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발전과 변화

중국 상고시대에 탕(湯)임금이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후 상(商)나라를 세웠다. 상나라는 반경(盤庚)임금에 이르러 도읍을 은(殷)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273년이 지나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자 은은 페허로 변하였다. 이곳을 사서(史書)에서는 은허(殷墟)라고 하는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일대이다. 갑골문은 바로 은허에서 발견된 상나라 후기의 복사(卜辭)를 기록한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문헌인 갑골편에 사용된 문자이다.
따라서 갑골문은 기원전 1,300년쯤부터 기원전 1,100년까지 사용된 문자이다. 그 당시에는 거북이의 껍데기나 짐승의 뼈를 불로 지져서 갈라진 흔적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습속이 있었다. 점을 친 날짜·점친 사람·점친 내용·점친 결과·결과에 대한 판단 등 일련의 사항을 점을 치는데 사용한 거북이 껍데기나 짐승의 뼈 위에 칼로 새겨놓았다. 갑골문은 사용된 재료로 인하여 갑골문, 발견된 장소로 인하여 은허문자(殷墟文字), 내용으로 인하여 복사(卜辭), 서사방식으로 인하여 계문(契文)이라고도 부른다.

갑골편은 청(淸)나라 광서(光緖) 말년에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발견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용골(龍骨)'이라고 하여 한약재로 쓰였다. 1898년 톈진(天津)의 멍띵성(孟定生)과 왕샹(王襄)이 용골에 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고간(古簡, 고대 죽간처럼 문자가 새겨진 문헌이란 의미)'이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1899년 왕이룽(王懿榮)이 갑골편을 최초로 저록한 리우어(劉鶚)와 더불어 감정하고 연구한 결과 용골의 문자가 '은인도필문자(殷人刀筆文字, 은나라 사람이 칼로 새긴 문자)'임을 밝혀냈다. 이로써 갑골문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고대 역사는 물론 중국문자학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갑골편은 지금까지 15만여 편이 발굴되었고, 개별자는 5천 자에 이른다. 그 가운데 고석된 자는 2천여 자이나, 고석 결과에 쟁론이 없는 자수는 겨우 1,200자에 그치고 있다. 어쨌든 갑골문은 지금까지 발견된 한자 가운데 체계를 갖춘 가장 오래된 한자이다. 갑골문은 지금까지 고석된 글자가 절대적으로 적은데, 이는 갑골문이 원시성이 농후하다는 증거이다.
그 반면에 갑골문에는 상형자·지사자·회의자뿐만 아니라, 형성자·가차자도 발견되는데 이는 갑골문이 상당히 성숙한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갑골문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갑골문의 가장 큰 특징은 상형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특히 같은 글자지만 여러 가지 자체가 공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자체를 비교해 보면 갑골문은 도화와 문자의 과도기적인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馬(말)'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문은 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금문의 주된 사용시기는 서주시대이므로 일반적으로 서주금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나라 청동기에도 족휘(族徽, 부족을 상징하는 문양)를 비롯한 문자가 주조되어 있는데, 오히려 갑골문보다 상형성이 더 농후하다. 또 서주이후에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기에도 많은 금문이 주조되거나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자체상으로 금문은 일반적으로 서주의 금문을 말한다.
금문은 주로 청동기물에 주조되어 있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고, 이기명문(彛器銘文)이라고도 하며, 당시에 청동을 길금이라 하였기 때문에 길금문자(吉金文字)라고도 한다. 금문은 갑골문과는 달리 고대부터 세상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금문은 정벌(征伐)·책명(冊命)·상사(賞賜)·사전(祀典)·계약(契約) 등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
원래 예악기·생활도구 등으로 사용된 청동기는 한편으로는 왕권의 상징으로 대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라에서 제작한 9개의 정(鼎)은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자의 상징이 되었는데, 천하를 도모하는 것이 "九鼎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묻는다(問鼎)"로 대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로 새긴 갑골문이 날카롭고 각이 지며 가느다란 것에 반하여, 동기에 주조된 금문은 굵고 둥글어서 중후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진나라는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밀접한 서주의 문자를 그대로 이어받아 주문을 사용하였다. 주문은 대전(大篆)이라고도 하는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주문에 기초하여 만든 소전(小篆)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주문 즉 대전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위치한 자체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문은 주(周)나라의 태사인 주(籒)라는 사람이 아동들의 글자공부를 위해 제정한 것으로, 그 당시 통용한자의 표준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전국 칠웅(七雄)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가 서주의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문자의 자체 역시 일맥상통하는 대전을 사용한 것에 반하여, 나머지 동쪽에 위치한 육국은 이른바 육국고문(六國古文)이라는 간략화되고 변화가 심한 자체를 사용하였다.
전국시대는 지역과 국가의 분열로 어문정책 또한 통일이 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토(西土)의 대전과 동토(東土)의 고문이라는 서로 일치하지 않은 자체를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육국 사이에서도 서로 풍격이 다른 자체를 사용하게 된 주된 이유이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한자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전은 동한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에 수록된 '주문' 이외에는 확실히 밝혀진 자료가 없다. 일반적으로 석고문에 각석된 자체가 대전이라는 설이 널리 펴져있으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석고문은 오히려 소전에 가까우며 '저초문(詛楚文)'이 주문에 가깝다고 한다.
고문은 공자의 옛집 벽에서 발견된 '고문 경서' 즉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와 육국의 옛땅에서 발굴된 죽간·백서·도기·화폐·도장 등을 통해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대전과 고문을 포함한 전국문자는 형성자 수량의 증가·가차현상의 보편화·이체자의 대량 출현·자체의 간략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전국문자의 가장 큰 특징은 상나라 갑골문과 서주의 금문에 비해 상형성을 탈피하여 부호화의 초기 단계적인 현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상나라 갑골문과 서주의 금문이 각각 당시의 표준문자를 대표한다면, 전국문자의 자체는 그 지역성만큼이나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갑골·금문·주문으로 이어지는 한자자체의 정통을 이어받은 진나라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서동문(書同文-문자자체 표준화 정책)을 실시하여 대전을 기초로한 소전을 만들었다. 이로써 한자는 지역적 혼란을 벗어나 표준자체를 갖추게 되었다. 서동문 사업은 그 후 중국 각 조대에서 시행한 문자 표준화 정책 시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전은 필획이 복잡한 대전자체를 상당히 간략화하고 고쳐서 만든 진나라 통일 국가의 표준자체이다. 물론 이 문자표준화사업은 대전과 불일치하는 육국의 고문을 통합하고 폐지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것이다. 진나라 소전의 가장 대표적인 자료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전국을 유람하면서 각석한 역산(嶧山)·태산(泰山)·낭야대(琅玡臺) 등이다. 체계적인 소전 위주의 자서는 동한 허신의 『설문해자』로 모두 9,353자를 수록하고 있다. 물론 설문에 수록된 소전 자체가 모두 진나라 소전의 면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전의 풍격을 고찰하는 데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소전의 특징은 갑골문·금문 등과 비교하면 자연적으로 드러나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한자의 부호적인 성질을 정립함으로써 한자 자형 결구의 규율을 구비하도록 하였다. 갑골문과 금문의 결구 형태는 규율성이 엄밀하지 않은 반면, 소전은 선형화되어서 자형이 도화의 특징에서 더욱 탈피하게 되었다. ② 한자 결구를 정형화하여 편방의 위치와 형체를 고정시켰다. ③ 윤곽을 모두 묘사한 갑골문과 윤곽 내부를 다 메운 금문의 자체를 일률적으로 선형화하였다. ④ 자형규격과 필세를 통일하였다. 따라서 소전은 이전의 한자에 비하여 상형성이 약화되어 자체를 통하여 한 눈에 객관 대상을 인식하는 한자 특유의 표의성을 상실하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
예서는 일반적으로 진예(秦隸)와 한예(漢隸)로 나뉜다. 진나라 관리들이 늘어나는 행정업무에 발맞추어 서사의 편의를 위해 소전 대신 사용한 자체가 진예이고, 한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해서의 직접적인 모체가 되는 자체가 한예이다. 또 시기상으로 구분하여 진예를 고예(古隸-옛 진나라의 예서)라 하고, 한예를 금예(今隸-지금 한나라의 예서)라고 한다. 진예의 필세는 소전과 한예의 과도기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데, 당시의 옥리(獄吏)인 정막(程邈)이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예서는 주로 '옥졸(도예(徒隸)라고 하였음)'들이 문서 작성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예서(隸書)'라고 하였고, 또 당시 진나라의 공식적인 일급자체인 소전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좌서(左書)'(左는 佐와 같고 보조의 의미가 있음)라고도 하였다. 진예의 가장 대표적인 자료는 수호지(睡虎地)에서 발견된 진나라 죽간에 서사된 자체이다. 진나라의 일급자체인 소전에 비해 보조적인 이급자체로 역할을 담당하던 진예는 한나라에 와서 국가의 공식적인 표준 자체가 되었다. 현재 일반적으로 예서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한나라의 예서를 말하며, 한나라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이나 비석에 각석된 자체가 대표적인 자료이다.
예서는 소전을 민첩하게 쓴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여러 방면에서 소전과는 또 다른 특징과 의의를 지니고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예서는 한자 자체의 변화와 발전에 있어서 그야말로 대변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문자학에서는 소전에서 예서로 자체가 변화발전한 것을 예변(隸變)이라고 부른다. 예서는 소전이 직사각형의 형체를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옆으로 넓게 퍼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소전이 둥근 필체인데 반하여 예서는 곧은 필체로 변하였고, 소전이 감싸는 필세인데 비하여 예서는 마지막 부분이 갈라져 날아갈 듯한 삐침획을 형성하고 있다.
예서의 가장 큰 특징은 편방 형체의 변화에 있다. 예서의 편방은 소전에 비해 간화되고 병합되고 변형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 예변과정에서 편방의 혼동현상까지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腎'·'朕'·'靑'자 등은 소전에서 각각 '肉'·'舟'·'丹' 편방을 구성요소로 하였지만 예서는 '月' 편방과 혼동된 현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변 이후의 자체는 한자의 특성인 겉모양에서 뜻을 드러내는 표의의 기능이 대폭 상실되면서 순수한 부호적인 성격을 띈 문자로 새로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나라 시기에는 예서 이외에 초서가 사용되었다. '초서(草書)'는 초솔(草率)하고 간편한 자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고문자에도 이런 현상이 발견되는데, 일반적으로 초서란 한나라때 형성된 예서를 간략하게 흘려쓴 자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한나라의 공식적인 일급자체는 예서이고 보조적인 성격의 이급자체는 초서이다. 예서에서 탈변한 초서는 필획이 서로 연이어져 있지는 않았는데, 이를 '장초(章草)'라고 한다.
그리고 동진(東晋) 이후에 필획이 연이어진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하며,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글씨가 대표적이다. 당대에 이르러 금초를 기초로 하여 '광초(狂草)'가 생겨났는데, 이 자체는 너무 간략화되고 글자와 글자도 연이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정보교환의 수단으로는 이미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서예라는 예술적인 경우에만 사용하게 되었다.
한나라 시기에는 예서 이외에 초서가 사용되었다. '초서(草書)'는 초솔(草率)하고 간편한 자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고문자에도 이런 현상이 발견되는데, 일반적으로 초서란 한나라때 형성된 예서를 간략하게 흘려쓴 자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한나라의 공식적인 일급자체는 예서이고 보조적인 성격의 이급자체는 초서이다. 예서에서 탈변한 초서는 필획이 서로 연이어져 있지는 않았는데, 이를 '장초(章草)'라고 한다.
그리고 동진(東晋) 이후에 필획이 연이어진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하며, 서예가인 왕희지(王羲之)의 글씨가 대표적이다. 당대에 이르러 금초를 기초로 하여 '광초(狂草)'가 생겨났는데, 이 자체는 너무 간략화되고 글자와 글자도 연이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정보교환의 수단으로는 이미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서예라는 예술적인 경우에만 사용하게 되었다.
행서는 해서와 초서가 흥성한 뒤에 형성된 자체이며, 해서와 초서의 장점을 겸비한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자체이다. 해서는 한 획 한 획 또박또박 써야 하기 때문에 빨리 쓸 수 없는데 반해, 행서는 자형의 원래 모습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초서의 필획을 연이어 쓰는 장점을 취하여 서사의 편리를 실현한 자체이다. 문자의 변별력과 서사의 재빠름을 모두 구현한 행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필기체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