없는 신의(信義)에 대하여 감격한 마음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렇듯 세한도(歲寒圖)는 송백(松柏)과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그림과,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있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구절을 통하여 이상적의 한결같은 절조(節操)와 의리(義理)를 송백(松柏)이 지닌 만취(晩翠)에 비견(比肩)시킨 작품인 것이다. 세한도를 보면서 “대나무 줄기에는 사계절의 푸르름이 있으며, 솔과 잣에는 변하지 않는 정절의 마음이 있어 이 둘을 일러 천하의 근본이라 하는 것이니, 대와 솔과 잣은 사계절이 바뀌어도 그 줄기나 입새의 푸르름을 바꾸지 않는다.(如竹箭之有筠也 如松柏之有心也 二者居天下之端矣 故貫四時而不改柯易葉/여죽전지유균야 여송백지유심야 이자거천하지단의 고관사시이불개가역엽)”라는 예기(禮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절조(節操)의 소나무를 생각하니, 조선세조때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인 성삼문이 형장에 끌려가 죽음을 맞으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 고 하니/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어/백설이 만 건곤(滿乾坤) 할 때/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라고 읊은, 불변의 충의(忠義)와 불굴의 지조(志操)가 넘치는 충절(忠節)의시가 가슴을 저미어 온다.
아마도 금강산 어딘가에 성삼문의 혼이 담긴 낙락장송이 버티고 서서, 요즘세상의 배신과 불의(不義)에 대하여 눈을 부릅뜨고 서슬 퍼런 호령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만세(萬世)에 충절(忠節)의 사표(師表)인 성삼문의 시를 읊조리다보니,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위해 신의(信義)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역사의 기록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오직 자신의 잇속을 쫒고 권세를 따라 배신을 밥 먹듯 쉽게 하고도, 염치없이 뻔뻔스럽게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있으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낙락장송이라면 누구나 제일먼저 충북보은의 ‘정이품송’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전국에 41개소나 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들 중에서 절반정도는 낙락장송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호수를 비롯하여 심산유곡에 꼭꼭 숨어있는 낙락장송 또한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 전,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에 있는 소나무그림전문갤러리에 갔을 때, 정말 대단한 낙락장송의 그림을 보고 놀라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사)한국소나무보호협회 설립이사장이며 소나무보호캠페인작가인 정영완(丁永完)화백이었다. 정화백은 전국의 천연기념물과 보호수를 비롯하여 보기만 해도 기운이 넘치는 낙락장송을 주로 그렸으며, 개인전만도 7회나 개최한 대작가였다.
많은 작품 중에서 경북울진의 ‘안일왕산’(금강소나무길4구간)에 있는 대왕금강송(수령/600년)의 그림이 전시장을 압도하였다. 그림을 한참 바라보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그림속의 대왕금강송과 하나가 되어버렸다. 화폭에 담긴 소나무를 바라만 봐도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청(靑靑)하여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신라 진흥왕 때 솔거가 그린 황룡사의 노송도 벽화가 어찌나 잘 그려져 있었던지,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으려다 그림에 부딪혀 떨어질 정도여서 그 그림을 신화(神畵)라고 하였다는데, 정화백이 그린 대왕금강송이야말로 창문만 열어놓으면 새들이 날아들 정도로 소나무가 살아있는 그대로였다.
난 대나무 못지않게 하늘높이 곧게 치솟은 금강송과 우람하게 자란 낙락장송은 물론, 흙 한줌 없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암석청송(巖石靑松)과, 하늘을 향해 위만 바라보지 않고 팔 벌려 손잡고 옆으로 둥글게 가지를 키워가는 반송을 특별히 사랑한다. 하지만 소나무라면 그 모양과 품종을 가리지 않고, 곧으면 곧은 대로 굽으면 굽은 대로 모두 다 좋아한다. 내가 만나본 소나무들 중에서 보은의 ‘정이품송’, 경북 예천의 ‘석송령(石松靈)’, 청도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영월 청령포에서 단종의 슬픈 마음을 헤아렸다는 ‘관음송’과 장릉을 향하여 굽어있는 ‘충절송(忠節松)’을 비롯한 청령포의소나무 숲, 원도봉산에 있는 망월사의 청룡혈을 지키고 서있는 노송(老松)들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서울 성북구 ‘정릉’의 마당에 있는 두 아름이나 되는 노송(老松)과, 경남거창에 있는 수승대의 소나무를 비롯하여, 각 왕릉에 있는 청청(靑靑)한 소나무들이 내마음속의 화폭에 짙은 향기를 품고 있다. 지난여름 충남 서천의 ‘송림(松林)산림욕장’과 안면도의 솔숲을 찾았을 때, 바닷바람에 송풍(松風)이 일 때 마다 ‘쏴’하고 귓전을 스치던 솔잎이 우는 송도(松濤)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후련하고 마음이 절로 청정(淸靜)해진다.
산책하기에 좋은 소나무숲길은 조선의 모든 왕릉의 주변에 아주 잘 조성되어있다. 그래서 지난달에도 아내와 함께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의 능을 다녀왔다. 우리나라의 언어인 한글창제를 비롯하여 큰 업적들을 많이 남긴 세종대왕은 소나무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은 소나무 양성 기술을 상세하게 갖추어 알리라고 명하였으며,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금송령(禁松令)을 내려 소나무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소나무를 사랑한 세종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는 듯, 다른 곳의 소나무들과 다르게 세종이 잠든 영릉(英陵)을 호위하고 있는 소나무들은 능을 향하여 절이라도 하는 듯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러한 세종의 애송(愛松)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주차장에서 영릉(英陵)까지 가는 길목의 넓은 공간에도 소나무들을 아주 많이 심어놓은 걸 볼 수 있었다.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사이에 있는 소나무 숲길이야말로 일품이었다. 이 길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숙종, 영조, 정조가 직접 행차하여, 먼저 효종의 능을 참배하고 세종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길을 왕의숲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난 그날 세분의 왕들과 달리 세종의 능을 먼저 참배하고 효종의 능을 찾았다. 어디나 왕릉의 숲길들은 대부분 인위적인 포장을 삼가고, 길 위에 마사토만을 보토(補土)하여 놓았기 때문에 산책하기에 더욱 좋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원의 길들은 대부분 산업재(産業材)를 이용하여 포장을 해놓는 바람에, 무릎이 성치 않거나 건강을 위해서 흙을 밟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포장한길을 놔두고 길옆으로 걷기 때문에 흙길이 새로 생기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원트(Want)와 니드(Need)의 차이에 대한 생각이 난다. 원트(Want)는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가지고 싶은 것으로서, 없어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만, 니드(Need)는 꼭 필요한 것으로서, 그것이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할 때 포장된길을 피하여 흙을 밟으며 걷는 모습에서 건강과 관련된 것만은 니드(Need)전략이 우선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효종의 능에서 내려오는 숲길에 돌비늘의 부스러기가 아주 많이 섞인 흙이 깔려져있었다. 마치 희망을 속삭이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모습이 신비롭기만 하였다. 우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길 위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밟으며 더 천천히 걸었다. 당뇨로 혈액순환이 원활치 못한 아내의 냉기(冷氣)어린 손을 잡고 보니, 평생 녹록치 않았던 삶의 훈장처럼 마디가 굵어지고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이리저리 굽어져있어 마음이 아리었다. 그런 아내의 거친 손길에서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가슴에 서린 애환(哀歡)의 숨결이 찐하게 전해져왔다. 말단공직자의 아내로 시작하여 시부모를 시봉(侍奉)하면서 음과 양으로 여유롭지 못한 젊은 시절의 삶을 살아왔는데, 이젠 또 늙고 성치 못한 몸으로 딸네 집을 오가며 손녀들을 돌보느라 편히 쉴 수 없는 형편이고 보니 안쓰러움만이 가슴 한가득 밀려왔다.
아내와 난 효종의 능에서 내려오다가 길옆에 숨어있는 아주 힘차고 잘생긴 소나무를 발견하였다. 우린 그 소나무를 함께 껴안으며 소나무위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드는 순간 우린 ‘야아~!’ 하고 이구동성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우로 굽이치며 하늘로 치솟은 모습이 마치 용린(龍鱗)이 성성한 황룡 한마리가 용틀임을 하면서 힘차게 승천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우린 소나무 잎을 타고 창공에서 내려오는 천기(天氣)와 소나무의 실뿌리를 따라 올라오는 지기(地氣), 그리고 황룡송(黃龍松)의 송기(松氣)를 오롯이 받아들이며 몇 차례 심호흡을 해보았다. 몸이 가뿐해지면서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난 한발 물러서서 다시 소나무위를 바라보았다.
소나무를 쳐다보면서 ‘청송(靑松)은 사철 만고(萬古)에 푸르러/삭풍한설(朔風寒雪) 몰아쳐도 굽히지 않고/추운겨울 공산(空山)을 꿋꿋이 지키네/우리도 잇속과 권세(權勢)에 유혹되지 않고/타고난 본연지성(本然之性) 당당히 지켜/강상(綱常)과 신의염치(信義廉恥) 만고상청(萬古常靑)케 하리라.’ 라고 시한수를 지어 허공을 향해 읊었다. 우린 다시 영릉에서 인근의 신륵사와 ‘목아(木芽)박물관’에 들렀다. 목아박물관에도 잘생긴 반송과 처진 소나무 그리고 백송이 심어져 있었다. 어디엘 가나 소나무들이 반겨주고 있어 참 기분이 좋았다.
소나무는 신령스러운 나무라서인지 보기만 해도 마음이 맑아지고 힘이 솟아난다. 전국의 이름난 소나무들과 얽힌 전설들을 생각해보면 소나무가 영목(靈木)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단군조선사에 나오는 신단수 역시 소나무로서 우리 한민족의 창세역사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함께하였다. 소나무화가인 정영완화백은 하늘의 천제인 환인(桓因)으로부터 천부삼인(天符三印)을 물려받아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환웅(桓雄)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펼치고자, 신단수인 낙락장송 아래에서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천상의 삼천무리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의 그림을 그렸다. 또 이 성스럽고 엄숙한 장면을 감축(感祝)하는 듯 우주의 모든 행성들이 신단수의 소나무가지에 내려앉아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그림들을 모아 ‘소나무는 우주수(宇宙樹)’ 라는 이름으로 2019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하였다. 그런데 내가 지난달에 방문했을 때 그 신령스럽고 의미 깊은 작품이 전시실에 그대로 주인과의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민족의 혼이 서려있는 신령스러운 그림이 하루빨리 귀한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오래된 소나무를 보면 자신의 속살을 보호하고 있는 겉모습에서부터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된다. 육각형으로 골이 깊게 갈라진 아주 두꺼운 겉껍질에서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낙락장송이나, 밑동의 겉면은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송린(松鱗)이라고 말하듯 물고기 비늘같이 겉껍질이 얇아지다가, 그 위엔 송린도 생기지 않은 채 붉은 주황색 의 빛나는 비단옷을 입고 하늘 높이 치솟은 금강송을 바라보면, 소나무의 힘찬 기상에 자연히 숙연해 질 수밖에 없다. 소나무는 추운겨울 인고(忍苦)의 수도(修道)를 해서인지 해가 묵으면 묵을수록 세월의 흐름과 함께 속(俗)티를 벗고 선(仙)티가 나는 군자다운 풍모를 보인다. 또한 세세연년 흐르는 춘추(春秋)의 빛과 바람에 고고함을 더하여 스스로 품격이 높아지고 정서적 향기가 짙어짐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소나무는 옛사람들의 마음에서 항상 떠날 수 없는 동경(憧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의 예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시화예술(詩畵藝術)의 훌륭한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자연의 풍광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소나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학작품에도 소나무를 소재로 한 예가 많았다. 사명당의 푸른 소나무에게 바치는 '청송사(靑松辭)'란 헌시(獻詩)와, 이퇴계의 '영송시(詠松詩)', 유헌주의 '영송도(詠松圖)'등 소나무에 대한 옛 시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역시 자신의 벗은 소나무와 수석죽월(水石竹月)이라면서 오우가(五友歌)라는 시를 읊었다. 고산은 오우가에서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솔아 너는 어이 눈서리를 모르느냐?” 며 소나무의 지조에 대하여 예찬하였다.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소나무의 기상을 흠모하는 시를 읊어온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귀책열전’에서 “송백(松柏)은 뭇나무의 으뜸(百木之長/백목지장)이다.” 라고 하였다. 고려 말 원증국사(圓證國師)였던 보우(普愚)스님 역시 “소나무는 초목가운데 군자이고, 이것을 사랑하는 이는 사람가운데 군자로다(松者草木之君子也 愛此者人之君子也/송자초목지군자야 애차자인지군자야).”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또한 옛 선비들은 벼슬살이를 마치게 되면 솔숲이 창창한 고향으로 돌아가 치산(治山)이나 하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고자 하는 소박한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기에 고향산천을 벗 삼을만한 좋은 터를 잡아 자신이 거처할 집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을 지으면 당호(堂號)를 짓게 되는데 당호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인생관 또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이나 취향에 따라 정하였다. 이렇게 이름 지어진 수많은 당호 중에서 사철 항상 푸르름을 상징하는 만취(晩翠)란 글을 사용한 예가 적지 않았다. 예컨대 만취당(晩翠堂), 만취헌(晩翠軒), 만취재(晩翠齋), 만취정(晩翠亭)이란 이름으로 당호를 삼은 곳이 전국각지에 상당히 많은걸 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얼마나 소나무를 사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나 역시 절의(節義)의 상징인 소나무를 사랑하기에 어디엘 가거나, 오래되고 잘생긴 청청(靑靑)한 소나무를 만나면 반갑게 뛰어가 두 팔 벌려 소나무를 얼싸안는다. 오늘도 내가 사랑하는 소나무를 만나보러 ‘북서울꿈의숲’ 을 찾아 나섰다. 숲에 들어서자 소나무들이 내게 말한다. ‘봄에서부터 가을이 되기까지 따사롭고 기운이 넘치는 햇빛 한번 제대로 쏘이지 못하다가, 이제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햇빛을 보게 되었어!’ 라며 하소연을 한다. 그렇다. 여름 내내 잡목들의 그늘 속에서 온몸이 늘어진 채 맥없이 견디어오던 가엾은 소나무들이, 입동(立冬)이 몰고 온 차가운 바람결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목우(木雨)되어 날리고 나서야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소나무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내가 이름지어준 좌선암의 바윗돌을 향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좌선암에 이르러 바윗돌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하지만 마음속은 온통 소나무생각 뿐이었다. 우거진 잡목들 사이에 끼어 활개를 펴지도 못한 채 햇빛을 찾아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겨우 삶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소나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소나무가 아무리 사철 푸르다고는 하나 일 년 내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겨울엔 혹한에 맞서 싸우면서 그냥 푸르름을 지켜내고 있을 뿐, 성장은 봄에서부터 여름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름 내내 햇빛 구경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성장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소나무들의 현실이 너무나 딱하여 공원의 관리책임자를 찾아가 소나무예찬을 늘어놓으며, 소나무주변의 잡목들을 제거해 주면 좋겠다는 건의를 해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세훈 시장의 많은 역작의 치적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북서울꿈의숲’ 은 공원의 양옆으로 두 개의 산이 감싸고 있어 서울시내에서 제일로 멋진 공원이다. 전망대를 품고 있는 높은 산은 소나무가 별로 없지만, 그 반대쪽의 낮은 산은 소나무가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럼에도 잡목들이 웃자라고 녹음이 무성하여 소나무들이 맥을 못 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잡목들만 제거해준다면 솔 씨들이 싹을 틔워 몇 년 안에 솔숲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여의도의 공원처럼 평지에 도심의 공원들을 조성하면서 심은 소나무들이 날로 무성하게 자라 이젠 솔숲이 창창한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다. 이에 비하여 ‘북서울꿈의숲’ 공원은 산이 있기 때문에 기존에 많이 있는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주변의 잡목을 제거하여 성장환경을 조성해주고, 공간이 허한 곳엔 소나무를 조금만 더 심어준다면, 사철 푸른 솔숲이 이루어져 그 어느 공원보다도 아름다움의 가치가 높아지게 되어, 먼 후세에 까지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될 것이다. 또 소나무를 더 심어야 할 경우, 공원을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기증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으로서 의미가 더 깊지 않을까 싶다.
중국 명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유기(劉基)의 자(字)가 백온(伯溫)이기에 일반적으로 유백온(劉伯溫)이라고 하는데, 그의 예언서 내용이 현시대의 세태와 맞아떨어진다며 세간에 SNS상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난 그의 예언서보다도 그가 말한 권선시(勸善詩)에 마음이 더 끌린다. 권선시의 내용 중에서 소나무에 대한 구절만을 소개해본다. “선(善)은 생생한 청송(靑松)과 같고/악(惡)은 꽃과도 같으며/청송(靑松)은 담담하여/호화로운 기색이 없지만/하루아침에 된서리가 내린 뒤엔/다만 청송만 의연히 보일뿐/꽃은 보이지 않으리라.”는 구절이 있다. 즉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청송과 같이 영원한 보람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善)의 상징인 소나무가 잡목들에 치어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훌륭한 선비로서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으로 실학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보면 “집 주변에 송죽(松竹)을 심으면 생기가 돌고 속기(俗氣)를 물리칠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파트 단지의 조경수로 소나무들을 많이 심는다. 그런데 소나무를 운반해오면서 산에선 무성했을 가지들을 모두 손상시키는 바람에, 나무꼭대기에 불과 몇 개의 가지만이 남아있는 애처로운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바라건대 아파트높이와의 밸런스만을 생각지 말고, 키가 좀 낮더라도 가지가 손상되지 않은 제대로 된 소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복잡한 도시에서의 팍팍한 삶이란 항상 자연이 그립고, 사철 푸른 소나무를 동경(憧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북서울꿈의숲’의 산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게 하여, 사철 푸른 솔숲이 무성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면 일상에 지친 심신을 힐링하고자 공원을 찾는 많은 시민들이 ‘늘 푸른 소나무의 기상(氣像)’에서 생기(生氣)를 되찾게 되고, 마음 또한 청정(淸淨)해짐으로서 소나무에서 풍기는 신의(信義)와 절개(節槪)의 향기를 가슴깊이 되새기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