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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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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Re:백사 이항복의 고산(孤山) 시(연려실기술 제18권에 있는 내용)(한국고전번역원에서 퍼왔습니다.)
김정기 추천 0 조회 79 13.03.04 21:58 댓글 1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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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05 14:44

    첫댓글 이항복의 시 번역한 것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네요. 고산 스토리텔링 자료로 이보다 더한 게 없는 거 같군요.

  • 13.03.05 21:37

    전설, 설화는 역사 시간과 함께 변하지요. 같은 말이 듣고 적어두기에 이렇게 달리 윤색될 수도 있으니까요! <임하필기>는 훨씬 뒤인 19세기 후반경이구요.

  • 13.03.05 14:48

    납속당상 [納粟堂上] : 예전에, 흉년이 들거나 병란이 있을 때 곡식을 많이 바치고 된 당상을 이르던 말. 실제의 직책은 없는 이름만의 벼슬이다.

  • 13.03.05 19:06

    이항복이 나귀를 타고 서울서 춘천에 왔었다면 석파령을 넘었겠군요. 계축년 탄핵을 받은 것이 언제인지 알면 이항복이 석파령을 넘었던 계절도 추론 가능하구요. 석파령을 넘었다면 덕두원 주막거리에서 농주로 목을 축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양강에서 배를 함께 탔던 지역 젊은이들이 정말 쥑이네요. 정승인줄 모르고 농을 거는 장면이 압권이네요. 한자를 가지고 노는 솜씨가 그래도 유식한 젊은이들 같은데 공자님 앞에 문자쓰는 줄 모르고 농을 걸다니. 그런데 농을 거는 그런 젊은이들을 이항복이 시로 아니 농으로 화답하면 가지고 노는게 기가 막힙니다. 이런 시 국어책에 실려도 손색 없을 것 같은데.

  • 13.03.05 19:08

    젊은이들이 이항복의 시를 보았다면 간담이 써늘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보통 시가 아닌데.

  • 13.03.05 21:23

    계축년 탄핵과 백사 그리고 춘천 검색어를 찾아보니 백사가 시를 남긴 곳, 고산 부래산이 신연강에 있는 중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사가 석파령을 넘은 것은 전후 사정으로 보아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광해군이 부왕인 선조의 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자 백사는 불구의 몸을 이끌고 광해군에게 그런 일을 있을 수 없다며 극구 반대를 합니다. 아무도 입도 뻥긋 못하는 무시무시한 상황, 잘못하면 목이 뎅강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서 백사 이항복이 죽음을 무릎쓰고 간언하죠. 그일로 유배되고 춘천에 오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 13.03.05 21:32

    춘천을 거쳐 함경도로 유배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이때 상촌 신흠도 유배와 있었거든요! 당연히 석파령 넘어서!!

  • 13.03.05 21:36

    백사의 유배지 삼수가 춘천을 뜻하나요? 상촌 유배지가 덕두원리 감아리였다고 하던데. 상촌과 백사가 춘천서 만났다니 무척 흥분됩니다.

  • 13.03.05 21:39

    석파령은 역사교육의 현장임이 이 사실로도 입증되는 군요. 석파령을 통해 역사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면 정말 흥미진진할 것 같습니다.

  • 13.03.05 21:38

    함경도 삼수갑산이겠지요!

  • 13.03.05 21:41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백사가 춘천을 거쳐 함경도 유배. 그리고 상촌과 해후.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13.03.05 22:36

    위의 백사(1556-1618년) 시는 별도로 놀러왔을 때의 시라고 여겨집니다. 시에 날짜가 없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연보를 보면 1614~17년 사이에 관직에서 나와 있었기에 이때 춘천행이 있었을 것 같고, 1617년말에 유배가 거론되다가 1618년 1월에 삼수에서 다시 북청으로 결정되어 떠났다가 5월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지요. 신흠(1566-1628년)은 1617년 1월부터 1621년 8월경까지 춘천에 유배와 있었습니다. 어디서 유배길에 만나거나 편지를 주었다는 기록을 본 거 같은데 당장은 못 찾겠네요!

  • 13.03.05 22:57

    석파령이 유배지로 가는 길이기도 했군요. 상촌이 한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석파령을 넘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 13.03.05 23:24

    상촌은 그래도 고향에 돌아갔으나, 백사의 유배길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지막 길이었지요. 한음, 서애와 함께 임진왜란을 그나마 수습하도록 하였고 세 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며 명나라 장수들의 찬탄을 들었던 백사옹은 마지막 길도 탄식이야 있었지만 유감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공인의 길을 소박하게 끝까지 지킨 명상이었지요. 포천에 있는 그의 묘를 가보면 그 한산하고 적막하며 소박한 모습에 정말 백사였구나 하며 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 백사와 한음의 이야기를 어린이들이 즐겨 배우는 이유도 거기 있지 않을까요!

  • 13.03.06 08:21

    백사의 바른 정신과 기개가 석파령에도 서려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 백사 뿐이겠습니까? 석파령에 서린 역사 인물들의 정신들을 찾아보면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지난해 석파령 중심으로 7개 마을이 축제를 열었습니다. 석파령 주변 마을서 백사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키워내는 것이 석파령 역사문화를 생각해보는 의미중에 의미라고도 생각합니다. 상촌이 고향으로 유배를 온 것은 당시 일종의 배려가 아니었는지요?

  • 13.03.06 13:19

    상촌의 고향은 김포 어디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13.03.07 19:53

    확인해 보아야 겠습니다. 상촌 신흠이 평산 신씨라 평산 신씨였던 춘천 방동리 장절공과 연관지은 막연한 추론이 문제였습니다. 아직 확인 못했는데 열심히 찾아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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