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34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에서 한국인 수행자들과 마하시 선원장과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4. 질문 : 좌선을 할 때 호흡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리는 중에 무상, 고, 무아의 법을 느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법을 느끼는 것을 망상으로 알아차릴까 고민했습니다.
답변 :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릴 때 어떤 현상에 대해 세 가지 법인 무상, 고, 무아가 느껴지는 것이 진정한 삼법인이다.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의 모양이나 실재하는 것이나 모두 일어나서 사라지므로 영원하지 않다. 몸에서 무수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을 통해서 얻는 지혜가 진정한 지혜다. 명상을 하면서도 생각으로 아는 지혜는 진정한 지혜가 아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모두 찰나 간에 일어나고 사라진다. 이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은 오직 한순간의 일이다. 가령 횃불을 돌릴 때 팔을 펴거나 오므릴 때 모든 것이 순간순간의 찰나의 동작이 있을 뿐이지 그것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통찰지혜를 얻는 수행입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과 아는 마음을 하나로 보지 않고 몸의 영역과 마음의 영역을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찰나집중이 됩니다. 집중은 알아차림이 지속되어 마음이 고요해져 대상에 오래 머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찰나집중의 상태에서 지혜가 계발되고 차츰 지혜가 더 성숙해갑니다. 이때의 찰나집중은 대상과 아는 마음이 분리된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이며 이러한 찰나집중에서만 지혜가 계발됩니다. 그렇지 않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본집중을 하는 사마타 수행에서는 고요함에 머무는 것으로 그치고 지혜가 계발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vipasssana)라는 말은 빨리어로 접두사 위(vi)와 빠사나(passana)의 합성어입니다. 위(vi)는 분리하다, 다르다는 뜻이고 빠사나(passana)는 지켜보다, 통찰하다. 지속적으로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vipasssana)는 대상을 분리해서 통찰한다는 뜻입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분리해서 알아차릴 때 비로소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를 다르게 말할 때는 무상, 고, 무아라고도 합니다. 무상, 고, 무아는 존재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성품으로 사물의 궁극의 이치를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법이 바로 통찰지혜입니다.
지혜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성숙합니다. 많은 지혜 중에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최종적 지혜이며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때 생각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꿰뚫어서 아는 지혜라서 통찰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중에 무상, 고, 무아를 알았을 때는 망상으로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망상은 필요한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할 때를 말합니다. 수행 중에 지혜가 났을 때는 단지 지혜가 난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지혜가 난 것을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기뻐하는 순간 알아차림을 놓쳐 지혜가 더 증장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합니다.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자기 내면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알아차릴 때 대상과 아는 마음이 분리되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생각이라서 통찰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나 지식으로 알면 번뇌를 끊지 못하지만 통찰지혜로 알 때만이 모든 번뇌를 끊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으로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과 지혜의 차이는 미세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생각으로 법을 아는 지식의 단계에서 실재를 아는 지혜의 단계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세 가지인데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입니다. 문혜는 듣거나 읽어서 아는 초기단계의 지혜입니다. 사혜는 문혜로 알게 된 지혜를 지적으로 사유하는 지혜입니다. 수혜는 직접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얻는 지혜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세 가지로 알아차립니다. 첫째, 자기 몸과 마음의 감각기관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안[內]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둘째, 감각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밖[外]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셋째,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을 안팎[內外]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자기 몸과 마음이 아닌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면 내가 본다는 선입관으로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대상을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대상의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을 분리해서 알 수 있고 선입관 없이 알 수 있어 옳다거나 그르다고 알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면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첫 번째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은 먼저 자기 몸과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 서로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의 분리는 대상과 하나가 되지 않고 대상을 객관화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면 몸과 영역과 마음의 영역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첫 번째 지혜가 성숙되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지혜가 성숙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두 번째 지혜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지혜가 성숙되면 다음으로 모든 것이 앞선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이것이 연기의 지혜입니다. 연기의 지혜를 얻어야 비로소 일상에 대한 의문이 풀립니다. 무엇이나 우연한 것은 없고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고 알 때 그 원인은 자신이 일으킨 것이라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지혜가 성숙된 뒤에 다음 단계의 지혜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세 번째 지혜는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입니다.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서 몸과 마음의 무상, 고, 무아를 압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아는 세 가지 지혜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처음 경험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수행을 거듭할수록 더 높은 단계의 무상, 고, 무아의 지혜로 향상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단계적 과정을 거쳐 열반에 이르기 전에 최종적으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났을 때는 모든 집착이 끊어진 맑고 청정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 열반에 이릅니다. 이때 완두콩만한 유신견이 있어도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무수하게 반복됩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열반과 사다함의 열반과 아나함의 열반과 아라한의 열반이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바로 무상, 고, 무아를 얼마나 바르고 분명하게 알았느냐에 따라 도의 경지가 구별됩니다.
수행자가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날 때 한순간에 매우 빠르고 명쾌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지혜가 일어난 순간의 마음이 즉시 다른 마음으로 바뀌어 지혜가 난 마음은 사라집니다. 만약 무상의 지혜가 일어났을 때 이것을 붙잡고 있다면 지혜가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지혜가 날 때는 알아차림이 있지만 생각으로 바뀌는 순간 알아차림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수행이 더 발전하지 못하여 지혜가 증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안 뒤에 다시 알아차리던 대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지혜가 사유로 바뀌면 지혜가 난 것을 좋아하게 되어 수행이 퇴보합니다.
지혜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지혜가 났을 때 나의 지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가 난 순간의 마음은 이미 일어나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음을 얻은 자는 없다고 말합니다. 최종적 지혜는 무아를 통해서 얻기 때문에 내가 얻었다는 자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도는 있어도 도를 얻은 자는 없습니다. 아라한은 있어도 아라한이 된 자는 없습니다. 아라한이란 무상, 고, 무아의 완전한 도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