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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소송하시는 하나님 / 호 4:1-10
어느 유능한 젊은 변호사가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을 잘 변호하여, 무죄 석방되게 하였습니다. 법정을 떠나면서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앞으로 다시는 싸움에 관여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변호사는 그동안 쌓은 훌륭한 공적으로 인해 최고 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살인죄로 기소된 한 중년남자의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석에 서 있는 피고를 본 판사는, 오래 전에 자신의 성공적인 변호로 인해 무죄 석방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보고,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재판은 19일 동안이나 끌었는데, 판결은 유죄였습니다. 선고가 끝난 뒤 판사는 피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년 전에는 나는 당신의 구원자였으나, 지금은 당신의 심판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통해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떠났으며, 범죄를 일삼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판자로 심판하시게 되었는데, 본문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들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상 숭배자들의 말을 차별화하지 않았습니다. 다 좋은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다 들어두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말로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설교를, 좋은 말씀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서려면, 말씀의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말씀의 권세가 우리 심령을 사로잡을 때, 우리의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회중들이 말씀의 권위 앞에 벌벌 떨 때에, 대각성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소송을 제기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소송을 제기해서, 그들의 불법성을 드러내시고, 그 후에 그들을 이 땅에서 추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소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진실, 인애, 여호와를 아는 지식” 진실함이 있습니까? 책임지는 사랑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진실과 인애가 생활이라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신앙을 가리킵니다. 곧 생활과 신앙 모두를 진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특별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릇은 깨지거나 물이 새면 안 됩니다. 온전해야 합니다. 그릇이 온전하다는 게 무엇입니까? 서로 진실한 것입니다. 서로 책임지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다고 지적하신 첫 번째 것 ‘진실’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에메트’라고 하고, 신약성서에서는 ‘아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멘’이나 ‘에메트’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의 삶에 진실함이 묻어나야 합니다. 진실이란 다른 말로 서로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진실이란 말은 약속을 지키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진실함의 증표는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약속 받으셨던 것은, 철저하게 진실한 백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이나 체면보다는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짓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결국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멸망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 보다 진실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다고 지적하신 두 번째 것 ‘인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로 ‘헤쎄드’인데, 신약성서에서 제일 가까운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인애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애는 책임을 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책임지는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로만 했다면 별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십니다. 구원한다고 말씀하셨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하시고야 맙니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당신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임을 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다고 지적하신 세 번째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장성을 갖고 있습니다. 삶과 말씀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이 뒷받침될 때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성경에 대충 어떤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교세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의 크기에 그리 큰 관심 있어 할 거 같지 않습니다. 이건 사람의 관심거리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교인들이 서로 진실하고 책임지는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교회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에 대한 진실함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저 모였다가 흩어질 뿐입니다. 서로에 대해 애써 무관심해 하려고 합니다. 서로에 대해 책임지려는 자세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믿음의 식구라는 공동체 기능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만, 설교를 듣지만, 큐티를 하지만, 삶과 동떨어진 말씀입니다.
2절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고소를 당하는 구체적인 죄목들이 나옵니다.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하고 나니까, 그들에게 있는 것들입니다. 저주입니다.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것입니다. 속임입니다. 거짓말을 말하는데 아홉 번째 계명입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살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타살은 물론이고 자살을 포함합니다. 도둑질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짓으로 여덟 번째 계명입니다. 강도행위든 절도행위든 타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도둑질로 표현했습니다. 간음입니다. 부정한 성관계를 말하며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간음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간통과 음행입니다. 간통이 결혼하여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음행은 정조를 깨뜨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보다 포괄적으로는 음란한 짓 자체를 말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흐트러지고 희미해져가는 계명입니다. 포악입니다. 원뜻은 ‘찢다, 깨뜨리다’는 말로 폭력행위를 가리킵니다. 요즘엔 폭력도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복수입니다. “피가 피를 뒤이음”은 피 흘림의 행위가 뒤따른다는 의미입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릅니다. 이것들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어 걱정스럽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우리가 신기하기만 합니다.
3절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사람이 타락하면 자연이 탄식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니,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소득이 감소하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새벽까지 그물질을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힘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4절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은 아예 그들을 “내 버려둬라” 하셨습니다. 그들과 다퉈봤자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책망할 가치도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실 책망도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한테 합니다. 왜 책망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을까요?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종인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으면, 신앙은 끝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성도가 목회자와 틀어진 채, 좋은 신앙을 유지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회자와 다투는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가질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눈에 보이는 말씀 사역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주님을 잘 대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가장 막 되먹은 사람, 갈 데까지 간 사람, 책망할 가치도 없는 사람을 비유하여,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교인이 목회자를 존중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존경할 때, 그가 전하는 말씀의 권위가 서고, 은혜를 받을 수 있어서입니다.
5절 ‘너는 낮에 넘어지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넘어지리라. 내가 네 어머니를 멸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무지와 고집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가도, 이들만은 깨어 있어야 했습니다. 설사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도, 지도자들이라도 달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일반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악을 조장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앞당기는데 주역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율법 교사입니다. 율법을 해석하여, 그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죄를 예방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나 오늘이나 죄에 대한 가르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굳이 백성들의 마음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꺼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하는 직책입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직무를 더럽혔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번역했습니다. 제사장들을 “그 자랑스런 직책을 부끄럽게도 밥벌이로 만드는 것들”이라고 호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부패를 해도 희망이 있습니다. 경제 지도자가 실수를 해도 소망은 있습니다. 교육 지도자가 잘못을 해도 절망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가 진리에서 떠나면 희망이 절벽입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존경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내가 목사요” 하는 말이 쉽게 안 나옵니다.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한 성경지식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누구이고, 언제 태어났고, 몇 살에 죽고, 며칠 만에 부활했고 하는 식의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어로 “디아트”란 말을 썼는데, 그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얻게 되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 힘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는, 욕심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백성들을 제쳐놓고, 오직 자기들에게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참된 지식은 사람을 살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혼을 살립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원래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해서 고통이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그 문제를 해결 받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열방이 복을 받는 통로로 쓰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련하게도 지식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택하면, 다른 부분에서는 손해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손해 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다는 것은, 기억력이 나빠서 잊어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들을 하나님께 잡아매는 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끈을 슬그머니 놓아 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구속되기 싫어서,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놓는 순간,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 말씀을 거꾸로 읽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 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가까이 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붙들어 주리라.” 자녀들을 하나님이 가까이 해주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붙들어 주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7절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이 잘될수록 죄를 범했습니다. 번성할수록 범죄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욕심대로 살았습니다. 제사장이 많을수록 교회가 거룩해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직책을 부끄럽게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를 망신스럽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 7절을 보겠습니다. “이런 사제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나에게 짓는 죄가 많아진다. 그 자랑스런 직책을 부끄럽게도 밥벌이로 만드는 것들,” 무서운 말입니다. 종교인들이 많아질수록 죄도 많아진답니다. 제사장들은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속죄제물을 먹고 살면서, 백성들이 죄를 더 짓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의 관심이 평안함이나 부유함이 될 때,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배신하게 마련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수난’에 등장하는 포르투나스 선장은 마을의 사제를 보면서 이렇게 빈정거립니다. “저 걸신들린 인간이 사제라고? 그는 약방을 열어 놓고 그걸 ‘교회’라고 부르면서 신을 무게로 달아 팔고 있어. 무슨 병이든 다 고친다고 하지만 순 돌팔이지.” ‘그래, 무슨 일로 왔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좋아! 그리스도 3그램을 가져가게, 돈은 3피아스터야.’ ‘도둑질을 했습니다.’ ‘좋아, 좋아! 그리스도 4그램을 처방하지. 4피아스터만 내게. 그리고 자넨 왜 왔나?’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저런, 가여운 친구. 병이 아주 심각하군.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리스도 15그램을 복용하게. 돈이 좀 많이 들겠지만 말이야.’ ‘조금 안 깎아 줍니까?’ ‘안 돼. 15피아스터야. 돈을 내게. 그러지 않으면 지옥 밑바닥으로 직행이라네.’ 사제는 자기 가게에 있는 성상들을 보여 주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쇠스랑과 마귀들이 들끓는 지옥 얘기를 하지. 그러면 손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내고 말아…….” 사람들을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이끌기보다는 그들 속에 두려움을 주입하고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는 종교인들에게 대한 신랄한 조롱입니다.
주일 성수, 온전한 십일조, 전도, 헌신 등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들을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도울 생각도, 능력도 없는 이들로 인해 교회는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똑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 현실이 우리 믿음과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은 어리석은 교인일 뿐입니다. 생명이 속절없이 유린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늘 피해를 입는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녕 믿는 이들이라면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8절 ‘그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
제사장들의 구체적인 죄가 나옵니다. 원래 속죄제물은 제사장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속죄제물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식량으로 사용해야 할 만큼 궁핍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그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굿에는 관심이 없고 돈 챙기기에만 바쁜 무당과 다를 바 없었던 것입니다.
9절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너무 기막힌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머잖아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백성과 제사장 간의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거라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제사장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목회자만의 얘기로 들으면 안 됩니다. 직분자들이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존귀한 직분이니 잘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직분에 충성하여 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을 직접 다루십니다.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하나님은 당신이 세운 종을 직접 손보십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손보실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총대 매는 것을 자청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이고, 본인과 가정에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10절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손보실지를 예고하십니다. 먹으면 배가 불러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다. 음행을 해서라도 자손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래도 수효가 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되는 일이 없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외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리 못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은 말년에 치매가 와서,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자기의 나이도, 생일도 모르는 스승을 바라보던 제자가 답답해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지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심판뿐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있어야 할 것은 없으며, 없어야 할 것으로 채워져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이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비록 손해가 난다 할지라도, 있어야 할 것들로 갖추어야 합니다. 부디 없어야 할 것들에 관심 두지 말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로 채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잘 예배하고, 더 섬기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모쪼록 우리의 신앙 가운데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인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신앙의 소유자들이 다 되어서, 우리 중 한 사람도 하나님께 소송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느냐,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냐,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이 영광스러운 쪽으로 변할 수도 있고, 욕된 쪽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마지막에 다른 것 다 몰라도 좋지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내 구주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만큼은 알게 하옵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하고 무장하게 하옵소서. 나의 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잘 알아가면서, 하나님을 더 잘 예배하고 더 잘 섬기고, 더 잘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번성할수록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항상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쉽고 편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 호 4:11-19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천국에 갔는데, 천사가 큰 책을 그의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책에는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책을 들고 첫 장을 펼쳐 보니, 작은 글자로 가득 씌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어서, 무슨 글이냐고 물었더니, 그 내용은 “당신이 세상에 살 때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행동으로 지은 죄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둘째장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첫 장보다 더 작은 글씨로 가득히 씌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인가 다시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말로 지은 죄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입으로 지은 죄가,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셋째 장을 들여다보니 둘째 장보다 더 작은 글씨로 가득히 적혀 있어서, 천사에게 이 기록은 무엇이냐고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이것은 당신 마음 가운데서 생각으로 지은 죄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 한 장을 들추어보니 이번에는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기만 했습니다.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천사는 즉시 “이것은 당신 마음이요”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새까맣기만 한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서, 신령하고 거룩해 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인격적,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학자요, 정치가이요 사업가지만, 마음은 죄로 가득찬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17:9)이라고 했으며, 마태복음 15:19절에는 예수님께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하셨습니다.
더러운 마음이 어떻게 깨끗한 마음, 새까맣게 된 마음이 어떻게 하얀 마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육체의 더러움을 씻을 수가 있지만, 마음의 더러움을 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겔 36: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새 마음을 주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골 3:10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새 사람이 된 성도는 새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마음은 누구나 예수님의 보혈로 마음이 깨끗해졌습니다. 깨끗한 마음이란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 마음속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C.S 루이스가 쓴 대표적인 책 중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악마’를 대체로 희극적인 모습으로 상상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광기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그냥 먹는 것만으로 양이 안차서 폭식을 합니다. 술을 마셔도 그냥 마시는 것으로 양이 안차서 폭음을 합니다. 오토바이를 타도 그냥 달리는 것으로 성이 안차서 폭주족이 생겼습니다. 광기의 시대입니다. 광기의 시대는 열광의 시대입니다. 매니아 시대요, 중독의 시대입니다. 컴퓨터 매니아, 자동차 매니아 등, 매니아 시대입니다. 일중독, 게임, TV, 담배, 도박, 사이버, 인터넷, 술, 폭력 중독 등, 중독투성이입니다. 그냥 문화적 현상이거니 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지나칩니다. 광기는 창조의 에너지가 되기도 합니다. 예술가의 광기는 창조의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삐뚤어진 광기는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영혼까지도 타락시킵니다. 히틀러의 광기는 세계를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런 광기의 시대에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 광기가 어디에서 온 광기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미쳐도 바로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그 서문에서 악마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 인류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믿는 것입니다. 벧전 5:8-9절하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사탄은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를 미혹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미혹의 시대를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하나님 앞에 시간 드리기를 싫어하고, 다음은 물질 드리기를 싫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 보다, 가까운 길갈이나 벧아웬에 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곳이 가까울 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데 부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고할 필요도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릴 필요도 없고, 제사의 마지막에 여사제들과의 황홀한 시간 때문이었습니다.
11절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아간 것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여전히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은 음행과 포도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음행과 포도주는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스스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하며, 이제는 농사가 절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농사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만한 것은,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 것도 아니고, 메추라기를 몰아오시는 것도 아니니, 순전히 자기들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농사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햇빛과 비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비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장마 그러면 “아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성경에서는 “복된 장마비”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비에 대한 고대는, 과히 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를 내리게 할 수만 있다면, 죄를 지어도 좋고, 하나님을 떠나도 상관없고, 음행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술에 미치면 집도 제대로 못 찾아갑니다. 음행에 미치면 아내와 남편, 자식도 못 알아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2절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어디로 갔습니까? 세상이나, 나무에게 물었고, 막대기에게 고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나무나 막대기는, 아세라나 아스다롯 같은 여신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눈으로 보면, 이것들은 한낱 나무나 막대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나무나 막대기에게 찾아 갔을까요? 사람들이 왜 우상에게 복을 빌까요? 그게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네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대해 묻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신앙입니까? 얼마나 쉬운 신앙생활입니까?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삶과 연관된 예배를 원하십니다. 예배하러 오기 전에 ‘네가 어떻게 살았느냐’를 묻습니다. 예배드릴 만한 삶을 살았느냐를 물으십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내 속에 있는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사실 그건 꽤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고 편한 우상에게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절기 때만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어쩔 수 없어서, 실수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어서 이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이 길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 발로 우상에게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음란이 꽉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의 축제가 그들의 생각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하나님은 얼마나 따분하겠습니까? 그런 즐거움이 없습니다. 광야에서야 하나님이 없으면 당장에라도 죽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아도, 당장에 그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란 존재는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13절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산들이 작고 큰 나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큰 나무들을 아주 신성하게 생각했습니다.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풍년 제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14절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그런데 야외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음행을 일삼았습니다. 젊은 여자들이 앞 다투어 음행했습니다. 말이 제사지 항상 중심에 섹스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토록 우상 숭배를 말리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생각해서입니다. 그들의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를 얽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해서, 우리를 맘대로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걸 알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범죄자가 있으면, 출애굽기부터 여호수아까지는 반드시 골라냈습니다. 그 죄인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슬픈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제는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죄가 너무 만연해서, 몇몇 사람을 가려낸다고 해서, 공동체가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이 한두 사람일 때는, 그 죄인을 솎아내서 공동체를 깨끗하게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이 죄인일 때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젊은 여자들만 탓할 수 없는 게 남자들도 똑같았습니다.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남자들은 창기와 함께 놀아나고 음부와 함께 붙어 다녔습니다. 그들이 희생을 드리지 않아서 문제가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른 예배를 원하십니다. 바알에게 드리는 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제사떡 못 얻어먹어 굶어 죽으실 분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예배를 얼마나 많이 드립니까? 그 많은 예배 중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우리의 삶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 바깥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의 삶이 딱히 문제 없을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삶 같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신앙을 삶의 여러 영역 중에 하나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취미 생활, 등 여러 생활 중에 하나로 신앙 생활을 보니 문제입니다. “음행을 하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내 신앙양심을 팔지 않고도,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인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뭐라 답하겠습니까? 포도주와 곡식은 가나안 땅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취직하고 승진하고 직장생활하는 것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세상에 적응하기에 급급해서, 그들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원리가 세상 사람들의 원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그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쉽게 살려고 해서 문제가 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면, 편할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먹히고 맙니다. 신앙인이 세상 방식대로 살아서는, 절대로 그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전체를 에덴동산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상을 에덴처럼 경작하고 창조해 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삶의 터전을 개척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터를 에덴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낙원으로 꾸며가야 합니다.
15절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이스라엘은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행음하고 사는 것은 좋지만, 왜 유다까지 그런 식으로 범죄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유다만이라도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고로 이웃을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유다는 이웃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다도 이웃인 이스라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유다마저도 이스라엘의 못된 제사방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웃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이처럼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잘 골라서 사귀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웃은, 할 수 있으면 멀리해야 합니다. 목회자에 대해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이웃은, 멀찍이 경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내 신앙에 유익을 주는 이웃이 못 됩니다. “이 사람은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길갈과 벧엘은 그 동안 좋은 이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뜻깊은 곳들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했던 곳입니다.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할례를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넘어와서, 그들에게 가장 꺼림칙한 것은 바로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을 눈앞에 두고 할례를 실시했습니다. 애굽에서의 죄의 흔적을 청산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던 죄의 흔적을 잘라서 굴려보냈다고 해서, 그곳 이름이 길갈입니다. 벧아웬은 벧엘의 별명입니다. 벧아웬은 우상의 집이란 뜻이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신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뜻깊은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길갈과 벧엘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두 곳이 음란한 예배의 본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때 유명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길갈과 벧아웬에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을 더럽히는 것들은 일차적으로 멀리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보지도 말고 생각도 말고 관심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길갈과 벧아웬으로 올라 간 이상, 어떻게 할 재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길갈과 벧아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 가지 말아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장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허풍떨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기의 죄를 얼버무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죄와 세상을 이길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16절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그들을 먹이시겠느냐?’
고집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고집은 하나님도 못 말립니다. 한 번도 멍에를 맨 적이 없는 암소는, 모든 것이 제 멋대로입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한번 가야겠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때리고 꼬리를 잡아당겨도 무조건 갑니다. 코를 뚫지 않고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반면 양은 다릅니다. 물론 좀 늦게 오는 양도 있고, 놀다 오는 양도 있지만, 결국에는 따라 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목양입니다. 양떼를 넓은 들판에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입니다. 결코 양의 코를 뚫어서 몰고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에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십니다. 결코 노예 근성에 젖어 굴복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기도하라고 해도 죽어라고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간 조상이라도 있는지, 이 핑계, 저 핑계, 기발한 핑계를 대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암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목사는 목자지 카우보이가 아닙니다.
17절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우상과 연합하고 아예 우상과 하나가 돼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겠다고 합니까? 우상과 짝짝꿍으로 놀아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고 합니까? “버려 두라.” 우상을 섬기면서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갈등하는 빛도 없으니, 하나님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8절 ‘그들이 마시기를 다 하고는 이어서 음행하였으며,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죄짓는 데 용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기를 돌같이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셨습니다. 그럼 지도자들이라도 깨어 있었습니까? ‘그들은 부끄러운 일을 좋아하느니라.’ 지도자들이라도 백성들의 수치를 하나님 앞에 갖고 나가 회개했습니까? 그들 역시 그 부끄러운 일을 좋아했습니다.
19절 ‘바람이 그 날개로 그를 쌌나니, 그들이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내리신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날개로 싸서 다른 곳에 버려야겠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그 날개로 싼다”는 것은, 바람이 그들을 그대로 싸서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잡혀가서 고난을 받아야, 비로소 말씀앞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지, 지금 이 상태로는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통 음행과 포도주에 취하여, 말씀이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우상과 한치의 틈도 없이 연합한 그런 상태입니다. 그들은 결코 그들이 누리고 있고, 먹고 있고, 입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번 맛 본 음행과 포도주의 맛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말씀을 포기했고, 그들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완강한 암소 같습니다. 목자가 불러도 반응이 없습니다. 자기가 한번 하고 싶으면, 결국 가고 싶은데 까지 다 가고야 맙니다. “그 제물로 말미암아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 많은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지만, 그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손을 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뒤를 봐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관심조차 갖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업이 신통하지 않고, 장사도 안 되고, 회사에서도 힘들고,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신앙을 슬쩍 버리고,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고민한 적 없습니까? “세상에는 신앙이 안 먹히는구나. 신앙이 교회에서는 통해도 세상에서는 안 통하는구나.” 하고 좌절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러다 신앙의 형식만 남은 채,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기도는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지는 않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편한 방식을 따라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쉬운 것에 따라 줏대 없이 이리 저리 밀려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쉽고 편한 길이 위험한 길일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다른 사람이 쉽게 살면서 잘 사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길이 넓을 리가 없습니다. 길이 좁고 좀 힘들어도, 좀 불편해도,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걷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귀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악한 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거하지만,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한 성령의 사람으로서 승리의 삶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또한 말씀을 목숨처럼 붙드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소와 기다림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를 향한 강한 경고와 책망을 겸손히 받아들여, 성결해지고 거룩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