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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노동 -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이수영 옮김, 자음과모음 2022.
Pseudoarbejde: Hvordan vi fik travlt med at lave ingenting
문제는 개인이 아니다
그래도 벌처버는 개인보다는 시스템에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부조리한 시스템에 갇힌 인간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할 때가 많다. 혹은 상식이 별 소용 없는 환경에 맞춰 현명하게 행동하려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매우 열심히 일하지만 보다 넓은 시야에서 자기 일을 바라보고 그 일로 뭔가 변화가 있었는지 자문하게 되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벌처버를 보고 도발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벌처버는 사람들이 갑자기 한가해지거나 잘리면 종종 자기 상황의 무의미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데 주목했다. 쳇바퀴가 계속 도는 한 자기가 무의미하게 바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진짜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 “어쩌면 그런 깨달음을 따라가 논리적 귀결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겠죠. 다 그만둘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짜 노동은 회사와 조직이 보상을 주는 뒤틀린 거울방에 의해 유지될 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자존감과 자아상에 깊이 뿌리내려 유지되기에 웬만한 도전에 꿈쩍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터뷰 대상이 가짜 노동에 홀리지 않은 이유는, 결국 인간은 뭔가 유용하고 의미 있고 진짜인 일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다만 이런 갈망이 이제는 유별나다고 취급되는 것뿐이다. 누가 돈을 주겠다고 하면 하는 게 일이라는 통념이 널리 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츠 알베손이나 데이비드 벌처버나 이 책의 저자들에게, 이런 문제를 대신 제기해줘서 감사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끝없이 가짜 노동을 반사해내는 거울방에서 일하며 직장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같은 외부의 관점은 그들이 동조자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이 모든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보이는 게 나뿐이야?’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던 사람들 말이다. 아무 보람도 결과도 없이 직장의 요구에 맞추느라 공허감, 무기력, 무의미에 침식당해 부적응자가 되어가는 개인들을 우리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일이다.
노동의 동기들
인간은 왜 일하는 걸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저 가짜 노동을 청소하는 것보다 더 복잡할 것이다. 자칫하면 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대강 잡아놓은 개념을 이용하면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1.생존: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일한다. 생물학적인 대답이다. 이를 확장하면 가장 상식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2.돈: 문명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수단으로 바꿔놓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된 것이다. (이 내용은 나중에 더 깊이 다루자. 여기선 인간이 일하는 이유에 대한 다른 대답도 더 내놔야 한다. 우리는 이미 더 진전된 대답 두 가지를 다뤄봤다.)
3.본질: 인간의 ‘본질’이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행위를 수행하도록 요구하기에 인간은 일한다.
4.적응: 노동은 ‘적응의 방식’이다. 그래서 인간은 지배적 정상성을 받아들이고 일자리를 얻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우리가 가짜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다음과 같은 반대 주장에 부닥쳤다. “그래서 내가 회사에서 하는 일이 정말 가짜 노동이라 칩시다. 하지만 난 가족을 위해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비싼 동네에 주택 담보대출이 잡혀 있어요. 그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문제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1, 2, 4번의 생존, 돈, 적응과 같은 이유다. 하지만 3번 이유는 달라 보인다.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우리는 우리 생각보다 더 뛰어난 대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 그만두고 자연인으로 사는 것보다 좀 덜 급진적인 뭔가를 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우려를 제기하고 시민적 불복종을 실천하고 일에 간섭해 의미 있게 만들거나 좀 더 성취감 있는 직업을 위해 재훈련을 받는 건 어떨까?
인간이 일하는 다른 이유도 더 살펴보자. 인간의 동기는 생존과 정상성에 대한 욕구보다 더 깊은 곳에서도 존재한다.
5.타인의 인정: 인정 이론은 앞서 개괄한 유기적 상호작용 이론과 관련이 있다. 인정이란 아이가 부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엉성한 찰흙 덩이를 가리키며 ‘내가 만들었어’라고 선언할 때 추구하는 것이다. 인정의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는 사회가 내가 한 노동을 알아줄 뿐 아니라 그에 가치를 할당하는 것이다. ‘타인’이 내가 만든 것을 필요로 하여 사용하고, 그럼으로써 내 노동의 ‘가치를 알아준다’.
이는 또한 실업이 사람을 그토록 취약하게 만드는 이유와 사람들이 자원봉사 하려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2장과 10장에서 보았던, 충분한 일을 가지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고통, 내가 잉여의 존재라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일부 설명해준다.
불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은 물론, 가짜 노동의 인지와도 관련이 있다. 이는 물론 허위-유기적 상호작용의 인지다. 예를 들어 원하지 않는 일자리에 지원하거나 아무도 읽지 않는 설문 조사, 홍보 활동을 하고 기사와 보고서를 쓰거나 순전히 형식적인 자문 역할을 수행하고 발표하는 것이다. 시스템상 그 일을 해야 하고 심지어 인정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굳이 읽거나 자기 행동을 바꾸거나 하지 않는다. 그 일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상관없는 것이다. 이것이 14장에서 줄리의 보고서가 겪었던 일이다.
기껏해야 허위 의견을 좀 중얼거리고 깃발 좀 휘날려주고 행사 한번 하고 발행 지침과 반응 횟수에 칩착한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다. 그러고 나면 허위 인정까지 무사히 받았어도 결국에는 개인의 자존감을 갉아먹힌다. 그럼에도 데이비드 벌처버와 코린느 마이어처럼 감히 폭로하고,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이 무의미하고 불필요 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여전히 매우 드물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그들의 본보기를 따르기를 바란다.
만일 가짜 노동이 이 책에서처럼 흔하다면 폭로자가 왜 그렇게 적을까? 가짜 노동이 생활비를 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가짜 노동이 표면적이나마 노동과 닮았고 노동자에게 사회적 승인을 얻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가 이런저런 자문을 해주는 컨설턴트이고, 여러 경험을 쌓았다면 내 쓸모에 대해 멋진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저 가짜 노동이었다고 인정하면 나는 게임이나 벌이며 인생을 낭비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다. 더 나쁘게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까지 낭비하게 했다는 뜻이 된다.
데이비드 벌처버가 지적했듯, 다른 분야에서 인정을 얻어낸 후에야 이런 인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 자신이 이전에 즐겼던 인정은 완전한 헛짓거리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고 인정할 준비가 될 것이다.
6.자신의 인정: ‘인정에 대한 갈망’이 꼭 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아마, 자신의 행동이 결국 부모에게 결과를 보여주고 칭찬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일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서 사랑과 보호를 얻어내기 위한 방식이다. 내가 일해야 아빠가, 엄마가 나를 좋아할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부모가 상사 혹은 평가자로 대체된 후에도 이런 심리적 기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일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돈 받는) 일을 할 때만 가치 있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일을 빼앗아 가거나 근무시간을 줄이는 사람은 자존감에 위협이 된다. 우리를 해방시키려는 시도가 위협이 되는 것이다.
결국 바쁘지 않다고 인정하는 사람, 더 의미 있는 일을 요구하는 사람, 즉 금기를 깨는 사람은 주변에 위협이 된다. 상사가 임금을 내려도 되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등의 일반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동료들 내면에 존재하는 상사를 깨우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가 왜 여전히, 아무도 감시하지 않는 집에서조차 그렇게 많이 일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될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은 무서운 감독관의 위협이 있었기에 그렇게 일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만 어쩌면 지금도 우리 내면에는 그 노예 감독이 계속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주말 근무는 상사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건지도 모른다.
7.청교도적 노동 윤리: 1장에서 우리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유명한 테제, 청교도주의와 특히 칼뱅주의가 자본주의의 주요 추진력이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했다. 청교도 교리는 ‘죄의 고백과 내 탓’보다는 예정설에 기초하고 있다. 예정설이란 인간의 구원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태와 무관심이 만연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된 자 가운데 하나라는 증거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업에 성공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으로 가는 올바른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징후다. 베버에 의하면 칼뱅주의의 이런 신앙과 직업윤리가 자본주의를 진척시켰다. 이런 동기 부여는 더 이상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청교도의 직업윤리는 서구 문화에 통합되었다. 게으름은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이 믿음이 서구 문화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 잡았는지 알고 싶으면 아프리카에 가보라. 그곳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에 일반적으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상점에서는 직원이 계산대 너머로 친구와 신나게 수다 떠는 동안 손님들은 참을성 있게 줄 서서 기다린다.
8.대안의 부재(혹은 가장 덜 나쁜 선택지): 인간이 노동하는 여덟 번째 이유는 달리 뭘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휴가 기간에 병에 걸린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있느니 직장에 있으려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가족을 만드는 것보다 일하기를 택한다.
인간이 일하는 이유 3번으로 돌아가서, 인류의 본성이자 유기적 상호작용으로서의 노동 개념을 생각하면, 일 자체는 아무 잘못이 없다. 잠수, 즉 물과의 상호작용을 좋아하는 사람이 타인을 가르침으로써 자신을 외부화하고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도 좋아한다면, 잠수 강사가 되어도 잘못은 없다. 전통적으로 자원봉사도 바로 이런 식으로 추진됐다.
문제는 일이 더 이상 세계와의 유기적이고 본질적인 상호작용이 아니게 되고, 다른 본질적 상호작용을 대체하면서 시작됐다. 즉, 할 일 없음의 공포를 막기 위해 본질적이지 않은 일을 더욱 많이 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라기보다는 불안 관리 전략이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홉 번째 이유에 도달한다.
불안을 덮는 가짜 노동
9.불안 저지하기: 보통 연금 수령 나이가 되면서, 할 일이 적어지는 세상이 두려워지는 인생의 특정 시점이 온다. 그런 인생의 단계에서 조금씩 속도를 늦추고, 죽을 때까지 일하려는 게 아니면 다른 활동 탐색을 시작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직업 생활 말기에 도달하기까지 이런 통찰을 무시하고 단지 공포를 피하려고 그렇게 많은 가짜 노동을 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인정 차원에서 노동의 허위적 본성을 지적하는 것이 격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꽤 이해할 만하다. 파워포인트 발표, 보고서, 가치 체계, 전략, 자문, 다자 검증을 거친 논문 같은 모든 것이 인정받을 가치가 없다는 말이니까. 그러므로 노동의 허위적 본성을 지적하는 행위는 단지 직업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이는 거의 존재론적 고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러셀, 케인스, 로이드 라이트에게 다소 당황스러운 톤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노동시간을 3분의 2로 줄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자유 시간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우리의 공포를 억제할 수많은 가짜 노동을 발명했다고.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인구 집단, 하나의 사회 혹은 인류 전체로서의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엄청난 가능성의 대부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로봇화와 함께 도래할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산업 시대 패러다임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 정보산업, 거대한 3차 노동시장 역시 만들어냈다.
우리는 모든 노동 활동을 산업 시대에 갇힌 허위 형성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데 투자할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성을 위해 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논의를 세 가지로 나눠볼 것이다. 개인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조직과 관리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사회전체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본인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거나 남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하다면 여기서 읽기를 멈춰도 된다. 하지만 우리처럼, 독자 여러분도 만일 인생에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방식이 존재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계속 읽기를 바란다.331-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