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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연 도 |
지원자 |
입소자 |
채용자수 |
1938년 |
2,946 |
406 |
400 |
1939년 |
12,348 |
613 |
600 |
1940년 |
84,443 |
3,060 |
3,000 |
1941년 |
144,743 |
3,208 |
3,000 |
1942년 |
254,273 |
4,077 |
4,500 |
1943년 |
303,294 |
6,300 |
5,330 |
1943년 |
(학도병) |
3,893 | |
합 계 |
802,047 |
17,664 |
20,723 |
출전 : 지원자·입소자수 : 近藤緣一編,『太平洋戰爭下の朝鮮及び臺灣』(1944. 7. 내무성 작성), 1961 ; 채용자·학도병수 : 朝鮮軍司令部,『朝鮮軍槪要史』(복각판, 宮田節子編, 不二出版社, 1989년) ; 한일민족문제학회 강제연행문제연구분과,『강제연행 강제노동 연구 길라잡이』, 선인, 2005, 34쪽.
2) 징병
징병제는 1943년 8월 1일 처음으로 시행되어, 1944년 약 20~22만명 정도의 조선청년이 징병되었다. 이때 전체 징병대상자의 약 96%가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불참자 12,905명 중 소재불명의 불참자가 6,228명이었다. 이들은 적극적인 징병기피자로 볼 수 있다.
〈표 14〉일제하 조선인 군인 . 군속의 수
계 |
사망 및 행방불명(14%) |
복원(86%) |
비고 |
|||
육군특별지원병 |
17,664 |
2,473 |
15,191 |
육군군인 : 186,279명
해군군인 : 23,000명
계 : 209,279명 |
||
해군특별지원병 |
3,000 |
420 |
2,580 |
|||
학도특별지원병 |
4,385 |
614 |
3,771 |
|||
징병 1기(육군) |
90,000 |
12,600 |
77,400 |
|||
징병 1기(해군) |
20,000 |
2,800 |
17,200 |
|||
징병 2기(육군) |
74,230 |
10,392 |
63,838 |
|||
합 계 |
209,279 |
29,299 |
179,980 |
출전 : 표영수,「군인동원의 송출과정」,『일제말기(1939-45년) 강제연행의 송출과정과 관련자료』(한일민족문제학회 2003년 정기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고도국방국가를 표방하며 소년·청년·여자청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청년단을 개편해 모든 청소년을 포괄하는 조선청년단을 결성했고, 단위 청년단은 모두 청년대로 바꾸었다. 기존의 청년훈련소는 청년부로 편입되었고, 여자청년단은 개편·통합해서 여자부가 되었고 소년부가 따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3부체제에 더해 지역에서는 읍·면청년대를, 직장단위에서도 청년대를 조직해, 250만명을 포괄하는 대규모 조선청년단을 조직했다. 이는 일제가 전시체제에 동원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일제는 징병제를 선포하고 청년훈련소, 즉 기존의 학교 교육체제에 포함된 청년부 1반의 확충을 가속화했고,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조선청년특별연성령’을 공포1942. 11. 3하고, 청년부 2반의 단원인 이들을 대상으로 청년특별연성소에서 일본어·교련·근로작업 등 1년간 600시간 이상의 교육을 실시했다.
일제는 청년단-청년훈련소-청년특별연성소의 유기적 연관 속에서 징병예비교육을 실시했다. 그 핵심은 군사훈련 및 일본어 교육이었다. 일제는 청년단원들을 생산력 확충을 위한 강제동원 대상으로 삼아 근로보국대와 청년대, 생산보국운동 등에 동원했다. 註140)
3) 국민징용
국민징용이란 미명하에 1939~1945년 동안 일본 등지의 탄광·금속광산·토건현장 등으로 한국인 노동자 1백만명 이상이 강제연행되었다. 1939년 이후 강제연행된 한국인은 한반도 내에서 480만, 일본으로 152만, 군대요원 20~30만, 군위안부 14만 등 총 7백여 만명이 연행되었다. 註141)
〈표15〉일제강점기시대,국내외인력동원의추정 (단위 : 명)
노무동원 |
계 |
병력·준병력동원 |
계 |
(조선내 도내 징용) |
5,782,581 |
육군특별지원병 |
20,723 |
(조선내 관알선) |
382,537 |
육군 |
186,980 |
(조선내 현원 징용) |
260,145 |
해군 |
22,299 |
(조선내 국민징용) |
43,679 |
군속(육군) |
70,724 |
소 계 |
6,468,942 |
군속(해군) |
84,483 |
조선내 군요원 |
55,404 | ||
해외 징용 |
724,727 |
남방 군요원 |
36,535 |
일본 국민징용 |
132,781 |
일본 군요원 |
132,781 |
남방 국민징용 |
135 |
중국 군요원 |
4,587 |
합 계 |
7,326,585 |
합 계 |
614,516 |
총 계 |
7,941,101 |
비고 :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업위안부피해자 등 성 동원자들. 중국의 집단농장 이주자, 원폭피해자 등은 제외. 출전 : 김민영,「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조사 및 인원 추정」, 『2003년도 일제하 피강제동원자 등 실태조사연구 보고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한일민족문제학회 강제연행문제연구분과, 『강제연행 강제노동 연구 길라잡이』, 32쪽.
4) 학병
1944년 1월 20일의‘학도지원병’은 명목만‘지원병’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강제징병과 다를 바 없었다. 일제는 1943년 6월 25일 「학도전시동원체제확립요강學徒戰時動員體制確立要綱」을 제정한 후 1943년 10월 20일「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陸軍特別支援兵臨時採用規則」육군성령 제48호을 공포했다. 불과 한달 뒤인 11월 20일까지를 마감기한으로 설정한 이 제도는 전문대학 재학 이상의 조선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지원’병은 부모·형제·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 출신 오탁근은 명치대학明治大學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교련교관·의성경찰·헌병 등이 총동원되어 가족을 위협하
고 협박했다. 조선-일본간의 연락선은 물론 철도의 승차권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어 학병‘지원’여부를 검사했다. 가족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병들은 학병거부 및 도피를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註142) 소기국소小磯國昭 총독은‘전원 지원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했고, 판원정사랑板垣征四郞조선주둔군사령관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고관들도‘전원 지원’하라고 강요했다. 한편 문인보국회文人報國會·종교단체·중추원 등이‘전원 지원’을 위해 총동원되었다. 註143)
조선총독부는 학병 강제동원에 혈안이 되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조선청년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여운형·안재홍·김성수·장덕수·이광수·유진오 등을 강압하거나 이름을 도용해 이들 명의의 학병권유 권고문을 『경성일보』·『매일신보』 등에 게재하기까지 했다. 註144) 그리고 총독부는 최남선崔南善 등을 내세워 일본 유학생들에게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강연을 시켰으며, 학교 당국·지방관헌들은 가족을 협박하거나 가족의 명의를 도용하여 학병지원 권유 전보를 쳤다. 註145) 심지어 귀국하는 관부 연락선 안에서 타고 있던 한국 학생 약 30명을 형사들이 강압하여 지원 서류를 날조한 뒤 자진 지원한 것처럼 신문에 보도하기도 했다. 註146)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李光林 등 학병 60여 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徐載均, 보성전문 상과 졸업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 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의 이혁기李赫基, 보성전문의 이철승李哲承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註147)
조선인 학병들은 1944년 1월 19~20일에 일제히 입대했다. 학병 적격자 7,200여 명 중 한국 내 학생 959명적격자 1,000명, 귀성 중인 일본유학생 1,431명적격자 1,529명, 일본에 남아있는 유학생 719명적격자 약 1,400명, 9월 단축 졸업생 941명적격자 1,574명, 취직 중인 졸업생적격자 약 700명 등 총 4,385명이 끌려나갔다. 註148) 끌려나간 학생들은 모두 고등학력자로 조선의 차세대 지도자그룹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지원병’ 정책은 실질적으로 조선의 장래를 전쟁의 포연 속에 압살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끌려나간 학병들 가운데 전후 한국사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그중 몇 명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김수환천주교 추기경, 구태회국회의원, 민기식장군·국회의원, 민병권장군·국회의원, 민충식호주대사, 박동운한국일보논설위원, 신상초중앙일보 논설위원, 이병주작가, 임원택서울법대교수, 장도영장군·5·16쿠데타,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한신장군, 한운사작가, 현승종고대 교수, 황용주MBC사장. 註149)
학병·징병·징용에 대한 소극적 거부·적극적 반대투쟁은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던 학병들은 국내에서나 국외
에서 집단·개인적인 반일운동, 탈출사건을 벌였다. 학병·징병거부라는 소극적 반대에서 출발해서, 학병·징병·징용자를 포함한 비밀 무장조직의 결성, 일본군 내 학병들의 반란 시도, 학병 탈출과 국외 무장세력 합류 등의 적극적 항쟁이 결합되어 있었다.
2. 학병·징병 거부자의 조직과 무장화
일제 말기 국내 학병·징병 거부자들이 결성한 무장조직들은 “결정적 시기의 무장봉기”라는 동일한 정세관과 운동방침을 갖고 있었다. 즉 이들은 일제의 패망이 목전에 도달해 조선의 독립의 결정적 기회가 도래했다는 정세관에 입각해서, 국내의 동지들을 규합해 무장조직을 편성하는 한편 국외의 독립운동세력·무장조직의 국내 진공에 맞춰 중요 군사시설 파괴·무장봉기를 한다는 운동방침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보광당하준수, 조선민족해방협동당金宗伯, 세칭 城大醫學部사건, 산악대李赫基 등이었는데, 이 조직들은 직·간접적으로 건국동맹 혹은 여운형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註150)
1) 보광당
보광당普光棠을 이끈 하준수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1944년 1·20학병 출전을 거부하고 입산했다. 무술유단자였던 하준수는 덕유산 은신골을 거쳐 지리산 벽송사碧松寺, 전북 장안산長安山, 경남 백운산白雲山 등에서 겨울을 나고, 1945년 3월 경남 산청군 계관산掛冠山에 입산해 보광당을 조직했다. 지리산 시절 학병·징병·징용거부자 등 17명이던 무리는 보광당을 조직할 무렵 73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화전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일외에는 군사문제에 집중했다.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엽총 등의 무기 구입과 염초·황·제렴 등으로 화약제조를 시도했다. 이들은 주재소를 습격해 총기 5~6정을 획득하기도 했다. 지리산에서는 경관 200여 명이 습격했고, 1945년 7월 말에는 산청군 경관대 십여 명이 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들의 목적은 일본의 전쟁수행능력 저지와 연합군의 남한 상륙 시에 이에 호응할 수 있도록 당원들을 무장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즉 학병·징병·징용 등 일제 침략전쟁 동원거부투쟁에서 초보적 수준의 무장투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들은 연합군이 한반도 남부에 상륙한다는 정세관을 확립하고, 결정적 시기에 맞춰 봉기한다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다. 註151) 하준수는 여운형의 수양아들임을 자처할 정도로 여운형과 밀접한 관계였으며, 해방 후 자신이 건국동맹원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註152)
2) 조선민족해방협동당
징용·징병·학병 기피의 대표적 사례는 조선민족해방협동당朝鮮民族解放協働棠이었다이하 협동당으로 줄임. 협동당의 조직은 1943년경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1944년 국내에 들어와서는 포천 일대에 무장근거지와 무장부대를 설치하는 한편 경성제대 의학부와 연희전문 등 주요 거점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포섭한 조직이었다. 동경 대동아학원大東亞學院 서무계 겸 강사였던 김종백金宗伯은 조춘일趙春日, 高賀鶴松의 제자·안모安某, 大同學院 재학 등과 결합했고, 안모 등 몇 명이 국내에 잠입해 조직을 확대했다.
여기서 협동協働이란 명칭은“공산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등의 장점을 택한 진보적 조선독립운동의 이론”으로 ‘협동’의 이념에 입각한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당수 김종백의 진술에 따르면 이상적 사회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모두가 같이 일하고 착취가 없는 사회인데, 민주주의와 같이 자유방종에 흐르지도 않고 자본주의와 같이 착취를 허락하지 않는다. 협동사상은 공산주의와 다르며 원칙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한쪽으로는 이것에 제한을 두어 그 제한을 넘는 재산은 국유화하고 그것으로 교육비 등에 충당한다. (중략) ‘파시즘’과 같은 독재에 흐르지 않는 이상적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註153)
협동당원이었던 경성제대 의학부의 김정진에 따르면, 협동당이 제시한 선결문제는 민족해방이며, 그 다음이 자본주의 철폐였는데, “일본이 너무나 공산주의에 공포병”에 빠졌기에 실천운동방법으로 “협동체주의協働體主義란 체제”를 내건 것이었다. 註154) 즉 자본주의, 공산주의, 파시즘을 극복한 협동주의를 내건 것이었다.
1943년 여름 조직된 협동당은 원래 일본 동경에서 김종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나 학병을 기피한 학생들이 결집하면서 조직이 결정적으로 강화되자 조선과 일본 내에 거점을 마련했다. 나아가 1944년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자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겼다.
본부를 서울 계동에 두고 길주·명천·온성·함흥·원산·구성·위원·승호리·고성·금강산·양양·장전·포천·양평·김해·진해 등지에 거점을 확보했다. 이들은 전국 각도에 세포 구축을 시도했는데 북부지방염윤구·김석훈·박한용, 남부지방이수일·조춘일, 중부지방 및 연락담당박창빈·송재덕·정규상·이조원 등 조직책임자를 임명했다. 註155) 실제로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에서도 당원 모집이 이루어졌다. 계훈제는 강제징용되어 평양 채석장에서 장성규명치대 출신를 만나 그가 당원이던 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했다. 한편 이기형은 여운형과 상의한 후 염윤구당시 일본신학 중퇴와 함께 징병을 피해 협동당에 가입했다고 증언했는데, 註156) 염윤구는 전국 각지에서 지하공작을 하며 동지를 구해 근거지로 보냈고, 13도에 지부를 두었다고 주장했다. 註157) 협동당의 당칙은 다음과 같았다.
-. 당수에 대해서는 절대 복종할 것
-. 당수의 인격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 것
-. 당을 절대 믿을 것
-. 당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 것
-. 항상 자기가 당원이라는 것에 긍지를 가질 것
-. 동지는 서로 신뢰할 것
-. 곤고결핍을 감당하고 당원은 서로 고락을 같이할 것
-. 당명에 절대 복종할 것
-. 당을 배반하지 말 것
-. 동지 획득에 노력할 것. 註158)
협동당의 근거지는 포천과 춘천의 경계에 있는 국망봉國望峰에 두었는
데 도평都坪에서 광덕廣德까지 약 20리의 첩첩산중이었다. 인근의 흥룡사의 주지 김필제金必濟, 雲鏡스님가 협동당 당원으로 식량을 제공했다. 註159) 흥룡사는“일제시대 쌀 100석을 추수하고 화전을 통한 수입도 있어 살림이 넉넉”한 절이었다. 註160) 김지복은 “여운형씨 계열에서 포천에서 김화로 넘어가는 고개에다 아지트를 만들어 청년을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운경스님이 그곳에 식량을 대주었”다고 했는데, 국망봉에 모여든 협동당 관련자는 학생을 중심으로 징용·징병·학병·보국대 등으로 끌려 갔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국망봉에 굴 12개를 파고 집중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당수 : 김종백
·당간부 : 김준호金俊鎬 목산일부木山一夫 단산종수丹山鍾秀
·학생층 : 김준호최고간부, 김정진책임자, 경성제대 의학부 : 김정진 임광세 김교명 이상일 차상임 김경동 김동섭 최창준 정성장 신백우 권이혁
·산악부 : 김석훈金錫薰 훈련부장, 정기섭丁驥燮 지육부장·대정대학, 염윤구일본신학 중퇴, 정준섭연희전문 영문과, 이인식李仁軾 경성상업 졸업, 조춘일趙春日 조동호趙東浩 김필제 흥룡사 주지, 이기형李基炯
이기형에 따르면 염윤구·김석훈·정기섭·정재섭 등 10여 명이 춘성군 사북면 광덕주재소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가지고 염윤구일명 靑山의 지도아래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경성제대 공학부 이영필李永弼도 동료 6~7명과 함께 강원도 산중에 들어갔다. 해방 후 국군준비대 선언에 따르면 징병을 거부한‘수동지數同志’가 강원도 산중에서 산악대를 조직한 것이 국군준비대의 선구적 요람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註161) 염윤구는 이미 국망봉에 협동당의 근거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학병에서 탈출한 후 산악부에 들어갔다. 산악부는 산악대·산악군단 등의 명칭으로도 알려졌는데, 훈련부장 김석훈과 지육부장 정기섭 등의 간부를 정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사상훈련을 진행했다. 포천에서 200여 명이, 금강산에서는 100여 명의 청년들이 훈련했다고 하는데 1944년 12월 국망봉에서 실제 검거된 인원은 6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재등임업齋藤林業·삼흥제탄三興製炭 등에 시탄柴炭을 제공하면서 전시 인력난에 빠진 이들 회사에 징용·학병들을 취업시켜 조직의 안정성 확보에 주력했다. 낮에는 목재를 목총삼아 군사훈련을 실시했고, 야간에는 조선역사·병술·정세분석·정신강화 등이 이론학습을 했다. 또한 징병·학병거부투쟁, 일인 고관 및 친일파 처단 대상자 명단 작성, 단파청취 및 유언비어 유포, 연합국과의 연계도모, 민중봉기의 요인 조성과 봉기를 위한 목창木槍·목검木劒을 제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명천 등 농촌지역에서는 중앙의 지령에 따라 촌민들을 모아 낫과 곡괭이, 목총을 들고 주재소·헌병대 파견분실·읍사무소를 습격해 일본인 주요 간부를 살해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실제로 염윤구는 “일단 일을 일으킬 때는 각지부를 통하여 군수품생산기관과 운수기관의 파괴까지 계획”했다고 밝혔다. 註162) 계훈제도 협동당 관련자와 만나 본부의 지시에 호응해 다이너마이트를 훔쳐 30m 길이의 가마솥 폭파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포천 흥룡사의 김필제 스님은 직접 조달 방위책을 맡아 함께 활동했다. 註163)
협동당은 학생측과의 연대에 주목했다. 당수 김종백을 중심으로 경성제대 의학부생과 연계하여 견지의원堅志醫院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성대의학부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註164) 학병지원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던 경성제대 의학부 예과생들은 1944년 봄경 정성장鄭聖璋·김종설을 통해 산해山海라는 가명을 쓰던 35세 가량의 일본 유학생 출신, 즉 김종백을 만났고, 대일 무장봉기를 목표로 하는 협동당에 가담하게 되었다. 산해는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보아 공산당은 안되고, 그렇다고 반공산당으로도 안된다는 독특한 이론을 폈으며, 해방 후 관련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협동당이 공산주의가 아닌 “민족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註165) 이들은 이 이론에 매료되었는데, 성대 의학부 학생들은 이 시기 여운형과 접촉하고 있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관련자들은 정성장·김정진金楨鎭을 비롯해 김교명金敎命·김경동金庚東·김동섭金東燮·권이혁權彛赫·이상일李相一·임광세林光世·차상임車相壬·최창준崔昌俊·신백우申百雨 등 11명이었다. 이들은 1944년 11월 포천 산 속 본거지에 입산해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던 중 1944년 12월 15일 ‘성대 의학부 사건’으로 알려진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들이 체포되면서, 협동당 간부와 산악대가 습격·체포되기 시작했다. 의대생 신백우는 휘문중학 동창생 오세준과 독립문제 등으로 논의했는데, 그가 또 다른 비밀결사인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1941년 12월 10일경 조직. 회장 안두경安斗京, 회계계會計係 박백중朴百仲, 신주申周·차철부車哲夫·소천징웅小泉澄雄그룹과 연계되었다가 연쇄적으로 검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註166) 의대생 정성장·임광세·김경동·신백우·차상임·최창준 등이 검거되었고, 산악대도 습격을 받아 김석훈·김필제·정기섭 등 60여 명이 검거되었다. 김종백은 일단 피신한 후 보선산寶善山에 굴을 파고 새로운 아지트를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마을 구장의 밀고로 인천경찰서 형사인 시전柴田에게 검거되었다. 염윤구는 강원도 춘성군 사내면 화악산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註167)
김종백은 고문 끝에 1945년 1월 사망했고, 정성장·신백우는 기소되었으며, 최창준·김경동·차상임·임광세 등은 1945년 6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3) 기타
1944년 평양 일대에서 징병·징용을 기피한 청년들로 구성된 조국해방단이 있었다. 이들은 첫째 일제의 제1선 기관을 파괴하여 전력을 약화, 둘째 김일성과 연락해 무기의 입수, 셋째 인재를 뽑아 해외로 보내 직접 무력전 참가 등의 방침을 정하고 병기창이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동지들을 통해 무기와 폭탄을 빼내거나 인근 산에서 무기 제조·무술훈련을 실시하였다. 註168)
조직적 실체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혁기李赫基가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설악산·속초를 중심으로 한 산악대山岳隊 역시 학병거부자들의 조직이었다. 1941년 경성제대 예과 18회 입학생인 이혁기는 여운형의 영향 하에서 이철승과 함께 학병거부문제를 모의했고,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註169) 당시 여운형은 학병문제를 의논하러 간 경성제대 학생들에게 민족의 힘은 총이 있어야 학생들이 전쟁터에 나가 총부리를 돌려 투쟁하자고 설파했다. 註170) 이혁기는 학병거부에 실패하고 1944년 1월 학병에 끌려나갔지만, 곧바로 탈주했고, 산악대를 조직했다. 유진오에 따르면 이혁기는 남양으로 이동하게 된 기회를 틈타 탈출에 성공했고, 국내로 잠입했다는 것이다. 註171) 이혁기가 총사령을 맡은 국군준비대는 선언을 통해 “일즉이 8월 혁명 이전 도살자屠殺者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적 징병의 철쇄를 단절하고 탈주의 도피에 의하야 강원도 산중에 집결된 수동지는 혁명단체 ‘산악대’를 조직하야 우리운동의 선구적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그 연원을 밝혔다. 註172)
3. 일본군 내 학병탈출·반란시도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에 입영한 학병들의 탈출이었다. 이는 일본군을 사상적으로 약화·와해시키는 한편 탈출한 학병들이 무장투쟁 조직의 결성을 시도하는 한편 독립군에 합류함으로써 항일 군사세력을 강화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독립운동사』는 학병의 탈출에 크게 세 가지 성격이 있다고 정리했다. 첫째 탈출 그 자체로 항거하는 경우, 둘째 탈출한 후 한국광복군으로 망명하여 독립 전쟁에 참가하는 경우, 셋째 탈출 학병이 독자적으로 독립군을 편성하는 경우 등이었다. 註173) 첫째 경우 일본군 자체의 억압 및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차별로 다수의 탈영·탈출사례가 있었는데, 탈출동기와 과정을 볼 때 소극적 의미에서의 대일항쟁으로 볼 수 있다. 광복군에 들어가기 위해 망명·탈출한 경우와 독립군·무장조직 결성을 위해 탈출한 경우는 학병에 임한 “민족의 주체적 대처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註174) 특히 국내에서 독립군 가담 및 무장조직 결성을 위해 탈출을 모의하거나 실행한 사례들은 이러한 탈출·반란시도가 생명을 담보로 한 독립의지의 표현이었음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평양에서 대규모의 평양사단 학병반란사건이 전개되었으며, 용산·나남·대구·함흥 등 전국 각지에서 학병반란 혹은 집단탈출사건이 있었다.
1) 함흥43부대 학병탈출사건
전국적으로 학병탈출 및 반란이 처음으로 모의된 것은 함흥 43부대에 입대한 학병들이었다. 함흥43부대는 전시 동원사단으로 편성된 평양 30사단 예하 부대였다. 이 부대에 입대한 학병들 가운데 태성옥太成玉·임영선林永善·이윤철李允喆 3명이 탈출했다.
태성옥은 함경북도 명천 출생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함북 성진군 임명보통학교 5학년생으로 만세를 부르다 퇴학당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강했다. 조도전대학 법학부 졸업 후 학병에 강제 징집되었다. 태성옥은 이미 입대 전부터 일본군에서 탈출할 계획과 결심을 갖고 있었다. 註175)
임영선은 경신학교 출신으로, 명치明治대학 예과에 입학중 학병에 징집되었다. 임영선에 따르면 1943년 11월 임정에 가담하기 위해 열하성 승덕承德에 갔다가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1944년 1월에는 만주 봉천에서 독립군 접촉을 시도했으나 평북 정주경찰에 체포되었다. 임영선은 입대를 조건으로 석방된 후 함흥43부대에 입대했다. 註176)
함흥43부대에는 재학 중 끌려나온 조선학병 30여 명이 있었다. 태성옥은 군사훈련을 기피하기 위해 꾀병을 부려 병원에 입원한 후 함께 탈출할 동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임영선·이윤철중앙대학 출신이 물망에 올랐고, 그밖에 2~3명도 의사를 표명했지만 결정적 의지가 부족했다. 결국 태성옥·임영선·이윤철 3명이 탈출을 결정했다. 태성옥이 강력하게 탈출을 권유했고, 이윤철은 즉각 이를 승낙했지만, 임영선은 잠시 주저한 후 두 사람의 설득을 받고 이에 찬동했다. 이들은 탈출한 후 만주지역에 들어가 독립군에 가담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註177) 3명은 6월 2일을 탈출날로 정한 후 비상식량과 철조망 절단용 공구를 미리 준비했고, 물통·단도 등은 일본군 장비를 사용하기로 했다.
1944년 6월 2일 아침 이들은 함흥43부대를 탈출해 부대 뒤 발용산-성천강-장진으로 갔다. 이윤철은 경원선열차를 타자고 했고, 임영선은 고향 장진으로 가자고 주장해 장진으로 향하던 중 장진수력발전소 앞에서 흩어져 모두 자기 고향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이윤철은 독자인 자신으로 인해 가족의 고난이 증가할 것을 우려해 6월 18일경 홍원경찰서에 자수했고, 임영선은 6월 22일 21시경 함경남도 장진의 친척집에서 체포되었으며, 태성옥은 6월 28일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체포되었다. 註178) 함흥헌병대로 끌려온 3명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44년 7월 17일 평양 육군 군법회의에서 태성옥은 징역 5년 6개월, 임영선·이윤철은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일본 구주九州 소창小倉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해방이 된 후 1945년 10월 17∼18일에 석방되어 귀국했다.
2) 평양사단 학병탈출 시도사건
학병탈출·반란사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파장을 미친 것은 평양사단 학병탈출 시도였다. 평양사단은 평양 교외의 추을秋乙에 주둔하여 일명 추을부대로 불렸는데, 42보병부대, 43보병부대함흥 주둔, 44보병부대, 47포병부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부대에 입대한 학병들은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출신들이었다. 이 사단의 일본인 고참병들은 1942년 과다카날전투 등에 참가한 참전병들이었기에 기질이 거칠고 잔인했다. 또한 미군의 전투력을 체험했기에 이 전쟁에서 일본은 이기지 못한다고 공공연히 떠들기도 했다.
입대한 학병들은 각 내무반에 소수로 분산 배치되었고, 서로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내무반에서는 일본 고참병들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나아가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차별과 대학출신이라는 학력적 격차 때문에 더욱 심한 폭력과 사적 기합·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학병들이 민족의식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평양학병 반란의 주모자였던 김완룡金完龍의 경우, 함흥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주, 형은 함남 도청관리, 사촌형은 청진 판사를 지내는 등 내선일체를 무리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입대 후 내선일체가 완전히 허구임을 깨달았고, 일본인들에게 “세상에 나서 그렇게 차별대우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註179)
강제 동원으로 학병에 입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학병들은 내무반 내에서의 일상적 모욕·폭력, 부대 내의 민족적 차별과 부대간부 후보생 채용시험에서의 차별 등으로 점차 부대 탈출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탈출의 움직임은 1944년 7~8월경에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탈출 기도가 시작된 곳은 42부대였다. 1944년 6월 18일 간부후보생 채용시험 결과 조선인 학병의 합격률은 11%에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학병 차별이 명백해졌다. 42부대 학병들은 지역간 혹은 소속 중대에 따라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틈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불만을 토로하는 과정에서, 탈출모의 활동을 본격화하여 동지 포섭과 조직에 착수했다. 박성화·김완룡·최정수·김태선 등 함경남도 출신의 집단과 최홍희·김윤영·이도수·유인철 등 함경북도 출신자들 및 전상엽·박혁 등 제4중대 소속병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었다. 註180)
이들은 1944년 7월 중순경 김완룡의 제안으로 이러한 집단을 하나로 통일해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조직명·부서·인선 등은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전상엽에 따르면 조직명은 박성화의 제안으로 삼천당三千黨으로 정했다. 註181)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위원)장 김완룡
참 모 박성화 전상엽 이도수
식량괘 최홍희
피복괘 김태선
선전괘 박지권 김윤영
위생괘 이도수 註182)
한편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 우리는 주의 사상을 초월, 오직 3·1정신을 받들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원수의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 우리는 중지를 모아 직간접으로 일본 군부를 내부로부터 교란, 일본의 패망을 추진한다
-. 우리는 힘을 모아 무장봉기하고 사태가 여의치 못할 땐 백두산으로 들어간다
-. 우리의 최종목표는 오직 독립이요 자치권이나 참정권 따위는 고려의 여지가 없다. 註183)
42부대 중심의 의거 기간조직에 참여한 학병은 30여 명이었다. 註184)
42보병부대 옆에 위치해 있던 47포병부대에서도 부대 탈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42부대는 타부대에 소속된 학병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고, 47포병부대와 연락이 이루어졌다. 47부대의 조직 책임은 이철영李哲永이 담당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중경에 고려군이라 불리는 20만 명의 조선독립의용군이 조직되었다는 정보를 얻고, 일본이 패전할 때 미영군대가 상륙할 터이니 중경행과 미군 상륙에 대비해 영어를 공부하자는 등의 논의를 하기도 했다. 명백히 일제 패망에 대비한 준비와 탈출·독립군 합류를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44부대와 48부대에 대한 조직망 확대도 시도되었다. 외출·가족면회 등의 기회뿐만 아니라 근로정신대로 군수공장, 부대의 군복 손질 등에 강제동원된 한국 여학생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평양 출신의 전상엽·주명석·김영철은 근로 봉사에 동원된 평양 서문여고·정의여고 학생들에게 조직에 관한 연락을 부탁했다. 또한 연락장소로 추을육군병원을 이용했는데, 이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한모 간호사로부터 각부대와의 연락 및 정보파악에 도움을 받았다. 한편 조직연락을 위해 김동수가 꾀병으로 입원한 후 50부대에 대한 연락을 담당했다.
42부대를 중심으로 작전계획의 준비가 추진되었다. 거사를 둘러싸고 2개의 안이 제출되었다. 먼저 급진파에 속하던 전상엽은 학병들이 일시에 봉기해 평양사단을 폭파하자는 제의를 했으나, 폭약과 탄약문제, 그리고 일군의 반격 능력을 고려할 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두번째는 부대를 일단 탈출하여 한만국경韓滿國境 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폭파안도 겸한다는 제2안이었다. 결국 탈출과 폭파를 겸한다는 안이 채택되었다. 註185) 구체적 행동계획은 ① 지정된 날, 지정된 시간에 부대를 탈출하여 개별적 행동을 취하여 양덕陽德의 북대봉 기슭에 집합한다. ② 이후 낮에는 정찰·수색전, 밤에는 행군해서 양덕→낭림산맥→장진호長津湖→부전호赴戰湖→원풍元豊→황수원黃水院→풍산豊山 →갑산甲山→봉두리鳳頭里→길혜선吉惠線(길주∼혜산간)→보천보保天堡에 도착해 항일 게릴라전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국내 민중의 반일봉기와 소련의 대일선전 포고를 예상하는 한편 패색이 짙은 일군의 대부대가 즉각 동원되지 못할 것이며 추격해 와도 국경선에만 도착하면 독립군과 접선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졌다. 식량과 무기는 벽지의 경찰서와 헌병대를 습격하여 탈취할 계획이었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함경북도 보천보였는데, 註186) 이는 항일빨치산 부대가 1937년 6월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던 바로 그 장소였다. 註187)
이들은 개인 무기와 실탄, 의약품, 식량과 각종 장비, 민간복, 자금을 준비했다. 평양 학병탈출 계획은 김완룡을 최고 지휘자로 해서, 참모부와 지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제42부대, 제47부대, 제48부대, 제50부대의 학병이 간부로 참가했다. 최고지휘자 김완룡42부대, 참모장 박성화42부대, 작전참모 전상엽42부대, 보급참모 최홍희42부대, 정보참모 이도수42부대, 제1지대 최정수42부대, 제2지대 이철영47부대 등이었다. 註188)
부대탈출은 최초에 1944년 10월 1일 추석일로 정해졌다. 그런데 평양사단은 밀림전 훈련을 위해 부대병력 2분의 1을 동원하여 부전 고원에서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거사일은 11월 1일로 정해졌다. 이 사이 부전고원 기동훈련에서 최홍희는 고향친구이자 목재상을 하는 김한복을 포섭한 후, 그를 통해 박성화와 연락했다. 날짜를 정해 학병탈출 후 김한복이 양덕에서 대기한 다음 부전고원까지 길안내를 맡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거사에 참여한 학병에 의해 추을헌병대의 보조헌병 임영호林永鎬에게 모의 내용이 알려져 학병들은 헌병대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책임자 김완룡이 일본인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헌병대는 학병에 대한 대대적 검거를 개시했다. 박성화·최홍희·최정수·한춘섭·이도수·김윤영·전상엽·김태선 등 70여 명의 학병은 차례로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1944년 11월 전상엽은 거사에 협조해 준 정의여고·서문여고 여학생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해 탈출을 감행했다가 2개월 후 한만국경에서 체포되었다.
이들은 1945년 6월 10일 평양군관구 임시군법회의를 통해 2~1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치안유지법 제3조 ‘국체 변경을 목적으로 한 국가반란죄’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황군이 아니며, 입대할 때부터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한 반란기도가 있었다고 밝혔다. 판결결과 박성화 징역 13년, 김완룡 징역 9년, 전상엽 징역 8년, 노영준 징역 8년, 최홍희 징역 7년, 최정수 징역 6년, 김태선 징역 5년 6개월, 이도수 징역 5년, 이철영 징역 5년, 이준오 징역 5년, 조명수 징역 5년 등이 선고되었다. 註189) 이들은 해방이 되어서 석방되었다. 이후 김완룡·최홍희 등은 한국군의 장성이 되었고, 참여 학병들도 한국 사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3) 대구24부대 학병사건
대구24부대대구80연대에는 주로 경상남북도 출신의 학병 600여 명이 강제 입대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10여 일 후 3대대 3중대 27명을 제외 하고는 모두 북중국으로 보내졌다. 註190) 잔류하게 된 대구24부대 학병들은 함흥, 평양의 학병들과 마찬가지로 강제입대, 내무생활에서의 지속적 모욕과 학대, 부대 내에서의 민족차별, 전황의 전개 등의 요인에 영향을 받으면서 일본군 탈출과 독립투쟁을 모색하게 되었다.
문한우文漢雨·김이현金而鉉·권혁조權赫朝가 중심이 된 학병들은 입대 초기부터 저항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문한우는 1943년 연희전문학교 재학중 학생들에게 항일 민족사상을 고취하다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은 후 입대했다. 김이현은 1938년 6월 대구 계성중학교 시절 시내 중학생들과 함께 기독교 소년면려회를 조직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1941년 동경에서 임시정부 공작원과 접선하여 재일유학생의 포섭 및 독립운동을 한 바 있다. 권혁조는 배재중학교 재학 당시부터 저항운동의 선봉으로 활약한 바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입대 전부터 반일운동 및 독립운동에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권혁조·문한우 등은 우선 부대내에서 일본군 초급지휘관들을 매수하여, 부대 내외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자 다른 학병과 연락의 근거를 만들었다. 대구24부대 학병의 의거 계획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첫째, 외부의 동지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반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징용, 징병으로 끌려 갈 동포들을 최대한 도피시켜 줌으로써 민족의 희생을 막는다.
둘째,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 군인을 몰살한다.
셋째, 독약을 구하여 음식물에 투입하여 일본 군인을 죽인다.
넷째, 학병이 단합하여 집단 탈출함으로써 패전을 눈앞에 놓고 단말마적인 발악에 날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몰아넣고 굳어져 가고 있던 민족정신에 새로운 불을 지른다.
먼저 권혁조·문한우는 징용으로 징발된 청·장년들이 현지로 배치되기 이전에 수용되어 있던 대구상업학교 보초근무를 자원해, 여러 차례에 걸쳐 징용에 끌려온 장정 400~500명을 탈출시켰다. 다음으로 탄약고 폭파 및 위병소 무기탈취 후 일본군을 몰살한다는 계획은 문한우·권혁조·김이현 등 학병 27명의 찬동으로 추진되었다. 1944년 6월 8일 오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20여 명의 학병이 모였으나 기밀누설 조짐으로 중단했다. 일본군 독살계획은 문한우가 중학선배로부터 독약을 구하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마지막 계획은 24부대 소속 학병 전원의 탈출계획이었다. 집단 탈출을 감행한 후 지리산에 들어가 대열을 정비하고 국외로 탈출해 독립투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1944년 8월 8일 문한우·김이현·권혁조·권태용權泰鏞·권중혁權重赫·김복현金福顯 등 6명이 탈출에 가담했다. 이들은 대구 팔공산에 입산했고, 지리산으로 근거지를 옮길 계획이었다. 일본군의 수색망이 좁혀지자 문한우·권혁조는 안동에서 서울로 잠입하려다 체포되었고, 권태용·권중혁은 신령新寧 뒷산에서 체포되었다. 김이현·김복현은 서울로 잠입했고, 김이현은 만주로 탈출하여 1945년 8월 만주 봉천에서 임시정부 공작원과 접선해 당산唐山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註191)
체포된 권혁조·문한우·권태용·권중혁 등은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1944년 12월에 권중혁·문한우는 징역 5년, 권태용·권중혁에게는 징역 4년이 언도되었다. 이들은 일본 육군형무소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4. 학병의 일본군 탈출과 독립군 가담
강제입대된 학병들 가운데 중국전선에서 탈출을 감행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탈출이 실패하면 감옥으로 가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전시 상황이었지만, 일제의 총알받이로 죽느니 용감하게 탈출해 독립군 진영에 가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속에 탈주가 속출했다. 목숨을 걸고 중국대륙에서 일본군 탈출에 성공한 대부분의 학병들은 2만리 장정을 통해 중경의 광복군을 찾아갔다. 일부 학병들은 연안의 조선의용군에 가담하기도 했고, 일부는 중국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학병으로 강제입대된 총 4,385명 가운데 640명이 전사했고, 400명 이상이 중국에서 중국측으로 도망하려 했으며 200명 이상이 성공했다. 註192)
학병들의 광복군 합류는 중경 임시정부에게 일제 패망의 결정적 계기이자 한국 내 반일세력의 적극적 반란과 독립운동 합류의지를 보여주는 쾌거였다. 이들의 합류에 대해 김구는 다음과 같이 썼다.
50여 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政廳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 온 것이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의 광복군 제3지대를 찾아 온 것을 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인에게 큰 감동을 주어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식당에서 환영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양 여러 나라의 통신 기자들이며, 대사관원들도 출석하여 우리 학병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註193)
학병들은 한광반을 거쳐 광복군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며, 1945년 광복군 제2지대·제3지대에서 추진된 미 전략첩보국OSS과의 한반도침투를 위한 연합작전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의 핵심이 되었다.
버마전선에서 탈출한 3명의 학병들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카탈리나섬에서 미 전략첩보국OSS이 재미한인과 공동으로 추진 중이던 한반도 침투 연합작전인 “냅코작전”에 자원해 최후의 대일전에 참여했다. 즉 학병들은 목숨을 건 일본군 탈주를 통해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는 한편 또다시 광복군·조선의용군·중국중앙군·미군 등에 가담함으로써 대일전 승리를 위한 항쟁에 참여했다.
1) 중국에서의 탈출
중국 주둔 일본군에서 가장 많은 학병이 탈주한 것은 서주徐州 치중대輜重隊였다. 註194) 이 부대 학병 50여 명 가운데 22명이 탈출하여 그중 20명이 광복군에 가담했고, 이들 중 18명이 임천臨川 한광반韓光班을 수료해 한광반 학병 33인의 반수 이상을 점했다. 이들은 평양 사동 제50부대치중대에 입영한 주로 평남북 출신의 동향이자, 중학·대학 동창 등이었다. 한성수韓聖洙·이영길李永吉·박승헌朴承憲·장준하張俊河·장도영張都暎·오건吳健·백정갑白正甲·홍기화洪基華·윤영무尹永茂·김용민金容旻·차약도車若島·노능서魯能瑞·승영호承永祜·송찬호宋贊鎬·사동욱史東郁·김우전金祐銓·최택원崔澤元·김영록金永錄·홍석훈洪錫勳·안광언安光彦·변영근邊永根·
김봉식金鳳植·유종목兪鐘穆 등이 입영 직후부터 탈출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자청하여 광복군이 있는 중국 전선에 배치받아 탈출을 계획하였는데 그는 면회 온 부인에게 일본군에서 탈출할 계획을 알렸으며 “그 당시 나의 절망에 일루의 희망은 내가 중경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를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실현할 의지였다. 註195) 이들은 1944년 2월 13일 평양을 출발, 2월 16일 중국 서주에 도착해, 교외에 전부대專部隊 치중대로 배속되었다. 이들은 서주 도착 2주부터 허락된 일요일 외출을 통해 서주 교민들과 접촉하는 한편 나침반과 양초 등도 준비했다. 한국 학병들은 내무반에 2~3명씩 배치되었고, 접촉가능한 사람들끼리 탈출을 시도했다.
·제1차 탈출1944. 3. 26 : 한성수·오건·이종무 3명 탈출. 한성수는 광복군 3지대에 편입 후 상해방면 공작 중 교포의 밀고로 1945년 5월 남경형무소에서 처형됨. 오건·이종무는 14개월간 중국 보계寶鷄에서 포로생활 후 1945년 5월 석방되어 광복군 2지대에 편입. 註196)
·제2차 탈출1944. 4. 13 : 박영록 1명 탈출. 한광반
·제3차 탈출1944. 4. 29 : 백정갑·윤영무·박승헌·김용민·변영근·안광언 6명 탈출. 한광반
·제4차 탈출1944. 5. 15 : 이영길·홍기화 2명 탈출, 팔로군에 체포된 후 석방. 한광반
·제5차 탈출1944. 5. 18 : 승영호·노능서·차약도 3명 탈출. 한광반
·제6차 탈출1944. 6. 13 : 김우전 1명 탈출. 한광반
·제7차 탈출1944. 7. 7 : 장준하·김영록·홍석훈洪錫勳·윤경빈尹慶彬 4명 탈출.
한광반
·제8차 탈출1944. 8. 20 : 김봉식·백현욱白玹煜 2명 탈출, 3일후 체포됨.
이상과 같이 이 부대의 학병 중 22명이 탈출하여 그중 20명이 광복군에 가담했고, 2명은 곧 체포되었다. 탈출한 20명 중 18명은 황포군관학교 임천臨川분교의 한광반에 입소했다.
또한 서주 인근의 숙현부대宿縣部隊에서도 8명이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을 거쳐 광복군에 가담했다. 註197)
·제1차 탈출1944. 5. 25 : 석근영石根永·윤상호尹祥鎬 2명 탈출. 윤상호 병사. 석근영은 호남성 심구沈邱의 부로수용소俘虜收容所에서 귀덕歸德 일본군 기마대에서 탈출한 서상렬徐相烈과 신현창申鉉昌과 함께 임천행. 한광반
·제2차 탈출1944. 6. 16 : 정명鄭明·전이호全履鎬·김성근金星根·김성환金聖煥 4명 탈출. 한광반
·제3차 탈출1944. 6. 30 : 김유길金柔吉·김영호金榮鎬 2명 탈출. 한광반
한편 전선배치 직후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군이나 연합군에 참가하기로 하고 마음먹고 유서까지 써놓았던 김준엽金俊燁은 중국 서주 인근 경비중대에서 단독 탈출1944. 3. 29해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했다. 註198) 박재봉朴在奉(근위60사단, 1944. 8. 19), 한필동韓弼東(64사단, 1944. 8. 1), 김상학金相鶴(64사단, 1944. 5. 18), 박정렬朴貞烈(64사단, 1944. 7), 황갑수黃甲秀(64사단, 1944. 5. 18), 최덕휴(64사단, 1944. 7. 1), 한면필韓冕馝(1944. 10), 강익진康翊鎭(64사단 , 1944. 5. 18), 이봉훈李奉勳(5593부대, 1944. 4), 서영찬徐永燦(1944. 3), 유영중柳英中(64사단, 1944. 7) 등의 학병들이 중국에서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가담했다. 註199)
이들 학병을 중심으로 안휘성 부양현 임천 소재 중국 황포군관학교 분교 내 특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한광반이 설치되었다. 중국 전선에 동원된 학병 가운데 33명의 학병이 여기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1944년 9월 10일부터 11월 21일까지 70일간 훈련을 받은 후 중경 임시정부 및 각 지대·전구로 파견되었다. 註200)
또한 한국·일본의 학병은 아니지만 정기엽鄭基燁처럼 중국대학 법학원 재학 중 1944년 3월 24일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 입대한 사례도 있다. 정기엽은 이후 백순보白淳甫·이영철李英哲·최동권崔東權·김창석金昌錫·이건국李建國·장일제張一題·조대균趙大均·김유환金裕渙 등 중국 여러 대학 재학생을 포섭해 후방으로 보내는 등 초모활동과 비밀공작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그에 의해 포섭된 학생들도 광복군에 입대했다.
남경 중앙대 학생으로 광복군에 참여한 사례도 존재했다. 1940년 『상해시보上海時報』 기자이자 중앙대학 재학 중이던 송지영宋志英은 중국 정부 특파원인 능지남凌志男 상교上校와 접선해, 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박철원朴哲遠·이정선李正善·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등과 함께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했고, 조일문·정영호鄭英昊·김용金龍·이정선·김택주金澤周 등 애국청년을 초모해 광복군으로 후송했다. 송지영은 1944년 남경의 임정 특파원 김병호金炳豪가 체포된 이후 중앙대 학생들과 함께 검거되었고, 1944년 6월 상해 일본영사관에서 징역2년형을 선고받은 후 일본 장기長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註201)
한편 학병을 탈출해 광복군이 아닌 연안 조선의용군이나 중국 중앙군에 가담한 사례들도 있었다. 동경제국대학 법학과를 다니다 학병으로 입대한 신상초申相楚는 김준엽과 함께 중국 서주로 향하며 탈출계획을 서로 확인한 바 있었는데, 강소성 북방 동해東海 주둔 일본군 독립부대에서 동료 2명과 함께 탈출1944. 7. 11했으나, 그가 탈출한 지역은 신사군 즉 팔로군 관할지역이었다. 중경행을 원했지만 신사군에 편입되었다. 1945년 4월 한인 30여 명과 함께 연안으로 떠난 신상초는 9천리를 행군했지만, 연안에 도착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신상초는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에 편입되었다. 이후 신상초는 다시 산해관-금구-통화를 거쳐 간도에 도착했다. 조선의용군 동만지대제5지대원 소속이었던 신상초는 다시 개산둔에서 의용군을 탈출해 1946년 1월 함흥을 거쳐 고향 평북 정주에 도착했다. 註202) 신상초에 따르면 일본군 소속 조선인 탈주병은 계속 증가해, 1944년 8월 15일 무렵 신사군 제4사단에만 15명이 있어 이들이 모두 신사군 항일군정대학에 편입될 정도로 조선의용군·팔로군 쪽으로의 탈주도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이용상李容相은 학병에게 주어진 민족적 임무를 남달리 생각하여 한국인 병사 12명을 지휘하여 탈출했다. 註203) 탈출 후 이용상은 중앙군中央軍 형산衡山유격사령부에서 특수공작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탈출사례들은 중국대륙에서 일본군 내 학병 탈출이 단순히 군생활의 어려움이나 불만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패망이라는 정세의 변화 및 학병들의 민족적 의분과 결단에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중국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존재가 학병들의 탈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학병을 비롯한 한국인 병사들은 일본군을 탈출하면 자신들을 수용할 광복군이 있었음을 인지한 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했으며, 이런 측면에서 일본군 내 한적 사병의 탈출을 고무하며 이와 관련한 선전·선무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한 광복군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2) 일본·버마에서의 탈출
일본에서 탈출해 임시정부에 합류한 특별한 사례도 있었다. 김문택金文澤의 경우 일본에서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에 합류한 특별한 경우였다. 註204) 김문택은 1943년 고향 진남포에서 황해도지사를 민족반역도라 비판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1944. 12을 받았다. 징역 5년형을 구형받았고, 5개월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감옥에서 고향선배로부터 임시정부와 광복군 애기를 들은 김문택은 일본 중앙대 법과 1학년 재학 중 학병으로 강제입영된 후 일본 큐슈 서부의 제17부대에 배치되어 6개월간 훈련받았다. 김문택은 장두성張斗星과 함께 탈출1944. 9. 25하여, 녹아도-별부-대마도-매물도통영-마산-용산서울-평양까지 동행했다. 이후 혼자서 함흥-청진-도문-서주-북경-제남-서주를 거쳐 광복군 제3지대에 도착1945. 1 5했다. 106일간의 험로를 거쳐 일본에서 중국 안휘성 부양阜陽 삼탑집三塔集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후 김문택은 1946년 4월까지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했다.
버마전선에서 탈출도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박순동朴順東·이종실李鍾實·박형무朴亨武의 사례였다. 학병으로 강제 입대한 박순동은 용산 제629부대에 입대해, 1944년 9월 7일 버마원정군 낭狼사단 소속 능야綾野 산포山砲중대원이었다. 註205) 일본군의 패배와 영국군의 진격 소식을 접한 박순동은 학병인 이종실·이가형李佳炯과 탈출을 모의한 후 이종실과 탈출1945. 3해 영국군에 투항1945. 3. 26했다. 또한 학병출신인 박형무도 일본군 49사단을 탈출1945. 4해 영국군에 투항했다. 이들은 인도 뉴델리에서 합류한 후 뉴델리 주재 미 전략첩보국과 접촉해 OSS의 특수요원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뉴델리-카라치-카이로-카사블랑카-대서양-워싱턴D.C.-로스앤젤레스를 거쳐 OSS의 냅코프로젝트 훈련장이던 산타 카탈리나Santa-Catalina섬에서 한반도 침투훈련을 받았다. 재미한인 및 맥코이포로수용소 출신 한인포로를 포함해 총 19명의 한인이 참가한 이 특수작전은 잠수함을 타고 한반도 해안에 침투한 후 무전설비·정보수집·사보타지 등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註206) 일본의 패전으로 훈련이 취소된 후 이들 학병출신 3명은 하와이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월 11일 인천으로 귀국했다.
5. 군속의 탈출과 고려독립청년당·암바라와수용소 반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포로감시요원이란 명목으로 조선인 군속들을 대거 모집했다. 1942년 6월 12~15일간 전국에서 총 3,223명이‘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에 입대해, 2개월간 훈련을 받은 후 남방으로 배치되었다. 註207)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조선인 중 148명은 전후 연합군의 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사형 23명, 유기징역 125명이었다. 이들은 석방 이후에도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대부분 귀국하지 못했다. 그런데 포로감시원들 중 일부는 자바포로수용소, 암바라와수용소에서 항일반란을 기도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자바·보르네오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비치되었다. 이들은 포로감시원으로 일본군의 지휘·감독 하에 포로관리의 최일선 업무를 담당했다. 계약기간은 2년이었으나 무시되었으며, 민족적 차별이 심각했다. 이런 와중에서 1944년 태국·버마간 철도공사 현장의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김주석이라는 군속이 탈출했다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일제는 이 사건에 대처해 1944년 11월말부터 암바라와 서북방에서 자바포로수용소 산하의 조선인 군속 200여명에 대한 특별교육을 실시했으나 이 와중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항일조직이 결성1944. 12. 30되었다.
이 조직은 이활李活이 주도한 것으로, 그는 서대문형무소 간수로 일하다가 사상적 전환을 해 항일운동을 하다 헌병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군속에 응모했다. 이활은 남양으로 향하는 수송선에서 동지획득에 주력해 태국에서 탈출한 김주석, 임헌근고려독립청년당 조직부장, 김현재고려독립청년당 군사부장 등을 포섭했다. 이들은 특별훈련기간 중 10명의 동지를 모아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아시아의 강도, 제국주의 일본에 항거하는 폭탄아가 되자”는 등의 강령을 채택하고, 총령이활, 군수부장김현재, 조직부장임헌근, 세마랑지구책이상문, 암바라와지부장 손양섭, 부지부장 조규홍, 자카르타지부장 문학선, 부지부장 백문기, 반둥지부장 박창원, 부지부장 오은석 등의 조직을 정했다.
조선인민회가 거행한 손양섭 . 노병한 . 민영학 3의사 위령제(1946.1)
고려독립청년당은 자카르타에 당본부를 두고 반둥·세마랑·암바라와에 지구당을 두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궐기할 것을 맹세했다. 당 결성 직후 암바라와 지부장 손양섭은 군속 중에 민영학·노병한을 포섭했고, 이들은 싱가폴수용소로 전속명령1945. 1. 4이 내리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기관총 1정, 실탄 2천발, 소총 3정을 탈취해 포로수용소 암바라와 분견소장 관사를 습격하는 한편 군납업자 자택, 암바라와 역 등을 습격했다. 첫날 전투에서 민영학은 총상을 입고 자결했으며, 손양섭과 노병한도 일본군에 포위되자 1월 6일 자결했다. 3일간 일본군·군속·상인 및 원주민 1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했다.
한편 자카르타와 반둥의 조선인 군속들에게도 싱가폴 전속명령이 내려졌는데, 고려독립청년당원 6명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수송선을 탈취해 연합군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군의 비상검색으로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독립청년당 조직이 헌병대에 탐지되어, 총12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5월 19일과 24일 군법회의에 송치되었고, 7월 21일 군사법정에서 치안유지법 1조 위반으로 징역 10년이활, 징역 8년 6월김현재, 징역 8년임헌근, 징역7년이상문, 조규홍, 문학선, 백문기, 박창원 등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1945년 9월 4일에야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