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 임정자
추석에 부모님 산소에 들러 시골집으로 갔다. 북적거렸던 식구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감나무에 감은 익어가고 있었다. 형제자매 여덟을 둔 엄마는 내게 "반듯한 직장에 다니려면 공부해야 한다"라고 종종 말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외삼촌의 삶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자식들 교육이 우선이었다.
시골집 마당은 곡식 창고이자 농기계가 여기저기 서 있었다. 또한 닭, 오리, 바둑이(개) 가족들이 살았다. 여름이면 빨간 고추를 가을이면 탈곡한 나락(벼), 콩이나 깨 등 수확한 곡식을 멍석에 널어 말렸다. 엄마는 농사짓는 사람이 부지런해야 돈을 더 벌 수 있다고 새벽에 일어나 논, 밭으로 갔다. 집에서 일하는 아저씨를 데리고 눈코 뜰 새 없이 일했다. 아버지는 부잣집 2대 독자로 태어나 반 한량으로 살았다. 농사꾼도 아니고 그렇다고 놀고먹는 것도 아닌 그 어디쯤, 농기계는 아버지 손에서 움직였으니.
안마당은 한여름 밤에 식구들이 멍석을 깔고 앉아 팥죽을 먹기도 했다. 명절에는 윷판을 그려 윷가락을 던지며 윷놀이도 즐겼다. 요즘에 보기 드문 언니, 오빠의 전통혼례식 풍경도 연출 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학교 운동장만 한 곳이 지금은 작은 교실만 해 보인다. 둘째 오빠가 퇴직하고 시골에서 살겠다고 관리를 했는데도 손 봐야 할 곳이 많다. 기와 지붕이 너덜거린다. 엄마 흔적이 남아 있는 자개장에 조각이 떨어져 꽃 그림이 어긋나 있다. 뒷마당으로 나가니 강아지풀이 무성하다. 그 사이로 분홍, 하얀, 빨간색 봉숭아가 피어 있다.
엄마는 아버지와 이별하고 넓은 마당에 나무를 심고 텃밭을 일구었다. 그때 엄마 나이는 일흔여섯이었다.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논밭은 동네 사람에게 임대하고 감나무 인근에 매실, 앵두, 석류 등 유실수를 심었다. 귀퉁이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상추, 쑥갓, 오이, 가지, 방울토마토, 참외, 수박 등 계절마다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을 가꾸었다. 풍성했다. 여전히 마당은 엄마 일터였다.
휴가철이나 명절에 가면 비닐하우스에서 갓 따온 상추, 참외, 말린 가지, 늙은 오이 등을 바리바리 싸 주곤 했다. 애써 기른 작물은 자식들에게 내주고 엄마는 "꽃만 봐도 배부르다. 쑥갓꽃이 아주 이쁘다. 콩알만 한 부추꽃은 어찌 그리 야물어 보이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꽃 이야기를 했다. 나는 건강한 계절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꽃은 무심히 지나쳤다. 이제는 보인다. 텃밭이 꽃밭으로 변한다는 것을.
정원에 장미꽃이 거의 다 져버렸다. 5월 내내 나를 웃게 했던 분홍 꽃들이다. 그래서 슬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내년에 또 만날 테니. 장미가 사라질 무렵 텃밭에서 상추와 쑥갓이 올라오고 작년에 심어두었던 파릇한 부추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것들을 뜯어 식탁에 올렸다. 쑥갓은 상추와 쌈으로 먹기도 하고 라면을 끓일 때 넣으니, 맛이 향긋했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된장에 무쳤다. 그 향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엄마가 만든 된장이 아니라 맛깔스럽거나 감칠맛이 덜하다.
쑥갓 싹이 다 자라 줄기도 잎들도 억세고 빳빳한 진초록으로 변했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채소가 꽃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골집 안마당 비닐하우스에서 봤던 것보다 다르게 연한 초록이 노란 꽃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기적처럼 여겨졌다. 잎은 하얗고 꽃봉오리는 노랗다. 국화꽃 같지만, 쑥갓 향이 난다. 몇 그루에서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것을 꺾어다 거실로 들였다. 꽃병에 꽂았다. 더할 나위 없이 보기 좋았다.
거실에 쑥갓 향이 감돌았다. 혼자 말했다. 엄마가 너를 보고 감탄할 만했겠다. 내게 와줘서 고맙다고. 내년에 또 보자고.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 밥맛처럼 마음이 편안해지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내가 살던 고향으로 오기를 잘했다. 낯선 곳이 주는 불안과 익숙하지 않은 냄새가 있었다. 환경이 다르니 공기가 달라질 수밖에. 오래 보아도 물리지 않은 작물 꽃에 그립고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엄마는 여든넷에 일에서 해방되었다.
어릴 적 엄마가 내 손톱에 물들이게 했듯 딸에게 해줘야겠다. 뒷마당으로 가서 봉숭아꽃을 꺾어 검정봉지에 담았다.
첫댓글 엄마의 향기가 마당에 가득하네요.
요즘들어 엄마가 더 보고싶네요. 제가 나이드나봅니다. 고맙습니다.
우리집 마당과 비슷하겠구나 생각하지만 선생님의 눈길이나 손길은 정말 많이 다르네요.
'채소가 꽃으로 다시 태어났다.' 참 예쁜 표현입니다. 추억이 깃든 것은 다 저마다의 이야기기를 품고 있어서 따듯한 거 같아요. 선생님 글처럼요.
엄마, 시골집.
저도 옛날 생각이 나네요.
시골집 마당은 모든 것이 있지요.
그리움에서 추억까지.
정말 감성적이고 서정적이네요. 시골집 마당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립니다. 잉잉.
오래 전 기억이 많은 사람은 부자라지요.
풍요로운 친정이 잘 그려졌네요.
제 주변에도 부추꽃과 쑥갓꽃 예찬론자가 있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