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는 아니야 / 곽주현
며칠간 날씨가 쾌 춥다. 지금 머무는 곳이 남쪽 항구 도시라 바람이 많아 더 움츠리게 한다. 이럴 때는 손주들이 다니는 유치원이 멀어서 걱정된다. 그런데 코로나가 크게 번져 등원하지 말라 했단다. 그러나 맞벌이 부부 등으로 인해 (부모가 맞벌이라는 이유 등으로)가정에서 머물 수 없는 애들은 ‘긴급 돌봄’은 할 수 있다고 한다. 가정에서 알아서 선택하라는 말이다. 이럴 때는 보내야 할지, 집에 머물게 해야 할지 살짝 고민이 생긴다. 부모의 의중이 중요한 변수다. 애들 엄마가 한참 망설이더니 우리를 쳐다본다. 유아는 전염력이 낮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하루에 수만 명이 확진되고 있으니 언제 어디서 감염될지 몰라 두려워진다. 집에 두면 할머니, 할아버지 부담이 커서 눈치를 살피는 거다.
더 망설일 것도 없어 안 가도 좋다고 말하니 “할아버지 최고.”라며 두 녀석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안긴다. 손주가 예쁘고 귀엽기는 하지만 온종일 그들의 시중을 들며 지내야 하는 것 또한 피곤한 일이다.(하다) 둘이 잘 놀아서 별로 해줄 것이 없지만 그래도 하루 내내 지켜보는 일은 꽤 힘이 든다. 젊은 엄마들이 가끔 육아로 인해(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며칠 전까지도 집에 있는 것보다 등원하는 게 더 좋다고 하더니 무슨 이유인지 안 가고 싶어 한다. 갈아입지도 않고 잠옷 그대로 블록 장난감을 꺼낸다. 누나는 인형을 만들고 동생은 로봇을 조립하기 시작한다. 노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누가 여자이고 남자애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점심을 먹고 또 다른 블록을 방바닥에 내린다.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놀기에 아내와 차 한잔하고 돌아보니 큰아이만 있고 작은놈이 보이지 않는다. 잘 놀다가 가끔 숨바꼭질한다며 옷장이나 커튼 뒤에 숨는 것을 좋아해서 이곳저곳을 찾아봐도 없다. 할머니 방 이불이 볼록하기에 들쳐 봤더니 둘째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잠이 들었다. 이 녀석은 잠이 와도 투정 부리는 일 없이 아무 곳이나(에서) 누워 잔다. 참 별놈이다. 첫돌 이후로는 혼자 잠들고 일어나서도 칭얼대는 일이 거의 없다. 손주를 여럿 키웠지만, 이런 순둥이는 없었다. 누가 들으면 이놈만 편애한다고 입을 삐죽거릴 것 같다. 뭐 그게 꼭 좋은 성장 과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두고 볼 일이다. 혼자 남은 누나는 심심하다며 밖으로 나가자 한다. 날씨가 춥고 코로나 때문에 갈 곳이 없다. 이 애는 낮잠을 자는 날이 없다. 같은 핏줄이면서 이렇게 다른가 싶게 아무리 피곤해도 눈을 깜박거리며 버틴다.
밖으로 나왔다. 하얀 외투를 입은 손녀의 모습이 선녀처럼 예쁘다. 딱히 갈 곳이 없어 10여분 걸어서 롯데마트에 갔다. 그곳은 따뜻하고 아이들이 구경할 게 많아 가끔 가곤 한다. 기분이 좋은지 내 손을 꼭 잡고 무어라 쫑알대며 따라온다. 둘만 이렇게 외출하는 일이 처음이어서 몰래 데이트하는 기분이다. 마트에 들어가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어차피 시간 보내기 위해서(보내려고) 왔으니 서두르지 않는다. 장난감 판매대에서 손녀가 원하는 것을 찾으니 이미 동나고 없다. 인기 있는 것은 이렇게 빠르게 팔린다. 뿌루퉁한 애를 겨우 어르고 달래서 다른 것을 골랐다. 왕관 머리띠를 쓰고는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집에 황금색, 은색, 분홍색 등 머리띠가 여러 개 있는데 또 골랐다. 유치원에 가려면 그것들을 날마다 바꾸어 가며 이리저리 거울에 비추어 보고는 제 마음에 들어야 가방을 멘다. 지켜보던 할머니는 크면 얼마나 멋을 내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킥킥 웃는다.
선물이 없으면 지원이가 골낸다고 조르기에 탱탱공도 샀다. 누나다(라)고 동생을 꼭 챙기는 걸 보면 기특하다. 기분이 좋은지 집으로 오는 아이의 발걸음이 통통 튄다. “할아버지가 제일 좋다.”며 엄지 척을 한다. “나도 도은이와 데이트하니까 무척 기쁜데.”라고 대꾸하니 “이건 데이트가 아니야, 그냥 산책이야.” 하며 나를 쳐다본다.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이다. “그러면 데이트와 산책이 어떻게 다른 거야?” “좋아하는 남자와 여자가 손잡고 차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는 게 데이트고, 산책은 그냥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는 것이야.” 이제 겨우 만 여섯 살배기가 이렇게 말하니 감당을 못 하겠다. 어이가 없어서 한참 그냥 걷다가 “그러면 도은아, 네가 커서 첫 데이트 하게 되면 할아버지에게 꼭 말해 줘. 이건 숙제야.”라고 말하니 녀석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꼭 그러겠다.” 한다.
그 후 봄과 가을이 바뀌고 바뀌었다.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더니 2035년 3월에 대학에 입학했다. 스무 살 꽃 나이다. 제 엄마의 그때 모습과 똑 닮았다. 더 예뻐지고 풋풋한 들장미 향이 나는 것 같다. 5월 축제가 열리고부터는 얼굴 보기가 어렵다. 피곤도 하련만 늘 생기가 돈다. 요즘 들어 부척 멋을 더 부리고 거울 앞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오늘도 귀가가 늦어져 걱정하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한다. 손녀딸이다. 방으로 들어서더니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겉(곁)에 앉는다. 할 말이 있다며 수줍게 웃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된다.
이제야 숙제를 하게 되었단다. 아이를 만나면 가끔 그 일을 말하며 웃곤 했는데 잊지 않았나 보다. 내일 드디어 데이트한다고 말한다. 똑똑하고 잘 생겨서 할아버지도 맘에 들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들떠서 꽤 큰 소리로 말하는데도 잘 들리지 않아 몇 번씩 되물어야 했다. ‘구순(九旬)이 다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상상이 현실로 맞을 수 있을까? 어쩌면 네(‘네’) 데이트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곳에 있을 수도…. 그러나 어디에 있던(든)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