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 글은 언제나 잔잔하면서도 풍요롭다. 그건 참 묘한 경험이다. 침착함 속에 넘치는 열정과 그저 무심한 듯 지나치는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응시하는 성찰의 힘을 느끼게 된다. 그의 영혼 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하나 있구나 하는 감탄이다. 대단한 독서가로 알려진 그의 글에는 그의 독서 편련이 묻어나고,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사와 현실에 대한 생각의 무늬들이 그대로 손에 만져진다.
《아슬아슬한 희망》은 제목 그대로 갈수록 암담하고 점점 나락의 길을 걷고 있는 시대에 참된 삶의 의미를 묻고 사람과 역사에 대한 ‘희망’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어루만지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한 채 하늘을 말할 수는 없었”고 “하늘을 말하지 않고는 땅의 희망을 말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신앙과 삶에 대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깨우침을 드러내준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팍팍한 일상과 암울한 시대에 세월이 참 무상하지만 불멸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오늘날 한국사회와 지구촌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자세로 실천의 길에 들어설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 예수를 따르는 이의 순결한 마음과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는 외로운 결연함이 스며있다.
어떤 이는 그의 글에 대해 “몸에 박힌 가시일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고통 받고 억눌린 이들의 현실을 주시하고, 이들의 삶을 괴롭게 하고 있는 권력과 현실의 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바로 그것이 예수의 마음임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에 깊숙이 박히고 있는 가시다. 그러나 그 가시는 진정 무엇 때문에 아파해야 하며 무엇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하며 무엇 때문에 기도하고 무엇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지 일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와 닿는다. 그의 글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하지만 그 진지함은 지루하거나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삶이 보여주는 성실함의 무게와, 성서 해석의 진실성,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픔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아파하는 자와 함께 아파하며, 웃는 자와 함께 웃는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억울한 고통에 시달려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다름 아닌 복음의 진정한 역할이다. 그런 까닭에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으면 우리가 서슴없이 직면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현실과 외롭게 쟁투하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해야 할 것인지 분명해진다.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고 있으면 사람음의 본래 가치가 회복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염되지 않고 맑고 경건한 울림으로 이 세상을 일깨우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생명은 기적이다”라는 글의 마무리에서 “내가 기적인 것처럼,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은 기적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면서 등굣길의 초등학생, 산책중인 아주머니,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할머니, 자원봉사중인 아저씨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날린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게도 하나하나 사랑을 불어놓는 따스한 온기와 함께 그 사랑을 훼방하고 가로막는 힘과 싸워야 할 때는 물러섬이 없다. 그런데 이 예언자적 육성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쫓겨나고 밀려난 자의 삶과 맞닿아 있다.
생명에 대한 소명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교회가 갈 길이라고 외치는 그의 육성은 그의 책 곳곳에 스며있다. 이는 어쩌면 이미 세상의 대세를 쥐고 있는 질서에 대한 역습과 전복(顚覆)이 된다. 하여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글은 오늘날, 힘없이 현실의 위력에 무너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격려가 된다.
김기석 목사의 설교가 고사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말씀의 전범(典範)이 될 만하다면, 그의 칼럼은 탁류가 넘치는 강을 뚫고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줄기와 같다.
바람 부는 날에도 밭에 나가고 구름이 낀 날에도 들판에 나간다.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의 갈 길이다. 이 암담하고 답답한 시대의 거리에서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온통 열기에 지쳐 가는 가 했더니, 생명의 멋진 바람이 분다. 김기석 목사의 말과 글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새로운 용기와 기력을 부어준다. 물론, 그것이 김기석 목사의 헌신과 능력의 소산이겠지만, 그건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득 담긴 말씀이기에 그렇다.
이제 그의 책에 대한 소개를 따로 뭔가 하는 것보다는 그래서 그가 쓴 문장들을 음미하는 편이 훨씬 낫다. 자칫 그가 쓴 문장들을 추상화하고 그로써 글맛을 잃게 할까 싶어서다.
그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희망은 그렇게 늘 위태롭다. 희希 자에는 ‘바라다’라는 뜻도 있지만 ‘성기다’, ‘드물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희망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다. 희망은 낙관적 전망이 아니라, 기어코 살아내기 위한 안간힘이다. 상처를 빛나는 흔적으로 만들고, 연약한 것을 보듬어 안고, 뿌리가 드러난 것을 북돋는 이들이야말로 희망의 전사戰士라 할 수 있다.”(66쪽)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라야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허황해 보인다. 하지만 그 희망을 망각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드는 이들과 더불어 새 세상이 도래한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찾아가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던 과부와 같은 이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희망의 나무는 커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희망의 나무’는 오롯이 현재의 삶에서 움트기 시작한다.
“삶이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오늘이라는 점들이 모여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룬다.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도 정성껏 살아내야 한다.”(70쪽)
그래도 그는 묻기 시작한다. 일상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이건만 우리는 그 인생의 일상적 의미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상은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걷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가끔은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다. 일상은 대개 담담하고 심심하다.”(153쪽)
그렇지 않은가? 일상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우리는 자랄 수 없으며, 그 일상의 시간 속에서 길러지지 못한 생각과 습관 그리고 성찰은 자연히 뿌리가 얕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상의 자리로 돌아와 성찰의 시간을 익혀나가는 인생은 아름다워진다. 그건 마치 오랜 손맛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된장 맛이며, 그로써 우리의 일상에 건강함이 채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일상으로 제대로 돌아오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번거롭기만 하다.
“희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리듯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참 삶의 길을 조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일상 속에서 늘 접하는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지간히 무감각해졌다. ‘괜히 거짓의 맨 얼굴을 폭로하려다가 봉변당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포승줄처럼 우리를 묶고 있다.”(100쪽)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란다. 맞다. 그래서 우리는 대단한 것을 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마음과 영혼은 자꾸 폐허를 닮아가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거짓에 대해 우리는 어지간히 무감각해졌다.” ‘진리’로 성숙해져야 할 영혼의 공간이 폐물이 되어간다는 것이 다. 우린 그걸 일상에서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소소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건 조르쥬 쇠라의 그림 한 장을 보고 쓴 이야기다.
“조르쥬 쇠라가 1886년에 출품한 그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을 바라본다. 수많은 색점을 찍어 그린 이 그림은 색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휴일의 한 때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호수에는 작은 배들도 떠있다. 그런데 화면은 마치 시간이 일시에 정지되어 버린 듯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쇠라의 그림 속에서 일상은 영원과 잇대어 있다.”(70쪽)
이런 재창조의 순간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날로 그 삶이 폐허로 변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비극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아들과 딸을 생각할 때마다 김승희 시인의 〈제도〉를 떠올린다.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 공부 책을 칠하고 있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색칠이 나갈까 두려워한다. 아이는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선 안에 갇혀 있다. 답답하다. 죽은 풍경이다.”(168쪽)
그렇게 그는 인간을 옥죄이는 것에 저항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될 때 인간의 존엄은 스러지고 만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이 하나 둘 돈의 전능함이라는 허구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순간, 행복을 구성하는 다른 방법을 알아차리는 순간, 자유와 진리에의 열정이 회복되는 순간, 우리를 휘몰아가던 그 맹목적인 열정은 잦아든다. 비로소 이웃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100쪽)
아, “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춘다. 바로 그때 참 사람의 길이 열린다”라는 문장 하나만 제대로 잡고 살아도 우린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에 대한 그의 단상은 또 이렇게 펼쳐진다.
“모든 길은 단순히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공간이 아니다. 길은 사람들이 걸어 생기는 것이지만, 길은 그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기억의 온축이다. 길은 지향이기에 희망이고, 기억을 환기시키기에 그리움이다. 현대인의 불행은 길을 잊었다는 데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며 걷는 동안에는 희망도 그리움도 떠오르지 않는다.”(55쪽)
우리는 사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건 일상의 경치다. 그러나 경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불안하다. 아니, 늘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런 인간들만 자꾸 늘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을 향해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해라’, ‘그 문제에 붙들려 경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사회가 가하는 폭력이다.”(129쪽)
그래서 그는 이런 세상에 가득 찬 것을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한 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과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들은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주변세계를 재배치한다. 그들과 만나 상처를 입지 않고 물러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들은 욥의 세 친구를 닮았다. 느닷없이 닥쳐온 불행 앞에서 넋이 빠진 친구들에 그들은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댔다. 욥의 죄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겪는 불행이 그의 죄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판 욥의 친구들이 참 많다. 쓰나미나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태를 두고 불신앙 운운 하는 종교인들 말이다. ‘모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앎’은 독선이요 폭력이 아니던가? 딛고 서야 할 땅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폭우처럼 ‘안다’고 하는 자부심은 때로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을 진창으로 만들어버릴 때가 많다. 나의 ‘앎’ 혹은 ‘옳음’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타자와 소통할 여지는 줄어든다. 타자는 동화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다.”(171쪽)
여기에 더해 이렇듯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척하면서 실은 신앙과 관계없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표독’해지는 이들을 자기 확장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라며 “욕망이라는 이름의 끈을 자르지 않는 한 자유로운 질주는 불가능하다”며 날선 비판과 함께 가느다란 실눈을 뜨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 시대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을 정직이라 말하고, 남을 짓밟는 것을 경쟁력이라 말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쥐어짜는 것을 효율성이라 말한다.”(192쪽) “욕망의 특색은 도취와 중독이다. 욕망에 중독된 영혼은 파괴되는 문화와 자연을 위해 울지 않는다.”(28쪽)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일까? 있다.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눈을 뜨면 된다.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아니 우리가 차마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다. 마음에 등불 하나 밝혀지면 과도한 욕망에 바탕을 둔 행복의 꿈이 환상임을 깨닫게 된다.”(290쪽) “먼빛의 눈길로 현실을 바라보는 순간 욕망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내적 자유가 유입된다.”(250쪽)
주옥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그 주옥같은 이야기에는 진심이 있고 겸허한 자기 성찰이 있다. 그의 이러한 성찰은 교회, 기독교를 향해서도 가차 없이 쏟아진다.
“크기의 신화가 거룩함이라는 지향을 대체한 후 교회는 더 이상 다른 세계에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교회는 시인으로 하여금 30만 원으로도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든든함과 넉넉함을 주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추문거리가 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상호금융권에 대한 감사를 벌이다 보니 교회에 대출해 준 돈이 4조9천억 원에 이른다 한다. 제1금융권이 대출해 준 4조원을 합하면 거의 10조에 이른다. 교회가 매달 금융권에 이자로 갚아야 하는 돈이 600억 원이라 하니,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했던 예수의 가르침이 무색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의 ‘빛이 되라’ 했더니 세상의 ‘빚이 되었다’며 비아냥거린다.”(95-96쪽)
이제 그는 일상을 넘어 우리가 마주하는 시대의 아픔에 다다른다.
“분향소 앞, 세찬 바람에 일렁이는 노란색 깃발은 마치 죽어간 이들의 넋인 듯하여 나는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돌아선 채 눈물을 훔쳤고, 또 어떤 이는 처연한 표정으로 두 손을 그러쥔 채 영정 앞을 떠나지 못했다. 애도의 물결을 막으려는 이들, 애도가 분노로 화하지 않을 방도 찾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저 펄럭이는 노란색 깃발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186쪽)
분향소 앞 광장에서 흔들리는 깃발을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는 그는 이 시대의 아우성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 광장마다 내걸린 깃발은 우리를 ‘애수’의 정한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의이다. 그들을 성급하게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하냥다짐이다. 신은 무고하게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잊어도 신은 잊지 않는다. 신은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지은 죄를 당신이 받는 모욕으로 간주하신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189쪽)
이러한 애끓음은 팽목항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피에타를 보고 있다. 그 피에타는 저 무심한 진도 앞바다를 품고 있는 팽목항에 있다. 돌아올, 아니 돌아와야만 할 자식의 젖은 몸을 덮어주려고 담요를 든 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런데 그 피에타의 품에는 자식이 없다.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 돈 귀신에 들린 기업가, 관리 감독 책임을 방기한 관료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기보다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해경, 그리고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정부, 그리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도 ‘별 일 없겠지’ 하며 무사안일하게 살아온 우리가 공모하여 죽인 이들이 지금은 거울이 되어 우리 양심을 돌아보라고 다그친다. 팽목항 앞의 피에타 앞에서 우리는 눈물을 그칠 수 없다.”(215쪽)
그러면 절망하기만 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다가 ‘한 사람의 혁명’이라는 말에 붙들렸다. 깊이 각성된 한 사람이 검질기게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비록 좁지만 종국에는 생명 세상과 통하게 될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식물에 물을 주고, 염천을 마다하지 않고 밴 것을 솎아내고, 벌레를 잡아주는 농부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혁명가가 아닌가? 누구는 그런 이를 가리켜 최초의 인간이라 했고, 하늘의 빛과 만나 눈이 밝아진 바울은 그런 이를 가리켜 새로운 아담이라 했다. 시절은 바야흐로 새로운 아담을 기다리고 있다.”(87쪽)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문풍지가 된 사람들’을 그리며 희망의 불빛을 티운다.
“어둑새벽 거리는 지난밤의 향락과 도취의 흔적들로 인해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다. 도시인의 말끔한 아침을 위해 야광천을 덧댄 옷을 입은 채 새벽거리를 쓸고 있는 환경미화원들을 본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묵묵히 비질을 하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혼곤한 소비의 흔적들을 수거하기 위해 청소차에 매달린 채 달려가는 이들, 화려한 도시의 불빛 저편 어둠 속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을 돌보기 위해 달려가는 이들을 본다. 절망의 황소바람에 맞서며 역사 속에 온기와 웃음을 불어넣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문풍지로 선 그들에게서 문득 거룩함의 온기를 느낀다.”(274쪽)
이런 모든 의식과 자세와 깨우침이 이 척박한 세상에 희망을 일구는 길이다. 인간의 자유로움을 지켜내고 그 존엄한 권리를 옹호하며 생명의 세계를 평화의 영으로 가득 차게 하는 일, 그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이들이 순례의 경건함으로 재창조되는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해서 성소가 되어간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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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손석춘/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건국대학교 교수
‘한국어로 하는 가장 아름다운 설교.’
김기석 목사의 설교를 두고 교회 안팎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이 책에 담긴 ‘주옥’들은 왜 그의 설교에 상찬이 이어지는가를 웅변해준다.
김 목사의 글은 무엇보다 당신의 모습만큼 겸손하다. ‘가장 아름다운 설교’를 한다는 목사는 엉뚱하게 ‘지렁이’에 질투를 느낀다.
“가끔 지렁이를 질투한다. 지렁이는 나뭇잎, 풀, 쓰레기 등 버려진 유기물을 제 몸무게만큼 먹어치우는 생태계의 청소부이다. 해로운 미생물을 제거하고 기름진 분변토를 내놓아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흙 속에 길을 내서 토양에 공기와 수분이 드나드는 통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지렁이를 닮을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내 속으로 끌어들여 정화한 후 그것을 세상의 선물로 내놓을 수 있을까?”
지렁이를 보며 삶을 수업하는 목사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생을 깊이 천착하는 혜안도 눈부시다. “시간 속의 멀미, 이게 예토에 살고 있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본 당신은 “멀미를 잊으려면 환상이 필요하다”며 사람들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쾌락을 탐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라고 날카롭게 통찰한다. 하지만 환상에서 깨어나면 공허감은 더욱 깊어간다고 경고한다.
‘우리 시대의 목사’ 김기석은 가을 산이 곱게 물들고, 졸가리만 남은 나무들의 치열한 겨울나기가 시작될 때도 “희망조차 없이 휘뚝거리며 살기엔 세상이 너무 척박”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어 ‘그들에게 착한 노래를 불러줄 사람은 누구인가?’ 묻고,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더욱 그리운 시대”라고 토로한다.
이 책의 첫 독자로서 감히 증언하거니와 김기석 목사가 바로 ‘아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틈만 나면 마당가에 나가 새싹을 살피기도 하고 “누구보다 먼저 봄과 눈맞춤 하고 싶다는 속 좁은 바람”을 털어놓기 한다. 그래서 “작을 ‘소’자 모양으로 돋아날 새싹이 외로울까봐 안달이냐는 아내의 꾸지람쯤은 건듯 미소로 퉁겨”내고 “겨우 밑동만 남은 채 겨울을 난 씨도리배추에 노란 장다리꽃 피어날 날을 눈물겹게 기다린다.”
그렇다고 ‘감상’에 결코 머물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한국교회를 저마다 ‘대표’한다는 목사들이 “가난한 집 학생들이 불국사나 가지 왜 제주도로 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냈느냐”라거나 “세월호 사고를 좋아하는 세력은 종북 좌파들이고, 추모식은 집구석에서 해야지 왜 광화문 사거리에서 광란을 피우느냐?” 따위의 망언을 일삼을 때, 방송에 출연해 “너무 권력의 언어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준엄하게 꾸짖는 목사다. 신문에 칼럼을 쓰며 “한 대형 교회의 원로목사는 사기미수 혐의로 법정 구속되었고, 또 다른 젊은 스타 목사는 성추문에 연루되어 망신을 당하고 있다. 허장성세를 거두고 본질에 충실하지 않는 한 언제든 종교는 그리고 정치는 타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예언하는 당당한 목사다.
이 책에는 나를 부끄럽게 한 대목도 있다. ‘출퇴근길에 통과하게 되는 대학거리’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새내기들을 보며 김 목사는 “시간의 볼모로 살아온 지난 몇 해의 기억은 아예 사라진 것일까? 아직 권태의 침입을 받지 않은 눈길엔 호기심이 가득하고, 생기발랄한 웃음소리는 종소리 같다. 두툼한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자랑스레 걷는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문을 열어젖히는 이의 설렘이 있다”고 쓴다. 이어 “그 문이 부디 희망의 문이기를. 저절로 기도하는 심정이 된다. 희망을 향해 걸어가는 저들에게 오랜 행군을 견디어 낼 발을 허락해달라고, 어떤 시련이 와도 정복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저들의 마음마다 세워지게 해달라고, 현실 논리에 자발적으로 투항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살아있는 생명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빈다.”
고백하거니와 명색이 대학교수로 ‘종교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새내기들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지식’을 그들과 나누면서 기껏해야 내가 선 ‘자리’의 정당성에 회의를 느꼈을 따름이다.
하지만 김 목사는 씩씩하다. 지렁이에 질투를 느끼고 ‘씨도리배추에 노란 장다리꽃 피어날 날을 눈물겹게 기다리는’ 그의 가슴은 단호하게 외친다.
“스스로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어 새로운 생의 문법을 만들어가는 사람, 전사가 되어 낡은 가치를 사정없이 물어뜯고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기꺼이 끌어안는 성스러운 반역자들. 새로운 세상은 그들을 통해 도래한다.”
김 목사가 교회의 ‘상투어’를 넘어서는 까닭도 새로운 세상을 더불어 꿈꾸기 위해서다. 그가 본 예수는 “상투어로 변해버린 율법의 언어를 깨뜨려 생명을 담지한 말로” 빚어냈다. ‘오늘 목회자들의 과제가 있다면 상투어로 변해버린 종교적 언어를 우리의 일상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일’이라는 그의 겸손한 제언이 고스란히 구현된 언어들로 이 책은 가득하다. 교회를 나가는 모든 교인들에게 일독, 아니 정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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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똥스럽고 몰강스러운 세파에 휘둘리는 이들에게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 총무, 옥천성당 신부
또 터졌습니다. 엊저녁이던 10월 17일 케이 팝 공연을 즐기던 판교 시민들 16명이 참변을 당했습니다. 경주의 코오롱 마우나 리조트에서 대학생 열 명이 숨진 2월 17일과 배 타고 제주로 가던 학생들과 여행객들 삼백네 명이 물에 잠긴 4월 16일에 이어 올해 세 번째 대형 참사입니다. 지붕이 폭삭 주저앉고 배가 갑자기 자빠져 가라앉고, 딛고 섰던 밑창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퍽 든든해 보이고 게다가 매끈하기까지 한 것들이 저리도 속절없이 주저앉고, 가라앉고, 내려앉습니다. 어느 구석하나 믿고 맡길 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한 싱크 홀입니다. 외신에서는 이런 한국을 더 이상 ‘위험사회’가 아니라 ‘사고사회’ ‘재난사회’라고 부릅니다.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남들 같으면 몇 년에 한 번 생길까 말까 하는 참사가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언제 차례가 닥칠지 몰라 불안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는 꼴이 너무나 초라해져서 지내기 힘듭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 하는 짓이 하도 엉뚱해서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오늘은 포도밭에 가서 일을 좀 하자고 부탁을 했지만 앞에서만 알았다고 했을 뿐 종일토록 서성거린 곳은 거기가 아니었습니다(마태복음 21장). 임금님이 풍성한 잔치를 차려놓고 와서 즐기자고 여러 번 불렀지만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서 차려놓은 상을 보기 좋게 걷어차 버렸습니다(마태복음 22장). 함께 일 좀 하자고 해도, 더불어 놀아보자고 해도 번번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슬프게 하는 게 사람의 역사일까요? “송이송이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시고 떫고 쓰기만한 들포도를 맺었느냐?”(이사야 5:4)하시는 하늘의 탄식과 “이 세대는 악한 세대로다!”(누가복음 11:29)하시는 쓰라린 판정을 용케 피했던 시대가 언제 있기나 했을까요?
그 아래에서는 언제고 근심 없이 잠들 수 있는 지붕 하나, 맘 놓고 내 자식을 몸을 실어 보낼 배 한 척, 앞이 가려서 보이지 않을 때 밟고 올라설 디딤돌 같은 그런 ‘하나’가 간절합니다. 춥고 어둡고 숨 막힐 때 돈으로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그것’ 하나를 불쑥 꺼내놓는 것이 종교의 사명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래도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약이며 밥이며 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야말로 종교의 할 일입니다. “도대체 이게 사람이란 말인가?” 하고 물을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사람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런 이를 우리는 성직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김기석 목사님이 인생의 딱딱한 수수께끼들을 오랜 시간 생각의 우물에 담갔다가 불리고 풀어서 마련한 아름다운 수필과 결기어린 글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또 함초롬이 깊은 사색에 머물게 하는 시가 들어 있습니다. 산문과 시가 마치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처럼 조화롭게 어울려 군침이 돌게 만듭니다. 읽을수록 힘이 나고 웃음이 나고 신이 납니다. “자자이 점점이요, 구구이 관주로다”라더니 매 문장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게 만듭니다. 살똥스럽고(말이나 행동이 독살스럽고 당돌한) 몰강스러운(억세고 모지락스럽게 차마 못할 짓을 하는) 세파에 시달리느라 기진맥진하신 당신께 분명 위로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이야기입니다. 누가 사람인지, 사람이 함께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이 정말 이룰 일이 무엇인지 실로 오랜만에 쉽고 편하고 즐겁게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