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영화 <밀양>을 보고 나서
영화 〈밀양〉의 주인공 이신애는 얼마 전 하나뿐인 아들 준이를 잃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 그녀는 남편이 이곳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다며 좋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투자도 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 말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신애는 돈을 노린 유괴범에게 아들을 살해당한다.
“죄송한데요. 제가 가진 돈이 그거밖에 없거든요? 정말이에요. 땅 계약요?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저 땅 살 돈 없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그냥… 돈 있는 척하려고 그냥 거짓말한 거예요. 그 돈 (870만 원)이 제 전 재산이에요. 보, 보험금요? 그게 남편 사업하다 빚진 거 다 갚고요. 그리고 여기 내려와서 가게 얻고 인테리어하고…”
유괴범과 한 이 통화는 설득이라기보다 고백에 가깝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행복한 미망인’인 척, ‘능력 있는 서울 여자’인 척 연기하며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신애의 환상은 이 고백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밀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각색한 영화다. 아들을 잃은 신애는 종교라는 또 다른 환상을 받아들인다. 기독교에 귀의해 마음의 평화를 얻고 가해자를 용서하려 한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마주한 가해자의 평온한 얼굴 앞에서 용서와 평화의 환상은 다시 한번 찢겨나간다. 가해자 역시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용서를 해요? 어떻게 용서를 해요?”
“하나님이 용서하셨으니까네. 이 선생도 용서를 해야지.”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이 벌써 하나님한테 용서를 받았대요.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대요.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왜? 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섭리만을 말하는 김 집사에게서 돌아서던 신애는 부엌에서 지렁이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며 오열한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사람이 하찮은 벌레처럼 나뒹구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람보다 더 큰 힘과 권위를 가진 하나님이 용서하고 결론을 내렸으니 한낱 미물인 사람으로서는 절망할 밖에.
소설 〈벌레 이야기〉 속 살인자 도섭은 사형 집행 직전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이나 저 세상으로 가서나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 주시고…….”
자신이 죽인 아이의 영혼을 자신과 ‘함께’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오만함.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지내던 소설 속 주인공 ‘알암이 엄마’는 이 몹쓸 뉴스를 들은 이틀 뒤 유서 한 조각 남기지 않고 혼자 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린다.
이청준이 이 소설을 쓴 것은 1985년이다. 훗날 이창동 감독은 이 소설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광주’를 떠올렸다고 한다. 12‧12 군사반란으로 시작해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이 세상을 움켜쥐고 있던 시절. 1988년 청문회에서는 광주의 진상을 따지고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정치적 ‘화해’라는 이름의 공론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피해자가 여전히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가해자들끼리 손을 잡고 용서와 화해를 선포해버린 것이다. 권력이라는 거대 담론에 의해 용서할 권리마저 압수당한 개인. 가장 주체적인 자리마저 빼앗긴 이 시대의 ‘벌레’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까.
영화 〈밀양〉의 신애 역시 교도소에서 도섭을 만난 뒤 시위하듯 하늘을 노려보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내 집 밖으로 뛰쳐나가 소리 지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이 절규는 역설적으로 ‘벌레’가 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마지막 신호다. 그리고 그 비명이 울려 퍼지는 지상에는 늘 종찬이 서 있다. 종찬은 신애가 갈구했던 ‘하늘의 뜻’이나 ‘숭고한 용서’와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속물적이고 지질하며, 신애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거나 공감할 지적·영성적 깊이조차 없다.
종찬은 영화 〈마더〉의 엄마처럼 자식의 고통 안으로 침잠해 함께 미쳐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김 집사처럼 신의 섭리를 들먹이며 타인의 고통을 섣불리 참견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신애가 가는 길을 네댓 걸음 뒤에서 따라갈 뿐이다. 신애가 면회실에서 기절했을 때 병원을 지키는 사람도, 그녀가 하나님을 저주하며 미쳐갈 때 곁을 지키는 사람도 종찬이다. 그는 늘 신애의 뒤에서, 고통의 바깥쪽에서, ‘딴 데하고 똑같이 그저 사람 사는’ 그곳으로, 부지불식간에 볕이 비치는 그 비루한 현실 속으로, 그녀를 끊임없이 초대한다.
종찬의 이 ‘현실성’은 거대 담론에 짓밟힌 개인에게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 국가 권력이든 종교적 섭리든, 거창한 이름들이 개인의 용서할 권리마저 압수해갈 때 종찬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예”라는 투박한 사투리로 그녀를, 대단할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곁을 지킨다. 그는 신애를 끝내 이해하지 못하지만, 신애를 불쌍한 사람으로도, 성녀로도 대우하지 않고, 그저 ‘이신애’로 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신애는 마당 구석에 앉아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삐죽삐죽하고 엉망으로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삶처럼 볼품없다. 그때 종찬은 말없이 다가와 거울을 들어준다. 거울은 자신의 민낯을 직시하게 하는 도구다. 그는 신애가 종교적 환상이나 자기기만의 가짜 전설에서 벗어나, 비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1985년 이청준이 폭압적인 시스템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벌레로 으스러지는지를 기록했다면, 2007년 이창동은 그 벌레들이 오물 섞인 땅바닥에서도 햇볕을 받으며 서로를 비추어주는 풍경을 통해 답을 찾아나간다. 신애가 하늘의 비밀스러운 햇볕을 구걸하기를 멈추고, 곁에서 무심하게 거울을 들어주는 현실적인 이웃의 손을 믿으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를 때,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마당 구석의 낮은 땅바닥에 닿는다. 그리고 그곳에, 따스한 햇볕이 머문다. 구원은 저 높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비루한 땅바닥에 이미 와 있다는 듯이.
첫댓글 https://youtu.be/9R0_1V1a094?si=uTcKdNJnqPfLTG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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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제문 쓸 때는 이 곡을 들었습니다.
이번 주는 더 늦어져버렸네요. 죄송합니다. ㅠㅠ
그래도 변명을 좀 해보자면. 밀양은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너무 큰 영화라서 좀 벅찼습니다.
신애의 고통이나 그걸 다루는 영화의 지루하고 집요한 시선도 쉽지 않았고요.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 파고 싶은 욕심도 자꾸만 올라왔고, 동시에 지쳐서 더 이상 못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동시에 이 많은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묶어서 하나의 글로 담아내야 하나, 정말 모르겠다, 나는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동시에 영화 밀양과 관련된 텍스트도 엄청나서, 베끼고 싶다는 유혹도 엄청났던.... 그런 영화였습니다.
글이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