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편 말씀은 다윗의 믹담시로 인도자를 따라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믹담’이라는 표현은 아직까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학자들 간에 일치된 의견이 없다고 했습니다. 알다스헷이라는 말도 이 시편을 부르는 가락인 것은 알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인도자를 따라서 맞춘 노래이기 때문에 다윗과 후대의 사람들이 공동체로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개인의 탄식시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선지자적 예언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들이 악인들, 특별히 공의를 행하지 않는 지도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중요한 것은 이것이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시면 시인은 이 시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줍니다. 바로 통치자들입니다. 여기서 통치자라는 말은 인간 지도자, 권력자, 재판장들을 의미할 수 있고, 동시에 영적인 악한 통치자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1차적으로 불의한 인간 지도자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들이 정의를 말해야 하지만 침묵하고 올바르게 판결을 해야 하지만 잠잠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이스라엘에 세워진 재판관, 권력자, 왕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바르게 판결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의를 말하고 올바른 판결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침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데,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극적으로는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그들이 소극적인 차원에서 그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폭력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자신의 권력을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자들의다스림을 받은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립되어 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계속해서 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멀어졌다고 합니다. 여기서 ‘멀어졌다’는 말은 ‘이방인이 되다’는 뜻입니다. 또 ‘곁길로 나아간다’는 표현은 ‘떠돌아다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들의 하는 짓이 이방인과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들과 다름 없는 삶을 살았고, 나아가 거짓들을 말하는 자들이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들은 시인이 속한 언약 공동체에 한 번도 속해 본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업을 얻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분명히 확실한 기준이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형제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이 의와 불의를 가르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래서불의한 지도자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준에 맞춰서 판결하고 재판하고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좀 떠나도, 형제나 이웃에게손해를 입혀도 그것에 눈감고,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의입니다.
계속해서 시인은 그들의 행실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독사와 코브라와 같습니다. 그들은 독사와 같이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말과 행실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말과 행실입니다. 율법의 정신과 완전히 반대됩니다. 그들의 결정과 정책과 방향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귀가 먹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5절은 당시에 술사가 피리를 불면 그것을 듣고 뱀이 춤추거나 멈추거나 하는 그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리 소리를 듣고 뱀은 춤을 추기도 하도 잠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지도자들은 귀가 먹은 뱀과 같아서 술사들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여기서 술사는 지도자 곁에 있는 의로운 조언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능숙한 술객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아주 지혜롭고 의로운 자의 조언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호소 합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꺽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사자와 같이 강력한 힘을가지고 불의를 향하는 자들의 힘을 상징하는 어금니를 뽑아 달라고 합니다. 그야 말로 이빨 빠진 호랑이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강한 물살에 흘려 사라지게 하시고,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해 달라고 합니다. 화살이 꺾이면 안 쓸모 없어 집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면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와 같게해 주시고 만삭 되지 못한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나오자마자 죽은 것 같이 이 세상에 없던 자로 만들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로서 그들을 살라서 없애 달라고 합니다. 이런 언어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악인에게심하게 말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시인은 하나님께 강한 표현을 씁니다. 이런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상당히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한 표현들은 반대로 시인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크기를 말해 줍니다. 이 강한 자들, 악인들은 시인이 있는 공동체 안에 있는 힘있는 통치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는하나님 외에 다른 의지할 곳이 없는 아주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인에게 가장 큰 위로는 악인들이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악인들이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폭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10절 마지막 부분에서 “그들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는다”는 표현은 전쟁터를 배경으로 합니다. 치열한전투 후에 대적을 물리치고 그들이 흘린 피에 발이 적셔지는 것입니다. 다소 잔인한 그림 언어이지만, 그만큼 속히 그리고 극적으로 악인들이 없어질 것을 소망하며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의인들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지도자들이 전쟁터에서 죽게 되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속히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없어졌을 때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참으로 악인을 물리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정의를 세우신다고 하면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될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오늘 시편의 시인과 같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아주 강한 표현으로 책망하는 요한의 말을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마태복음 23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말과 동일한 말을 역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행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며 책망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지도자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의한 지도자들, 부정 부패와 억압과 폭력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의 최후가 어떨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다스리는 자들이 너무나 적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 세상에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당신의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불의한 통치자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억압할 때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심판해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억압을 끊고 임할 새로운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속히 올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참된사랑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샘플입니다. 완전히 의로운 나라, 완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나라는 주님이 오시면완성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통해서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보여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깊이 사랑하고, 감싸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교회의 정책과 방향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의한 지도자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합니다. 나아가 우리가 먼저 불의한 통치자들이 아니라 의로운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의와 의로움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공정함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아래 사람 다스리고 섬기는것을 말합니다. 나보다 낮은 사람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들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들로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랑으로하나님의 돌보심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런 지도자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배출되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의로움을 보여줄 통치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찬송한 후에 이 기도제목으로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