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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7코스를 벌써 3번째 걷고 있습니다.
2015년 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그리고 이번에 또 한 번.
이번에 간 것은 100인 원정대 8차 트레킹에 불참하여
보충 트레킹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매번 참석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100인 원정대 신청을 하였으니
그 죄값을 치러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스스로에게 책임감을 입증하여 무책임한 인간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보고자 함입니다.
집에서 그 머나 먼 가양역까지 근 2시간에 걸쳐 도착하였습니다.
3번 출구로 나와 가양대교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 다리를 건넙니다.
어제와 그제 그렇게 맑고 깨끗하던 하늘은 어디로 가고
오늘의 하늘에는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정체 모를 부유물이 뿌옇게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리 아래 올림픽 도로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다리 위에도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며 소음과 매연을 뿜어냅니다.
서울둘레길 전 구간 중에 최악의 구간입니다.
서울둘레길 3코스에도 광진교라는 다리가 있지만
그 다리와 이 다리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악조건을 무릅쓰고 다리를 거지반 다 건널 무렵이었습니다.
아뿔싸!.....................난 주것따!...............................
스탬프를 안 찍었던 것이었습니다.
저 빌어먹을 다리를 다시 건너 스탬프를 찍고
또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 니미럴....
그냥 가 말어. 그냥 가면 스탬프 하나 찍자고 나중에 또 와야 되잖아. 염병...
망설임 끝에 하는수 없이 스탬프 찍으러 돌아갑니다.
돌아와 찾아보니 빨간 우체통은
가양대교 오르는 긴 계단 옆에 살포시 놓여있었습니다.
에라이 망할 우체통, 스탬프 꽝꽝 찍습니다.
죄 없는 우체통은 내 한심한 기억력 대신 수난을 당합니다.
한강 자전거길을 경유, 난지 나들목을 건너 메타세콰이어길을 걷습니다.
일군의 찍사들이 길 가운데 삼각대를 설치하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설마 저 찍사들이 미친 척
빨간 가방 둘러메고 엉덩이 씰룩거리며 걸어가는
이 못난 작자를 사진에 넣지는 않겠지라고 애먼 상상을 해봅니다.
하늘공원에서는 억새축제가 한창이라
맹꽁이 전기차가 쉴새 없이 관람객을 실어나르고 있습니다.
꽃으로 수놓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거대한 월드컵 경기장을 보며 담소정에 닿습니다.
담소정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관목이 자라고 있는데 누렇게 변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담소정은 말 그대로 담소하기 좋은 정자입니다.
이제 불광천을 얼마간 따라갑니다.
자전거는 달리고 사람들은 걷는데 개천의 물은 느리기만 합니다.
개천에는 팔뚝만한 붕어가 유유히 유영하다가 뭐에 놀랐는지
딱 한 번 몸부림 치자 가라앉았던 침전물이 폭발한 듯 떠오릅니다.
저런 곳에서 붕어가 살다니 붕어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불광천을 나와 증산마을을 잠시 지나면 이윽고 두 번째 우체통을 만납니다.
이제부터 진짜 둘레길 다운 둘레길을 걷습니다.
봉산은 비록 낮은 산이지만 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은평구 주민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귀한 산입니다.
봉산에는 능선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져 있고
군데군데 체육시설과 정자, 벤치 등 쉼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높낮이가 거의 없는 능선을 룰루랄라 걸어
드디어 보충 트레킹 인증 장소인 봉수대에 도착합니다.
비교적 너른 이곳에는 봉수대와 봉산정이 서있고
북쪽으로는 북한산 서측 경사면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인증사진을 찍고 길을 재촉해 이제는 벌고개 도로를 건너 앵봉산을 오릅니다.
이 구간은 7코스 중 가장 가파른 구간이지만 그리 많이 오르지는 않습니다.
앵봉산은 두어 번 고개를 넘나들면 끝이 납니다.
봉산과 앵봉산에는 특징적인 설치물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바로 시(詩)를 써놓은 설치물들입니다.
이걸 시비(詩碑)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시설물(詩設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철제 기둥에 철판을 대어 시를 적어 놓았습니다.
봉산과 앵봉산을 거닐며 한 20여개 정도 본 것 같습니다.
유명시인과 무명시인들의 시가 반반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유명시인들로는 김춘수 이해인 김종철 정지용 기형도 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기형도의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 시를 소개하고자 쓰잘데기 없는 긴 서두를 이어왔습니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삽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위 시는 어찌보면 동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해는 시든 지 오래’라든가 ‘찬 밥처럼 방에 담겨’라든지
‘배추잎 같은 발소리’등의 시어는
그가 아니라면 써내기 힘든 감각적 언어 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무 삼십단을 팔러 장에 간 엄마와
해 저문 깜깜한 밤에 홀로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을 통해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시인과
힘겹게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고스란이 묻어나는
아주 처연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하나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한 9살 정도나 되었을까요.
제 밑으로는 저보다 3살 어린 동생과
위로는 저보다 5살 위인 형이 하나 있었습니다.
형은 아이큐가 160이나 되는 수재로
초.중학교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아서 동네에서 소문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놀음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의 고된 노동력이 가족을 살리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학비를 댈 능력이 안되서
형은 중학교 때부터 남의 집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몹시도 가난했지만 어머니의 유일한 낙은 동네사람들이
‘저 아이는 나중에 큰 인물이 될거야’라고
칭찬하는 걸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형은 우리집의 보물 중의 보물이었던 거지요.
어느 날 형이 가정교사집에서 모처럼 집에 온 날이었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하고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먹거리가 없어 저녁끼니를 떼우지 못하고 있다가
어머니께서 형에게 심부를 시켰습니다.
아랫마을에 가서 강냉이 찌끼를 사오라는 것이었지요.
강냉이 말고 강냉이 찌끼는
강냉이가 되다 만 딱딱한 옥수수 알갱이를 말합니다.
거의 쓰레기나 다름 없는 강냉이 찌끼를 싸게 파는 곳이 있었는데
형이 그걸 사러 집을 나선 것이지요.
형이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보라가 치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근심이 시작되었습니다.
나와 내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형이 들고올 강냉이 찌끼만을 생각했습니다.
눈은 삽시간에 무릎까지 차올 정도로 쌓여갔습니다.
형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는 속으로 셈을 합니다.
하나 둘 셋........구십구 백......손가락 하나 접고
하나 둘 셋........구십구 백......손가락 둘 접고
하나 둘 셋........구십구 백......손가락 셋 접고
접고 접고 또 접고 열 손가락 다 접고
열 손가락을 열 번 접어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문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3시간이 지났을까요. 마침내 형이 큰 봉투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동생과 나는 뛸 듯이 기뻐 봉투를 받아 들고 찌끼를 먹는 동안
어머니는 형을 붙들고 하염없이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형이 간 강냉이 가게는 문을 닫았고
다른 마을에 있는 강냉이 가게로 갔으나 거기도 닫았고
또 다른 마을에 가서야 강냉이 찌끼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린 동생들이 목 빠지게 기다릴 것을 너무 잘 알았던 형은
어떻게 해서든 강냉이 찌끼를 구해야만 했던 것이지요.
눈보라를 뚫고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강냉이 찌끼를 찾아 다닐 때
두텁게 입지도 못한 옷차림에 추위는 또 얼마나 컷을까요.
형의 어깨와 머리에는 두껍게 눈이 쌓여있었습니다.
저의 어릴 적 상황이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과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엄마 걱정’에서는 아이가 엄마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이고
저의 집에서는 엄마가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한 번 기형도 시인의 시를
화자만 바꾸어 그대로 모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들 걱정
단돈 10원을 손에 쥐고
강냉이 사러 간 우리 아들
안 오네, 해는 잠든지 오래
나는 생선처럼 문에 달려
아무리 천천히 손가락 셈을 해도
아들 안 오네, 낙엽 같은 발소리 사박사박
안 들리네, 어둡고 걱정되어
금 간 문 틈으로 폭풍같은 눈보라
사립문에 혼자 서서 쓰러질듯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통한의 문밖
기형도 시인은 29살 이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맙니다.
그가 죽은 후 2달 후에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이 출판되었는데
위에 예시한 ‘엄마 걱정’은 시집 맨 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요절한 천재 시인을 알려진 기형도 시인의 시 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작품은 ‘빈 집’이라는 시입니다.
저 역시 기형도 시인의 시 중에서 이 시를 가장 좋아하구요.
기형도 시인이 사망한 지 10주년이 되는 1999년에는
그의 유작을 모아 기형도 전집을 펴냈는데
이 책에는 시 뿐만이 아니라 소설 산문 자료등이 실려 있습니다.
산문에서는 시인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장정구를 만난 소감을 쓴 구절이 있는데 재밋는 건
기형도 시인이 자기보다 2살 어린 장정구를 소년이라고 칭하는 대목입니다.
당시 나름 뜨고 있던 장정구를 치기어린 소년으로 치부한 걸 보면
자신의 시와 글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던 걸로 판단됩니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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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Very nice!
You're welcome!
소요유님~감사드립니다.
멋진 사진과 글~~대단하십니다.
삼조 조장님이신가요?
네, 고맙습니다.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저는 어릴적 밥을 넉넉히 먹고 자라 실감나진 않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조장님이야, 얼굴에 쓰여있잖아요.
밥 못먹고 자랐다라고 거짓말 해도 누가 곧이 듣지 않을 걸요.
어릴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넉넉하지는 않으나 이만큼 지낼 수 있다는 게 기적같아요.
그러니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생활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