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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4회 가나가와ㆍ시즈오카②
△시즈오카연수원에서 은사를 생각하며 ‘다이난코’를 연주했다.(제30권<상> ‘대산’)
태양의 시즈오카가
승리로 빛나면
민중불법의 개가가 울려 퍼진다
새로운 애칭이 탄생
2016년 11월 27일, ‘시즈오카현 태양총회’를 성대히 개최했다. ‘시즈오카현의 날’ 45주년과 ‘혼의 독립’ 25주년을 기념하는 회합이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만감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시즈오카는 세계광포의 ‘정의의 태양’입니다. ‘격려의 태양’입니다. ‘승리의 태양’입니다.”
“‘태양의 시즈오카’가 승리로 빛나면 민중불법의 개가는 말법만년에 걸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새로운 애칭 ‘태양의 시즈오카’가 탄생했다. 태양은 어떤 일이 있어도 빛난다. 먹구름이 자욱한 날에도 구름 위에서 자신의 사명에 꿋꿋이 살아가듯이 불타오른다. 폭풍우가 걷히면 찬연히 어둠을 비추고 만물에 희망의 빛을 보낸다.
‘태양의 시즈오카’는 민중승리의 상징이고 어떠한 고난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사제승리를 대선언하는 애칭이다.
사제의 원점은 영원불멸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에는 종문의 총본산 다이세키사(大石寺)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학회는 황폐해진 종문을 외호하고자 정성을 다했고 크게 흥륭시켰다. 그러나 학회의 크나큰 발전을 질투한 닛켄은 그 대은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세계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불의불칙(佛意佛勅)의 단체인 학회의 파괴를 꾀했다.
그러나 광포를 파괴하려는 책략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미 총본산은 니치렌불법과 동떨어진 방법(謗法)의 산으로 변했다. 법화경에서 설한 ‘환착어본인(還著於本人, 도리어 본인에게 돌아온다,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려는 자는 도리어 자신이 그 과보를 받는다)’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무참한 모습이다.
그러나 총본산이 방법의 산이 되어도 하계강습회 등에서 새긴 창가사제의 원점은 영원불멸하다.
정사(正邪)가 명백해짐으로써 학회의 모습과 이케다 선생님의 행동이 더한층 빛을 발해 ‘시즈오카에 사제의 혼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긍지 드높은 역사를 구축했다.
총본산에서 엮은 사제의 드라마는 수없이 많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제15권 ‘개화’다.
1971년 여름, 총본산에서 하계강습회를 개최했다. 8월 5일, 근처에 있는 아사기리고원에서 세계잼버리를 개최하던 보이스카우트에게서 ‘태풍으로 위험하니 참가자 6000명 정도를 다이세키사에 대피시킬 수 있느냐’는 요청이 있었다.
총본산에는 이미 강습회에 참가한 고등부원 7000명이 있었다.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신이치는 그 자리에서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종무원에 그 의향을 전했다.
신이치는 태풍으로 흠뻑 젖었을 보이스카우트 멤버들을 위해 샤워시설과 담요를 준비하도록 지시한 다음 자신도 서둘러 매점으로 가서 수건을 모두 구입했다. 보이스카우트 제1진이 도착하자 신이치는 따뜻하게 말을 건네며 수건을 나누어주었다. 또 멤버가 모여드는 대강당 주변에는 환영의 의미로 모닥불을 피우고 영어를 할 수 있는 고등부 멤버에게 통역을 도와줄 수 있도록 요청했다.
마침 그때 고등부는 전국부원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담당간부가 통역 멤버를 모집하자 150명 정도가 용기 있게 손을 들었다.
대강당 로비에 탁자와 의자로 급조해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신이치를 중심으로 청년부 간부와 진행요원, 고등부원이 하나가 되어 수용할 태세를 갖추었다. 실로 ‘사제일체(師弟一體)’의 모습이다.
그리고 음악대와 고적대도 ‘환영연주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진두지휘하는 신이치의 모습을 보고 모두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솟아났다.
대피하러 온 보이스카우트 멤버가 잇따라 도착했다. 고등부와 수송반(현재 창가반)은 생기발랄하게 움직이며 식사를 나누어주었다. 일단락되자 여기저기서 영어로 담소를 나누는 유대가 넓혀졌다.
불안해하며 대피하러 온 보이스카우트 소년들도 같은 세대의 고등부원과 금세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고 새로운 만남에 볼을 붉히기도 했다.
이튿날 보이스카우트 멤버가 떠날 때까지 신이치를 선두로 모두 단결해 진심 어린 대응을 이어갔다.
헤어질 때 보이스카우트 일본연맹의 담당자 한 사람이 신이치에게 달려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우리는 외국인과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전에 더욱더 국내에서 이해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창가학회에 대해서입니다.
이번에 우리는 폭풍우라는 어려운 사태를 만나 여러분의 진심 어린 마음과 인간성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따뜻한 우정에 싸여 보낸 하룻밤에 야마모토 회장의 호의를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우정의 불꽃을 꺼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제15권 ‘개화’)
‘개화’에는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으로 어려움에 놓인 벗에게 격려의 빛을 보내는 창가 사제의 숭고함과 불법이 추구하는 인간주의의 진수가 담겨 있다.
시즈오카에 보낸 지도 - 후지산처럼!
(‘시즈오카 건아의 노래’에 담긴 진심을 털어놓는 장면)
신이치는 가사 첫머리에 후지산을 노래했다.
거기에는 ‘후지산처럼 거센 바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당당한 신념의 사람이 되어라!’ ‘후지산처럼 하늘 높이 우뚝 솟은 고귀한 인격의 사람이 되어라!’ ‘후지산처럼 자비의 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감싸 안는 위대한 경애의 사람이 되어라!’라는 시즈오카 동지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2008년 11월, 신이치는 신시대 제1회 시즈오카현 청년부총회를 기념해 이 노래를 수정했다. 2절의 ‘세계의 벗이’를 ‘정의의 동지가’로, 3절의 ‘세기의 공덕’을 ‘사제의 진열’로, 마지막 부분의 ‘자 춤춰라’를 ‘자 이겨라’로 바꾸고, 시즈오카 건아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했다.(제29권 ‘역주’)
누마즈지부 결성대회
1960년 11월 7일, 야마모토 신이치는 누마즈시공회당(산업회관)에서 개최한 누마즈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했다.(제2권 ‘용무’)
모치하라 다케시 지부장은 인사하러 단상에 올랐을 때 준비한 원고를 찾지 못해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신이치의 성원에 힘입어 힘껏 포부를 말했다.
지도에 나선 신이치는 ‘진실한 사람’인 모치하라를 존경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으로서 중요한 것은 말을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생각하는 진심이며 성실함입니다.
학회의 최고 간부인 여러분은 모두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하십니다만 그렇게 처음부터 이야기를 잘하시는 분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 좌담회나 여러 회합에서 어떻게든 동지를 격려하고 불법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동안 10년, 20년이 흘러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훌륭히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머지않아 모치하라 지부장도 틀림없이 당당하고 논리정연하게 감명 깊은 지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서투르다고 비판하지 말고 서로 보완하고 지키면서 이 누마즈지부를 공덕에 가득 찬 지부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치의 진심 어린 말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던 모치하라는 ‘나도 선생님처럼 철저히 동지를 지키자’고 굳게 맹세했다.
제8권 ‘보검’에는 1963년 7월 8일, 신이치가 참석한 후지노미야회관 개관식과 시즈오카 본부 결성대회의 모습을 그렸다.
‘보검’에서는 타락한 종문 승려들의 실태와 학회원에 대한 거만한 행동 등을 시즈오카의 리더가 신이치에게 보고했다. 신이치는 학회원을 지키고자 직접 역승(役僧, 사무를 처리하는 승려)에게 항의하고 종문에 깃든 ‘악’과 싸운다.
신이치가 가나가와현에 있는 하코네연수원에서 개최한 ‘고텐바가족우호회’에 참석한 날은 1975년 9월 28일이었다. 제22권 ‘파도’에서 소개한 이 회합에서 신이치는 이렇게 멤버들을 격려했다.
“인생에는 기쁜 일도 있지만 괴롭고 슬픈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이나 경제고 등 여러 가지 시련이 계속 이어진다 해서 그것이 곧 불행으로 이어 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좋아, 지지 않겠다! 반드시 승리해 보이겠다’는 강한 마음으로 희망에 불타 전진하는 사람에게는 고난마저 환희가 됩니다.
그런 강한 마음을 기르고, 도전과 환희의 생명을 용현하는 근원적인 힘이 제목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 중의 대환희이니라’(어서 788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고텐바 지역 여러분이 모이셨습니다. 저는 고텐바라는 지명을 들으면 어쩐지 어전이나 궁전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실 여러분 가슴속에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최고의 궁전이 있습니다. 그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바로 남묘호렌게쿄이며 신심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보은하는 삶을 살아가는 속에
인간이 나아가야 할 참된 길이 있다
선사와 은사의 유덕을 현창
시즈오카 광포에서 스승과 수많은 원점을 새긴 곳이 바로 아타미시에 있는 도카이연수원(훗날 시즈오카연수원)이다. 이곳은 시즈오카뿐 아니라 각지의 벗에게도 추억이 깊은 장소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제1차 종문사건을 전후로 신이치가 동지를 격려하고 인간주의 철학의 빛을 보낸 ‘일대 거점’이기도 했다.
제14권 ‘대하’에서는 도쿄미래회 제3기의 결성식도 언급했다.
제24권 ‘어머니의 시’에서는 1976년 9월, 신이치가 이 연수원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 해 3월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의 유덕을 기리고자 ‘마키구치원(牧口園)’을 개원했다. 9월 방문 때에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흉상 제막식(15일)을 거행했다.
남자부, 대학부 연수에서는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을 끝까지 선양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대성인불법과 어본존 그리고 어서를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불법이 훌륭하고 어본존이 위대할지라도 그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무(無)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법은 스스로 홍통되지 않는다. 사람이 법을 홍통하는 고로 인법(人法)이 함께 존귀하니라.’(어서 856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법을 가르쳐주신 스승을 찬탄하고 스승에게 보은하는 삶을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데에 인간의 참된 길도 있습니다.”(제24권 ‘어머니의 시’)
이튿날 16일, 신이치는 마키구치원에서 개최한 도다 선생님의 시비(詩碑) 제막식에 참석했다.
시비에는 ‘묘법(妙法)의/ 광포 여정은/ 멀지만/ 서로 격려하며/ 다 함께 나아가노라’ 하고 1955년 새해를 맞아 읊은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사제의 유대, 그리고 동지의 유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했다.
홀로 서지 않으면 광선유포를 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또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가자고 단결하지 않으면 광선유포를 확대할 수 없다.
도다는 그런 중대한 성업(聖業)을 완수하는 창가학회라는 교단을 ‘창가학회불(創價學會佛)’이라고 선언했다.
대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총하여 니치렌(日蓮)의 제자 단나 등은 자타피차(自他彼此)라는 마음 없이 수어(水魚)라고 생각을 해서 이체동심(異體同心)이 되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이라고 하느니라.”(어서 1337쪽)
결국, 물과 물고기라는 마음으로 일치단결해 신심에 힘쓸 때, 생사일대사의 혈맥 다시 말해 묘법의 혈맥이 유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가학회불’의 근본조건은 광선유포를 위한 이체동심의 단결에 있다. 따라서 도다의 이 시는 모든 동지가 영원히 마음속에 새겨야 할 지침이기도 하다.”(제24권 ‘어머니의 시’)
신이치는 1978년 새해 수뇌간부와 함께 시즈오카연수원으로 갔다. 그 해는 마키구치 신생님과 도다 선생님이 군부정부의 탄압으로 체포되어 투옥된 지 35년 그리고 신이치가 쉰 살을 맞은 해였다.
이 방문을 묘사한 제26권 ‘법기’에는 스승의 진심이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연초에 시즈오카연수원에 있는 마키구치원을 방문해 순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엄연히 권력의 마성에 끝까지 맞선 선사와 은사를 추모하며 한 해의 승리를 맹세하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다.
목숨을 건 격투에 이은 격투 속에서 신이치는 늘 마키구치와 도다의 옥중투쟁을 마음속에 그리곤 했다. 특히 마키구치는 고령인데다 영양실조로 괴로워하면서도 심문 당하는 자리에서 군부정부의 정신적 지주인 국가신도의 잘못을 당당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불법의 정의를 끝까지 외치고 감옥에서 서거하셨다.
신이치는 늘 자신에게 말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장렬한 투쟁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 멀었다! 사자후와 같은 창제로 무한한 힘을 불러일으켜 용맹 과감하게 싸우자. 더욱, 더욱, 더욱!’”
신이치는 그 해 4월 20일, 이토평화회관 개관식에 참석해 ‘확신이 바로 신앙의 근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제27권 ‘정의’) 또 지도 마지막에는 힘차게 이렇게 말했다.
“학회의 강함은 전 회원이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대확신을 계승한 데 있습니다. 그 ‘불법의 정도’를 걷는 우리에게 공덕의 햇살이 찬연히 비추지 않을 리 없습니다.
승부는 일생입니다. 또 삼세(三世)의 생명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지켜봐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이 선언하고 전진합시다!”
개관식 날에 당시 이토지역의 지역부인부장이던 하야시 사나에 씨(이즈겐류현 현부인부 주사)에게 이케다 선생님이 시를 써서 선사했다.
“묵묵히/ 나아가는 공덕/ 영광스러운 나날”
시에 담긴 스승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한 사람 또 한 사람 동지를 격려했다.
하야시 씨는 “개관식을 개최하고 1년 뒤, 선생님이 회장을 사임하셨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놀라고 분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선생님과 함께 묵묵하게 꿋꿋이 나아가자’고 맹세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토에도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휘몰아쳤지만 하야시 씨와 멤버들은 다 함께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제자의 길을 나아가자고 외쳤다. 시즈오카연수원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태연자약하게 지휘하는 광포 스승의 모습을 눈과 마음에 새겼다.
하야시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시즈오카의 땅에서 미래의 학회를 위해 끊임없이 희망을 발신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사제직결로 정의의 대화를 넓히겠습니다.”
빛나는 무대 - 시즈오카연수원
시즈오카연수원(옛 도카이연수원)은 1971년, 마키구치 선생님 탄생 100주년의 가절에 개원했다.
1976년에는 부지 안에 ‘마키구치원(牧口園)’을 개원했다. ‘창립의 뜻’ ‘학회정신’ ‘후계의 제자’ 등 마키구치 선생님의 글씨를 새긴 비석이 이곳을 방문한 멤버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케다 선생님이 중국의 문호 바진 씨와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이 연수원이다. 1980년 4월, 봄이 한창인 정원에서 중등부합창단이 합창으로 환영하고, 회담에는 현대 중국 문학의 어머니 셰빙신 씨도 동석했다. 각종 그룹의 모임을 개최하는 등 수많은 사제의 원점을 새긴 장소다.
정법정의를 관철
이케다 선생님은 시즈오카가 등장하는 ‘어머니의 시’ ‘법기’ ‘정의’에서 군부정부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정법정의(正法正義)를 외친 선사(先師) 마키구치 선생님과 은사 도다 선생님의 투쟁을 거듭 적었다.
“신이치는 ‘광포 제2장’을 맞았을 때부터 세계 광선유포의 길을 열기 위해 모든 회원이 선사 마키구치, 은사(恩師) 도다 조세이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하게 느꼈다. 선사와 은사의 정신은 전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광선유포에 온몸을 바치겠다는 결의다.
니치렌 대성인의 정법정의를 관철하는 자비와 용기의 신심이다.
구원의 맹세로 맺어진 두 사람의 유대는 순난 속에서 금빛 광채를 발하며 창가(創價) 사제의 길을 영원히 비췄다.
마키구치와 도다가 관철한 이 사신홍법(死身弘法)의 정신이 미래 영겁토록 맥동해야만 창가학회의 혼은 계승되고 광선유포의 청류는 대하가 되어 넓혀진다. 신이치는 그렇게 통감했다.”(제27권 ‘정의’)
당시 종문의 사원은 어강(御講) 등에서 주지가 학회에 대한 비방을 되풀이했다. 일부 주간지도 학회를 중상하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교활한 ‘반역자 무리’가 암약하고 있었다. 신이치는 학회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승속화합(僧俗和合)을 위해 종문 측과 거듭 대화했다.
신이치의 분투로 학회와 종문은 화합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반역자의 참언에 놀아난 종문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학회원을 탈회시키고 단도(檀徒) 만들기에 열을 올리는 말사(末寺)도 나타났다.
“신이치는 ‘지금이 바로 회원 한 사람 한사람의 가슴속에 확고한 신심과 광포의 사명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는 창가의 사제정신을 단단히 세워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제27권 ‘정의’)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정신을 거듭 외친 까닭은 그러한 배경과 신이치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치의 투쟁은 계속된다.
회장을 사임하고 이틀 뒤 1979년 4월 26일, 신이치는 시즈오카연수원으로 갔다. 제30권(상) ‘대산’에는 그 심정이 “21세기를 향해 크게 비약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순교한 선사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혼을 새긴 이곳 연수원에서 사색하자고 생각했다.” 하고 씌어 있다.
나아가 “야마모토 신이치는 시즈오카연수원에서 세계평화를 추진하기 위해 각국 지도자·지성인과의 교류, 그리고 문명·종교 간의 대화를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를 깊이 사색했다.”(제30권<상> ‘대산’)
광포 스승의 새로운 투쟁은 시즈오카에서 시작됐다. 신이치는 먹구름 위에서도 언제나 불타오르는 태양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따뜻한 빛을 끊임없이 보내는 태양처럼 시즈오카에서 차대를 비추는 희망의 빛을 보냈다.
다이난코(大楠公)
신이치는 시즈오카연수원에서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최악의 사태를 맞았을 때를 떠올렸다. 떠나는 사람도 있는 가운데 신이치는 글자 그대로 고군분투하며 은사를 섬겼다.
그런 은사가 1951년 1월 6일, 모든 후사를 의탁했다. 젊은 신이치의 뇌리에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큰아들 마사쓰라 부자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떠올랐다.
신이치는 도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절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일생을 후회 없이 선생님께 바치겠노라는 각오만큼은 이미 하고 있습니다. 이 각오는 또 앞으로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제30권<상> ‘대산’)
그로부터 28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신이치는 시즈오카연수원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곡은 ‘다이난코(신록 우거진 사쿠라이)’였다.
신이치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기로 했다.
“사랑하고 신뢰하는 그대를 위해, 또 21세기의 대활약을 기원하며 이 곡을 보냅니다.”(제30권<상> ‘대산’)
이렇게 말하고 신이치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리며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제자의 성장을 바라는 일심으로 혼을 담아, 때로는 힘차게 연주를 이어갔다.
‘일어서라! 내 제자여, 우리 동지여 용감히 나아가라! 그대들이야말로 신이치이기에!’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제30권<상> ‘대산’)
제30권(상) ‘자복’에서도 신이치가 1979년 섣달 그믐날과 1980년 새해를 시즈오카연수원에서 보낸 일을 언급했다.
“원단 아침, 신이치는 시즈오카연수원에서 깊이 기원하면서 ‘평화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세계광선유포를 위해 더욱더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하자’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제30권<상> ‘자복’)
용감히 나아가라!
그대들이야말로 신이치이기에!
시즈오카문화회관
회장을 사임하고 1년이 지난 1980년 5월 12일, 신이치는 시즈오카문화회관에서 남자부부장회에 참석(제30권<상> ‘웅비’)했다. 이튿날인 13일에는 이 회관에서 자유근행회를 개최하고 14일에 도쿄로 돌아왔다.
4월 29일부터 나가사키에서 시작된 반전공세의 ‘제1막’은 시즈오카에서 일단 막을 내렸다. 그동안 신이치가 격려한 동지는 15만명이 넘는다.
“모든 벗의 가슴에 환희와 용기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모두가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가는 창가사제의 대도(大道)를 끝까지 걸어가겠노라고 서원했다.
냉혹하고 무참한 악승들과 반역자 무리가 꾸민 모략에 반격하는 반전공세(反轉攻勢)의 봉화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제30권<상> ‘웅비’)
‘시즈오카편’ 마지막에 신이치가 시즈오카문화회관에서 청년에게 외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광선유포의 후계를 부탁한다!”
“지금이야말로 신심수행의 노고를 잊으면 안 된다!”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사회, 직장의 승리자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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