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세상 사람들은) 남을 아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일컫지만,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지혜가) 밝은 사람인 줄은 알지 못한다. (남을 이기는 사람을 힘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으로 일컫지만, (일부러 일삼는)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힘이) 굳센 사람인 줄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저절로 그러하게) 부유해지게 되고, (밖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굳세게 일삼는 사람은 (저절로 그러하게) 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몸이 사라질지라도)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 공功이) 오래 살게 되고, (몸이) 사라질지라도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그 이름이) 오래 보여지게 된다.
世之, 所謂智者, 知人也. 而不知, 其, 不如自知之, 爲明也.
세상 사람들은 일컫는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남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남을 아는 사람이 일삼는 지혜의 밝음) 그것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자신(自; 道·德·自然·無爲·性·命)을 아는 사람이 일삼는 (지혜의) 밝음과 (더불어)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
世之, 所謂有力者, 勝人也. 而不知其, 不如自勝之, 爲强也.
세상 사람들은 일컫는다. “힘을 가지는 바가 있는 사람이란 남을 이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남을 이기는 사람이 일삼는 힘이 굳셈) 그것은 (일부러 일삼는) 자신(自; 有爲)을 이기는 사람이 일삼는 (힘이) 굳셈과 (더불어)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을.
多藏者, 世之, 所謂富也. 然以多藏爲富者, 恒多欲, 多欲者, 恒多求. 是, 無時而足也.
재화를 쌓은 바가 (남보다) 많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부유한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것처럼) 재화를 쌓은 바가 (남보다) 많은 사람을 부유한 사람으로 삼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늘 그러하게 (재화를 쌓은 바가 남보다 많은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많아지게 하게 되고, (따라서 그들이 재화를 쌓은 바가 남보다 많은 바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많아지게 되면, (그들은) 늘 그러하게 (재화를 쌓은 바가 남보다 많은 바를 일부러 일삼아) 구하는 바가 많아지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끝끝내 재화를 쌓은 바가 남보다 많은) 때나 (부유한 사람이 되는 바를) 충족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內不足, 而外多求. 雖家, 累萬金, 亦乞人而已矣. 知足者, 食, 可以救饑而已. 衣, 可以揜形而已. 其願, 常易足. 足, 乎中, 而無求於外. 雖糲飯短裼, 亦可謂天下之上富矣.
(이른바)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밖으로 (일부러 일삼아) 구하는 바가 많아지게 된다. (따라서) 비록 집안에 수많은 금金이 널려 있을지라도, (집 밖에서 구걸하는) 걸인이 되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밥이 배가 주린 바를 건져주는 데 알맞게 할 따름이다. (그) 옷이 몸이 헐벗은 바를 가려주는 데 알맞게 할 따름이다. (따라서) 그 바라는 바가 늘 그러하게 쉽게 충족되게 된다.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만족하게 되면, 이른바 (안으로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만족하는) 가운데 자리하게 되면, (그) 밖에서 (일부러 일삼아) 구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되고, (따라서) 비록 (쌀겨를 다 벗기지 않은 현미로 지은) 거친 밥을 먹고, (어깨가 드러나는 소매가) 짧은 옷을 입을지라도, “(나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라고 일컬을 수 있게 된다.
奮發乎功名者, 世之, 所謂有志也. 然是, 皆外耳, 其志之, 成者, 不在我者. 曷若行之. 於身而自强不息之, 爲, 必能成其志也.
공功과 이름을 떨쳐내고 피워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그) 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떨쳐내고 피워내는 일) 이것이 모두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에 대해) 밖(의 일)일 따름이게 되면, (비록) 그 “뜻하는 바(志; 功·名)”가 이루어지게 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자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어떻게 (그 떨쳐내고 피워내는 일) 그것을 일삼아야 하는가? 이른바, (그) 몸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가 굳센 바가 멈추지 않은 채(自强不息; 性·命·自然·無爲·道·德), (그 떨쳐내고 피워내는 일을) 일삼게 되면, 반드시 (자신에게 자리하는) 그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盖生, 而引年者, 世之, 所謂久且壽也. 然是, 亦有窮也焉. 不失其所者, 道, 全守, 固, 而物, 莫能動也. 死而不亡者, 精神, 獨存. 而不與形, 俱化也. 如是, 則眞可以與天地, 偕久矣.
삶이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대로 거듭 한) 해年를 끌어당기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오래 보여지고, 오래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삶) 이것은 (그)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다. (그러나) 부실기소자(不失其所者; 삶이 그 끝점을 다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을지라도,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바性·命·自然·無爲·道·德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는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 德·自然·無爲·性·命)가 오롯하게 지켜지게 되고, (따라서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물건이 단단하게) 굳어지게 되며, 따라서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한) 물건(物; 道)이 (흩어지는 바로) 움직이기를 잘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사이불망자死而不亡者는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면밀한 바(精; 道·性)와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神; 道·命)는 (비록 몸이 사라질지라도) 홀로 (남아) 자리하게 된다는 말로서, (그것은) 몸이 (사라지는 바로) 달라지는 바를 갖추는 바와 더불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게 되는데, 따라서 하늘과 땅이 함께 하는 오래 사는 바를 더불어 하게 된다.
夫自勝者, 克己也. 知是者, 寡欲也. 强行者, 力行, 而不怠也.
이른바, 자승自勝은 극기(克己; 유위有爲한 자신을 극복)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승自勝)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줄이게 된다. 강행强行은 힘써 일삼는다는 말로서, (일삼는 데 있어서) 게으르지 않다는 뜻이다.
死而不亡之說, 儒者, 盖難言之. 然人, 苟能抱一致柔, 使天下之物, 無能以滑吾中者, 則其神, 常完, 其氣, 不傷, 其能長久而不壞者.
(그런데) 사이불망死而不亡은 유학자儒學者가 풀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그러나 (풀이하면) 정말로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와 더불어) 하나되는 바(一; 道·德·自然·無爲·性·命)을 품어 안음으로써,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부드러운 바(柔; 一)에 이르기를 잘하게 되면, 천하의 사물로 하여금, (유위有爲가) 부드러운 바로써, 자신의 가운데(中; 心·身·志·行)에 자리하기를 잘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게 되고, 따라서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神; 性)가 늘 그러하게 자기 일을 마치게 되며,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무위無爲한) 기(氣; 命)가 (늘 그러하게) 다치지 않게 되며, (따라서) 그 (공功과 이름이) 오래 살게 되고, 오래 보여지게 되기를 잘하는 바가 어그러지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亦不可謂無是理也. 但其用功之要, 則必自寡欲克己始, 而持之以不怠而已.
이른바, 이것은 이치로운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공功과 이름이 오래 살게 되고, 오래 보여지게 되는) 공능功能을 일삼는 요체는 ‘(자신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줄이는 것’과 ‘유위有爲한 자신을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그것을 지키는 데 게으리지 않는 것’일 따름이다. 〔장구長久의 방법은 과욕寡欲, 극기克己, 지지持之, 불태不怠라는 것이다〕
非有所謂服食祈醮. 役使神怪之說, 如後世方士之, 所假托者. 此讀老氏者, 所宜先辨也.
이른바, (그 공功과 이름이 오래 살게 되고, 오래 보여지게 되는 공능을 일삼는 요체는 따라서 기이한) 옷가지를 입고 (괴이한) 먹거리를 차려 놓은 채, (귀신에게) 빌거나 (산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일부러 일삼아) 지어내 퍼뜨린 기이하고 괴이한 이야기로서, 후세의 (도교道敎의) 방사方士가 (일부러 일삼아) 속여서 높이게 한 바이다. 이 노자(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따라서 마땅히 (이것을) 앞서 가려야 한다. 〔기초祈醮는 재초齋醮를 의미하는 듯하다. 재초齋醮는 도교道敎의 제례祭禮 또는 기도 의식이다. 재齋는 심신心身을 청정히 하는 것을 뜻하고, 초醮는 제단祭壇을 만들어 술과 음식을 차려서 신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뜻한다. 재초는 도교에서 중시하는 신神과 인간을 매개하는 도사(道士; 方士)가 주관한다. 재초의 종류는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동과 이변을 다스려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것, 제왕帝王의 복福과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것, 조상과 죽은 자의 영혼을 이끌어 신선神仙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 널리 일반 민중의 복리를 기원하는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재초의 형식이 정리된 것은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420~589)이다. 도교가 왕조의 신망을 얻었던 당唐나라(618~907)와 송宋나라(960~1279) 시대에는 재초가 특히 성행하여 하나의 국가적 행사가 되었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