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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B.C. 538-142)
2. 하스몬 왕조(B.C. 142-63)
3. 로마의 지배(B.C. 63-A.D. 313)
4. 비잔틴의 지배(A.D. 313-636)
5. 이슬람제국의 지배(A.D. 636-1072)
6. 셀주크 투르크 시대(A.D. 1072-1099년)
7. 십자군 시대(A.D. 1099-1291)
9. 오스만 제국의 지배(A.D. 1517-1917)
10. 영국의 지배(A.D. 1918-1949)
11. 이스라엘의 독립
12.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전쟁과 평화
13.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전망
14. 메시아사상과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관계
15. 기독교와 유대인의 관계
1.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B.C. 538-142)
B.C. 539
ⅰ. 바벨론은 새로운 강대국인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 무너졌다. 따라서 바벨론의 포로로 생활하던 유대 백성들은 이제 바사의 속국이 되었다.
ⅱ. 바사의 고레스 왕은 바벨론과는 달리 유대 백성들에게 관용정책을 폈다. 고레스는 원년인 B.C. 538년에 유대인의 고국 귀환을 명했다. 이것이 유대의 바벨론 포로 1차 귀환이다.
ⅲ. 유대인들은 바사의 고레스 왕의 포로 귀환령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귀환하여 B.C. 516년에 성전을 건축하고 B.C. 445년 성벽을 중건하였으나 여전히 독립을 인정받지 못하고 강 저편의 주(州)의 일부로 되어(스8:36) 바사의 행정 하에 있었다(느3:7).
B.C. 333
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바사의 다리오 3세를 아르벨라 전투에서 패망시키고 바사를 정복함에 따라 유다는 다시 희랍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알렉산더의 목표는 헬레니즘(헬라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결합한 문화)을 방편 삼아 동서양의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ⅱ. B.C. 323, 알렉산더는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점령 후 돌아오는 길에 바벨론에 체류 중 열병으로 사망했다(32세). 알렉산더 사후 희랍제국은 그의 군대 휘하 장군들에 의해 4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ㆍ프톨레미 : 애굽, 팔레스틴
ㆍ카산데르 : 마게도니아, 그리스
ㆍ리시마쿠스 : 트리키야, 소아시아
ㆍ셀류쿠스 : 시리아, 바사제국 대부분
B.C. 323-198
ⅰ. 유다는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점령당했다. 헬라의 분열된 왕국인 프톨레미 왕조는 유대인에게 자치권을 부여했으며, 종교나 문화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애굽에 많이 이주하여 살았으며, 그들은 당시 헬라어를 사용함으로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ⅱ. 따라서 B.C. 250 애굽의 유대인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70인 역이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애굽의 수도요 헬라사상의 큰 중심지였으며, 많은 유대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B.C. 198
ⅰ. 헬라의 분열된 왕국인 시리아(수도 : 안디옥)의 셀류쿠스 왕조가 유다를 점령했다. 그들은 처음 30년 간 유대 민족에게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들의 문화는 당시 애굽과 마찬가지로 헬라적이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ⅱ. 유다인들은 희랍 옷과 놀이와 연극을 즐겼으며 희랍의 건축과 풍습과 사고방식 등을 받아들였다. 또한 헬라어는 당시 세계의 공통어로 모든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정도가 되었다.
B.C. 168
ⅰ.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다인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그는 당시 신흥국가인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무거운 배상금 마련을 위해 유다인들에게 많은 세금을 요구했으며, 성전을 약탈했다.
ⅱ. 또한 그는 유대 민족의 종교를 탄압했다. 곧 그는 유대인을 완전히 헬레니즘화시키기 위해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하고,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강제로 먹였다.
2. 하스몬 왕조(B.C. 142-63)
B.C. 167
ⅰ. 유대의 제사장 마타티아스가 성전에서 제우스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을 거부하고 시리아의 관리를 죽이고, 다섯 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하였다.
ⅱ. 이때 하시딤파를 중심으로 한 많은 유대인들이 마타티아스 일가와 손을 잡고 종교의 자유를 위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ⅲ. 마타티아스는 독립군의 게릴라전을 지휘하다가 B.C. 166년에 죽었는데, 유언으로 셋째 아들 마카비 유다(쇠망치 유다)를 지도자로 지명하였다.
B.C. 164.12.25
ⅰ. 마카비 유다는 시리아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탈환하고 우상과 이교 제단을 파괴하는 등 성전을 정화하였다.
ⅱ. 그 후 유대인들은 이 성전 탈환을 기념하여 매년 하누카 축제(수전절)를 지키고 있다. 그 후 마카비 유다는 시리아와의 한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B.C. 152
ⅰ. 마카비 유다의 형제인 요나단이 뒤를 이어 유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ⅱ. 그는 대제사장으로 있으면서 유대의 번영을 촉진하였으나, B.C. 142년 시리아인에게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B.C. 142
ⅰ. 요나단이 죽자 그의 동생 시몬이 대제사장이 되었다. 시몬은 로마의 외교적 지원을 얻어 셀류쿠스 왕조로부터 ‘대제사장 겸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ⅱ. 이때 비로소 유대 민족은 사실상의 독립을 확립할 수 있었다. 유대는 더 이상 시리아에게 조공을 받치지 않게 되었다.
ⅲ. 시몬과 그의 두 아들은 B.C. 135 그의 사위에 의해 피살되었다.
B.C. 135
ⅰ.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왕위에 올랐으며, 하스몬 왕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ⅱ. 하스몬이란 마카비의 조상 하스몬의 이름을 따서 붙인 호칭이다. 그러나 하스몬 왕조는 그 정통성에 있어서 ‘하시딤’의 도전을 받았다.
ⅲ. ‘하시딤’이란 히브리어로 율법에 충실하다는 뜻으로, 바리새파 사람 중에 아주 경건한 유대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마카비 가문의 후예에 의해 세워진 하스몬 왕조가 율법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율법에 의하면 유다 지파 다윗의 후예가 아니고서는 왕이 될 수 없었다.
ⅳ. 결국 하스몬 왕조는 자신들의 반대 세력인 하시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요한 히르카누스 2세는 하루아침에 바리새파 사람 800여 명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했으며, 나머지 하시딤을 모두 예루살렘에서 쫓아냈다. 하시딤은 한때 열심으로 싸워서 나라를 되찾으나 결국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ⅴ. 그들은 사해 부근으로 이주하여 외부와 단절된 채 ‘쿰란공동체’ 곧 에세네파를 형성했다. 그들은 오직 기도와 근신으로 암흑기를 보내면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임박한 종말론적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B.C. 104
요한 히르카누스가 죽자 아리스토불루스가 형제들을 죽이고 부친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술과 질병과 공포심으로 인해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B.C. 103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그의 동생 얀네우스가 통치자가 된다. 그는 영토를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와 비슷할 정도로 확장하였다.
B.C. 76
ⅰ. 얀네우스가 죽자 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70대의 노과부로써 9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였다.
ⅱ. 그런데 그의 두 아들인 요한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왕위 다툼을 했다. 형제간의 정권 찬탈의 과정에서 이들은 각각 로마와 사막의 제국 나바티안 왕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ⅲ. 나바티안 왕조(B.C. 2C-A.D. 2C)의 수도는 페트라였다. 나바티안 왕조는 후에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 의해 멸망한다.
B.C. 63
ⅰ. 하스몬 왕조의 왕위 다툼에 개입한 두 제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충돌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몰락한다.
ⅱ. 로마의 장군인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 유다는 다시금 이민족에게 짓밟혀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ⅲ.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아들 안티고누스를 로마로 사로잡아 가고 히르카누스를 유대의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했다.
ⅳ. 그러나 실제 권력은 정략가인 이두메인 안티파테르에게 주어졌으며, 유대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3. 로마의 지배(B.C. 63-A.D. 313)
B.C. 63
ⅰ.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로마는 하스몬 왕조의 히르카누스 2세에게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ⅱ.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부에 대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몬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다.
ⅲ. 그는 동부 민족인 파르티아(바대)의 힘을 빌려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곧 로마에게 패하고 처형당함으로써 이 땅은 로마제국에 예속된 한 주(州)가 되고 말았다.
B.C. 47
ⅰ. 로마는 안티파테르를 유다의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B.C. 37년 왕위에 오른 헤롯 대왕(B.C. 37-4)의 아버지였다.
ⅱ. 그는 원래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하스몬 왕조 때 요한 히르카누스가 병사를 모집할 필요가 있어 사막민인 이두메(에돔)인을 반강제적으로 할례를 주어 군대에 편입시킬 때 유대교로 개종한 자였다.
ⅲ. 그는 병사들의 사령관에 임명되어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 후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와 폼페이우스와의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시저를 지원, 그 공로로 유대의 지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ⅳ. 그는 큰 아들 파사엘에게 베레아 지방을, 작은 아들 헤롯에게 유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B.C. 37
ⅰ. 안티파테르가 독살되자 로마는 그의 후임으로 안티파테르의 아들이며, 히르카누스의 딸 미리안느 공주와 결혼한 헤롯을 유대 왕에 임명하였다.
ⅱ. 헤롯은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으며, 거대한 건축물들을 많이 세웠다. 그는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다. 예루살렘 성전은 B.C. 19년에 착수하여 A.D. 64년에 완공되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대인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ⅲ. 그는 하스몬가(家)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고 헤롯 왕조를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넷으로 분할하여 아들들인 아켈라오, 헤롯 안티바, 빌립, 루시니아에게 나누어주었다.
B.C. 4
ⅰ. 헤롯 대왕은 갑자기 병들어 죽었으며, 그의 사후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약화되었다(안티파테르-헤롯대왕-헤롯안티바-헤롯아그립바).
ⅱ. 예수 그리스도는 B.C. 4년 헤롯 대왕이 죽기 바로 전에 태어나셨다. 헤롯 대왕이 죽자 그 아들 아켈라오가 그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되었다(마2:22).
A.D. 26-36
ⅰ.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유대 주(州)의 총독으로 재위했으며, 유대는 ‘명목상의 왕’과 ‘총독’이라고 불리는 로마의 집정관에 의해 이중적으로 통치되었다.
ⅱ. A.D. 36년에 빌라도는 사마리아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사마리아인들은 로마에 사절단을 보내어 빌라도의 잔인성에 항의하고 빌라도의 제거를 요청했다.
ⅲ.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되어 골(Gaul, 지금의 프랑스)로 유배되었으며 그 후에 자살했다.
A.D. 37-44
ⅰ.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다를 비롯하여 빌라도와 헤롯 대왕이 통치했던 지역들을 맡았다.
ⅱ.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 때문에 갑자기 충이 먹어 죽고 만다(행12:20-23). 이 후부터 유대는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ⅲ.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 그는 헤롯 왕가의 최후의 왕이다.
ⅳ. 바울은 바로 이 아그립바 2세와 베스도 총독에 의해 연행되었다(행25:13-26,33)
A.D. 52-60
ⅰ. 벨릭스(행24장)가 아그립바의 통치를 계승하여 유대 총독이 되었다.
ⅱ. A.D. 60-62년 베스도(행25,26장)가 벨릭스의 후임으로 유대 총독이 되었다.
ⅲ. 그 후 플로루스라는 로마 관리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잔인하고 포악스럽게 유대 민족을 통치하였다.
A.D. 65년
ⅰ. 유대인은 총독의 잔학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유대인들은 사해 변방에 있는 마사다 요새를 점령하여 로마 수비대를 무찔렀다.
ⅱ.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수비대장이 열심당(Zealot)을 조직하여 로마 수비대를 몰아냈다. 이러한 반란은 유대의 여러 도시들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A.D. 66
ⅰ.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케스티우스 장군이 2만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왔다. 그는 6달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중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퇴각해 버렸다.
ⅱ. 유대인들은 퇴각하는 로마군 6천 명을 죽이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 당시에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 요단 강 건너편 베뢰아 땅에 정착했다.
ⅲ. 케스티우스의 이유 없는 퇴각 소식을 들은 로마 황제 네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보냈으며, 베스파시안은 그의 아들 디도와 함께 6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유다의 도시들을 점령하여 나갔다.
A.D. 68 겨울
ⅰ. 네로 황제가 자살하자 베스파시안은 로마로 돌아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ⅱ. 그는 다시 디도를 보내 예루살렘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A.D. 70.2
ⅰ. 디도는 8만 명의 군대와 장비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ⅱ. 예루살렘에서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로마 군대의 진군을 피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디도는 항복하라고 외쳤으나 유대인들은 그의 말을 조롱하였다.
ⅲ. 로마군은 유월절 절기 동안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는 어느 편에서도 결코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로마 군인들이 성벽의 한 부분을 무너뜨리면 유대인들은 필사적으로 성 안쪽에 다시 벽을 쌓아 놓았다.
ⅳ. 기근이 예루살렘을 휩쓸었다. 여자들은 자기 자신의 죽은 자식을 먹기에 이르렀고, 성인 남자들은 식량으로 먹기 위해 새똥 몇 줌을 차지하려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
A.D. 70.9.8
ⅰ.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강타하여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전을 불태웠다.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칼에 찔리고 불에 타거나 십자가형으로 살해되었다.
ⅱ. 또한 수만의 유대인이 포로로 잡혀 로마로 갔으며, 그들은 광산에서 노역하거나 투기장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었다. 또한 수만의 유대인들이 세계의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다. 디도는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로마로 끌고 갔다.
ⅲ. 그 때 약 967명의 유대인(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이 함락된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와 마사다로 향했다. 마사다는 위가 쟁반 같이 평평한 돌로 되어 있으며, 사방은 거의 수직으로 약 430m 가량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마사다 요새는 면적 8ha, 둘레 1.5km이다. 마사다는 헤롯 대왕에 의해 B.C. 35년에 튼튼히 요새화 되었다.
ⅳ. 마사다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헤롯이 100년 전에 그곳에 저장해둔 막대한 양의 식료품을 발견했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식량은 그곳에서 저장되었던 때와 마찬가지 상태였다. 그 외에도 많은 무기들이 발견되었다.
A.D. 72 봄
ⅰ. 로마의 장군 실바는 1만5천 명의 병사로 마사다 요새를 포위 공격하였다. 유대인들은 2년 동안 버텼다.
ⅱ. 유대인의 지도자 엘리아살 벤 야일은 이제 내일이면 로마 군인들이 성벽을 돌파하는 데 성공할 것을 알았다. 그렇게 되면 아내들은 강간당할 것이며, 자식들은 노예가 될 것이며, 그리고 남자들은 살해될 것이다. 그래서 그 최후의 밤에 야일은 모두에게 자살할 것을 설득했다.
ⅲ. 모든 성인 남자들은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가슴 찢어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야일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눈물 어린 작별 인사를 나눈 다음 각각의 남자는 자신의 가족을 신속하게 죽였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한 곳에 재빨리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10명을 제비뽑아 모든 남자들을 죽이도록 했다. 모든 남자들은 각기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 곁에 누워서 양팔로 아내와 자식들을 껴안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 10명은 모든 남자들을 모두 죽인 다음, 1명을 제비뽑아 남은 9명의 남자를 죽이도록 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궁전을 불태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몸을 칼로 찔러 가족들 곁에 넘어져 죽었다.
ⅳ. 그러나 한 노파가 엘리아살의 친척인 다른 사람과 5명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도망쳐 나왔다.(요세프스의 ‘유대인 전쟁사’)
A.D. 130
로마 황제 하드리안(Hadrian)은 예루살렘을 재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에다 쥬피터 신전을 세웠다. 이 일은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다.
A.D. 132
ⅰ.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가 메시아를 자처하며 로마에 대항해 제 2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예루살렘의 해방’, ‘이스라엘의 구속’이라고 히브리어로 쓴 동전을 발행하였다.
ⅱ. 랍비 아키바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민 24:17)라는 구절과 연관시켜 그를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아로 선포하였다. 20만 이상이 혁명에 가담했으며, 가담자는 충성 서약으로 손가락 하나를 잘랐다.
ⅲ.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에서 역부족이었다.
A.D. 135
ⅰ. 코크바는 로마의 장군 줄리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랍비 아키바는 산 채로 피부가 벗겨졌는데, 그는 여전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다”(신6:4)라고 말했다고 한다. 5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이 기간 동안에 살해되었으며, 남은 유대인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ⅱ. 예루살렘은 ‘알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거주가 금지되고 오직 성전 파괴일(日)에만 방문이 허락되었다.
ⅲ. 하드리안 황제는 지금까지 유다로 부르던 속국의 이름을 ‘시리아-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더 이상 유대인이 이 땅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고, 이후로 이 땅은 이스라엘이나 유대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유랑(流浪)의 역사
ⅰ. 노예로 끌려가거나 추방당한 유대 민족은 전 세계로 흩어져 기나긴 유랑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라도 주권도 없는 국제 고아가 되어 독일에 살면 독일계 유대인, 프랑스에 살면 프랑스계 유대인, 스페인에 살면 스페인계 유대인이었다.
ⅱ. 소수의 유대인이 디베랴에 정착했고, 디베랴는 유대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ⅲ.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종교 형태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전통적으로 유대교는 두 개의 기둥, 곧 ‘성전’과 ‘율법(토라)’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A.D. 70년 이후의 유대교는 완전히 토라 중심의 종교가 되었다. 성전이 없기 때문에 대제사장도, 제사장도, 동물 희생제사를 통한 속죄도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유대교와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ⅳ. 오늘날의 유대교는 오직 ‘토라’를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 공부하는 종교이다. 종교의 중심은 이제 성전 대신에 율법을 공부하는 장소인 회당이 되었다. 회당은 예배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물론 이곳에서의 예배란 동물의 희생제사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한다. 율법의 공부는 그들에게 구원과 직결된다.
4. 비잔틴의 지배(A.D. 313-636)
A.D. 313
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전의 비잔티움)을 수도로 건설하였으며, 기독교 신앙은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많은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고 이스라엘 땅은 범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ⅱ.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의 기독교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A.D.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유대인에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라는 법령을 선포했다.
A.D. 362
ⅰ. 줄리안이 황제로 즉위하자 그는 배교자가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했다.
ⅱ. 그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마23:37-39 /24:1,2)이 오류임을 증명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모리아 산의 성전 재건을 약속했다. 그러나 성전을 지으려던 일꾼들은 지반에서 터져 나오는 이상한 불길에 의해 모리아 산에서 도망쳐 내려왔다.
ⅲ. 줄리안은 8개월 동안 통치한 다음 A.D. 363년 한 전장에서 죽었다.
A.D. 364
ⅰ.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리되었다.
ⅱ. 서로마제국은 A.D.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다.
ⅲ. 한편 동로마제국은 A.D. 1453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비잔틴시대를 지속하였다.
ⅳ. 비잔틴시대 동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 그리고 1년 중 단 하루(9월 8일)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A.D. 614
ⅰ. 페르시아의 코스로에스 2세가 팔레스타인을 침입해 왔으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해방을 기대하며 그를 지지했다.
ⅱ. 비잔틴 군대들은 패전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ⅲ. 당시 기독교회는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A.D. 629
ⅰ. 로마제국의 헤라클리우스 황제 휘하의 비잔틴 군사들이 페르시아 군사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에 다시 입성하였다.
ⅱ. 유대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었다.
5. 이슬람제국의 지배(A.D. 636-1072)
A.D. 570
아라비아 메카에서 출생한 모하메드는 A.D. 610년 이슬람교를 창시했으며, A.D. 632년 아라비아반도 전체를 차지한 사라센제국을 건설하고 62세의 나이로 죽었다.
A.D. 637
ⅰ. 사라센제국은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ⅱ.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무슬림의 세 번째 성지가 되었으나 행정적으로는 중요성을 띠지 못했다.
A.D. 650까지
ⅰ. 사라센제국은 동으로 오늘날 이란의 대부분, 서로는 시드라만 동쪽 연안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북으로는 카프카스와 타우루스 두 산맥에 이르는 땅을 점령하였다.
ⅱ. 비잔틴을 축출하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사라센제국은 처음에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승인하고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 대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강요했다.
ⅲ. A.D. 717년 비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이 도입된 이후부터 유대인은 공적인 행동, 종교의식, 법적 지위 등에서 제한을 받았다. 또한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와 사회적ㆍ경제적인 차별대우를 받았다.
ⅳ.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박해가 심해지자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나고, 소수의 유대인만 남게 되었다.
A.D. 8세기 초
사라센제국은 이베리아반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인더스 강 하류 유역을 정복하였는데, 이때의 정복으로 이슬람제국의 기본적 영역이 대체로 결정되었다.
A.D. 732
사라센제국은 프랑크의 뚜르 전투에서 샤를르 마르뗄에게 패함으로 더 이상의 서방 진출을 저지당하게 되었다.
A.D. 11세기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졌으며, 이 땅은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의 터전으로 바뀌었다.
A.D. 1258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함락시킴에 따라 사라센제국은 멸망하였다.
6. 셀주크 투르크 시대(A.D. 1072-1099년)
ⅰ. 10세기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동남부로부터 투르크 민족들이 이주할 때, 셀주크라는 이름의 족장이 이끄는 한 유목부족이 11세기에 서아시아를 침공해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란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제국을 세웠다.
ⅱ. 회교로 개종한 그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박해했다.
ⅲ. 셀주크 족은 1097년 십자군에 의해 내륙지방으로 쫓겨 갔다.
7. 십자군 시대(A.D. 1099-1291)
이교도인 아랍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하여 여덟 차례의 주요한 십자군운동이 있었다. 제 4차와 제 5차 십자군운동이 가장 비참했다.
(1) 제 1차 십자군 운동(A.D. 1095)
ⅰ. 베드로라는 한 유럽인 수도사가 예루살렘 성지의 기독교 주교를 방문했다.
ⅱ. 예루살렘 주교는 이슬람교도인 셀주크 족들에 의해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으며, 그는 베드로를 통해 로마 교황 우르반(Urban) 2세에게 예루살렘을 구출할 군대를 일으켜 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A.D. 1095.11.18
ⅰ. 프랑스 끌레몽에서 한 특별회의가 개최되었다. 베드로 수도사는 그 회의에서 현지 상황을 보고하며 격렬한 연설을 했다.
ⅱ.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룩한 도시의 회복에 자신들의 생명을 바칠 것을 지원했다. 제 1차 십자군은 부이용의 갓프리가 지휘했다.
A.D. 1099
ⅰ.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주위를 일곱 번 행군한 직후 진격하였으며, 무자비하게 닥치는 대로 적을 쳐부수었다.
ⅱ. 도시의 비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으며,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방어하던 유대인들은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갓프리는 예루살렘의 총독 겸 수호자로 선출되었다.
ⅲ. 그러나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 된 도시와 성에 국한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비록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2) 제 2차 십자군 운동(A.D. 1146년)
ⅰ. 제 2차 십자군은 교황 유게니우스 3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가 이끌었다.
ⅱ. 제 2차는 25만 명의 영국인과 독일인 병사의 생명을 잃게 한 엄청난 재난이었다.
A.D. 1187
ⅰ. 쿠르드인 살라딘은 군사적 천재(天才)를 발휘하여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하틴 만에서 십자군들을 완전히 패배시켰다. 그는 정복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ⅱ. 이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몇 몇 성에 한정되었다.
(3) 제 3차 십자군 운동(A.D. 1189-1192년)
ⅰ. 영국의 사자 왕 리차드가 십자군을 이끌었다.
ⅱ. 그는 이전에 살라딘이 빼앗았던 그리스도인의 요새들 중의 몇 개를 점령했으나 예루살렘을 되찾지는 못했다.
(4) 제 4차 십자군 운동(A.D. 1202-1204년)
ⅰ.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제 4차 십자군을 선동했다. ⅱ.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이르지도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5) 제 5차 십자군 운동(A.D. 1218-1221년)
ⅰ. 헝가리 왕 안드레와 독일 황제 프레드리히 2세가 지휘했다.
ⅱ. 그들은 애굽에 상륙하여 애굽을 점령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이 만약 애굽에서 퇴각한다면 십자군에게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
ⅲ. 그러나 십자군은 애굽의 보물 창고들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그 제의를 거절함으로 십자군운동 전 기간을 통해서 가장 좋은 기회를 잃었다.
(6) 제 6차 십자군 운동(A.D. 1228-1229년)
ⅰ. 성공적인 십자군운동이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이 십자군운동을 비난했으며, 지도자인 프레드리히 2세를 증오했다.
ⅱ. 프레드리히는 이슬람교도들과 조약을 체결했고, 이슬람교도들은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십자군들에게 넘겨주었다.
ⅲ. A.D. 1229년, 프레드리히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자신을 왕으로 포고하였다.
(7) 제 7차 십자군 운동(A.D. 1248년)
ⅰ. A.D. 1244,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었고, 그로 인해 제 7차 십자군운동이 일어났다.
ⅱ.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지휘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이 9세는 사로잡혀 한동안 억류되어 몸값을 강요당했다.
(8) 제 8차 십자군 운동(A.D. 1267년)
ⅰ. 프랑스 왕 루이와 영국 왕자 에드워드가 마지막 십자군 운동을 공동 지휘했다.
ⅱ. 이 십자군은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최후의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에서 방향을 돌려 키프러스로 항해했다.
ⅲ. 초승달(crescent, 회교군)이 십자가(cross, 십자군)를 이긴 셈이다. 이것으로 192년 간 계속된 드라마는 끝이 났다(‘아브라함부터 중동전쟁까지’ 참조).
8. 마멜루크(mameluke)의 지배(A.D. 1291-1516)
ⅰ. 이집트 무슬림인 마멜루크족(노예의 뜻)은 궁전호위병으로 봉사했던 애굽의 터키족 노예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애굽인 주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애굽의 왕권을 물려받았다.
ⅱ. A.D. 1291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십자군을 몰아냈다.
ⅲ.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한 제한을 가했다. 이슬람교도들과 구별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노란색 두건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푸른색 두건을 두르도록 법으로 정했다.
ⅳ. 마멜루크 시대에 이스라엘 땅은 오랜 가뭄을 겪었다.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궁핍하였다.
9. 오스만 제국의 지배(A.D. 1517-1917)
A.D. 1517
ⅰ. 터키의 셀림 1세가 마멜루크족을 쳐부수고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셀림 1세의 아들 셀리만은 예루살렘 성벽들을 재건했는데 오늘날도 그의 업적이 기념비로 서 있다.
ⅱ. 셀리만 시대에 유대인의 생활은 개선되었으며, 새로운 유대인이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은 대부분 팔레스타인의 츠파트에 거주했으며, 이곳의 유대인 수가 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ⅲ. 셀리만의 사후 팔레스타인은 터키 태생의 지방장관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그들은 통치권을 유지하기 위해 뇌물을 콘스탄티노플의 최고 술탄에게 바쳤다. 이로써 ‘진저리나는 터키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백성과 토지를 약탈했고, 유대인들과 아랍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치욕스러운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당했다.
A.D. 1798
ⅰ. 나폴레옹 보나빠르트가 중동에 들어왔다. 그는 해안을 따라서 욥바, 가자, 그리고 가이사랴를 정복했으나 강력한 중심 도시 아크레를 점령할 수 없었다.
ⅱ. 이 해안 도시는 터키와 영국군에 의해 방어되었다. 그는 고국으로 향했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했다.
A.D. 1838
영국의 영사관이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영사관이었다.
A.D. 1843
ⅰ. 프랑스ㆍ프러시아ㆍ오스트리아ㆍ스페인도 뒤를 이어 영사관을 세웠다.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그리고 유대인들이 또한 이 기간 중에 선교단을 창설했으며, 구미의 학자들은 성서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했다. 수에즈운하의 개통은 3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로서의 이 땅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ⅱ. 이 땅의 유대인들의 생활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유대 인구는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이들은 수 세기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ⅲ. 이때 오스만제국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ⅳ. 그러나 1500년대에 5000명에 불과했던 유대인의 수는 1839년 1만 명, 1880년 3만5천명, 1900년 7만 명, 1914년 9만 명이 되었다.
A.D. 1853
ⅰ. 크리미아 전쟁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권리를 놓고 일어났다.
ⅱ. 러시아는 오토만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뺏기 위하여 터키에 침입했으며, 터키는 프랑스와 영국에 도움을 청했다. 러시아는 그 전쟁에서 패했다.
A.D. 1878
ⅰ. 유대인 벤 예후다가 꿈속에서 팔레스타인에 히브리어를 다시 보급하라는 소명을 받고 러시아에서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는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모든 군중을 향해 히브리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ⅱ. 유대인들은 분개하여 그를 돌로 쳤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몇 마디의 히브리어도 기도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벤 예후다는 변치 않았다. 유대인은 그를 계속해서 미워했으며 터키족에게 체포당하도록 계획했다.
ⅲ. 그때 국제적으로 유명한 유대인인 데오도르 헤르쯜이 예후다의 꿈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예후다는 갑자기 영웅 대접을 받게 되었다.
ⅳ. 팔레스타인의 독일계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그들의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다른 유대인 무리들도 뒤따랐다.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했으며, 그 사전에서 그는 성경과 탈무드의 히브리 단어들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많은 단어들도 새로 만들었다. 벤 예후다는 사어(死語)를 재생하고 부활하는, 세계사에서 전례 없는 일을 성취하였다.
A.D. 1897
ⅰ.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데오도르 허쯜이 ‘시온주의’ (Zionism) 운동을 스위스의 바젤에서 시작했다.
ⅱ.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파견된 204명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그는 세계 시온주의자 조직을 구성했다. 이 조직은 유대 민족을 위해 팔레스타인에 합법적 조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ⅲ. 그러나 이 총회는, 시온주의자 조직이 메시아사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정치적인 성격의 운동임을 규정했다. 막스 노다우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정치적으로 요청되는 새로운 시온주의는 모든 신비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낡고 종교적이며 메시아적인 것과 다르며, 더 이상 메시아사상과 동일시될 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시온주의는 기적에 의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길을 준비하고자 한다.”
ⅳ. 그 회의 직후, 헤르쯜은 세계 국가들과의 외교적인 노력과 협상을 할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러시아, 대영제국, 이탈리아, 독일을 방문했으며, 교황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ⅴ. 그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고 있는 터키 왕을 직접 만나러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터키 왕은 헤르쯜의 달변에 감명을 받고 유대인들이 2천만 달러를 내고 팔레스틴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헤르쯜은 돈 갖은 유대인을 한 사람도 설득시킬 수 없었으며, 황금 같은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A.D.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에서는 터키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아랍인들이 터키 족을 싫어했다.
A.D. 1914년 여름
ⅰ. 중동의 정치적 지리적 상황을 바꾸어 놓을 사건이 발생했다. 곧, 세르비아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오스트리아 황제의 조카이며 후계자)이 총탄에 맞아 살해되었다.
ⅱ.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러시아ㆍ대영제국ㆍ프랑스ㆍ이탈리아가 세르비아를 도우러 왔다. 터키는 독일 측에 가담했다.(세계 1차 대전, 1914-1918)
ⅲ. 그러나 1916년 아랍인들은 터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영국인 로렌스는 대영제국의 편에서 싸울 20만 명의 아랍인 군대 소집을 도왔다.
10. 영국의 지배(A.D. 1918-1949)
A.D. 1917.11.2
ⅰ. 예루살렘 입성을 목전에 두고 영국의 외무장관 발포어가 유명한 ‘발포어 선언’을 선포했다. 그것은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다 백성을 위한 국가 건설을 지지하며, 이 목적의 달성을 촉진하기 위하여 유대 백성의 노력을 최선으로 이용할 것이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미국의 대통령 윌슨을 포함하여 동맹국의 여러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ⅱ. 이 선언의 배후에는 당시 저명한 유대인 화학자인 카임 바이즈만 박사의 영향이 있었다. 그는 옥수수 열매의 발효를 통해 포탄 제조에 필요한 화학약품인 아세톤을 생산하는 방법을 영국에 제공함으로서 영국의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ⅲ. 영국 정부는 바이즈만에게 보상을 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바이즈만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민족의 고국으로 만들어 줄 것만을 요청했다. 훗날 유대 백성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함으로써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A.D. 1917.12.11
ⅰ. 알렌비 장군의 지휘 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종식되었다.
ⅱ. 시온주의와 발푸어 선언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였다. 유대 민족의 귀환사는 보통 1882년부터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1948년까지 시대별로 5대 이민군으로 구분한다.
ⅲ. 특히 2차 대이민 때 들어온 벤구리온(초대수상), 벤-쯔비 (2대 대통령), 쉬프린작 (초대 국회의장) 등은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돌아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한편, 정당과 유다인 기구, 그리고 주민들의 대표기구 등 준국가적인 기구들을 조직하고, 지하군사조직을 창립하면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주춧돌을 놓아갔다.
ⅳ. 벤구리온을 중심으로 한 이들 지도세력은 A.D. 1948에 독립국가 건설에 성공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의 발전을 주도했다. 이들은 대부분 비종교인들이었다.
ⅴ. 2009년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수는 총 751만 명인데, 유대인 562만 명, 아랍인 150만 명, 기타 3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종교는 유대교 76%, 회교 16%, 기독교 2.1%, 드루즈 1.6%, 기타 및 무교 4.3%이다.
A.D. 1922.7
ⅰ. 유엔총회는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을 인정하고 유대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에 국제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대국가 건설 촉진계획에 위임통치지역인 지금의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ⅱ. 영국은 유대인과 아랍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1920년 유대 사회는 정당기구를 선출했으며, 1922년에 영국의 위임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대인 대리기관’이 구성되어 영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해 유대 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다.
A.D. 1929
ⅰ.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통곡의 벽에서 살해되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바위 돔’(Dome of Rock)과 ‘아크사의 회교사원’(the Mosque of Aksa)을 파괴하려고 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ⅱ. 이로써 유대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대인 공동체의 노력은 아랍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들의 강한 적개심은 수차에 걸친 격렬한 폭동과 유대인에 대한 공격으로 분출되었다. 쌍방의 대화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으며, 시온주의와 아랍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A.D. 1936
ⅰ. 영국은 유대와 아랍에게 팔레스타인을 분할할 것을 권했다. 영국은 일찍이 위임통치하의 지역을 분할했듯이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대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 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
ⅱ. 유대인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였으나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A.D. 1939.5
ⅰ. 영국은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反)유대 폭동으로 인해 아랍인들을 달래기 위한 ‘백서’(White Paper)를 발표했다. 그 ‘백서’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이 전 인구의 30%로 제한된 소수의 유대인을 가진 하나의 아랍국가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ⅱ. 유대인들에게 이 백서는 발포어 선언을 배반한 것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통치하고 있는 독일에서 반유대주의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이민제한 조치를 반대했다.
ⅲ. 이 기간 중에 유명한 하가나(유대민족 방위군)가 조직되었다.
A.D. 1939.9
ⅰ. 독일이 폴란드에 침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ⅱ.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영국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13만 명의 이스라엘인이 입대하여 대영제국을 위해 복무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유명한 모세 다얀은 영국군으로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ⅲ. 한편 예루살렘의 아랍인 지도자들은 나치와 협력하기 위해 독일군에 입대했다.
A.D. 1945
ⅰ.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대학살)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ⅱ.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정부는 유럽의 유대인 말살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그들은 거리로부터 수용소로 옮겨져서 무차별 사격을 받았으며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ⅲ. 유대인은 전쟁 후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3분의 1만이 살아남았다. 전후(戰後) 영국은 ‘백서’의 규정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와서 정착하는 유대인의 수를 더욱 제한하였다.
A.D. 1947
ⅰ. 영국이 백서를 포기하게 만든 국제적인 한 사건이 발생했다.
ⅱ. 4,554명의 유대인 피난민을 실은 4천 톤의 목재선이 팔레스타인의 하이파 항(港)에 정박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들을 모두 체포하여 세 척의 감옥선에 실어 프랑스의 한 항구에 다시 정박시켰다. 유대인들은 배에서 떠나기를 거부하고 단식투쟁을 했으며, 이러한 비극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ⅲ. 영국은 그들의 백서정책을 폐기하고 유엔 총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했다.
11. 이스라엘의 독립
A.D. 1947.11.29
ⅰ. 유엔 총회는 33대 30으로(기권 10표) ‘팔레스타인 분할과 이스라엘 독립국가 창설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ⅱ. 그 내용은 팔레스타인 땅의 52%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48%에는 아랍 국가를 수립하고, 예루살렘과 그 주변은 국제관리 지역으로 남긴다는 것이었다.
ⅲ. 벤 구리온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진영에서는 그 안을 수용하였으나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아랍인들은 유엔 투표 후 24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유대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대 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ⅳ. 유대 방위단체는 공방 끝에 유대 국가에 할당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A.D. 1948.5.14
ⅰ. 해 뜰 무렵 영국의 국기 유니온 잭(Union Jack)은 예루살렘에 있는 정부 청사 위의 깃대로부터 내려졌다. 팔레스타인을 통할하고 있었던 영국의 고등판무관은 17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예루살렘을 떠났다.
ⅱ. 이 날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선언을 히브리어로 읽었다. 같은 날 미국의 트루먼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했다. 사흘 후에 러시아도 이스라엘을 인정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를 이루고 있었으며, 명목상의 국가 명칭을 제외하곤 사실상 하나의 국가였다.
A.D. 1949.1.25
총선으로 초대 의회가 개원하였으며, 이스라엘 독립의 두 주역인 벤구리온과 와이즈만이 각각 총리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A.D. 1949.5.11
ⅰ. 이스라엘은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ⅱ. 모든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 시온주의 운동의 창시자 헤르쯜
ⅰ.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의 배경에는 헤르쯜의 역할이 컸다. 헤르쯜은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립자이며 이스라엘 국가의 아버지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온주의를 전파했고 시온으로 돌아가야 하는 꿈을 나누어주었다.
ⅱ. 데오도르 헤르쯜(Theodor Herzl)은 1860년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의 중산계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비엔나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대학시절에 듀링의 책 ‘인종, 도덕, 문화 문제로서의 유대인 문제’(1881)에서 “유대인이 해로운 종족이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10년 후 그는 반셈족주의자인 드루몽(Drumon)의 책 ‘프랑스 유대인’을 읽고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에는 유럽 어떤 곳보다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심각한 수준에 있었다.
ⅲ. 그는 1891년 비엔나의 한 신문사로부터 파리 특파원을 제안 받고 기자가 되었다. 프랑스 내에서의 반셈족주의 물결은 드레푸스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1894년 프랑스에서는 유다인 장교 드레프스가 프랑스군의 군사기밀을 독일로 누출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드레푸스 사건’이 일어났다. 1896년 드레푸스는 무죄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06년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유대인이 유럽 사회에서 얼마나 차별 받고 있는 지를 실감하게 된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이유로, 또한 뛰어난 상술을 지닌 하층 상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핍박을 받았다.
ⅳ.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접한 헤르쯜이 내린 결론은 유대 국가 건설이었다. 1895년 헤르쯜은 ‘유대 국가’를 저술한다. 이것은 시온주의를 제창한 최초의 이론서가 되었다. 핵심 사상은, 유대인은 유럽을 떠나 약속의 땅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다 국가 건설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 소책자(50페이지 정도)는 큰 반응을 일으켰다.
ⅴ. 19세기 말 당시 이 같은 주장은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하나의 환상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각 나라별로 유럽의 유대인 지식층들을 시온주의 이상 아래 조직하고, 시온주의 총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제안으로 전 유럽의 유대인 대표가 참가한 제 1회 시온주의 총회가 1897.8.29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되었으며, 모두 2백여 명의 유대인 대표가 참석하였다.
ⅵ. 헤르쯜은 유대 국가가 고대 유대와 이스라엘 왕국이 있었던 바로 그 땅에 세워지기를 고대했다. 그는 그의 책 ‘오래된 새 나라’의 타이틀 페이지에서 “만일 당신이 하기만 한다면 이것은 동화가 아니다”고 말했다. 1차 시온주의 총회가 끝난 뒤 그의 일기에는 “나는 여기에 유대 국가를 세웠다. 만일 내가 이 사실을 크게 소리친다면 모든 세상이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5년 적어도 50년 안에 모든 이들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ⅶ. 그는 정치적인 외교활동으로 유대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고 터키(당시 팔레스타인은 터키 통치 하에 있었음)와 영국을 대상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ⅷ. 그는 유대인들이 겪는 고난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하여 1903년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에 유대 국가 건설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온주의 총회는 그에게 강하게 반발하며 그를 배신자로 취급했다.
ⅸ. 1904년 시온주의 총회에서 헤르쯜은 우간다 안(案)에 대해 사과하고 팔레스타인 국가건설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ⅹ. 그러나 총회가 끝난 며칠 후 그는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연설은 “우리가 꾸는 이 꿈은 5년 내지는 50년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50년을 바라보았고 그의 환상은 정확히 실현되었다.
ⅺ.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에 크게 호응했고 하나둘씩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한 알의 씨앗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의 꿈은 유대 국가를 이루는 작은 씨가 되었다.
ⅻ. 이스라엘 국가가 재건되고 그의 시체는 예루살렘으로 이장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유대인 어린이는 교실 벽에 걸려있는 헤르쯜의 초상화를 보며 자라난다.
□ 홀로코스트
ⅰ.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은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히틀러는 이미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유대인들을 독일로부터 추방했다.
ⅱ. 1933-1936년 사이에 40,000명의 유대인들이 독일로부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다. 많은 독일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이나 다른 유럽국가로 이주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주하려는 나라들과 통치자들이 유대인들 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ⅲ. 제 2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을 떠나지 못한 자들은 전쟁과 함께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 세계의 유대인 수는 9백만 명이었는데 전쟁 후에는 3백만 명이 남았다. 하지만 이러한 유대 민족에 대한 핍박과 학살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ⅳ. 유럽인들에 의한 대학살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고향 땅인 팔레스타인과 미국으로 줄을 이어 이주했고,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의 성경적 의미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24:32-33)
1. 어떤 이들은 무화과나무를 1948.5.14의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로 해석한다.
ⅰ.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이고, ‘가지가 연해지는 것’은 독립운동이고, ‘잎사귀를 내는 것’은 독립이라고 한다.
ⅱ.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적 독립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바로 지금 매우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리켜주는 또 하나의 징조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본토에서의 재건은 그것이 비록 불신앙의 국가건설이라 할지라도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ⅲ. 또한 눅21:29-31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전후하여 일어날 군소 국가들의 독립을 가리킨다고 한다. 곧, 1940-1950년대에 이루어진 전 세계적인 탈식민지화 현상과 또한 2차 대전 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많은 신생독립국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2. 문제점.
ⅰ. 성경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한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예로 들어서 진리를 교훈한 일은 있지만(눅13:6-9 마21:19),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국가로 비유하여 말씀하신 적은 결코 없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든 것은 그 나무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매우 친숙한 나무이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ⅱ.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참 감람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곧, 이방인들은 본래 돌 감람나무와 같은 존재로서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당 한 신분이라고 말씀한다.
ⅲ.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이스라엘’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인위적인 가정과 상상의 산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ⅳ. 만약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독립으로 계속 고집한다면 마21:19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서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마21:19)
12.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전쟁과 평화
* 1차 전쟁
* 2차 전쟁
* 3차 전쟁
* 4차 전쟁
* 5차 전쟁
*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대봉기)
* 평화협정
* 이스라엘과 PLO간의 평화협정의 결렬
(1) 1차 전쟁
ⅰ. 팔레스타인과 아랍인들은 유엔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3개의 결정을 채택했다.
첫째,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이라크 등의 군대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 정부를 파괴하는데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지역을 침공하는 5개 아랍 국가들에 가담하여 전쟁을 선포한다.
셋째, 이스라엘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이스라엘 정부와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것이다.
A.D. 1948.5.15
ⅰ. 이집트ㆍ요르단ㆍ시리아ㆍ사우디아라비아ㆍ레바논 등 아랍 국가들은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다. 약 4천5백만 아랍인들과 64만 유대인들과의 전쟁이었다. 군사 40대 1, 인구 70대 1, 장비 1,000대 1, 국토면적 5,000대 1의 전쟁이었다.
ⅱ. 아랍 국가들은 북쪽, 남쪽, 그리고 동쪽에서 포위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배후인 서쪽에는 지중해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1만 정의 소총, 소총 1정 당 탄알 50발, 4문의 구식 대포, 그리고 3천6백 정의 기관단총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상황은 이스라엘에 전혀 희망이 없는 듯했다.
8개월 간의 전쟁의 결과
ⅰ.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랍연합군을 물리쳤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국민의 1%가 죽었으며(6,000명) 1949.2.24 독립전쟁은 끝났다.
ⅱ.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의 결과로서 1947년 분할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할당되었던 것보다 23% 더 많은 영토를 획득했다.
ⅲ. 해안 평야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ⅳ.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舊)시가지가 포함된 동부(東部)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西部)를 관할하게 되었다.
ⅴ. 아랍인들의 UN결의안 거부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스라엘 내 아랍 인구는 60만 명 이상이 독립전쟁 동안 떠나고 16만7천여 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ⅵ. 1948년 전쟁 후 이스라엘은 번영하였으며, 1952년까지 이스라엘의 인구수는 이민자들에 의해 두 배가 되었다. 유다인 이민자들은 80가지의 서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110개국에서 왔다.
(2) 2차 전쟁
이집트의 나세르
ⅰ. 범아랍 민족주의운동을 주창하며, 1956.10월에 이집트ㆍ시리아ㆍ요르단의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ⅱ. 이집트는 1956년에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며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 선박의 통과를 금지하고, 티란 해협의 봉쇄를 강화하였다.
ⅲ. 시나이반도는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기지로 변모해 갔으며,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는 날로 증가했다.
A.D. 1956.10.29
ⅰ. 이스라엘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먼저 급습을 하였다.
ⅱ. 이것을 ‘시나이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이스라엘은 8일간의 전쟁에서 시나이반도 전역과 가자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 작전은 뉴욕 타임즈가 세계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들의 하나라고 일컬은 아주 비범한 전투였다.
ⅲ. 4개월 이상 동안 시나이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이스라엘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시나이반도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에 유엔군을 투입되게 함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을 지키게 하였으며, 티란 해협의 개방을 보장받음으로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할 수 있게 하였다.
(3) 3차 전쟁
A.D. 1967.5.14
ⅰ. 낫세르는 이집트군을 이동시켜 시나이반도 국경선에 집결하고 국제연합군에게 그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ⅱ. 1967.5.30 낫세르는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고, 시리아와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요르단 군대는 이스라엘 공격에 대해 이집트의 명령에 따른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A.D. 1967.6.5
ⅰ. 이스라엘은 자위권을 발동하여 이집트에 선제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고원에서 저지시켰다. ⅱ. 이 전쟁은 제 3차 중동전쟁으로 ‘6일 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현대 이스라엘 역사의 분수령이 된 전쟁이다.
ⅲ. 애꾸눈의 모세 다얀 장군이 국방장관으로서 활약한 이 전쟁에서 아랍 4개국의 군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요르단과 이집트로부터 골란고원ㆍ가자지구ㆍ요르단 강 서안의 유대-사마리아지구와 시나이반도 등을 점령했다.
ⅳ. 이스라엘은 통곡의 벽 탈환과 함께 감람산, 구(東)예루살렘 성, 베들레헴, 헤브론, 세겜, 여리고 등 자기 민족의 성지들을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다.
ⅴ. 이스라엘은 이제 영토가 20,000㎢에서 68,000㎢로 늘었다. 이스라엘 국민의 사기는 충천했으며, 비록 조그만 영토와 인구를 가진 소국이지만 중동지역에서는 그 누구도 상대하기 어려운 군사대국으로 부상했다.
ⅵ. 유엔은 그 해 11월 결의안을 통해 이스라엘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묵살하고 점령지 내에 유대인 정착촌을 지어 이곳이 자국영토임을 확인하려 했다.
ⅶ. 점령지 중 시나이반도는 79년 캠프데이비드협정에 따라 이집트에 반환됐으나 나머지 땅은 아직도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어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ⅷ. 이스라엘은 1967년의 6일 전쟁 이후에 이스라엘의 통치권 안에 있는 모든 종교의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한다고 공표를 했다.
ⅸ. 1967년 이전에는 유대인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곳인 통곡의 벽의 유대인의 접근을 요르단 정부가 금지시켰지만, 1967년 이후에 이스라엘 정부는 통곡의 벽에서의 종교 행위는 기독교, 무슬림, 어떤 국가, 어떤 종교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각 종교, 종파의 종교의식에 간섭하지 않는다.
ⅹ. 또한 동(東)예루살렘을 예루살렘에 합병시켰는데 이곳의 성전 산(山)에는 두 개의 회교 사원이 있다. 이 두 회교사원도 회교인들이 관리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정부가 전혀 간섭하고 있지 않는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장소가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아주 거룩한 땅임에도 불구하고(유대인의 성전 터였으며, 지성소가 있던 자리임) 유대인의 그곳 안에서의 기도를 금하고 있다.
(4) 4차 전쟁
A.D. 1973.10.6
ⅰ. 제 4차 중동전쟁인 ‘욤 하키푸림 전쟁(속죄일 전쟁)’이 터졌다. 아랍 진영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ⅱ. 이스라엘은 남쪽으로 이집트, 북쪽으로 시리아의 동시 공격을 받았다. 요르단은 이 전쟁에 불참을 선언했다. 이 전쟁은 1945년 2차 대전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는 백만 이상의 병사들이 동원되었는데, 아랍군이 83만8천 명, 이스라엘군이 27만5천 명이었다.
ⅲ. 이스라엘은 방심하여 급습을 당했고 병력과 무기 면에서 희망이 없을 정도로 열세였다. 수에즈운하를 따라 설치되어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자랑하던 바르 레브 선(Bar Lev Line)은 이집트의 기습공격에 힘없이 무너졌으며, 속죄일을 맞아 손을 놓고 있던 병사들은 전선 곳곳에서 패퇴하여 전사하였다. 골란고원에서는 시리아의 탱크공격에 곤욕을 치렀다.
ⅳ.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은 미국의 무기보급과 첩보위성의 도움을 받아 결국 시리아와 이집트를 격퇴했다. 골다 메이어 여(女)총리는 전쟁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도 문책을 당했다.
ⅴ. 그러나 이 전쟁은 중동에 평화의 싹이 돋는 계기가 되었다. 아랍제국의 선두에 서서 이스라엘과 싸운 끝에 상처만 얻고 빚더미에 눌리게 된 이집트가 미국의 도움을 받고자 이스라엘과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ⅵ. 이스라엘 역시 당시 300만의 작은 인구와 경제규모로 1억5천만의 대아랍제국을 계속 상대하기는 힘이 부쳤다. 특히, 아랍제국 중 인구 규모나 전력 면에서 최강인 이집트와의 평화는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을 촉진시켜 대(對)아랍 투쟁에서 이스라엘을 한결 수월케 하였다.
A.D. 1977
ⅰ.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의 초청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국회에서 연설함으로 양국 간의 국교 수립을 하였다.
ⅱ.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통한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독립 쟁취는 어렵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A.D. 1979.3.26
ⅰ. 미국의 지미 카터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캠프데이비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ⅱ. 이 평화조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1982.4월 유일하게 석유가 나던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5) 5차 전쟁
A.D. 1982.6
ⅰ. 이스라엘은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강력한 PLO집단이 레바논 남부에 거점을 두고 총격과 로켓공격과 테러행위를 반복하자,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ⅱ. 이스라엘은 이곳에 있는 PLO조직과 하부 군사조직을 제거하였으나, 다른 한편 수많은 양민이 이스라엘 군의 방관 아래 레바논의 팔랑헤당 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ⅲ. 이스라엘은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인해 1985년 초까지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일부 군대를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6)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대봉기)
A.D. 1987
ⅰ. 팔레스타인 민족의 이스라엘군 통치에 항거하는 대봉기, 곧 인티파다가 폭발하였다.
ⅱ. 팔레스타인인들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 군의 점령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요구했다.
ⅲ. 이때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은 이스라엘군 병사에게 돌을 던지며 대봉기에 앞장서 싸웠으며, 이스라엘군은 무자비한 총격으로 진압함으로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ⅳ. 이스라엘의 양심적 인사들은 이 일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도 비난이 끊이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지도세력은 분열되어 방향을 잡지 못했다.
(7) 평화 협정
A.D. 1991 마드리드에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이 참석하는 평화회담이 열렸으며,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협상이 마련되었다.
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오슬로 평화 협정
A.D. 1993.9
ⅰ. 이스라엘(라빈)과 팔레스타인(아라파트)은 계속되는 폭력사태를 중지시키기 위해 “땅과 평화를 교환한다”는 내용의 오슬로협정을 워싱턴에서 맺었다.
ⅱ. 그 내용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를 수립한다는 것과, PLO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박은 두 민족 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간다는 것이었다.
A.D. 1994.5.4
ⅰ. 이스라엘 군은 오슬로 평화협정에 따라 27년 만에 여리고에서 철수를 시작했고, 1995년 말 요단강 서안 지구에서 이스라엘 군이 추가로 철수하고, 자치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이 1996.1 실시되었다.
ⅱ.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은 30년 가까운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가자에 돌아와 자치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현재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43% 지역에서 철수했고, 이 지역에 팔레스타인 자치가 실시되고 있다.
②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 협정
A.D. 1994.7
ⅰ.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46년간의 전시상태를 종식하고 양국 간의 평화를 선언했다.
ⅱ. 실로 이것은 이집트와 국교수립 후 15년만의 일이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평화협정 이후에 많은 분야에서 협력을 하고 있다.
③ 이스라엘과 시리아
A.D. 1995.12과 1996.1
두 차례의 회담이 양국의 대사급으로 워싱턴에서 가진 바 있다.
④ 다자간 협상
A.D. 2002.1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회의는 36개의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안보, 수자원, 경제개발 등의 공동 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8) 이스라엘과 PLO 간의 평화협정 결렬
A.D. 1993.9
오슬로 평화협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동(東)예루살렘 문제로 평화협정은 암초에 부딪히게 되었다.
A.D. 2000.7
ⅰ. 캠프데이비드 협상에서 이스라엘의 바락 총리는 동(東)예루살렘 문제의 의제 상정조차 거부하던 과거의 강경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동(東)예루살렘 주변의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에 대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주권 인정과 동(東)예루살렘 시가지 일부의 행정적인 관할권 인정을 제안했다.
ⅱ. 이 제안에 의하면 구(舊)예루살렘 시가지 내부의 무슬림ㆍ기독교인 아랍인 거주 지역은 팔레스타인 측이 현재 상태보다 확대된 행정자치권을 가지며, 동(東)예루살렘을 포함한 전체 예루살렘 시(市)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국의 수도로 분할된다. 또한 성전 산(山)의 경우는 지표면은 PLO측이 주권을 행사하고, 그 밑 부분은 이스라엘이 주권을 행사토록 하는 것이었다.
ⅲ. 이에 대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성전 산 공유를 거부했으며, 여기에서 양측의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ⅳ. 라빈의 후임으로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가 되자 그는 여론을 의식하여 예루살렘에 대해 강경한 정책으로 선회했다. 그는 동(東)예루살렘을 포함한 전체 예루살렘 시는 통일된 상태로 이스라엘의 주권 하에 있어야 하며, 이를 분리하거나 팔레스타인 측에 절대 양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A.D. 2000.9
ⅰ. 샤론 총리가 동(東)예루살렘의 민감한 장소인 성전 산을 방문하자, 엘-악사(성전 산) 인티파다가 폭발되었다.
ⅱ. 엘-악사 인티파다는 1987-1991년 사이에 일어난 제 1차 인티파다보다 훨씬 격렬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긴장은 1982년 이래 최고조에 달했으며 양측 간 유혈 충돌로 인해 400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ⅲ.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상호간에 국경선이 없이 생활하다 보니 감정 충돌이 더욱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실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만이 완전한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두 민족 간에 가장 문제가 되는 쟁점은 무엇인가?
□ 동(東)예루살렘 문제
ⅰ. 팔레스타인은 수도를 동(東)예루살렘으로 하고, 요단강 서안과 가자 전 지역에 외교와 국방권을 행사하는 독립국가 창립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들에게 동(東)예루살렘의 성전 산(山)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공언했었다. 따라서 그들은 동(東)예루살렘 지역 내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비롯한 점령지역 전역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요구한다.
ⅱ. 한편 이스라엘의 입장도 확고하다. 특히 동(東)예루살렘은 현재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유대교의 성지이므로 내줄 수 없다. 또한 동(東)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산과 두 회교사원은 팔레스타인과는 상관없이 1967년까지 요르단이 통치했었으며, 전 세계 회교인들의 성지이므로
그곳에 팔레스타인 국기를 꽂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ⅲ. 동(東)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게 각각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a. 이스라엘
ⅰ. 동(東)예루살렘의 성전 산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모리아 산이다.
ⅱ. 이 산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창22:17- 18)는 위대한 약속의 말씀을 받는다.
ⅲ. 솔로몬은 바로 이 산에 성전을 건립하였으며, “자기를 사로잡아 간 적국의 땅에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옵시며”(왕상8:48-49)라고 기도했다.
ⅳ. 이 후 예루살렘과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삶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망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시절에도 항상 예루살렘 쪽을 바라보며 기도했으며, 예루살렘을 ‘시온’으로 부르며 그리워했다.
ⅴ.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은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이곳저곳 유리 방랑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과 기도 속에 살아있었다. 그들은 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면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 가게 해달라고 간구해 왔다. 나아가서 ‘이스라엘 땅’과 함께 ‘예루살렘’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에 큰 추진력을 제공했던 시온주의 운동의 하나의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이 특별한 종교적ㆍ민족적 정서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ⅵ. 1967년 6일 전쟁이 끝난 며칠 후 벤구리온 전 총리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 처리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나 시리아의 골란고원, 그리고 요단강 서안 지구에서도 철수할 수 있으나 단, 예루살렘은 유엔에서 어떻게 결정하든 우리의 주권 하에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3천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국민 대부분은 예루살렘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러한 견해에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ⅶ. A.D. 1980.7.30 이스라엘은 국회에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통과시키고 수도를 정식 이전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은 하나로 통일된 이스라엘의 수도이며, 대통령ㆍ국회ㆍ행정부ㆍ대법원이 상주하는 곳으로써, 모든 종교적 성지가 보호되고 이 성지에 대한 종교인들의 정서와 신앙이 존중되며, 자유로운 접근과 종교 활동이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ⅷ. 이스라엘 정부는 동(東)예루살렘의 병합과 입법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이 지역에 주택을 건설하고 유대인을 이주시켜 인적ㆍ물리적인 유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ⅸ. 1967년 이후 병합된 점령지역 1/3 가량의 땅을 팔레스타인 지주로부터 몰수하여 3만5천 동의 주택을 새로 지어, 이곳에 15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이주시켰다. 이러한 신규 주택촌 건설과 함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고 있는 기존주택에 대해서는 개축과 신축을 금지함으로 자연적으로 이들이 이곳을 떠나도록 유도하고 있다.
b. 팔레스타인
ⅰ. 예루살렘(아랍어 Al-Quds)은 무슬림에게도 중요하다. 예루살렘은 이들에게 메디나, 메카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성지이다.
ⅱ. 이슬람이 시작된 처음 16개월은 무슬림 역시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었으나 무하마드의 예언에 의해 메카로 바뀌었다(꾸란2장 142-150).
ⅲ.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성지가 된 것은 무하마드와 얽힌 전승에서 기원한다. 꾸란에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전능하신 분(알라)께서 그의 선지자(무하마드)를 밤중에 거룩한 사원(메카)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사원(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Qur'an, Sura17:1)라는 구절이 있다. 이 ‘가장 먼 곳에 위치한’이라는 구절은 아랍어로 ‘엘-악사’인데, 이슬람에서는 이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해석한다.
ⅳ. 또한 무하마드의 어록집인 하디스(Hadith)에 무하마드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에 폐허가 된 솔로몬 성전으로 가서 여러 선지자들(아담,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그리고 예수 등)과 함께 기도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져 온다.
ⅴ. 바로 이러한 전승과 연관된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의 칼리프 압델 말리크(685-705)와 그의 후계자인 알-왈리드에 의해 바위의 돔인 황금돔 사원(691)과 엘-악사 사원(709-715)이 세워졌다.
ⅵ. 따라서 동(東)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요르단,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회교 아랍 국가들도 회교 성지(성전 산에 있는 회교사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ⅶ. 이스라엘은 지난 94.10. 요르단과의 평화협정에서 예루살렘의 회교 성지에 대한 요르단의 지위를 보장한다고 명문화하였다. 요르단은 예루살렘의 회교 성지에 대한 권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다짐한다. 이에 대해 사우디, 시리아 등 여타 아랍제국이 반발하고 있다.
ⅷ. 한편 동(東)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중요한 곳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 십자가에 달리셨던 골고다 언덕,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성전산 등 중요 성지가 이곳이 있기 때문이다.
ⅸ. 오늘날 국제사회는 예루살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유엔 안보리도 1980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실질적으로론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예루살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의 보장.
ⅰ. 1949년 독립전쟁 때 발생했던 70만 명의 토착 팔레스타인 난민이 지금 대략 500만 명(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기타 아랍국가들, 기타 국가들)이 되었는데, 이들의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
ⅱ.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가 750만 명인데, 그 중에 560만 명이 유대인이고, 150만 명이 아랍계 이스라엘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ⅲ. 오늘날 팔레스타인은 자치정부이긴 하지만 국제세계에서 아직 국가로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오늘날 일부의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진영은 1947년의 분할 안(案)으로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지만,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같은 요구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미 인구 이동으로 영토와 국경선이 변했기 때문이다.
13.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의 전망
ⅰ. 중동 국가들의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상황은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 사람의 독재자에 의한 강압적인 통치는 미래가 불투명하다.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등도 없다. 아랍의 경제는 발달된 산업이 없고, 중산층이 적다.
ⅱ.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산유국에서도 부(富)가 일부 소수 그룹에 편중해 있어서 백성 전부가 그러한 부(富)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아랍 국가들은 남한의 국민 총 생산량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ⅲ. 이런 가운데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일반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할 희생양을 계속 설정해 둘 필요성이 있다. 그들은 가장 쉽고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국민들의 종교적인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한다. 따라서 오늘날 이란, 이락, 리비아, 일부 팔레스타인 등은 지금도 계속하여 유대 민족의 말살의 필요성을 드러내 놓고 주장하고 있다.
ⅳ. 예컨대 1990년 걸프 전쟁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합병하려고 침공한 아랍국가 사이의 전쟁이지만 사담 후세인은 텔아비브 주변에 39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또한 이란은 이스라엘에게 피해를 주기 1,300km 이상 되는 살상용 중장거리 미사일을 북한 등지에서 구입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약 1,300k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ⅴ. 한편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세계의 다른 나라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만약 남ㆍ북한 간에 전쟁이 일어나 북한이 남한을 정복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남한 주민을 몰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을 죽이거나 유럽 등지로 내쫓을 것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을 멸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여유로운 태도를 취할 수가 없다.
14. 메시아사상과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관계
ⅰ.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을 메시아운동의 완성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1948년의 이스라엘의 독립과 일치시켜 보는 시각이다.
ⅱ.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메시아운동과 시온주의운동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곧, 이스라엘의 건국은 메시아운동의 결과는 아니다.
(1) 메시아운동
ⅰ. 메시아운동이란, 과거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생활할 때 이사야ㆍ예레미야ㆍ에스겔 등의 예언을 통해서 귀향과 회복의 꿈을 품었던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구원의 메시아를 보내서 이스라엘에게 화평과 아름다운 세계를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다. ⅱ. 이것은 온전히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의 메시아사상이다. 이러한 꿈은 헤르쯜 당시에도 일부 종교적 유대인들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사상이었다.
(2) 시온주의운동
ⅰ. 헤르쯜의 시온주의운동은 메시아사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 반셈족주의), 곧 반유대주의운동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다.
ⅱ. 유대인들은 떠돌아다니는 수 천 년 동안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와 미움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이유로, 또한 뛰어난 상술을 지닌 하층 상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핍박을 받았다.
ⅲ. 따라서 헤르쯜의 ‘시온주의운동’은 철저하게 유럽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그로부터 불과 50년이 채 못 되어 나치가 등장하여 600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을 감행한다. 남은 유대인 생존자들은 홀로코스트에 충격을 받고 2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급거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이스라엘로의 귀향에 결정적인 촉매작용을 한 것이다.
ⅳ. 그러므로 헤르쯜의 시온주의운동은 성경적ㆍ종교적 의미의 귀향은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아의 도래에 의한 것도 아니요, 신앙적 회심에 의한 것도 아니요, 오직 살기 위한 정치적인 귀향이었으며 정치적인 운동이었다.
(3)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한 유대교 내부의 견해 차이
① 정통파 유대교인
ⅰ. 정통파 유대교인들은 하시딤(율법에 충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증거하는 증인됨에 있다고 한다(사43:10). 이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성을 세우는 것,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ⅱ. 그들의 선교적 사명의 근거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42:6) 등의 성경 말씀에 두고 있다.
ⅲ. 랍비들은 바벨론 유수와 분산의 목적도 전도로 보았다. 곧,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호2: 23)”라는 말씀과 같이 전도를 위해서 전능자가 이스라엘을 흩으셨다고 한다.
ⅳ. 사실 흩음과 전도의 관계는 창28:14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말씀에 암시되어 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ⅴ. 따라서 그들은, 1885년 피츠버그선언에서 유대이즘의 목적은 진보적인 종교들과 함께 모든 사람들 가운데 진리, 정의, 그리고 평화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ⅵ. 유대인들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라 단일신론을 보급하는 제사장이 되어 전도를 하는 종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유대인은 시온(팔레스타인)으로 복귀하는 메시아사상을 거부하고, 유대인의 흩어진 조건에서 그가 속한 국가들에게 제사장적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ⅶ. 따라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건국이 무신론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써 신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은 유대 민족국가의 재건이 유대교 율법에 의한 것도 아니고 메시아의 도래에 의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군 징집을 거부하며, 생활용어는 히브리어보다 디아스포라에서 살 때 사용했던 이디쉬를 선호하며 세속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
ⅷ. 그러나 정통파 유대교는 시온주의 사상가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홀로코스트 여파는 유대인들을 강한 시온이즘으로 흡수되게 하였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정통파의 유대교는 전도의 개념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흔히 룻1:16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말씀을 곧 잘 인용하지만, 실제로는 전도하지 않는다.
ⅸ. 그들은 누구든지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고 스스로 개종하는 것이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들은 2천년 동안 세계를 유랑하면서 그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도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다른 이방인들에게 전도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② 신정통파 유대교인들
ⅰ. 신정통파 유대교인들은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인들로서, 이스라엘의 독립과 건국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한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군 징집에도 응할 뿐 아니라 국가 권력과 군을 신성시한다. 또한 과학기술 등 현대문명을 상당 부분 수용한다.
ⅱ. 특히 이들 가운데 ‘구쉬 에무님’(Gush Emunim)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들은 소수의 민족주의적 종교집단이며, 문자적으로 ‘신자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1967년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된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가 수많은 정착촌을 건설한 주역들이다.
ⅲ. ‘구쉬 에무님’은 이스라엘 초대 최고의 랍비인 아브라함 쿡의 ‘에레쯔 이스라엘(이스라엘 땅)’ 사상에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의 회복이 하나님의 구속의 한 과정이며,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온 영토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유다 민족에게 주셨던 땅(창15:18)이므로 이 땅을 포기하는 어떠한 타협이나 외세(주로 미국)로부터의 압력도 항거하고 거부한다.
ⅳ. 따라서 이들은 점령지역에 있는 이 약속의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정착해 사는 것이 비록 국법을 어긴 것이 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명령에 의한 것이므로 우선되어야 하고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이들은 약속의 땅의 회복의 촉진이 구속 역사의 진전을 나타내는 것이며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땅을 회복하는 전쟁과 이에 동원되는 군대는 물론 무기까지 신성화한다. 이들은 이 구속의 역사를 거스르는 어떠한 타협도 용납치 않는다.
ⅴ. 최근 중동 평화협상에 요단강 서안, 가자 그리고 골란고원 등 점령지역 처리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로 이해하는 극단적인 유대 민족 종교인들이 그 갈등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③ ‘이스라엘의 회복’의 성경 예언과 무관함.
ⅰ. 오늘날 이스라엘은 내적으로는 소위 종교인들과 종교인들 사이의, 종교인들과 세속인들 사이의 갈등을 지니고 있고, 외적으로는 아랍과의 갈등에 직면해 있다.
ⅱ.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독립은 그 과정이나 결과를 놓고 볼 때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실체를 바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15. 기독교와 유대인의 관계
(1)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갈등
초대교회 시절
ⅰ. 초대교회는 핍박으로 인해 대부분 팔레스타인 밖으로 흩어졌다. A.D. 2세기 예루살렘을 제외한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있는 곳은 가이사랴뿐이었다. 초대교회 교부인 오리겐과 유세비우스는 가이사랴에서 기독교 교리를 세워나갔다.
ⅱ. 그들은 왜 유대인이 버림을 받았는지 논증했다. 그들은 유대인이 자신들의 불신앙의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의 상속권을 박탈당했으며,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요, 새 이스라엘임을 주장했다.
ⅲ. 저스틴, 오리겐,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 모든 교부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로부터 교회로 옮겨왔으며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의 몫이 남겨져 있지 않다고 했다.
ⅳ. 한편 유대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선민 유대인은 이방인과 태생부터 다르기 때문에 비록 잠시 죄악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대인은 미쉬나(구전 율법)와 탈무드, 그리고 미드라쉬(유대교 경전 해석)를 사용하여 유대교의 담을 쌓아 나갔다.
ⅴ. 이러한 신학적 배경에서 기독교와 유대교는 역사적으로 서로 대립하며 갈등을 증폭시켜 왔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 기독교인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갖고 계속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에 대하여 아무런 형제애를 느낄 수 없었다.
ⅵ. 한편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을 가리켜 ‘미님’(Minim, 분파의 뜻으로 이단을 가리키는 말)으로 불렀다. 오리겐에 의하면 5세대에 걸친 ‘미님’은 15만 명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A.D. 3세기 중엽
ⅰ.랍비 예후다가 ‘나시’(지도자)가 되면서 ‘나시’는 로마의 승인을 받은 유대인의 지도자가 되었다.
ⅱ. ‘나시’는 성전파괴 이전 산헤드린이 가졌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에게 ‘나시’의 존재는 부담스러웠다.
A.D. 324
ⅰ. 콘스탄티누스 황제(324-337)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자 교회는 유대인을 대항할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이전까지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의 핍박을 받는 종교였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 로마의 보호를 받고 유대교는 계속적인 박해를 받아야 했다.
ⅱ. 유대인의 기독교 개종은 보호되었으나 반대로 유대교로의 개종은 금지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유다인의 거주가 금지되었으며, 일 년 중 하루 성전파괴일(日)에만 예루살렘 방문이 허용되었다.
A.D. 337
콘스탄티우스 2세(337-361)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결혼을 금지시켰으며,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도록 했다.
A.D. 355
ⅰ. 줄리안 황제는 헬라의 종교를 신봉했다.
ⅱ.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유대인에게 성전 재건을 약속했다. 이 일은 기독교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유대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ⅲ. 성전 재건은 예상 못했던 천재지변으로 중단되었다.
A.D. 429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유대인의 ‘나시’를 폐지하였으며, 유대인을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A.D. 438
ⅰ. 테오도시우스 2세는 지금까지의 법을 종합화하였으며, 유대인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를 법으로 공포했다.
ⅱ.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향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가로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A.D. 8세기 초
아랍이 스페인을 공격하고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자 스페인의 유대인은 약 3백년 간 자유롭게 시, 철학, 과학뿐 아니라 유대교를 발달시킬 수 있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2)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 반셈족주의), 곧 반유대주의
ⅰ. 중세에 이르러 서방세계는 유대인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ⅱ.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며, 선민의식과 메시아사상에 집착하고, 유대교를 고집했다. 이런 연유로 중세에 유대인은 밖으로 한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사방에서 반유대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변 사회로부터 박해와 학살, 추방의 고난을 겪었다.
ⅲ. 중세교회는 유대인을 사단과 손잡은 사악한 무리라고 낙인찍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제한시켰다. 유대인은 수치와 멸시의 동의어로 여겨졌다.
ⅳ.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토지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대금업(貸金業)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대금업자 유대 상인은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표적인 예이다.
A.D. 1348-1349
유럽 인구의 삼분의 일이 흑사병으로 죽자, 유대인이 흑사병을 퍼뜨렸다는 의심을 받았다.
A.D. 1492
ⅰ.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인은 개종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비밀리에 유대 전통을 유지하기도 했다.
ⅱ. 추방당한 이들은 그리스, 북아프리카, 오스만제국 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오스만제국은 비교적 유대인에게 관대했다.
A.D. 1516
ⅰ.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유대인을 게토(Ghetto, 鑄造場)라는 구역에 격리시켰다.
ⅱ. 도시의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자 추가로 유대인 거주구역을 할당했으며 게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로써 게토는 유대인이 강제로 살게 되는 격리구역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A.D. 1655
ⅰ. 게토는 독일, 프랑스, 폴란드, 보헤미아의 도시에도 생겨났다. 비엔나의 게토에 살던 유대인은 모두 5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ⅱ. 중세 말 게토는 유럽에서 공식적인 기구가 되었으며, 유대인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에 직면하였다.
ⅲ. 그러나 주변세계와 단절된 게토에서 유대인은 자유롭게 토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자체적인 교육을 통하여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한편 게토에서의 삶은 유대인의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A.D. 16세기
ⅰ. 종교개혁은 중세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수정케 했다.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인 관용이 대두되어 갔다.
ⅱ. 프랑스혁명은 유대인에게 경제적ㆍ정치적 권위를 처음으로 부여했다. 네덜란드와 함부르크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유가 주어졌고, 1791년 프랑스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어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유다인의 권리를 법으로 인정했다.
ⅲ. 그러나 안티 세미티즘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A.D. 19세기
ⅰ. 러시아는 반유대인 법령을 제정하여 유대 공동체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ⅱ. 1881년부터 1917년까지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반유대적인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A.D. 1894
ⅰ. 프랑스의 대위 드레푸스는 프랑스의 기밀을 독일에 넘겼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드레푸스가 썼다는 편지는 처음부터 위조된 것이었다. 드레푸스는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언론은 그가 유대인임을 강조했다. 1899년 재판이 다시 열리고 그는 감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무죄는 몇 년 뒤에야 인정되었다.
ⅱ. 이와 같은 안티 세미티즘의 영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기다리든지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든지 행동할 것을 더욱 자극했다.
(3)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이중적 정서
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에게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ⅱ. 예수님은 마23장과 눅11장에서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셨다.
ⅲ. 한편 바울은 롬9-11장에서 동족에 대한 피 끓는 애정을 토로하며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11:1)고 말씀한다.
ⅳ.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비판하면서도 어떠한 형태이든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으리라는 믿음의 애정을 가지게 된다. 예컨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을 생각하면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로 미워하면서도, 그러나 다른 한편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이 그것이다.
(4)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
ⅰ.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이들은 스스로를 '예후딤 메시히임'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이 그들의 메시아임을 믿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ⅱ. 현재 이스라엘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메시아닉 쥬)이 약 5천여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각 교회는 장로(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음)가 설교와 예배를 인도한다.
ⅱ.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유대인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이란 말은 민족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개념이다. 만일 어떤 유대인이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밝힌다면, 유대인 공동체는 그를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ⅲ.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해왔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란 당연히 혐오스러운 종교로 여겨질 뿐이다. 먼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가까운 과거만 돌아봐도 나치의 유다인 학살에는 이에 동조하고침묵을 지킨 서방 교회가 있었다. 이러한 아픈 과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란 쉽지 않다.
ⅳ. 따라서 유대인 교회는 서방선교사에 대하여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유대인 선교는 이스라엘에서 말씀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선교와는 구별된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선교를 위해서는 그 지역과 주민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ⅴ.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 선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단순히 물질과 순간적인 열정으로 이 일에 뛰어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수집해야 하며 이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활동하도록 서두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5)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한 기독교인의 역사적 책임
ⅰ. 이스라엘은 독립기념일 전날을 홀로코스트(대학살)의 날로 지킨다. 그들은 자축하기 이전에 안티세미티즘의 희생제물이 된 동포를 결코 잊지 않는다.
ⅱ. 예루살렘에 있는 홀로코스트 추모관인 야드 바셈에는 그때의 생생한 장면을 사진과 기록으로 전시하고 있다. 식량이 공급되지 않은 게토에서 굶주려 죽은 앙상한 시체를 마치 장작을 쌓듯이 쌓아 놓은 사진, 구덩이에 포개어져 있는 시체, 옷을 벗긴 채 구덩이 앞에 서 있는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뒤에서 총을 쏘는 나치 군인들, 죽음의 수용소, 가스실, 생체실험, 불태워지는 시체들, 이런 끔찍한 사진들이 야드 바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ⅲ. 또한 야드 바셈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용서는 하지만 망각은 또 다른 방랑으로 가는 길이다.” 이스라엘은 젊은 세대가 혹시라도 조상들의 고난을 잊어버릴까봐 반복하여 교육을 시킨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고 하는 유대인은 우리와는 참으로 대조가 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잊고 사는 데, 그들은 용서는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결의를 한다. 우리는 용서 안 된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다 잊고 있다.
ⅳ. 역사적으로 교회와 크리스천은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해 책임이 있다. 물론 대부분 중세교회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개신교 교회도 방관자였다. 텔아비브대학 내에는 디아스포라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한 쪽에는 약간 조명을 어둡게 한 검은 벽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한 글이 쓰여 있다.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교회는 침묵했습니다.”
ⅴ. 물론 전후 독일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사죄하고 이스라엘에게 배상금과 물자를 제공했다. 독일은 전후 유대인에게 용서를 비는 뜻으로 ‘참회의 날’을 정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후 우리 민족에게 취한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ⅵ.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밖에는 도처에 안티세미티즘이 널려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유럽 여행할 때 자기 신분 밝히기를 꺼린다. 자칫 봉변을 당하기 때문이다. 히브리대학에는 유럽으로 처음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에게 티켓을 주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함부로 밝히지 말아라. 그리고 되도록 너희들끼리 이야기를 할 때도 히브리어로 하지 말고 영어로 얘기를 하는 게 좋다”라고 교육한다.
ⅶ. 유대인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선교의 대상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섬겨야 할 것이다.
첫댓글 아주 중요한 기독교 역사 자료입니다!!
신약시대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바로 파악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