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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를 위한 신앙의 결단 / 에 4:10-17, 고후 1:23-24
사람의 일생이란 계속적으로 선택하며 결단하는 것이다. 선택과 결단의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 중에서 부득불 하나만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다. 또한 그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다 포기하는 결단을 함께 해야 한다. 선택을 바로 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선택을 했는데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결단이 없을 때 또 다시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기 생을 책임지며 살아간다.
‘결단에 피라미드 형이 있다’라는 이론이 있다. 대단히 흥미있는 얘기이다.
첫째로, 일상적인 결단이다.
흔히들 ‘오늘 아침에는 무슨 음식을 해 먹을까? 점심에는 또 무얼 먹을까?’ 하며 식사 때마다 반찬이나 찌개를 생각한다. 여기에도 상당한 선택이 있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음식은 찬이 많아서 젓가락을 들고 이것 먹을까, 저것 먹을까 하며 망설일 따가 있다. 이것도 선택하고 저것도 선택한다면 한 젓가락으로 동시에 잡을 수가 없다. 장에 옷을 사러 가서도 ‘이 옷을 살까, 저 옷을 살까? 어느 쪽이 더 어울릴까?’ 하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어떤 일이고 역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
둘째로, 일상적 결단보다는 조금 더 중요한 의미의 선택과 결단이 있다.
자가용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차를 살까? 현대냐, 기아냐, 대우냐?’ 하고 회사를 결정하고 차종을 결정한다. 냉장고나 세탁기를 살 때도 심사숙고하여 산다. 많은 것 중에서 부득불 선택했으니 이제는 적어도 10년정도는 사용해야 한다. 잘못 선택했다 해도 버릴 수가 없다. 이렇듯 한번 선택한 것이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친구를 사귀는 것, 전공과목을 택하는 것, 직업과 직장을 택하는 것, 결혼하는 것 등 어쩌다 잘못 선택하기라도 한다면 오랫동안 아니면 평생을 고생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잘 선택하기만 하면 기대 이상의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런 선택은 중요한 선택이다. 그렇지만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결정적 선택과 결단이 있다.
그야말로 생명을 거는 것이다. 여기에 운명을 건다. 이 한순간의 선택으로 내 영원한 생명이 좌우된다. 이렇듯 중요하고도 결정적이고 종말론적인 선택과 결단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 그런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단을 내리게 하는동기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물적 동기이다.
모든 동물은 본능을 따라 살아간다. 그 본능을 따라 먹어야 하고, 살아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동물적 충동에 따라 선택하게 되는 일도 많다. 내 육체의 건강에 따라서 식욕이 끌리는대로 선택하고 결단한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동물은 모든 부딪히는 사건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반응, 반사하면서 살지만, 인간은 반사적이기보다는 한번 더 깊이 생각하고 거기에 응답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적 결단이다.
둘째는 도적적 동기이다.
동물적 충동은 있지만, 그것에 따를 수는 없다. 도덕성을 묻는 것이다. 도덕적 동기를 무시하고 결단할 때 인간은 비참해진다. 술 먹는 사람들을 보면 1차 한번 갔으면 됐지, 2차, 3차는 왜 가나? 그래놓고 다음날 속쓰리고 배아프면 괜히 술 먹었다 후회한다. 이렇게 된 후에도 다시 술 먹을 기회가 있으면 거절을 못한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도덕적 동기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선택과 결단이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 이런 것들이 다 도덕적 동기이다. 사람이라면 이에 따라 선택하고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으로 신앙적 동기이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결단한다. 내 마음에 잠시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쪽을 택한다. 나로서는 혹 불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는다. 주의 뜻이기에 주의 뜻대로 하리이다라는 이 결단,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결정하신 것과 같은 이같은 선택과 결단이어야 한다. 이같은 신앙적 동기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세가지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을 믿고, 그 존재를 믿고, 그 사랑을 믿을 때에 그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된다.
내가 구원받기 전까지는 내 존재의 의미를 내가 모른다.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내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모른다. 불신앙의 사람이다. 그러나 신앙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된다.
둘째는 사명의 의미를 얻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필요하지 않다고 하고, 내가 나를 보기에도 너무나 초라하고 쓸모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쓸모가 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비록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필요가 없을지라도 적어도 하나님께는 내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내가 꼭 필요하다는 사명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신앙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가치가 고귀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하여 엄청난 의미를 느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셋째는 현실의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모순되고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뜻대로 안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으로서 느끼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 의미가 있다. 오늘도 할 일이 있다. 오늘도 내가 직면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시고 계신다. 모름지기 이같은 우주적 의미를 느끼면서 현실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 현실 안에서 모든 창조적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는 뜻없는 현실이 없다. 버려진 사건도 없다. 크고 작고도 없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현실 그대로 그 속에 엄청난 우주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간혹 이런 분을 볼 수가 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때 저런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위하여 역사하셨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다. 확실히 믿고 있다. 또한 미래에 대한 약속도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 운명은 물론이고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모든 것을 인도해 주실 것이다 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어렴풋이나마 믿고 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당한 이 현실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오늘 내가 당면한 이 현실, 여기에 의미가 있음을 알면서부터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에스더라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에스더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면서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인 바사(페르시아)에 살고 있다. 그 옛날 소수의 유대민족이 남의 나라에 가서 살면서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고향을 떠나 남의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으레 그러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유대 여인의 미모와 지혜가 눈에 띄어 바사의 아하수에로왕의 아내가 되었다. 앞날의 영광은 보장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의 생은 한 여자로서가 아닌, 그야말로 한 나라의 왕후로서 일생동안 왕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이없는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아 그 유대 민족이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만이라는 아주 사악한 사람 하나가 자기 나라에 있는 온 유대 백성을 다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말살시킬 수 있는 건의안을 만들어서, 왕으로부터 그 허락의 표시로 인을 받아냈다. 그 법령이 시행되면 이제 유대 사람들은 다 죽게 된다. 바사 나라의 수산성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들의 운명이 말살될 위기에 직면했다. 세상에 그런 어이없는 고난이 어디 있나?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렇게 민족 전체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와 그 사촌 동생 에스더를 보라. 큰 공을 세워서 위기에 처한 유대민족을 건져낸다. 뿐만아니라 유대 백성이 바사 나라에서 큰 영광을 얻는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킨다. 이방 땅에서 하나님께 높이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직면하는 위기, 이것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역사 창조의 새 기회가 된 것이다. 위기가 기회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숨은 역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역사를 진행시키고 계셨다. 겉으로 드러남이 없이 숨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그래서 이 절박한 위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높이시고,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런 위기가 창조적인 기회로 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신앙적 응답과 신앙적 결단이 요구되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과 새로운 신앙의 결단을 통하여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이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카나다와 미국 사이에 걸쳐있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굉장한 명성이 있는 관광지이다. 어떤 사람이 이 폭포의 깍아지른 듯한 양 절벽 사이에 쇠줄을 메어 놓고 줄타기를 시도했다. 너도나도 이 줄타기를 구경하려고 수만 명이 모였다. 특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건넌다, 못건넌다 하며 내기까지 하였다. 모두들 ‘저 사람이 과연 건널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였다. 드디어 줄타기하는 사람이 긴 막대기 하나만을 손에 들고 줄 위를 한발짝 한발짝 내딛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손에 손에 땀을 쥐었다. 마침내 그 사람이 무사히 줄타기를 끝낸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제히ㅏ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바퀴가 하나밖에 없는 조그마한 손수레를 끌고 건너겠다는 것이다. 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여러분, 과연 제가 이 폭포 위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요?’ 그러자 관중 속의 어떤 사람이 대답하듯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빈 몸으로 건넜을 때 무사했던 사람이 그까짓 조그만 수레 하나 끌고 가지 못할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너나없이 여기에 동의했다. 그러자 줄타기하는 사람이 정중하게 한마디 더 물어보는 것이었다. ‘정말로 제가 여기를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신다면, 아무나 한분 이 손수레에 올라타십시오. 제가 끌고 건너겠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무사히 건너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는다고 했지만, 자기들이 직접 수레에 올라타기는 꺼려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그런데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손을 반짝들면서 ‘내가요, 내가 타보겠어요!’ 하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줄타기하는 사람은 그 어린아아를 태우고는, 줄을 타고 폭포 이쪽에서 저쪽까지 무사히 건너갔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별 희한한 어린애도 다 보겠다’라고들 생각했다. 그래서 막 수레에서 내리는 그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었느냐?’ 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용기요? 저 분은 우리 아버지세요. 저는 아버지를 믿거든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아, 그럴거야, 그래, 맞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윤명을 걸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 결단이 있어야 한다. 감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인정한다고 해서 그 지식이 신앙인 것은 아니다. 신앙이란 분명한 결단이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귀중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르드개가 왕후인 동생 에스더에게 말하는 것의 내용을 눈여겨 보라. ‘우리 민족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이제 모두가 말살당할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너는 왕궁에 있는 몸이다. 이러한 때에 네가 왕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해도, 우리 백성은 다른 방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실 테니까. 누구를 통해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구원해 주실 줄로 나는 믿는다. 그러나 네가 왕궁에 있다 해서 우리 백성이 처한 이 위기를 너 홀로 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라. 우리 민족이 다 죽으면 너도 함께 당할 것이고, 만일에 네가 이 때에 잠잠하면 우리는 다른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겠으나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망하리라’ 아주 무서운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겠다고 대답한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자기가 해야할 현실적 사명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이다. 오늘날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당면의 문제이다. 그래서 에스더가 기도와 금식 중에, 자기 존재의 이유를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깨달으려 했던 것이다. 지금 결정적인 시간이 왔다. 여기에 용기가 필요하고, 여기에 새로운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왕후가 된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하여,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바로 이 사건을 위하여 예비된 일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중요한 말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는 어떠했나? 그것은 다 지나간 얘기이다. 이제 여러분의 오늘은 어떠한가? ‘바로 이 순간,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사건을 위하여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라고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가장 성공적이고 가장 용기있는 생을 사는 사람이다. 가장 큰 의미의 생을 사는 사람이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곧 ‘이 때를 위함이라’ 함이다. 에스더, 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네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구약 창 45장에 보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 형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지난날, 형들은 17살 난 동생 요셉을 팔아먹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먹은 것이다.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애굽왕 바로의 꿈이 요셉이 해몽한 그대로 이루어졌다. 애굽은 물론 다른 나라에도 흉년이 들었다. 요셉의 형들은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오게 된다. 애굽의 총리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저 앞에 있는 총리가 누구인가? 자기들이 노예로 팔아먹은 요셉이다. 이것을 알게 된 저들은 벌벌 떤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다. 그런데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해서 혹시 내가 보복할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나를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자기가 팔린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신앙인의 현실관이다. 사실 사건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다. 형들은 그를 분명히 팔아먹었고 그는 팔려왔다. 그러나 그는 팔려온 자로 살지 않았다. 보냄받은 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받아들이는 현실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내가 처한 현실이 어떤가? 그저 팔자와 운명이 기구해서 이렇게 살아갈 뿐인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고 있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팔려가는 생이 아니고 끌려가는 노예도 아니다. 보냄받은 사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사명의 사람이다. 그래서 요셉은 말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니님이시라.’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보내셨다, 나는 보내심을 받은 것이지 당신들의 손으로 팔려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다. 때로는 헌신을, 때로는 인내를, 때로는 겸손을, 때로는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에는 단 한마디도 응답이 없고, 싸구려 은혜만 구하고, 그것만을 달라고 소리지르는 우리들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생각하라.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비장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신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에스더의 말을 잘 새겨들으라. ‘내가 사흘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당신들도 나를 위해서 금식하며 사흘동안 기도하세요. 내가 왕궁의 규례를 어기고 왕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도 역사하시고 계신다. 여기에는 이기주가 없다. 이성적 판단도 없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도 없다.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어루어지이다 하는 순간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과거에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을 믿는다. 미래의 약속도 믿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지금 현재 내가 당한 처지, 바로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내게 분담하시고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이다. 에스더는 이 믿음과 이 지식과 이 신앙 안에서 새로운 결단을 한다. 나를 버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다짐한다.
우리가 다 에스더도 아니고 요셉도 아니다. 그러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절박한들 이 두사람이 당했던 것만 하겠나? 억울한들 이만큼 하겠나? 지금 것은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여 지금도 무엇인가 요구하고 계신다.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보냄받은 사명의 사람들로서 바른 선택, 바른 결단을 할 때 바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것이다. 이것을 믿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