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公 전각 묘비명 (進士公 諱 珏 墓碑銘)
[선조14년 신사년(1581년)- 인조19년 신사년(1641년)]
공(公)은 정선인(旌善人)이니 세대(世代)로 양양(襄陽)에서 살았으며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시골의 명망(名望)있는 가문(家門)이 되었다.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휘(諱)는 경달(景達)이요. 조(祖)는 통덕랑(通德郞)이며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휘(諱)는 문경(文經)이며, 증조부(曾祖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시니 휘(諱)는 찬(瓚)이시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첨정(僉正) 견룡(見龍)의 따님이다. 부인(夫人)의 천성(天性)이 순후(淳厚)하고 두루 삼가서 윗사람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대접함이 심히 지어미의 도(道)를 얻었더라.
선조 신사(辛巳)년 4월 11일에 공(公)을 낳으시니 공(公)의 휘(諱)는 각(珏)이요. 호(號)는 죽재(竹齋)이시다.
소시(少時)부터 재예(才藝)가 뛰어나 문학(文學)을 잘하더니 인조 갑자(甲子)년에 진사(進士)를 하였다.
공(公)이 강릉김씨(江陵金氏)에 장가드니 선조 정축(丁丑)년 3월 17일에 출생(出生)하였고 아버지는 계공랑(啟功郎)에 천헌(天憲)이요. 조부(祖父)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를 지내니 휘(諱)는 경휘(景暉)요. 증조(曾祖)는 봉직랑(奉直郎)에 포천훈도(抱川訓導)를 지내니 휘(諱)는 설(說)이라
부인(夫人)이 조사(早死)하매 자손(子孫)이 없어 후배(后配)로 강릉김씨(江陵金氏)에 다시 장가드니 선조 무자(戊子)년 8월6일에 출생(出生)하여 인조 무인(戊寅)년 1월 19일에 졸(卒)하니 [선조21년 무자년 1588년-인조16년 무인 1638년]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에 휘는 선문(善文)이요 조(祖)는 통선랑(通善郞)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내니 휘(諱)는 저(坥)이요. 증조부(曾祖父) 통훈대부(通訓大夫) 훈련원(訓鍊院) 습독(習讀)이니 휘(諱)는 종(誴)이라.
공(公)이 인조 신사(辛巳)년 10월 14일에 졸(卒)하시니 양양군(襄陽郡) 남면(南面) 부소치(扶蘇峙) 고개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葬事) 하였다. 공(公)의 자(子) 부천(賦天)이가 장차 석물(石物)을 하고자 하여 공(公)의 비명(碑銘)을 짓기를 청(請)하니 지무(枝茂)가 그의 선공(先公)의 명의(名儀)를 아름답게 여겨 드디어 거친 글로서 그의 명(銘)을 써 가로되
하늘이 높은 산을 지어/天作高山
신령한 기운이 쌓이도다./靈氣間積
때로 성균관에 출입하였고/時遊泮宮
도학으로서 악함을 막았도다./以道拒惡
퇴직하여 산속 정자에서 머물면서/退在山亭
이웃에게 밝은 덕을 베풀었도다./施人明德
공의 자손들이여 / 公之子孫
영원토록 행복을 향유할지어다./永世享福
통정대부 강릉대도호부 부사 이지무 찬
通政大夫 江陵大都護府 府使 李枝茂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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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궁[ 泮宮 ]
성균관(成均館)과 문묘(文廟)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이지무[ 李枝茂 ]
이칭별칭
자 무백(茂伯), 호 수암(壽菴)
출생 - 사망
1604년(선조 37) ~ 1678년(숙종 4)
정의
1604(선조 37)∼1678(숙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무백(茂伯), 호는 수암(壽菴). 좌참찬 준민(俊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훈(從訓)이고, 아버지는 직경(直卿)이며, 어머니는 이우(李佑)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44년에 정언(正言)과 사서(司書)를 지냈다. 1649년에는 세자가 심양으로 갈 때 노모 봉양을 이유로 세자 호송을 거부하였다가 인조에 의해 미움을 받아 관직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1660년(효종 1)에는 장령(掌令)을 제수받았다. 1655년에는 장령과 필선(弼善)을 역임하다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 왔는데, 정사(正使)는 금림군(錦林君)개윤(愷胤)이었고 부사(副使)는 이행선(李行善)이었다.
귀국 후에는 금림군이 청나라에 체류하고 있을 때에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정문(呈文)을 작성하여 딸의 소환을 청국의 조정에 주청한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그는 이에 연루되어 관직을 박탈당한 뒤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장령(掌令)과 정언을 지냈고, 1662년에는 장령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장령과 헌납(獻納)을 지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지무 [李枝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