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벽 너머의 어머니
김지영
복도 저쪽 끝에는 부드러운 어둠이 서려 있다. 초겨울 오후 햇볕이 기어가듯 낮게 비춘다. 유리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은 긴 내부 통로의 반에 반도 못 미친다. 촉수 낮은 형광등이 네모난 콘크리트 동굴에 빛 안개를 내린다.
사람이 걸어 나온다. 보행 보조기에 의지한 채 느릿느릿. 옆에서 한 사람이 부축을 한다. 엄마. 2개월 만에 다시 보는 엄마다. 간호사가 모시고 나온다.
요양 병원 맨 밑층… 주차장 쪽에서는 그냥 걸어 들어갈 수 있는 1층이지만 병원의 정식 입구 현관 쪽에서 보면 지하층이다. 엄마는 3층 병실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층으로 내려오셨을 터이다. 나는 주차장에서 건물로 막 들어온 참이다.
엄마가 발걸음을 멈추신다. 얼굴이 환하다. 어스름한 햇볕이지만 안쪽의 어둠보다 밝은 탓이리라. 눈을 찡그리신다. 빛을 거스르며 서있는 내 얼굴을 알아보시는 데는 잠깐 시간이 걸린다.
“엄마.”
“이, 아들이네.”
엄마도 나도 한 걸음 다가간다. 그러나 멈칫. 엄마와 나 사이에는 유리 벽이 있다. 지난 번 왔을 때는 잠시나마 손도 잡아보고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도 했는데. 새로운 코로나 변종 오미크론 때문에 방역이 강화되었다 한다. 병원 환자와는 얼굴을 대고 만날 수 없다고. 그래서 병원에서 주차장 쪽 입구에 격리 면회실을 만들었다 한다. 어른 키보다 약간 높은 유리 문을 볼트로 고정시킨 격리막이 세워졌다.
엄마가 손을 내민다. 유리문에 엄마의 손이. 나는 그 손에 포개어 손을 댄다. “얘야, 손이 차다.” 우리가 유리문을 통해서 손을 ‘잡은’ 것을 잠시 잊으셨는지.
“성, 나여.” 나와 같이 엄마를 보러 간 이모가 엄마를 부르신다. 엄마가 한참을 바라보신다. “성, 나여 나.” 이모가 다시 엄마를 부른다. 울음기가 있는 목소리로. “잉, 동상.” 엄마가 그제서야 알아보신다. 이모는 엄마에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아들 보니 좋츄?” 엄마를 모시고 온 간호사가 엄마에게 묻는다. “그람, 우리 아들이 최고여.” “어머님이 우리 병원 최고의 코미디언이셔유. 말씀을 너무 재미있게 하셔유. ” 간호사가 말한다.
엄마가 이 요양병원으로 오신 지 벌써 8년. 이제는 병원을 ‘우리 동네’라고 부르신다. 기거하는 방은 ‘우리 집’, 방에서 나와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커다란 휴게실은 ‘동네 큰 마당’으로 생각하신다. ‘우리 집’에서 ‘동네 큰 마당’으로 가는 복도는 ‘고샅.’ 엄마가 사는 세계다. 바깥 세상의 일은 점차로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신다. 그래도 외아들인 나하고 대화를 할 때는 50년 전 일도 또렷하시다.
간호사가 시계를 본다. 다음 방문객을 위하여 면회실을 비워야 한다고. 엄마를 본 시간은 20분, LA에서 공주까지 걸린 시간은 20시간. 엄마가 다시 희뿌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신다.
2021년 겨울 한국 요양병원의 풍경.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가고 나면 그 세월 견디지 못한 어르신들은 어쩌란 말인가.
나는 바깥으로 나온다. 바깥에도 부드러운 어둠이 천천히 내려 앉는다. 엄마가 병실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상상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동네 큰 마당’ 그리고 ‘고샅’을 지나 ‘우리 집’… 5분도 안 걸리는 그 길을 세상 유람하듯 천천히 걸으실 터. 그 사이에 유리 벽 너머 ‘만남이 아닌 만남’은 잊어버리고, 어딘가 있는 아들만 생각하시겠지. 오늘은 엄마의 90세 생신이다.
김지영 / 변호사
2022년 1월 3일 미주 중앙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https://news.koreadaily.com/2022/01/03/society/opinion/202201031738113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