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교구 총대리 손삼석 주교 특강]
. 서울대교구 개포동 본당이 무려 4년 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행적을 그대로 순례를 하고 2008년에 책으로 낸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하는 중국 순례”라는 책,1) 정양모, 윤종국 신부가 번역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2007, 가톨릭출판사)괴 정양모 신부가 번역한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2007년 가톨릭출판사) 등이있다.
개포동 본당에서 오랫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님 현양사업을 한 것을 알고는 본당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자료가 있는가’ 하고 부탁을 했더니 사무장님이 그 본당에 있는 모든 자료들을 보내주셨다.
‘착한 목자 브뤼기에르 주교’(2005년),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2005년),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의 징검다리’(2006) 등의 책과 각종 CD를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이런 책들과 자료들을 읽고 브뤼기에르 주교님에 대해 정리하였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브뤼기에르(Bruguiere Barthelemy, 1792~1835)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나르본 읍 근교 레삭 마을에서 프랑수아와 테레즈 부부의 열한 번째 자녀로 출생하였다. 그는 나르본 읍에서 서북쪽으로 200여 리 떨어진 카르카손 읍에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 과정을 마치고(1805~1814년) 1815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았다.2)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하신 후 어느 지기가 주교의 성덕을 기리고자 프랑스어로 쓴 글 두 편이 카르카손 교구청 고문서고에 있다. 첫째 글은 그분의 출생부터 카르카손을 떠나기까지의 생애를 적은 약전이고, 둘째 글은 그가 카르카손을 떠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이별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송별기이다.3) 그 글에 보면 브뤼기에르 신부의 외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키가 좀 작고, 몸은 호리호리하며, 금발에 얼굴빛은 적동색이었다. 우리는 그의 열심과 많은 재능과 크나큰 양식(良識)을 우러러보았다. 그는 의지가 너무도 강하고 독립성이 대단하여 그 장상이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브뤼기에르 신부가 주교가 된다면 그의 표어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일 것이다. 거기에다 또 놀라운 고신극기를 들어야 하겠으니, 그가 프랑스에서 지낸 마지막 해에는 거의 빵과 물로 목숨을 이어 나갔고, 아무리 충고하여도 은수자와 같은 이 식사를 바꾸지 아니하였다.”4)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초상화를 봐도 강한 인상을 받는다. 꿰뚫어 보는 듯한 파란 눈, 우뚝 솟은 코, 꽉 다문 입술, 구릿빛 얼굴은 그분의 강인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사제서품 이후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1816년에서 1825년까지 모교인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교직은 보기 드문 성과를 거두었다고 달레 신부는 증언한다.5)
아시아 선교를 너무나도 갈망한 나머지,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입회 전 1825년 9월 8일 사목지였던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에서 고향 레삭에 사는 부모에게 고별 서한을 보낸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선교사 파견 전 고향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부모에게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은 다음 아시아로 떠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는 카르카손에서 1825년 9월 8일 역마차를 타고 파리로 떠나는 날 이 편지를 보냈다.6)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에 있는 첫째 편지이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하는 부모님께,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제까지 지상에서 아낌없이 사랑해온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부모님께 이 서한을 올립니다.” 그러면서 편지 맨 마지막에는 “저희가 이 세상에서 잠시 헤어지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하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사실 그 시절엔 아시아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대부분 살아서 귀국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순교하거나 병사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신부는 부모가 신앙의 힘으로 생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다섯 달 가량 머물면서 선교사 훈련을 받는 동안에 어머니(2신)와 부모(제3신)에게 두 차례 서한을 작성했다. 신부는 가족 친척들에게 두루 인사하면서 신앙생활에 충실할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3신).
훗날 어떤 이가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이 괘씸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연로한 아버지가 체념하듯 대꾸한 말이 걸작이다. “그럼 어쩝니까, 그 얘가 나보다 하느님을 더 좋아하나 봐요. 옳은 일이지요.” 여기에 정양모 신부님은 한 마디 덧붙인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다!”7)
그는 다섯 달 가량 선교사 연수를 이수한 다음 샴(오늘날 태국) 선교사로 발령을 받고 1826년 2월 말경에 보르도 항구를 출발하여 자카르타, 마카오, 싱가포르를 둘러본 다음 1827년 6월 4일 샴 수도 방콕에 도착했다. 거기서 64세 나이로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연로한 대목구장 에스프리 플로랑(Esprit Florens, 1762~1834) 주교를 보필하며 교구청 일과 방콕 본당 사목에 힘쓰는 한편, 20여명 남짓한 신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2.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기까지의 역사적 배경
1) 조선천주교회의 목자에 대한 목마름
1801년 신유대박해로 말미암아 조선천주교회는 유일한 목자 주문모 신부를 잃어버리고 다시 목자없는 고아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신유대박해의 폐허에서 제기한 조선 교회는 1811년 말 동지사 편에 밀사들을 파견하였다. 밀사들은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갔다.(신태보 베드로, 권기인 요한, 이여진 요한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조선 교우들은 선교사의 조속한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파견문제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소심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10여 년의 세월이 헛되이 흘러갔다.
이에 조선 교우들은 또 다시 교황에게(1825년으로 추정되는) 서한을 보내고 거기에서 선교사의 파견을 재촉하였다.(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조신철 가롤로의 이름으로) 이번에는 소기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포교성은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의 “조선에 필요한 것은 조선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수도회이고, 또 조선 선교지를 북경 교구에서 분리 독립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라는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조선 교우들의 서한은 1827년에야 로마에 도착하였으므로 수도회와의 교섭은 이 해에야 시작되었다. 포교성은 처음에 예수회에 조선 선교를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파리외방전교회에 이를 제의하였다.
2) 포교성 제의에 대한 파리외방전교회의 망설임
1827년 9월 1일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까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은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아(Langlois)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장차 설립될 조선 교구 전교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9월 20일자 파리외방전교회 회신에서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교황청의 제안을 유보한다. 다섯 가지 이유를 간략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돈이 없다 ② 선교사가 없다 ③ 시급한 일이 많다 ④ 조선입국이 어렵다 ⑤ 여력이 없다. 이 다섯 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상세하게 보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은 1828년 1월 6일 전 회원의 뜻을 묻는 회람을 돌렸다. 아마 조선 포교지의 수락 문제는 연기되었고, 어쩌면 무기한 연기될 것처럼 보였다.
3) 조선 선교지의 수락을 용감히 제의한 브뤼기에르 주교
프랑스 있을 때부터 조선 교회에 관심이 많았던 브뤼기에르 신부는 포교성성의 협조 요청 공한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회람을 방콕에서 보고나서 화가 치밀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1829년 5월 19일자로 외방전교회 본부로 장문의 편지를 써 보냈다(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中 pp.223-231;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제 10신 참조). 이 편지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가 조선 선교를 유보하면서 내세운 다섯 가지 이유를 하나하나 논박하면서 자신이 조선 선교사로 가겠노라고 자원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10신을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포교성성에서 조선을 여러분에게 맡기려고 했다는 것과 여러분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선교지에 보낸 회람을 읽고 알았습니다. 돈도 없고, 선교사 숫자는 적으며, 다른 선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고, 그 지방에 들어가는 데 거의 극복하지 못할 난관이 있으며, 또 불행한 조선 신입 교우들이 선교사들을 국내로 영입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방법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조선 선교 수락 문제를 미룰 생각을 여러분은 하고 있습니다. … 저 불운한 조선 교우들에게 선익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 이것을 제대 아래서 검토하시고 세심하게 고찰하시기를 바랍니다.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잘난 체한다거나 저보다 더 잘 아시는 분들에게 충고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고 오직 제 양심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① 우리에게는 기금이 없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답변: 우리에게는 전교회와 회원이 있고 우리를 보조하겠다고 했다. 또 우리가 지혜롭게 절약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대비할 수 있다. 내일 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재원을 마련해 주신다. 우리가 언제 불가능한 일을 거부한 적이 있었느냐? 우리가 천주께로 눈을 돌렸으니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는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우리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천주께서는 포교지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천주의 권능이 작아졌다는 말인가? 혹은 우리의 신앙과 망덕이 줄어들었다는 말인가? 김길수 교수는 그의 책, ‘하늘로 가는 나그네’(下권)에서 여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교를 하고자 함에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에게 진짜 없는 것이 무엇인가? 돈인가, 신앙인가?”
② 우리에게 선교사가 없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이유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지원자가 들어오고 있다. 다음과 같이 하면 틀림없이 많은 지원자가 올 것이다. “교훈이 되는 새 서한집”(인도나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쓴 서한을 수록하여 간행한 단행본)에서 ‘조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를 모두 인쇄하고 거기에다가 열심한 조선 교우들이 여러 번에 걸쳐 교황님께 올린 편지도 인쇄하여 수록하라. 그리고 성품을 지망하는 모든 신학생들에게 애덕과 열성에 간절한 호소를 하면 오래지 않아 선교사들을 얻게 될 것이다. 지원자 한 사람을 구하면 열 명이나 올 것이다.
③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물론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그러나 저 불쌍한 조선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것만큼 급한 일은 없다. 지구 저 끝에 있는 저 불우한 교우들은 여러 해 전부터 교우들의 공동 아버지이신 교황님께 두 손을 모아 쳐들고 구원을 청하고 있다. 신부 한두 명 쯤 줄어든다하여도 우리 포교지 전체로 볼 때에는 그리 큰 공백상태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버림 받은 포교지로 볼 때에는 이 신부 한두 명은 말할 수 없는 큰 은혜가 될 것이다.
④ 그 나라를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 점이야말로 여러 반대 이유 중에서 가장 그럴듯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결국 어떤 계획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또 세속의 자식들은 그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때에는 고난 때문에 물러서는 법이 없다. 하물며 광명의 자식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구령사업에 겁을 내고 소극적이어야 되겠느냐? 비록 넘을 수 없는 난관이 가로놓여 있어, 그 나라에 뚫고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시도해보아야 한다.
자기 힘으로 이루어져서 시초부터 용감한 순교자와 순결한 동정녀들을 그렇게도 많이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 사도 시대에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을 바쳤던 것과 비길 만한 일을 저 새로운 교회, 귀양살이와 종살이를 하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망나니들의 도끼날 밑에서 아직 복음을 전하고 신입 교우의 숫자를 끝없이 불려가는 용감한 증거자들을 아직도 수많이 가지고 있는 저 교회, 그래 저 교회가 버림받아야 되겠느냐?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자마자 공경하고 사랑한 조선인들에게 엄하고 매정하게 하시겠느냐? 이와 같은 생각이 잠시나마 생겨난다면, 저는 섭리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⑤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주교가 선교사 지원자들에게 가장 큰 호의를 보여주는 교구에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 많다고 하는데, 버림받은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용감한 희생을 한 어떤 회에 이와 비슷한 은총이 내려지지 않겠느냐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한다. 장래에 대한 아무런 언질을 주지 말고, 우선 신부 한두 사람을 보내겠다고 포교성성에 제안하라. 그러면 그들은 조선에 들어갈 여러 가지 현명한 방법을 열심히 찾을 것이다. 혹시 그들이 조선에 들어가면 이들은 선교사들을 맞아들일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곳에 이른 신부들은 목자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소멸될 위험을 시시각각으로 겪고 있는 저 선교지를 지탱해나갈 것이다. 만일 이 나라에 파견된 신부가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든지 사형을 당한다든지 하면 그 당사자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선교지에 크나큰 손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느냐? “제가 하겠습니다.” 샴 주교가 아무리 자신이 교구에 선교사가 많이 있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불행한 조선 사람들을 위해 신부 한 명은 기꺼이 내놓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 선교에 도움이 된다면 1년 전부터 교황청이 그에게 종용해온 주교직을 수락하겠노라고 했다. 그리하여 1829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방콕에서 샴 보좌주교로 성성되었다. 이어 브뤼기에르 주교는 말레이시아 반도 서쪽에 있는 섬 페낭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는 한편, 조선 입국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829년 10월 1일자(양력)로 포교성성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다: “성하께서 저의 성소를 검토하시기를 간청하나이다. 그래서 저의 성소를 승인하시면 저에게 출발 명령을 내리옵소서. 성하의 의향을 알게 될 때까지는 제가 지금 있는 포교지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어야 할 사람 모양으로 여기서 제 직무를 채우기를 힘쓸 것이오며, 그러면서도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사람 모양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겠나이다.”
4) 조선교구의 설정과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0년 1월 31일, 포교성 장관 추기경에게 또 편지를 보내어 그의 조선 파견을 다시 호소하였다. 그러는 동안 로마에서는 1829년 교황 레오 12세가 별세하고 비오 8세가 그를 계승하였지만 겨우 1년 만에 별세한다. 그 뒤를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으로서 조선 교우들에게 관심을 쏟았던 까펠라리 추기경이 1831년 2월 2일에 제 254대 교황(그레고리오 16세 1831년 2월 2일~1846년 6월 1일 재위)으로 등극했다. 그해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북경 교구에서 따로 조선 교구를 신설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蘇) 주교를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25일 페낭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이제 자신의 소임이 확정된 만큼 그는 목적지 조선을 향해 거침없이 고행의 길을 떠났다.
우선 배편으로 싱가포르에서 마닐라를 거쳐 외방전교회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갔다. 거기서부터 육로를 이용하여 푸저우(복건), 난징(남경), 시완쯔(서만자)를 거쳐 몽고 지방의 마찌아즈(마가자)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이렇게 오는데 만 3년이 더 걸렸다. 그러면 그 길을 따라 가보자.
3. 페낭에서 마찌아즈까지의 여정
1) 페낭에서 마카오까지
앞으로도 계속 보겠지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미래에 대한 각오는 남달랐다. 페낭에서 출발하기 전 그분의 여행기(1장)를 보면 이렇게 적고 있다: “내 계획에 맞서게 될 무수한 어려움에 대해 환상을 키우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모든 어려움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큰 어려움들에 봉착하리라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루하고 고통스런 이 긴 여행에서 당한 온갖 장애에 대해 내가 놀라거나 당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체포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장애와 난관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 내 감정 상태였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행을 만류하는 사람들과 주고받은 말을 그분의 여행기 서두에 적어두었는데, 이 대화체에 브뤼기에르 주교의 패기와 끈기, 신심과 집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해도 시도는 해봐야지요.”
“알려진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길을 하나 만들어야지요.”
“아무도 주교님을 따라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두고 봐야지요.”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4일 페낭에서 출항하여 8월 17일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거기서 병 때문에 페낭 신학교를 그만 둔 왕 요셉이라는 중국 청년을 데리고, 9월 12일 마닐라행 배를 탔다. 왕 요셉은 1835년 10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가 마찌아즈에서 병사할 때까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지극 정성으로 주교를 보필한 충복으로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 천주교회의 은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9월 30일 마닐라에 도착해서 아우구스티노회 회원인 세기(Segui) 대주교의 환대를 받고 대주교에게 여비를 빌려, 1832년 10월 12일 마카오행 배를 탔다.
세기 주교는 마지막 작별 인사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당신은 계획을 성공시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나는 그때 대주교님이 예언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로서는 아무런 희망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에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니까요.”8)
주교는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하여 교황청 포교성성 경리부에 두 달가량 쉬면서 조선 잠입을 구상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의 친정이라 할 수 있는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에 유숙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에 엄명을 내려, 브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지도 말고 도와주지도 말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가 반대하던 조선 선교를 브뤼기에르 주교가 단독으로 받아들였기에 괘씸하게 여겨 본부는 주교에게 일체의 지원을 거절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의 여행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18일 뭍에 내려가 곧 바로 움피에레스 신부9) 집으로 갔습니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내게 말했습니다. ‘저희 집에 오시길 잘하셨습니다. 프랑스 선교지들의 대표 신부는 주교님을 절대로 받아 주지 않았을 테니까요.’ 나는 그를 통해 파리신학교의 지도 신부들이 내린 강경한 조치들에 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갑사의 주교가 마카오에 오면 절대로 집으로 맞아들이지 마시오. 그의 일에 끼어들지도 마시오. 이 일에 관여하는 데는 포교성성입니다.”10)
그러면서 주교는 덧붙이기를 “가장 간결한 표현으로 요약해 보면, 이것은 ‘그가 아무리 필요로 하더라도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말라’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상황이 그러니, 훗날 프랑스인도 아니고 동료들도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냉대하는 일이 있어도 내가 놀랄 이유가 있겠습니까?”11)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 교구를 떠맡을 생각이 없었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는 1832년 3월 12일 자 회람에서 조선 교구를 맡을 의향이 없음을 다시 밝히는 공한을 회원들에게 보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에서 이 공한을 접하고 그해 11월 10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로 장문의 편지를 썼다. 본부의 공한을 조목조목 반박한 논쟁 서간인데, 그 치밀한 논리와 넘치는 박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서한집, 제20신).
2) 마카오에서 시완쯔까지
이제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에 도착해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26신에 보면 1832년 12월 17일에(여행기에서는 19일 또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를 포함한 여섯 명이 마카오를 출발한다.12)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832년 12월 19일, 선교사 여섯 명과 함께 우리는 쪽배에 올랐습니다. 쓰촨(四川)으로 가는 바이외 교구 출신 모방(Maubant) 신부, 장시(江西)로 가는 카오르 교구 프랑스 라자로회 회원인 라리브(Laribe) 신부, 장난(江南)으로 파견된 포르투갈 에보라 교구 출신 라자로회 회원 두 명, 교황청 포교성성의 선교사로서 산시(山西)로 가는 이탈리아 나폴리 교구 출신 작은형제회 회원 한 명(도나타 신부13)), 그리고 여러분의 종으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나, 이렇게 여섯이었습니다. 우리 배는 불편하였지만 선원들은 우리를 매우 점잖게 대우했습니다.”14)
마카오에서 푸젠행 배를 타고 무려 70일 이상 걸려(27신에는 75일) 1833년 3월 1일 도미니코회 소속 주교가 상주하는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 주교관에 도착했다. 그 여행은 매우 힘들고 지루했다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적고 있다: “우리 여행은 길고도 지루했고, 이따금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마카오에서 푸젠 주교가 사는 푸저우까지의 거리는 2,000리가 채 못 됩니다. 그래서 이 여정이 한 달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선박으로는 사흘이면 당도했을 이 여정을 우리는 75일이나 걸렸던 것입니다.”15)
소속은 달랐지만 푸젠 주교16)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Maubant) 신부를 극진히 대접했다. “푸젠 주교가 우리 모두에게, 특히 나에게 보여 준 사랑에는 그 어떤 것도 필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락원들까지 합쳐 14명이나 주교관에서 묵었습니다. 그중 몇 사람은 여러 달을 거기서 지냈습니다. 주교님은 너그럽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공급해 주었습니다. 또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만 너그러움을 보여 준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앞서 가고 우리를 뒤따라온 선교사들에게도 같은 도움을 주었고, 그들에게 자기 대목구를 지나가도록 초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렇게 고귀하고도 가톨릭 주교다운 행동은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의 찬사와 감사를 받을 만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매우 가난합니다. 그렇지만 재산이 얼마 없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많이 도와줍니다. 이따금 주교님이 자기에게 지정된 돈을 우리를 위해서나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몹시 걱정을 하면 그는 그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실(보살펴 주실) 것입니다.’”17)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선교를 자원한 모방 신부를 푸저우에 남겨놓고, 홀로 1833년 4월 23일 장난(江南)으로 가는 배를 탔다(28신: “오늘 저녁 저는 푸젠성 푸저우에서 장난으로 출발합니다.”) 장난에서 두 달 남짓 머물다가 7월 20일에 북쪽 여행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황제 운하와 양쯔강을 이용해 난징 부근까지 배를 타고 가다가, 7월 31일 양쯔강을 건넌 다음부터는 육로로 북상했다. 하루하루가 어렵고 위험한 여정이었지만, 장난에서부터 산시까지의 육로 여정(1833년 7월 31일~10월 10일)은 특히 험난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에는 삼복더위와 열병과 이질, 음식과 잠자리 등으로 고생한 참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나는 열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난징을 떠났습니다. 걷기 시작한 첫날부터 나의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피로하고 무더운 데다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은 결과, 복부에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이질이 분명했습니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 바람에 나는 기진맥진하여 계속 눕거나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내자들 말로, 주막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의원을 부르는 것은 큰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제8장).18)
잘 먹지를 못하니까 도저히 병이 낫지를 않았다. “영양이 풍부하고 위생적인 음식을 먹는다면 기운을 다시 차릴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얻어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찐만두뿐이었습니다. 얇은 피로 된 이 작은 만두 속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파 같은 것을 넣기도 했는데, 나는 이 만두를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 만두 속을 채운 마늘과 다른 여러 양념들 때문에 내 배 속에서는 불이 났고, 나로서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 일어났습니다. 내 길잡이들은 여전히 내게 물을 주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만두와 국을 먹는 것을 단념해야했습니다.”
“저녁 시간은 내가 먹고 휴식을 취하기에 가장 알맞은 때였으나, 또한 바로 이때가 열이 가장 심해지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길잡이들은 누워 있는 내게 음식을 가져오곤 했습니다. 내가 ‘지금은 먹을 수가 없소. 침상 옆에 두시오. 열이 좀 내리고 나면 그때 먹을 것이오’ 하고 말하지만 그들은 밤에 먹는 관습이 중국에는 없다고 대답하고는, 음식을 도로 가지고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길잡이 한 사람에게 내 쪽으로 와주도록 신호를 보내곤 했습니다(나는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가 오면(늘 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차를 좀 갖다달라고 청하곤 했습니다. ‘없습니다.’ ‘물 좀 주시오.’ ‘냉수는 주교님 병과 상극입니다.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냉수를 마시는 것은 삼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뜨거운 물을 좀 주시오.’ ‘중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더운 물을 청하지 못합니다.’ ‘주막 주인에게 병자가 마실 것이라고 말하시오.’ ‘주인에게 성가신 청을 하여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은 중국 예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바로 그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말로는 내가 들켜서 잡히게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선 선교지는 버려진 채로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필경 선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그보다 덜 혹독해도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어느 길잡이는 많은 은수 성인들도 하지 않는 고행을 내게 시키려 들었습니다. 내가 피로에 기진맥진한데다 작열하는 햇볕에 거의 질식할 지경이 되어 그늘에 앉으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빈정거렸습니다. ‘어떻게 고통을 피하려고 하실 수 있지요? 주교님이 쉬어야 할 곳은 햇볕 아래, 그리고 쓰레기더미입니다. 조선에 들어가시면 십중팔구 순교를 하시게 됩니다. 그러니 도중에서 돌아가시는 한이 있더라도 더위와 허기와 갈증과 발열 따위는 견뎌내셔야 합니다.”
8월 13일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넜는데 8월 17일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배에 올랐을 때 나는 보통 때보다 훨씬 심해진 열로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습니다. 입술이 말라 아래위로 어찌나 착 달라붙었던지 손으로 떼어내야만 입이 벌어질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 물을 줄 수 있거나 주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강 복판에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나는 내가 누워 있던 널빤지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배 바닥에 물이 스며든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몹시 기뻤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물로 적셔서 그것으로 혀와 입술을 축였습니다. 그때 나는 사악한 부자를 떠올리며(루카 16,19-31 참조), 그의 처지보다는 내 처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숯불 위에 누워 있지도 않고, 내 목을 축일 만한 물도 있지만, 그 사악한 부자에게는 이런 조그마한 위안도 영원토록 제공될 바 없으니 말입니다. 배에서 내릴 때 안내자들은 둔치까지 나를 안아서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임종에 처한 해수병자처럼 숨을 헐떡였습니다. 숨이 어찌나 꽉 막히던지 거의 20분 동안은 꼭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발작하는 사람처럼 먼지 속에서 뒹굴었습니다. … 더럭 겁이 난 내 안내자들은 부랴부랴 나를 옮겨놓았습니다. 나는 어떤 초막의 그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공기를 마시게 한답시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밭 가운데로 나를 보냈고, 이 장면을 완벽하게 연출하기 위해 안내자 하나가 내 얼굴에 중국 모자를 얹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자 때문에 바깥 공기가 조금도 통하지 않게 되어 하마터면 그나마 붙어 있던 숨길마저 아주 끊어질 뻔했습니다.”
이어지는 편지에 “마침내 천주께서는 차를 좀 구해 올 수 있도록 허락하셔서, 나는 펄펄 끓는 차를 여러 잔 들이마셨습니다. 차를 마시니 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만, 기운은 여전히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자, 오늘은 죽지 않겠다’ 하고 혼자 다짐하였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런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나를 괴롭힐 음모를 꾸몄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 그들 중 하나가 내 앞에서 다른 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의 성격을 길들여서 그분이 조선에 들어갈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도록 모든 점에서 그에게 반박하고, 그분이 바라는 모든 것과는 반대로 해야 할 것이오. … 이 길잡이는 프랑스인들 머리통은 모두 철통같아(그가 쓴 표현입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며, 나는 이 독특한 편견의 희생자였던 것입니다.”
“8월 24일(양력)에는 왕 요셉이 포도 한 송이를 가져왔는데, 머루보다도 더 시고 또 중국술 한 병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분명히 물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왕 요셉이 내 본명축일을 훌륭하게 지내게 하려고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 나는 프랑스를 떠난 뒤로 포도 한 송이를 손에 넣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밀떡 한 조각과 곁들여 먹었습니다. 이런 성찬을 먹은 덕에 나는 몹시 배가 볶이었습니다.”19)
또 이런 일이 있었다: “길잡이가 이불 한 채를 빌려다주고 싶어 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이것을 구해왔습니다. 이불을 덮자마자 나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이를 잔뜩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대중국 제국에 사는 사람치고 이가 득실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를 없애고 나자 곧 다른 병고가 이어졌습니다. 나는 심한 가려움에 시달렸고, 이 고통은 여섯 달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부가 온통 벗겨지고, 여기저기에서 피가 났습니다”(9장).
정말이지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지독한 고생을 한 것 같다. 정양모 신부님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를 번역하면서 이렇게 덧붙여 적었다: “사도 바오로도 병약한 몸으로 지중해 주변에서 20여 년간(45년-64년경) 선교하면서 어지간히 고생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브뤼기에르 주교와 그 애제자 왕 요셉이 겪은 고난보다는 덜했던 것 같다.”20)
1833년 8월 산둥성(山東省)과 10월 산시성 창즈(山西省 長治)에 도착해서 거기서 1년간 지낸다. 1834년 9월 22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시를 떠나 10월 8일 시완쯔에 도착해서 다시 1년 가까이 라자로회 회원(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전교회 회원)인 중국인 쉬에(Sue) 신부의 신세를 졌다. 시완쯔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겪은 일들 가운데서 특기할 만한 것은 1833년 4월 23일 푸젠에서 헤어졌던 모방 신부와 재회한 것이요, 파리외방전교회가 드디어 조선교구 선교를 맡기로 결정하였다는 희소식을 접한 일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33년 8월 26일 이 결정을 내렸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월 19일에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의 편지를 받고서야 비로소 그 중대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제44신). 이 중대한 결정으로 말미암아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한 다음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교구를 돌보게 된다.
시완쯔에 머물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6월에 몇 차례 박해의 위험을 겪었다. 산서 지역에서 벌어진 백련교도들의 반란 사건을 추적하면서 지방관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이 사건에 연루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시완쯔까지 확산된 이 박해는 다행히 서양인 선교사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내 수그러들었다. 두 번이나 시완쯔 부근의 산속 토굴로 피신하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무사히 박해의 위기를 넘겼다.
1835년 7월 28일 시완쯔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제46신) 추신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다리가 부었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일이 매우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습한 날씨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수종증에 걸렸거나 아니면 걸리게 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이때 이미 위중한 상태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석 달이 채 안되어 마찌아즈에서 병사하게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완쯔에서 마찌아즈로 떠나기 전날인 1835년 10월 6일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마지막 편지를 써보냈다(제52신). 이 편지에서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가 만주 선교를 책임져야하지만 장차 프랑스 선교사들이 좀 더 쉽게 조선에 잠입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교황청에 품신하라고 간청했다.
3) 시완쯔에서 마찌아즈까지
1835년 10월 7일 브뤼기에르 주교, 중국인 라자로회 회원 고 신부, 중국인 왕 요셉은 무장한 고용인들을 데리고 펭후양성을 향해 시완쯔를 떠났다. 시완쯔에서 펭후양성 비엔민까지는 장장 2천리, 영하 10℃가 넘는 혹한과 여행 도중에 도둑 떼와 맹수들이 출몰하기 때문에 고용인들을 무장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시완쯔를 떠나기 하루 전날인 1835년 10월 6일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결의를 이렇게 적었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제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로써 제 소망을 들어주시어 저를 무사 안전하게 그 미로에서 구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제52신).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은 10월 19일 마찌아즈 교우촌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이튿날(10월 20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낮 동안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였다.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잠시 누워 있다가, 갑자기 발을 씻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에는 면도를 하고 싶다고 말하여 신자인 면도사가 와서 면도를 해 주었다. 면도를 끝낸 뒤에 중국식으로 머리카락을 다듬는 조발을 마무리하는 순간, 브뤼기에르 주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이에 침상에 쓰러진 브뤼기에르 주교는 프랑스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짖고는 의식을 잃었다. 중국인 라자로회 회원 고 신부가 급히 병자성사를 베풀었으며, 저녁 8시 15분경 홀연히 선종하고 말았는데, 그때 주교의 연세 43세였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발하여 1835년 10월 20일 마찌아즈에서 선종하기까지 3년 넘게 위험하고 험난한 여행을 감행하다가 건강을 잃었던 것이다. 오직 조선에 복음을 전하겠다며 그분이 부여안았던 꿈, 그해 11월 압록강 국경지대에서 우리 교우들을 만나 조선으로 들어 오시려던 꿈은 그렇게 날개가 꺾여 버렸다.
1835년 11월 1일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부고를 받고 시완쯔에서 급히 마찌아즈로 가서, 11월 21일 성모자헌축일에 중국인 고 신부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의 시신을 마찌아즈 성당 묘지에 안장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종 소식을 들은 모방 신부의 서한을 보면 더 가슴이 절인다: “그런데 이게 웬 변고입니까? 주교님이 약속의 땅이라고 이름 지으신 조선으로 들어가시기 직전에 돌아가시다니요. … 기아와 갈증과 병고와 온갖 고난을 겪은 나머지 주교님은 조선인들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러 가겠다는 계획을 주님 앞에 세우셨습니다. 주교님은 그 계획을 이루고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바로 국경지대로 나와 정하상, 조신철 등 5명의 조선 교우들과 함께 1836년 1월 3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다. 서양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이루지 못한 꿈을 모방 신부가 이룬 것이다.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1월 25일 서울에 도착했다. 주문모 신부를 잃은 지 35년 만에 서양 선교사가 최초로 들어온 것이다. 3년 9개월 동안 전교활동을 한 모방 신부는 엥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같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여 1984년 시성되었다.
1931년,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선종하고 94년이 흘렀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유해를 서울로 옮겨오기로 결정한다.
1931년 9월 4일, 마찌아즈 본당에서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유해는 9월 14일 동멍구 대목구청에 도착하고 다음날 다시 진저우 성당으로 옮겨진 유해가 코르동 신부에 의해 여행 가방에 담겨져 묵덴 교구청으로 이송된 것이 9월 17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만주사변이 일어난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유해 이송을 맡은 푸아요 신부는 9월 22일 주교좌 성당에서 죽은 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한 후 서울로 떠난다. 그렇게 해서 주교님 유해는
그 해 10월 15일, 제8대 서울대목구장 뮈텔 대주교의 주도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94년이 흘러서야 주교님은 그토록 그리던 조선 땅에, 우리들 곁에 묻히신 것이다.
첫댓글 우리나라에 묻히셔서 다행입니다.
공감입니다~~^^
조선을 위해 긴 고통을 겪으신 브뤼기에르 주교님! 그 영광을 저희가 누리고 있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너무 멍먹하고 벅차오르는 뜨거운가슴이 용솟음칩니다. 브뤼기에르주교님!! 이조선땅에 영원히잠드시어 영원한 천상복락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