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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朝奉大夫司諫院左正言星山李公墓碣銘 並敍
고려 조봉대부 사간원 좌정언 성산 이여량(李汝良)공 묘갈명 병서
장복추(1815~1900)
於乎。公冠寫之藏。在善山坪城面資道洞負坤原。粤壬辰兵燹。失其傳。至正廟己亥。因五衢之徵。果驗幽竁之誌。碑已踣矣。今上戊戌。改謀竪碣。后孫萬相,上舍鼎煕。徵其銘於不佞。以老謬辭不獲。謹按狀云。世譜公天姿剛直。文學俱贍。洪武庚申。魁司馬。登ⓟ文科。陞禮務佐郞。甲子。選授左正言。麗史耦出遊無虛日。召李汝良曰。臺省公務浩繁。汝等宜各歸治事。遂馳上男山。汝良從之。與鄭釐。交章切諫。畧曰。倭冦深入。間諜京都。刺客奸人。安保其必無。永陵不從諫言。終有岳陽之行云。値社屋。矢罔僕。退終開寧大鳥洞。實距金烏山冶隱亭西北十里地。鄭文翼光弼。撰來孫貳相沆碑曰。正言汝良。麗亡不仕本朝。鄭公復周誌仁州公汝忠墓曰。與弟正言。事親極孝。友愛篤至。州誌李公汝良官止江原道按廉副使。此其行治履歷之大較。而世代遙濶。生卒月日。逸而無徵焉。ⓟ公諱汝良。上祖高麗司空能一。封星山君。子孫因貫焉。九世至益孫。典工判書。是公曾祖。祖禮儀判書培。考庶尹文廣。妣光山卓氏。判尹天成女。配星山呂氏。判書克誨女。墓星州禾谷坊洓洞。有表石。三男友牧使,善生員,時縣監。友子悠久司直,陽進士。善無后。時子孝純司直,孝眞參奉。悠久四世孫嘉善雲,參奉霙。並倡義壬辰。陽五世孫正字廷賢。遊寒岡門。廷賢七世孫源祚。判義禁。謚定憲。爲士林推重。孝純孫世仁。吏曹參議。六世孫尙䂓。守丙子義。稱崇禎處士。尙䂓子馥承旨。自餘簪纓世赫。文行輩出。爲世巨族。善德ⓟ之報。宜其裕後之人。撮其一二。謹爲銘曰。
惇倫之行根乎天。罔僕之志炳如日。無曰上焉而無徵。有此麗史若前人記述。嗚呼一片石守幽宮。勿壞傷永寧謐。
아, 공의 묘소는 선산(善山) 평성면(坪城面) 자도동(資道洞) 곤좌(坤坐) 언덕에 있다. 그러나 지난번 임진왜란 때 묘소를 잃었다가 정조 기해년(1779, 정조3)에 오구(五衢)의 징험으로 실제로 광중의 묘지석을 찾았지만 비석은 이미 넘어져 있었다. 금상 무술년(1898)에 비석을 새로 세울 것을 도모하여 후손인 만상(萬相)과 상사(上舍) 정희(鼎熙)가 나에게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는데, 내가 늙고 변변찮은 것으로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에 삼가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세보(世譜)에 의하면, 공은 타고난 자품이 강직하였고 문장과 학문이 모두 넉넉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1380, 우왕6)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문과에 합격하여 예무 좌랑(禮務佐郞)으로 승진하였다. 갑자년(1384, 우왕10)에 선발되어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었다.
또 《고려사(高麗史)》에 의거하면, 우왕(禑王)이 궁중에서 밖으로 나가 노는데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는데, 왕이 이여량(李汝良)을 불러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공무가 대단히 번거롭고 많을 것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각각 해당 관청으로 돌아가 자기 할 일을 하라.”하고는 드디어 남산(男山)으로 말을 달려 올라갔다. 여량이 뒤따르며 정리(鄭釐)와 함께 교대로 상소하며 간절히 충간하니, 충간한 내용의 대략에 “왜구들이 나라에 깊이 침략해와 서울을 염탐하니 자객과 간인(奸人)이 반드시 없다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영릉(永陵)은 충간의 말을 따르지 않다가 끝내는 악양(岳陽)으로 유배를 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서하고 개령(開寧 지금의 김천(金泉))의 대조동(大鳥洞)으로 물러나 일생을 마치니, 실로 금오산(金烏山) 야은정(冶隱亭)과의 거리가 서북쪽으로 10리이다. 문익(文翼) 정광필(鄭光弼)이 지은 바, 공의 5대손으로 이상(貳相)을 지낸 이항(李沆)의 비문(碑文)에 말하기를 “정언(正言) 여량(汝良)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정복주(鄭復周)공이 지은 인주공(仁州公) 여충(汝忠)의 묘지에 말하기를 “인주공은 동생 정언(正言)과 함께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히 도타웠다.”라고 하였고, 또 《성주지(星州誌)》에서 “이여량은 관직이 강원도 안렴부사(江原道按廉副使)에 이르렀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공의 치적과 이력의 대략인데, 세대가 멀고 아득하여 생몰의 연대와 날짜는 잃어버려 징험할 수가 없다.
공의 휘는 여량(汝良)이니, 시조는 고려 시대 사공(司空)을 지낸 능일(能一)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기에 자손들이 성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9대 뒤 익손(益孫)은 전공 판서(典工判書 공조 판서)를 지냈으니,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는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낸 배(培)이며 아버지는 서윤(庶尹)을 지낸 문광(文廣)이다. 어머니는 광산 탁씨(光山卓氏)로 판윤(判尹)을 지낸 천성(天成)의 따님이다. 공의 아내는 성산 여씨(星山呂氏)로 판서(判書)를 지낸 극회(克誨)의 따님이니, 묘소가 성주(星州) 화곡방(禾谷坊) 속동(涑洞)에 있으며 묘표(墓表)가 있다.
3남을 두었으니, 우(友)는 목사(牧使)를 지냈으며,선(善)은 생원이 되었으며,시(時)는 현감을 지냈다. 우의 아들 유구(悠久)는 사직(司直)을 지냈으며,양(陽)은 진사가 되었다. 선은 자식이 없고, 시의 아들 효순(孝純)은 사직(司直)을 지냈으며 효진(孝眞)은 참봉을 지냈다. 유구의 4세손 가선대부 운(雲)과 참봉 영(霙)은 모두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양의 5세손 정자(正字) 벼슬을 지낸 정현(廷賢)은 한강(寒岡)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다. 정현의 7세손 원조(源祚)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헌(定憲)으로 사림에게 추중을 받았다. 효순의 손자 세인(世仁)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며, 6세손 상규(尙規)는 병자호란의 절의를 지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일컬어졌다. 상규의 아들은 복(馥)으로 승지(承旨)를 지냈다.
기타 벼슬한 이가 대대로 빛이 났고 문행(文行)에 뛰어난 사람이 배출되어 세상의 거족이 되었으니, 선덕(善德)의 보답이 후손들을 넉넉하게 함이 마땅하겠다. 훌륭한 행실 중 한두 가지를 뽑아 삼가 묘갈명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惇倫之行根乎天 인륜에 도타운 행실은 천성에 근본하였고 /
罔僕之志炳如日 새 왕조에 벼슬하지 않는 절조는 해 같이 빛났네 /
無曰上焉而無徵 세월이 오래되어 징험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
有此麗史若前人記述 《고려사》와 전시대의 사람들이 기술한 것이 있네 /
嗚呼一片石守幽宮 아, 한 조각의 비석이 묘소를 지켜 /
勿壞傷永寧謐 무너져 훼손되지 말고 길이 평안하길 /
[주-D001] 오구(五衢)의 징험 : 잃었던 조상의 묘소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찾는 것을 말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기 때문에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뒤에 모친상을 당하여 오보(五父)의 거리〔衢〕에서 빈례(殯禮)를 행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들 거기에 장사지내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자가 잡은 상여끈은 빈례를 행할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추읍(郰邑)에 사는 만부(曼父)의 어머니에게 부친의 묘소가 방산(防山)에 있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그곳에 모친을 합장하였다.”라고 하였다.[주-D002] 禑 : 원전에는 ‘耦’로 되어 있으나 바로잡았다.[주-D003] 정리(鄭釐) :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382년(우왕8) 간관으로 있으면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 왜적의 침입과 흉년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구제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우왕 일행이 사냥을 하면서 민가에 자주 폐를 끼치는 것을 보고 다시 상소를 올렸으나 역시 묵살되었다.[주-D004] 영릉(永陵)이 …… 갔습니다 : 영릉(永陵)은 고려 시대 충혜왕(忠惠王)이다. 충혜왕이 조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충간의 말을 듣지 않으며 날마다 군소배들과 거리에서 노는데 전념하였다. 이에 원(元)나라에서 충혜왕을 불러들여 게양(揭陽)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왕은 가는 도중 악양(岳陽)에서 죽었다.[주-D005] 금오산(金烏山) 야은정(冶隱亭) : 금오산(金烏山)에 있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채미정(採薇亭)을 말한다.[주-D006] 정광필(鄭光弼) : 1462~1538.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이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주-D007] 이상(貳相) : 의정부 종1품 벼슬인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을 달리 일컫는 말이다.[주-D008] 이항(李沆) : 1474~1533.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호숙(浩叔), 호는 낙서(洛西)이다. 1496년(연산군2)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贊成)의 벼슬에 이르렀다. 김안로를 탄핵하다가 귀양 가서 사사되었다.[주-D009] 정복주(鄭復周) : 1367~?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사고(師古), 호는 죽당(竹堂)이다.[주-D010] 여충(汝忠) : 이여충(李汝忠)은 이여량의 동생으로 1377년(우왕3) 문과에 급제하여 인주 부사(仁州府使)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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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代祖考高麗左正言府君墓誌
이진상(李震相,1818~1886)
吾李以星山君諱能一爲初祖。勳銘崧陽之鍾。蹟著司倉之井。諱逸卷左尹,光演齊陵令,正臣太保,堅守ⓟ大卿,匡奉御正,立中少監,陽仁良溫令,宇唐贊成,葆同正,益孫工判,培禮判,文廣少尹。生諱汝良。天資剛直。文學贍博。洪武庚申。生員壯元。同年大闡。陞禮務佐郞。當辛禑初立。出遊無虛日。嘗幸嬖臣盧英壽第。百官陪從。禑召公謂曰臺省各司。公務浩繁。宜各歸治事。遂馳上南山臺。公與司議權近等從之。禑又召公曰何不從命。公遂與諫官鄭釐等。上疏極諫曰倭寇深入。草賊竊發。間諜窺覘京都。刺客姦人之變。安保其必無耶。永陵不從諫言。終有岳陽行。願以爲戒。禑不納。政堂以公能直言。選授司諫院左正言。出爲ⓟ江原道按廉府使。事見麗史。我國龍蛇亂。公私文籍盡灰燼。公之生卒行蹟並不傳。然鄭文翼光弼撰公仍孫貳相沆碑。明言公不仕本朝。開寧大鳥洞。相傳是公之遺墟。而墓在善山府南坪城資道洞坤坐原。與金烏山並十里而近。意者麗祚將終。炳幾早退。與吉冶隱先生同守罔僕節。沒世而無悔歟。配星山呂氏。判書克誨女。墓州東禾谷坊涑洞子坐。長子諱友。通政牧使。子陽進士。五世至正字廷賢號月峯。居星州。仲子善生員。季子時縣監。曾孫世仁號蓮潭。官吏議。貳相其子也。世恭中生進。其後有承旨馥號ⓟ陽溪。仍居開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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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代祖考高麗朝奉大夫司諫院左正言府君行狀
이승희(李承熙,1847~1916)
公諱汝良。始祖高麗大匡司空諱能一封星山君。遂貫焉。歷左尹逸卷,齊陵令光演,太子太保正臣,大卿堅守,奉御同正匡,檢校少監立中,良㬈令陽仁,政堂贊成于唐。至諱葆主簿,益孫典工判書,培禮儀判書。爲公高曾祖若祖考。考諱文廣平壤少尹。妣光山卓氏判尹天成女。光成君元光曾孫。今距公之世五百年。載籍缺。生卒月日無見焉。按世譜公天資剛直。文學俱贍。皇明洪武十三年庚申。生員壯元。同年文科。仍陞禮務佐郞。甲子政堂以公能直言。選授朝奉大夫司諫院左正言。州誌官江原道按廉副使。此始終履歷也。麗史王禑出遊無虛日。嘗抵嬖臣盧英壽第。百官從。禑召ⓟ禮務佐郞李汝良曰汝等慮予單騎出遊。扈從宜矣。安可每從街陌乎。臺省各司。公務浩繁。宜各歸治事。遂馳上男山。汝良與司議權近等從之。禑又召汝良曰何不從命。汝良與諫官鄭釐等交章諫曰倭寇深入。草賊竊發。間牒窺覘京都。刺客姦人之變。安保其必無耶。永陵不從諫言。終有岳陽之行。願殿下戒之。禑不納。此公立朝之蹟也。正明堂鄭公復周撰公伯氏仁州公墓誌曰與弟郡守公,正言公。事親極孝。友愛篤至。時稱三軺之慶。復覩於今日。盖以公九世祖大卿公有晨昏巷口三軺幷之詩也。此公處家之行也。鄭文翼公光弼撰公來孫貳相沆碑。述公事曰麗運旣訖。罔僕以終。此又公履變大節也。善州金烏山西北未十里許。有開寧縣大鳥洞。公遜荒舊基也。其東十里有善之坪城面資道洞坐坤原。公墓也。十五代孫震相采古而誌于墓曰麗祚將終。炳幾早退。從ⓟ吉冶隱先生罔僕以沒世。此則其影響之可追也。配星山呂氏判書克誨女。墓在星州東禾谷坊涑洞。有表石。生三男友晉州牧使,善生員,時山陰縣監。友子悠久司直。後居陜川高靈。陽進士後仍世于星。善無后。時子孝純司直,孝眞參奉。後居開寧尙州。六世孫參奉霙,七世孫正字廷賢,八世孫崇禎處士尙規。派流最蕃。玄孫吏曹參議世仁,九世孫承旨馥,十四世孫判義禁謚定憲公源祚最著名于朝。自餘簪纓文行。以鳴于世者踵相接。煩不能錄。今見在者殆千計。嗚乎。公孝友感乎人心。忠直犯于主顔。文章有以冠士類。謀猷有以贊廟筭。皆昭于簡編。垂美來世。厚德之庥。施及薪火。久而彌彰。亦足以徵公之仁矣。最其身當廢興之際。秉志不二。實有以樹綱常於百世。而卒泯晦其迹。不赫厥名。使後之尙德者。幾不能影響焉。其心愈苦而其事爲可恨。然公以麗代正言。沒身ⓟ而無與易也。其爲心已皦然如日矣。况鄭文翼先生一言。有足爲百世信史者乎。噫在公當日之心。猶恐人之或已知。在後之慕公者。乃必欲迹其事而彰其心。盖皆天理也。天豈可已乎。墓經壬辰大燹迷其處。正廟己亥。始得西之深目者而迹之。碑則爲逼葬者踣其半矣。誌惟官諱在。今上甲申。始更誌而納之。戊戌始克伐碑。求所以銘之者。不肖無識。奉父老命。僅因先君之誌。畧摭其可據者。庶立言君子。由是而知公之心。復博采而闡其幽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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