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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0일에 30여년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작은 책을 냈다. 제목은 [忠武公 南怡 將軍의 武勇] 이다. 아래는 주요 내용이다.
------------------아 래------------------
1818년 순조 즈음에 그때까지 조선역사에 있어서 德에 제1인자는 이퇴계,
戰略戰術에 제1인자는 이순신, 勇猛에 제1인자는 남이가 뽑혔다
책을 펴내며
60여 년 전 중-고등 학교 국사시간에 남이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마음이 哀殘하였다. 그의 北征歌는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1985년 제대를 하고 취업한 직장이 용산 미8군이었다. 근처 용문동에 남이장군 사당이 있었다. 연려실기술도 읽었고 남이섬에도 가보았다. 글을 쓰고 싶었는데 자료가 너무 없었다. 그렇게 이십년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전에 KBS TV 역사저널 그날에서 [1468년(예종원년) 남이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와 忠武公 南怡 將軍을 죽인 간신 유자광-고발의 달인] 이라는 방송을 유심히 시청하였다. 패널은 신병주 교수, 김용철 교수, 박금수 박사, 이익주 교수, 최태성 강사, 그리고 계승범 교수였다. 새로 연구한 부분이 많았고 얼마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그 내용을 내블로그에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였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다. 의령 남씨 대종회를 통하여 남인우씨가 비매품으로 [충무공 南怡 장군]이란 책을 낸 걸 알게 되었다. 즉시 연락하여 2023년 8월 23일에 의령 남씨 충경공파 사무실에서 4명이 만났고 그 책 한 권을 획득하였다. 그 책 속에는 남인우씨가 이십여 년간 수고한 피와 땀이 베어있었다. 두 자료를 서로 보완하여 편집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천 명의 군대는 쉽게 얻을 수 있어도 한 명의 뛰어난 장수를 얻기는 힘들다. 남이 장군의 北征歌는 남이 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 남이 장군은 중국에 까지 명장으로 소문이 나 있다. 北征歌에는 古土回復의 정신이 있다.
남이 장군이 처형된 지 170년이 지나 청일전쟁이 터졌다. 송파구 잠실에 청일전쟁에 의한 三田渡碑는 만주어 한문 한글 3개국어로 씌어져 있다. 만주 여진과 중국에는 분명 남이 장군의 건주 여진 정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화여대 박민수 교수가 만주어를 전공하여 청일전쟁(1637년)을 연구하였다. 不世出의 名將 南怡 將軍에 관한 더 많은 사료가 국내외에서 발굴되기를 기대한다.
현대전에서 아무리 우수한 군사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있어도 그걸 운영하는 장병들의 군인정신이 해이하면 모두가 무용지물이다. 우리는 최근 년에 아프카니스탄에서 그 교훈을 얻었다. 2010년 3월 26일 밤 북한군의 천안함 폭침에 우리 해군 장병 46명이 전사하였다.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였다. 참으로 분하고 허망하다. 남이 장군이 가신 지 550여년, 溫故知新, 남이 장군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오늘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하겠다.
2023년 11월 20일 편저자 남기영
남이 장군의 연보(年譜)
-1443년(세종25)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서 세종대왕의 여동생인 정선공주와 혼인한 남휘(南暉)의 長孫子로 출생, 父 남빈(南份), 高祖父 南在 (태종 때 영의정)
-1460년(세조6) 경진년 무과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선전관(장교)으로 관계에 진출
-1467년(세조13) 5.16~8.12 이시애의 난 평정과 출정
7.14 북청 공방전에서 반군의 기세를 꺾게 되자 최초로 행부호군(장군)에 제수되면서 당상관에 임명됨
8.27 건주 여진족정벌 논의 시 중추부 동지사에 제수됨
9.20 이시애의 난 평정공로로 적개공신1등으로 책록, 의산군에 봉해짐
-1467년(세조13) 9.24~10.3 강순 어유소와 함께 건주 여진족을 정벌하여 2등공신이 되고, 중국에 까지 명장으로 유명해짐
-1467년(세조13) 11.27 겸사복장 승진
-1467년(세조13) 12.27 공조판서에 오름
-1468년(세조14) 8.23 병조판서에 오름
-1468년(세조14) 9.7 병조판서에서 해임됨
-1468년(예종원년) 10.24~10.27 유자광의 무고로 예종이 친국(親鞫)하여, 역모혐의로 몰려 38명과 함께 처형됨 (이때 포르투갈 탐험가 디아즈는 아프리카 남단을 탐험하고 귀국)
-1710년(숙종36년) 남구만이 현 화성시의 묘를 찾아 고유제를 지냄
-1801년(순조1년) 정범조가 남이장군 전기를 쓰면서 민간에 전파됨
-1818년(순조18년)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로 신설(伸雪)되어 복관작됨
-1910년(순종4년) 8.20 충무공 시호(諡號)가 내려짐
1.남이(南怡) 장군의 북정가(北征歌)
백두산 돌은 칼로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없애네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2. 1468년 (예종 원년) 남이 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
조선의 무과
무과시험
남이의 시
남이 장군의 캐릭터
남이의 결혼
조선 시대의 혜성
유자광이란 인물
역모고변과 동시에 거열형
3. 忠武公 南怡 將軍을 죽인 간신 유자광-고발의 달인
유자광의 고변
예종은 남이를 무척 싫어했다
유자광의 고속승진 비결
유자광의 고변으로 인한 피해자
유자광의 가족사
유자광의 능력
신분사회의 폐해와 김종직의 치명적인 실수
유자광의 복수와 큰 실책
조선왕조 국가체제의 모순과 한계
4. [충무공 南怡 장군]의 편저자 남인우씨의 머릿말
남이 장군은 1467년(세조13년) 이시애의 난 평정과 북방 여진족 정벌 시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워,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26세의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늘날의 국방장관)에 까지 올랐다가,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이를 계기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훈구세력(勳舊勢力)들이 남이 장군을 병조판서에서 몰아내고, 이어서 유자광을 앞세워 역모로 몰아 무고(誣告)함으로서, 불세출(不世出)의 명장 남이 장군은 아깝게도 처형되고 말았다.
그러나 <民心은 天心>이라 하였던가?
장군이 꽃다운 나이에 채 피어 보지도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자, 世人들은 얼마나 장군을 흠모(欽慕)하고 애석(哀惜)해 하였든지, 장군의 행적과 이와 관련한 수많은 일화(逸話)들이 전승되어, 누구나 어렸을 적부터 수월찮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1964년도에 영화까지도 나왔고, 장군이 돌아가신 서울 용산 지역 일대에서는 매년 10월 초 남이장군 제(祭)를 지내오다가, 이제는 서울시 대표 민속 축제로 큰 행사를 치르고 있다.
실로 장군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지만, 오늘날까지도 “슈퍼맨”이 되어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정조대에 예문관제학을 지낸 정범조의 ‘南怡將軍傳’등의 전기들이 단편적으로 나오게 되면서, 조정은 물론 일반 민중에까지 광범위한 복관작(復官爵)여론을 형성하기에 이르자, 드디어 1818년(순조18) 모든 관작이 복원되었고, 조선왕조 말기에는 무인(武人)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충무공(忠武公)” 시호까지 받게 되었다.
실로 350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 끝에 역사 속에 재등장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진정한 역사의 복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전기(傳記)들이 야사(野史)들을 바탕으로 극히 짧은 분량이어서, 이시애의 난 평정과 여진족 정벌 등에서의 행적을 다 밝혀주지 못했고, 장군의 생년과 계보 등 잘못 전해지는 부분들이 많아, 때로는 엄청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하고, 실록, 야사, 족보 간 서로 혼돈을 가져오는 부분들도 많다.
본서를 펴내게 된 주요한 동기(動機)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는데, 1995년 조선왕조실록을 한글로 해역 한 CD-ROM이 나오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 들을 발견하고는, 야사(野史)와 족보(族譜) 등에서 전해지는 얘기들을 총 종합하여,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하면서도, 그동안 출간을 망설이면서 밀쳐 놓았던 2003년도 원고를 다시 손질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은 한글세대로 한문에 박식하지도 못할뿐더러, 남이 다 우러러보는 장군의 발자취를 밝혀나가는데,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을 이해 해 주시길 바라며, 이를 계기로 앞으로 더 좋은 책의 출간과 나아가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기여되었으면 한다. (2020.4.15. 편저자 남인우, 비매품)
5. 노산 이은상의 南怡 將軍의 묘와 追慕碑
멀리 금강산 만계동 물과 오대산 북쪽 골 물이 합하여 昭陽江 新淵江이 되어 加平 고을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니 이것이 北漢江이요 맑고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며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합하여서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는 사이 한 모래 언덕을 이루니 이것이 南怡 섬인데 동쪽에는 寒德山, 서쪽에는 佛岐山, 앞에는 굽이도는 강줄기로 그림 같은 산수 속에 휩싸인 아름다운 섬이 어찌 우연히 생긴 것이랴. 언제부터 남이 섬이라 불렸는지는 문헌상으로 고증할 길이 없으나 옛 지도에 南島라 적혀있음을 보면 오랜 유래가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이곳에 굳이 분묘가 있어 南怡 장군의 무덤이라 전해오는 것도 그의 비참한 최후를 헤아려보면 그 같은 추정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러나 역사란 오래 지나면 정확한 것이 흐려지기도 하고 아닌 것이 그릇 전하기도 하여 뒷 세상에 미혹을 끼치는 수가 많은 법이라.
내가 여기서 가벼이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거니와 다만 옛날부터 그렇게 전하고 믿어 온 것만은 그 또한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南怡 장군의 본관은 宜寧이요 의산군휘의 아들이며 太宗 대왕의 외손자로서 世宗 25년 계해 서기 1443년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천품이 뛰어나고 체격이 장대하여 장차 장수의 재목이 될 것을 기약했었고 당시의 재상 권람의 넷째 사위가 되었으며 나이 17세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이는 우리 역사상 참으로 드물게 보는 일이요 그로 인하여 世祖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는 이같이 절륜한 용기를 가졌더니 世祖 13년 서기 1467년 吉州 사람 會寧府使 李施愛가 咸鏡道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 해 8월에 節度使 허종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반역자들을 토평케 했을 때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가 바로 南怡 장군이었고 9월에 압록강 상류지대 建州衛의 女眞族들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우리 장수들이 나가 추장 이만주를 죽이고 그들을 무찔렀는데 그때에도 으뜸 공로를 세운이가 장군이라 敵愾功臣號를 내리고 우리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工曹判書와 兵曹判書가 되었었다.
그가 오랑캐를 무찌르고 회군하면서 시를 읊었는데 白頭山石 磨刀盡 豆滿江水 飮馬無 男兒二十 未平國 後世誰稱 大丈夫 라 하니 번역하면 백두산 돌은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말리니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뒷날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이 같은 시를 읊은 영웅이건만 운명이 기구하여 世祖 다음 예종이 즉위한 뒤 奸臣 柳子光의 모함을 입어 반역죄로 고문을 받은 끝에 원통하게 처형되어 내 나이 겨우 26세라 가석하다 한 말이 왕조실록에 적혔거니와 때는 서기 1468년 10월 27일이요 그 같이 죽었으므로 이 섬에 버린 듯이 묻혔는지도 모르거니와 그런 것을 따지기보다 여기서 옛 영웅 사모하는 일이야 못할까 보냐
그러므로 500년 뒤에 와서나마 이 묘역을 정화하고 그 외로운 영혼을 위로해 드리는 것이 우리들로서 할만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더욱이 이곳 南怡 섬이야말로 13만 7천여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 등 십여 종의 희귀식물들을 비롯하여 230여 종류의 수목들이 절로 나기도하고 심기도하여 거의 자연생태계에 가까운 숲을 이루어 좋은 교단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고 공기조차 공해 없이 맑아 많은 사람들이 거리의 먼지를 벗어나 끊임없이 찾아오는 터라 국토 자연을 아끼고 역사 전통을 사랑하는 정신도장이 되기에 적당하므로 정화사업이 뜻있는 일임을 믿고 못내 기뻐하는 바이다.
南怡 장군 돌아가신 지 509년 되는 1977년 10월 27일
노산 李殷相 글을 짓고 일중 金忠顯 글씨를 쓰고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 대표 閔丙燾 비를 세우다.
6. 작가 이병주의 평가
작가 이병주씨는 예종은 남이를 죽이기 위해 왕이 되었고 남이가 죽자 그도 1년이 못되어 곧 죽었다고 썼다. 남이는 큰 공을 세우고 28세에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가 되었다. 예종은 그의 아버지 세조가 그토록 총애한 남이를 왜 왕이 되자마자 급하게 죽였을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남이 장군을 존경하고 있다. 27명의 조선 왕 중에는 국제정치의 흐름을 파악 못하고 전쟁을 막지도 못해서 평화 시에도 인재를 등용하지 못해서 국내정치를 잘못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왕이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많다. 인조, 예종, 선조, 연산군, 광해군, 등등.
모세에 의해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의 유랑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입성해서 초대 사울 왕 다음에 다윗 왕의 아들인 솔로몬 왕이 재위 중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져서 결국 나라가 분열되어 바벨론에 멸망 당하였다. 고로 현재 이스라엘 청년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을 제일 싫어한다고 한다.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 주민센터에서는 역모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남이의 원혼을 달래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매년 10월 1일에 서울시 문화제 행사로서 南怡將軍大祭를 치른다. 南怡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당한 후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의 충성심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남이의 사당이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에 건립되었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안히 하지 못하면(男兒二十 未平國)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後世誰稱 大丈夫). 생전에 백범 김구 선생은 이 글귀를 친필로 써서 청년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27살의 나이에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 장군의 호연지기를 젊은이들이 배우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 역사에 충무공은 고려 때 3명-최필달, 박병묵, 지용수, 그리고 조선조 때 9명-조영무, 이준, 南怡, 李舜臣, 金時敏, 이수일, 鄭忠信, 구인후, 金應河로 총 12명이다.
편집을 마치고 나서
1945년 태어나서 생존을 위해 그 동안 치열하게 달려왔다.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살아온 과정을 기록하자. 본 제목의 책도 그 중의 하나다. 北征歌는 나태해 지고 있는 나의 도전정신을 일깨우고 있다. 호전적인 북한은 핵무기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미친개는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한다. 그 동안 잘 대처해 왔다. 그런데 최근 년에 정권교체 때마다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 불안하다. 유권자들은 안보와 경제철학이 투철한 능력 있는 정직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국가 지도자는 국민을 잘 살게 해야 한다. 국가안보는 한 번 실수하면 나라가 망한다. 대통령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恒在戰場 有備無患의 전투태세와 군인정신, 실전 같은 교육훈련, 知彼知己면 百戰不危다. 다시 한번 南怡 將軍의 그 기상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면서~
2023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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