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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석불사 (하)
무생물도 생명이 있건마는
또다시 작동되는 보일러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 석불사의 석굴은 이끼 제거를 위하여 일제가 남겨둔 흉
기, 보일러를 작동하여 증기세척 작업을 시행하였다. 원인제거가 되지 않는 한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6.25 동란이 끝난 1953년 보일러는 또 한 차례 가동되었다. 그러나 이때
의 증기세척 작업은 경주박물관 직원에 의한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1957년,
해방 후 제 3차 세척작업이었는데 이것은 경주교육청이 청부업자에게 지시하여 긴급하게 실
시한 것이었다. 당시 관광차 내한한 외국인 관광객의 도착 전에 세척한다고 사용준칙인 열
도의 조절, 1자 이상 거리에서의 분무 등을 무시하고 쏘아댔다. 이것이 신문에 "펄펄 끓는
수증기의 세례에 다박솔로 문질러댄 석굴암"이라고 보도되자 정부는 문교부차관을 파견하여
진상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문교부 산하 문화재관리국에는 1958년 1월에 '
석굴암 보수공사 조사심의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승만정권하에서 3차에 걸쳐 조사단을 파견했
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장면정권이 들어서면서 '석굴암보수공사'는 급진전되
어 1960년 5월 21일 건축가 배기형씨에게 설계를 의뢰하였고 1961년 3월 16일에는 문화재위원
회에서 이중돔 설치를 설계한 배기형씨 설계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
타가 일어난 다음 열린 5월 24일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회의는 배기형씨 설계안을 돌연 폐기
하고, 6월 7일에는 건축가 김중업씨에게 새로 설계를 위촉하게 되었다. 이 갑작스런 설계자
변경과 심의회사업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에서는 "이러한
변경은 5.16 군사혁명 직후에 있어서의 하나의 풍조를 반영하는.....조치였다"고만 적혀 있다.
박정희의 등장과 공사 진척
설계담당자 변경으로 보수공사가 답보상태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서 장면정권 시절에 초청
한 유네스코 문화재연구소장 플랜덜라이스 박사가 1961년 7월 17일 내한하였다. 그는 21일
에는 현지로 내려가 조사하면서 "석굴의 누수상태와 지사후 문제의 검토를 위하여는 석굴을
덮고 있는 봉토층의 제거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었다. 문교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승인함으로써 7월 31일부터 봉토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1964년부터 시행되는
본격적인 보수공사에 대한 예비공사의 시작이었다. 3년간을 끌며 답보상태에 있으면서, 공사
설계안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인 박사 한 사람이 와서 봉토를 파봐야 한다니까 문
교부는 긴급회의까지 열면서 승인했다는 사실이 마냥 서글프기만 하다. 그러나 석굴 보수공
사가 이처럼 급진전을 보게 된 데이는 또 하나의 힘, 5.16 직후 혁명정부의 단안이 있었다고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그는 10월 유신헌법을 통하여 영구
집원의 길을 열고 그의 소원대로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에 있었던 분이다. 그가 독재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는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동원하였지만, 살아있는 국민이 아니라 말없는 문
화재에 독재의 힘을 휘두른 것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소장 시절부터였다. 그는 일
찍부터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다. 불국사 복원, 아산 현충사 건립, 천마총 발굴, 한국미술 5천
년전, 해인사 경판고 이전 구상....그 모두가 '각하'의 지시하에 이루어졌다. 그는 이러한 문
화재 발굴과 보수 사업에도 일일이 의견을 내면서 지시하고 감독하였다. 우리가 문화재 현황
에서 보는 콘크리트 한옥에 미색 수성페인트를 칠한 천편일률적인 집들은 모두 박정희의 안
목으로 결재된 것이다. 석불사 석굴의 60년대 보수공사가 또다른 오욕의 이력이 되고 만 것
은 박정희의 지나친 관심과 간섭의 결과였다. 그것은 지금이니까 회한의 역사로 그렇게 말
하는 것이고 당시 석굴 보수공사는 막강한 독재자의 의지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플랜덜라이스의 2차 보고서
석굴 보수공사는 조사, 예비공사, 본공사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공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
하여 2인의 중앙감독관을 두기로 하여 문화재위원인 황수영 박사와 건축가 김중업씨가 임명
되었다. 수리공사의 기본방침은 석굴의 습기와 이끼를 원인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1)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이중돔을 세운다, (2) 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석굴 밑 암반에서 나
오는 샘물의 배수구를 강화한다, (3) 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 위하여 전실에 목조건축을 세
운다, (4) 석굴 내부의 환기를 위하여 지하에 공기통로를 만들어 이중돔 공간으로 빠지게 한
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석굴의 습기문제가 '습한 공기의 유입'에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
었다. 그러나 석굴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연구해온 남천우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석굴의 습기는 물이 스며드는 누수현상이 아니라 '결로현상'에 있다는 것이다. 즉 외부와 내
부의 공기 온도차가 심하여 이슬점에 다다르면 자연히 이슬방울이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사방침은 공기의 유입을 막는다는 것인데 이는 반대로 공기가 원활하게 유동할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하며 그것이 석굴의 원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낯먼우 박사는 당시 문화재위
원에 위촉되어 있지 않았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군다다 유네스코 플랜덜라
이스 소장은 7월 21일 경주에 내려가 하루 동안 조사한 다음 23일에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공사단의 방침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고 이 의견서로써 자신의 건의는 종결한다고 하였던 것
이다. 그리하여 7월 31일부터 예비공사를 위한 석굴 봉토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문화재보존과학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있던 플랜덜라이스는 의견서 제출 이후에도 현
지에서 조사를 하며 이태녕 박사와 같은 자연과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뒤늦게 한국의
자연조건이 4계절의 온도차가 한여름 섭씨 35도에서 한겨울 -15도에 이르는 큰 차이가 있
음과, 상대온도, 상대습도에 의해 결로가 생긴다는 자연원리를 인지하고서는 지난번에 제출
한 의견서를 정정하는 2차 의견서를 내게 되었다. 그 제출날짜가 8월 18일 이었으니 25일간
의 연구결과이기도 하였다.
내가 측정한 결과로서 8월중의 낮온도는 섭씨 35도, 습도 95%에 달하는 덥고도 습한 것
이므로 기온이 30도로 내려가는 밤에는 저온의 표면에 이슬이 맺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젖
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은 통풍이므로 석굴암을 밀폐하려는 시도는 중대한 과오
를 저지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지난번 의견은 정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
며 심사숙고를 거듭한 결과로서의 나의 의견은 석굴암 전면부에 지붕을 얹거나 또 문을 해
다는 것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반대'(all against) 한다.
그러나 플랜덜라이스의 2차 의견서는 묵살되었다. 이미 공사단의 방침은 그런 방향으로
굳어져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플랜덜라이스의 두 얼굴을 보게 된다. 하나는 오만스럽게도,
아니면 경박하게도 불과 하루 만의 조사에 의견서를 내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보고서를 끝낸
다고 한 지나친 권위의 과시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으면서도 25일 뒤에 요구하
지 않은 2차 의견서를 제출하는 학자적 양심 두 측면이다.
목굴암이 되는 석굴
석굴 보수공사에서 전실에 목조건축을 얹는 것은 '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 위한 조처
로만 구상된 것이 아니었다. 공사단은 석굴의 원형이 그렇다는 주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석
굴 주위를 조사 발굴하는 과정에서 8세기 후반, 창건 당시 것으로 추정되는 기왓장에 "석불
사"라는 명문이 새겨 있는 것을 수습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와는 목조건축의 기와인지, 봉
토 위의 깨진 천장덮개돌로 물이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부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
다. 황수영 박사와 공사단측에서는 또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 정선의 <교남명승
첩>에 들어있는 <골굴석골> 그림에 목조건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겸재가
1733년(58세)에 그렸다는 이 그림은 겸재가 60대에 보여준 화풍과 매우 달라서 진경을 진경
답게 그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 중에는 그의 손자 정황의 그림으로 보는 견해도
있을 정도로 겸재로서는 불명예스러운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골굴석굴>은 말 그대로 기
림사 쪽의 '골굴암'을 그린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석굴의 전실에 목조지붕을 얹는
다는 일은 원형을 위해서도, 보존을 위해서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사는 그렇게 진
행되었고 '석굴암'은 '목굴암'으로 되고 만 것이다. 석굴 전실에 목조건축을 세운다는 것
은 황수영 박사의 일관된 주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생각이기도 했다.
전실 석상의 전개 문제
1961년 7월 31일, 봉토 제거작업이 시행되면서 본격화된 석굴 수리공사는 1961년 9월 13
일에 공사 현장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예비공사는 1963년 6월 30일까지 약 2년에 걸쳐 실시
된 것이었다. 예비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본공사의 설계안이 계속 심의되었는데 1962년 10월
18일 회의에서는 목조암자 문제로 황수영, 김중업 2인의 중앙감독관 사이에 의견대립이 생
긴다. 결국 12일 뒤 김중업씨는 중앙감독관에서 해임되고 며칠 후 김중업씨와 맺은 설계계
약도 해약절차를 밟는다. 11월 13일, 김중업씨 후임에 김원용 박사가 임명되었다. 황수영과
김중업의 의견차이는 전실에 목조건축을 얹기 위하여 벽면을 현재의 절곡에서 전개로 바꾸
는 문제였다. 당시 전실은 양측면의 팔부중상이 한 분씩 등을 돌리고 꺾여 금강역사와 마주
보는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네 분씩 나란히 편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것을 편
다는 것은 곧 원형의 파괴를 의미하는데 황수영 박사는 그것이 일제 때 잘못한 것이라는 주
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팔부중상을 전개하게 되면 요네다가 측량했던 '무서우리만큼 치
밀한' 기하학적 수리관계는 다 무너지고 만다. 1963년 2월 16일, 새 감독관에 임명된 김원용
박사는 현지의 석재를 조사하고는 굴곡부는 원형이므로 전개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
다. 또 11일 뒤 10인의 관계자가 현지에 가서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는 사이 본공사가 시
작되는 1963년 7월1일이 되었다. 그리고 7월 2일 김원용 박사는 중앙감독관에서 해임되고
황수영 중앙감독관이 혼자 주관하게 되었다.
석굴 전실의 절곡을 편다는 것은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문화
재위원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8월 14일 황수영 감독관은 사의를 표한다. 그러나 황수영
감독관은 해임되지 않으며 더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굴곡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10월 12일,
문화재위원회에서는 굴곡면의 전개를 둘러싼 논란 끝에 표결 제의를 물리치고 굴곡부를 전
개하되 그 대신 상반된 논의내용은 모두 보고서에 기록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법정이나 국회에서 속기록에 기록해둔다는 증언의 의미를 비로소 실감했다. 후세의 올바른
판단을 위한, 그리고 자신의 양심과 명예를 위한 증거보존의 뜻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상
의 진행과정은 <석굴암수리공사보고서>에 실린 회의록에 자세한데 나는 왜 이 문제가 이처
럼 무리하게 강행되었는가를 잘 몰랐다. 그것을 남천우 박사는 <석불사>(일조각, 1990)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당시는 아직도 군사회의에 의한 통치시대였다. 그러므로 사실 문화재위원회가 정부로부터
의 압력을 이 정도라도 버티기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문화재위원회
는 더욱 무력화되며 자문기관으로 격하된다. 이와같이 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강제로
얻고 나서 불과 5일이 경과된 10월 17일에는 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씨 일행이 석굴 수리공
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격려한다. 서울에 있으면서 혁명과업에 바쁜 통치자가 굴곡부 전
개 결정의 소식을 듣고 5일 후에 경주 토함산의 석굴 현지에 왔다면 그것은 곧바로 달려왔
다고 표현될 수 있다. 자신의 지침에 대하여 완강하게 반대하던 문화재위원회가 스스로의
결정을 번복한 이상 박정희씨로서는 하루속히 석굴 현지에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굴암, 암굴암, 전굴암
그렇게 강행된 석굴암 수리 본공사는 1964년 7월 1일, 만 1년 만에 준공식을 갖게 된다.
1961년 7월 31일, 봉토 제거작업이 시작된 이래 만 3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준공식에는 당연
히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석굴 벽면에서는 눈에 띄게 물이 흘러내렸다. 누수
는 물론이고 습한 공기의 유입까지 막는 3년간의 공사가 결국 석굴을 물바다로 만들고 만
것이다. 여론이 비등하였다. "석굴암인가 수굴암인가", "석굴암은 암굴암." 그리고 그해 여름
석굴의 본존불은 물방울로 샤워를 하기에 이르렀다. 수리공사 이후 석굴에 이처럼 물이 스
미는 주요원인은 철저한 밀폐공사의 잘못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전실의 목조건축보다도 이
중 콘크리트 돔이 더 큰 문제였다. 석굴에 생기는 물은 남천우 박사의 진단대로 누수가 아
닌 결로현상인바 이중 콘크리트 돔 사이에 들어 있는 더운 공기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함으
로써 여름이면 굴 내부의 상대온도, 상대습도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었다.
전실의 목조건축도 굴 밖의 더운 공기의 유입은 막아주지만 공기중의 습기를 막는 데는 아
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천우 박사는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장마철에 방안의 공기가 밖의 공기보다 훨씬 더 건조하게 느껴지는 것은 방안 공기에 들
어 있는 습기의 분량이 실제로 적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방안의 온도가 밖의 온도보다 더
높으므로 방안의 상대습도가 낮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따름인 것이다. 가령 옷장에도 문
이 있고 광에도 문이 달려 있다고 하여 여름철에 옷장을 광 속에 넣어두고 안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여름철에 광 속이 언제나 습하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광속이 습한 것을 다소라도 건조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대낮에 광문을 열어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은 주부들도 알고 있는 상식인 것이다.(<석굴암 원형보존의 위기
>에서)
그러나 석굴의 습기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상태에서
기계설비에 의한 습기제거를 강구하게 되었고 준공 2년 뒤에는 서울공대 기계과 김효경 박
사에게 이 작업이 위촉되었다. 그리하여 석굴에는 급기야 공기냉각장치(에어컨)을 설치하여
기계작동에 의한 강제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근본적인 보존대책이 강구된 것이 아니라 '목
굴암' '암굴암'은 그대로 둔 채로 '수굴암'을 면하기 위한 '전굴암'으로 고착된 것이다. 그로부
터 30년이 다된 오늘날까지도 석굴 바로 옆에 붙은 기계는 진동소리를 내며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창의 문제
박정희 대통령이 석굴을 비롯한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개인적 취미와 성향일
수 있다. 그러나 독재자들이 문화재와 토목사업에 두는 관심은 자기능력의 과시와 대국민
선전효과에 있어왔다. 테리우찌 총독이 콘크리트벽으로 멋있게 석굴을 보수한 것이나 박정
희 대통령이 석굴의 전실에 번듯한 목조건축이 세워지도록 유도한 것이나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었다. 석불사 석굴이 보수공사 뒤에도 습기문제가 떠나지 않자 남천우 박사는 1969년 <
신동아> 5월호에 <석굴암 원형보존의 위기>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석굴암 논쟁'의 발단이 되어 현지공사 책임자였던 신영훈씨의 <석굴암 보수는 개악이 아니
다>(신동아 69년 7월호), 문명대 교수의 <석굴암 위기설에 이의있다 - 남박사의 위기설에
관한 반론>(<월간중앙> 69년 8월호) 등이 발표되고 남천우 박사는 다시 <속 석굴암 원형
보존의 위기>(<신동아> 69년 8월호)를 발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천우 박사는 석굴의 온
전한 보존 문제는 온전한 원형을 찾아내는 일이 된다며 석굴의 원형은 대담한 개방구조였고
석굴에는 광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또 석굴 본당의 10개 감실은 외벽과 맞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더 물러나 아래쪽에서 공기가 숨쉬도록 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남천우 박사는 일제시대에 석굴 보수공사 때 어디에 쓴 것인지 몰라 석굴 한쪽에 버려둔
원석재들을 검사하면서 호형을 이룬 긴 석재들이 바로 광창의 부재였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지금 우리는 석굴암을 관람하고 내려오는 길 돌계단 중턱에서 이 석재들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그것이 무슨 돌인지 모르는 채 지나치고 어린이들은 그 위에 오르기
도 하고 올라앉기도 한다.
1991년 전문가 회의록
기계설비에 의한 강제에 의하여 석굴의 온, 습도를 조절하는 데이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
른다.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다가 그 기계가 잠시라도 고장나는 일이 생기면 그 피해는 더
욱 커진다. 평생 에어컨 없이는 여름을 나지 못하는 습성에 어느 날 그것이 고장날 때 흘릴
땀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기계가 작동하면서 일으키는 소음을 관람자들은 인내로 참아준
다고 하더라도 그 미세한 진동이 석굴에 끼치는 영향이 없을리 없는 것이다. 낙숫물이 바위
를 뚫는 것을 생각해볼 일이다. 현재로서 무리없다는 것과 자손만대로 보존한다는 것은 다
른 것이다. 기계작동에 의한 습기제거가 일단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습기문제가 완전히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 다시 내한한 플랜덜라이스 박사는 석굴의 수리상태를 보고 나서
(1) 전실 목조건축을 철거할 것, (2) 이중돔 공간에 단열시공을 하고 또 그곳을 가온할 것
등을 건의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부의 문화재관리국은 한국과학기술원에 석굴연
구를 위한 용역을 주었다. 그것이 양재현 박사가 맡은 프로젝트였는데 거기에 "석굴보존에
관람객 출입이 해롭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1971년에는 유리장 안으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석굴의 본존불을 교도소에서 죄수 면회하는 것보다도 더
먼 거리에서 볼 수 있을 뿐이며, 그분의 권속은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된다.
1991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에서는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한 국내 전문가회의'
를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현지에서 열었다. 여기에 참석한 전문가는 김원용(고고
학), 황수영(미술사), 장경호(건축사), 신영훈(건축사), 보존과학 및 자연과학에서는 이태녕
(화학), 김효경(기계설비), 김종희(재료공학), 전상운(과학사), 민경희(생물), 이상헌(지질) 등
10명이었고 회의진행은 김동현 실장이 맡았다. 명실공히 각계 권위의 모임이었다. 회의 결과
는 회의록 끝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현재 석굴암의 보존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므로 근본적인 개선은 요구되지 않으나
화강암 시편을 석굴암 내부에 설치하여 장기적인 풍화요인을 규명토록 하고, 전실 밀폐와
조명 문제에 있어서는 조도를 현재보다 낮추고 조명방식은 하부에서 상부로 조사토록 한다.
석굴 내 항온, 항습을 위한 제습기의 소음, 진동은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나 장기적인 면
에서는 석굴암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소음, 진동이 작은 기기로 교체하거나 기계실을 다
른 장소로 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석굴암의 원형과 현상 변경에 대해서는 석굴암
보존위원회를 창설하거나 전문학회에 학술용역으로 의뢰해서 연구토록 한다. 관람객의 교육
적 편의 제공을 위하여 모형전시관의 건립을 추진한다.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의 개최보다는 국내 전문가를 외국에 파견 훈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무생물도 생명이 있건마는
나는 이 회의록을 읽으면서 많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석굴학'의 방향에 대해
서도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매우 유익한 자료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는 보수공사 당
사자와 기계설비 담당자가 증인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남천우 박사처럼
일생을 거기에 걸고 뜻있는 반론을 편 분은 초대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욱이 어느 분은
생전 처음으로 석굴암에 와보았다고 한다. 나는 이 회의록을 보면서 모든 석굴보존 관계자
들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하나 있었다. "무생물도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없다고 생각하는
가?" 무생물도 생명이 있다. 바위가 가루가 되어 부서지면 바위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 아닌
가? 석굴의 조각상들이 토함산 곳곳에 자연상태로 노출된 바위보다 석질이 약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돌의 건강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본존불 오른쪽 팔꿈치
가 피부암에 걸린 양 박락해버리고 말 것 같은 양상을 보았는가 못 보았는가? 어떻게 현상
태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는가? 나는 이 회의록에서 김원용 교수의 회한어린 주
장 속에서 석굴 보존대책의 방향을 잡아보고 싶다.
전세계적인 보물인 석굴암을 생각할 때마다 뭔가 가슴속에 꺼림칙한 생각이 듭니다. 이것
은 석굴암을 보수할 때 정말 잘해놓은 것인가라는 의심이 아직도 있고, 언젠가는 내가 한
번 나서서 해결해야겠다는 그런 생각도 가져보고.....전실 자체가 반드시 목조건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런 생각은 현대적인 생각이지 신라 당시로 돌아가면 그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저는 학자로서 집념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황수
영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지금 석굴암은 개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석굴암이 되어
야지 황굴암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결국 세계 석굴암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모든 석굴암에 관련된 사람은 앞으로 다 빼고 우리나라에 우수한 젊은 학자들이 많
으니 새로운 사람들ㄹ로 위원회를 만들어서 석굴암에 관하여 다시 한번 검토를 하고, 만약
에 그때 관여한 사람이 방해를 한다면 전부 다 죽고 난 다음에 정말 마음을 터놓고 가능성
을 따져서 그런 방향으로 밀고나가야지 지금처럼 해서는 말이 많아 안됩니다....
나의 석불사 석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광과 오욕의 이력서가
아무런 희망도 비치지 못하고 끝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프고 잔인한 얘기가 될 것 같다. 나
는 이제부터 석굴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두 분의 아름다운 인생을 소개하고, 아름다운 시
두편을 옮기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련다.
김효경 박사의 전보
1966년, 석굴의 습기와 이끼 문제를 기계설비라는 강제작용에 의해서라도 해결한 것은 서
울공대 기계공학과의 김효경 박사였다. 나는 김효경 박사를 뵌 적이 없다. 또 기계설비를 지
금처럼 석굴 가까이에 설치한 것이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명
백히 잘못된 일이라는 소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김효경 박사가 그 이후에 보여준 모
습에서 눈물나는 감동을 받았고 저런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살아 있고 희망이 있다
는 믿음을 다시 새기게 되었다. 기계작동에 의한 석굴의 보존 문제는 1966년 6월 25일로 김
효경 박사의 책임은 끝났다. 그러나 김박사는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30년간 이 작
업의 사후관리를 감독해오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니고 문화재관리국이나 석굴암측
에서 출장비 1원도 준 일이 없다. 그러나 김효경 박사는 이미 정년퇴직한 노령임에도 때가
되면 경주로 가서 석굴에 오른다. 기계설비 작동 이후 석굴의 온, 습도는 하루 6, 10, 14, 18,
22시 5번을 측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측정기록은 경주시와 문화재연구소에 한 부씩 보내
고 있는데 김효경 박사도 매일 받아보며 검토, 확인하고 있다. 48세 때 시작해서 76세의 고
령이신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 기록으로 보면 5월부터 9월까지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매년 4월이면 나는 석
굴암 기계실에 전화로 확인합니다....저는 언제 기술감독관에서 해임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1년에 두 번 이상은 석굴암에 꼭 왔습니다. 왜냐하면 4, 5월이나 8, 9월이 되면 누군가가 머
리를 두드리고 이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해서 현장에 와서 보고, 담당자에게 운전하는
방법은 이런거요, 운전 관리지침은 이런거요, 공기청정기의 필터는 정기적으로 교체해야 하
는거요....등등의 여러지침을 내려주고 갑니다. 늘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좋은 효과를 내며 자극도 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제가 어떤 때는 석굴암 기사한테
월권행위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아무개가 뭔데 전화를 하고 이따금 왔다 가는가, 문화재관
리국에서는 연락도 없는데 왜 그러느냐고 할 지 모르지만 1966년에 이 공사를 내가 했다는
사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동안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해왔습니다. 나는 내
가 잘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자료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더 좋은 방안을 강구할 토대가 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죠.('석굴암
전문가 회의록'에서)
나는 항시 관이 하는 일보다도 민이 하는 일이 빛날 때 그 문화는 성숙한다고 믿고 있다.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에 매달리는 스테이지 체질들이 제풀에 사그라들고, 남들은 뭐라
고 하든 곰바위처럼 자기가 생각한 일에 일생을 거는 쇠귀신 같은 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
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4천만이 들떠서 레게춤을 흔든다 해도 단 한 명만이라도
그러지 않는 인생이 있다면 우리 문화는 죽지 않고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1세기 한국역사가 나에게 가르쳐준 값진 교훈이었다. 김효경 박사는 석굴에 기계설비
장치를 할 때의 개인적인 한 에피소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1966년 6월 25일, 기계를 돌려서 석굴을 완전히 건조시켰습니다. 그날 밤 12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더군요. 이후 걱정이 되어서 약 1년간은 수시로 석굴암에 왔다갔다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 매일 어디를 가느냐고 묻더군요. 나는 나중에 얘기하마라고 해놓고는 6월 26일
일단은 경주에 내려와서 전보를 쳤습니다. "석굴암 제습문제 해결 축하" 보내는 사람은 누
구냐? "경주시민"하고 전보를 쳤어요. 나중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갔더니 아이들이 경주시민
이 친 전보가 와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나는 아이들한테는 말하지 않고 집사람한테만 그건
내가 친 거요라고 말했습니다.('석굴암 전문가 회의록'에서)
신라역사과학관의 석우일 사장
경주시 하동 201번지, 경주민속공예촌 안쪽 깊숙한 곳에는 5년 전에 개관한 '신라역사과
학관'(0561-745-4998)이 있다. 개관 당시의 이름은 '동악 미술관'이다. 이 과학관은 한 경주
시민, 진짜 경주사람의 땀과 의지로 세워진 경주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1991년 '석굴암 전문가
회의'때 모든 전문가들이 이 전시장을 견학하고는 큰 감동을 받고 그 회의 결과에 이러한
교육관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은 서울공예사라는 목조
각을 수출하는 석우일(55세) 사장의 사설 미술관이다. 석사장은 경주중, 고등학교를 졸업하
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뒤 줄곧 석재상을 해온 분이다. 그 이상의 특별한 이력이
없다. 있다면 누구보다 경주를 사랑했고 신라인의 슬기에 감복하여 그 위대한 유산을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교육장으로 만들어보는 꿈을 갖고 있었다. 1985년부터 석사장은 석재상으
로 번 돈을 여기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석불사 석굴의 신
비를 밝히는 석굴 모형도와 해부도를 제작하고 첨성대를 통하여 관측한 신라인의 천체인식
을 복원한 천문도를 제작하고, 18만 호를 자랑하는 서라벌의 옛모습을 재현하는 <왕경도>
를 제작하고, 지금은 '신의 소리' 에밀레종의 신비를 밝히는 성덕대왕 신종의 제작과정을 재
구성하는 모형도 제작에 들어갔다. 그 모형과 도해와 사진자료를 통하여 고대인의 과학과
과학정신을 밝히는 역사교육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의 석불사 석굴 모형도는 5분의 1 축척으로 1개, 10분의 1 축척으로 7개
를 제작하여 석굴의 내무와 외부 구조, 그리고 현재의 상태와 원형의 추정,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실의 전개와 꺾임 문제, 광창의 유무 문제 등을 모두 수용하여 그것을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내가 복잡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었던 석굴구조의 과학성과 치밀
함은 이 8개의 모형도로써 완벽하게 설명된다. 석불사 석굴을 답사하기 전에, 또는 답사한
후에 반드시 여기를 거쳐가야만 그 신비에 접근해갈 수 있다. 석불사 석굴의 교육전시장을
만들어낸 것도 관이 아니고 민이었다. 하루에도 천만 원의 입장료를 징수하여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현찰수입이 가장 많은 석불사의 석굴을 관리하는 석굴암과 문화재관리국이
관람객을 위하여 한 일은 결국 유리장으로 막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께 바친 두 편의 시
석불사의 석굴에 바친 시는 이상스러울 만큼 적다. 하찮은 미물을 바라보고도 거기에 온
갖 의미와 사랑을 곧잘 부여하는 것이 시인이건만 이 거룩한 존상 앞에서는 차라리 침묵의
탄미라는 겸손으로 피해갔던 모양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석불사의 시는 모두 4편이다. 그중
유치환의 <석굴암대불>과 서정주의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는 이미 잘 알려진 명시이다.
그러고 보면 두 분 모두 현대시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경주를 사랑했던 분이
기에 감히 석불사를 노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청마 유치환은 경주고와 경주여고 교장을 10
년간 지냈고 말년엔 경주에 와서 살고자 했으나 뜻밖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목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
먼 솔바람
부풀으는 동해 연잎
소요로운 까막까치의 우짖음과
뜻없이 지새는 흰 달도 이마에 느끼노니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적적히 눈감고 가부좌하였노니
청마의 시는 우렁차서 좋다. 어려울 것도 없고. 그래서 나는 고등학생 때 청마의 유명한
<깃발>을 곧잘 외우면서 마치 산마루에 올라 지르는 호쾌함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런
데 대학입시 국어시험 문제에 운좋게도 이 <깃발>의 첫행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빈
칸으로 해놓고 쓰라는 주관식 문제가 나왔다. 나는 너무도 기분좋은 나머지 덤벙대다가, 아
니면 내 특유의 이미지 기억법으로 잘못 쓰고 말았다. "이것은 소리치는 아우성." 그러나 내
가 아슬아슬하게 합격한 것을 보면 채점관이 맞게 해준 것 같다. 하기야 나는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 읽어냈으니까. 아무튼 청마의 시는 당당함과 통쾌함으로 답답한 심사가 일어날 때
읽으면 오장육부의 후련함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청마의 시는 그 첫구절의 강렬함 때문에
여운이 바스러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불국사에서 석굴로 오르는 길가에는 청마의
시비가 있어 나의 눈길이 항시 그쪽으로 닿는데 거기에는 오직 첫구절 "목놓아 터트리고 싶
은 통곡을 견디고 /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앉았노니"만 새겨있다. 여운이 짙은 시라면
미당 서정주의 몫이다. 사물에 대한 잔잔한 관조와 거기에서 읽어내는 생에 대한 은은한 인
식은 곧잘 선적 요해의 경지에 다다르는 미당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당도 느낌표 없이는 시
를 쓸 수 없었던 것이 석불사였다.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
이 싸늘한 바윗속에서
날이 날마다 들이쉬고 내쉬이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도 내 것이로다.
종을 치는 자는 모름지기....
지금부터 15년 전인 1980년부터 오늘까지 나는 해마다 석불사 석굴에 올랐다. 그때마다
무슨 수를 쓰든지 석굴 안에서 혼자 몇시간을 지내곤 했다. 그러나 80년대를 보내면서 나는
석불사의 석굴을 좋아하지 않았다. 차라리 화순 운주사의 무개성한 돌부처들이 집단적 개성
을 보여주는 모습이나 지리산변 마을의 돌장승 입가에 도는 파격미에 박수를 보냈다. 그에
비할 때 석불사의 석굴은 너무도 권위적이었고 강압적이었으며 보편적이었다. 그러다 내 나
이 40이 되는 80년대 말 어느 날 석불사 석굴에서 전에 볼 수 없던 그 무엇을 보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해마다 찾아뵌 그분이었는데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조화적 이상미라는 것을 보
았다.
그날 내게 다가오는 석불사 석굴의 조각은 맹목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아카데미즘이 아니
었다.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엔 절대자의 기품이 강하
였다. 엄숙하다고 말하기엔 온화하고,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엄했다. 젊다고 생각하려니
너무 의젓하고 노숙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건장하였다. 그리하여 혹자의 "아버지라고 보려
하니 너무 자비롭고, 어머니로 보려 하니 너무 엄격했다"는 말도 생각났고, 이 세상의 질서
와 평화가 저 한 몸에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본존불의 고전주의적 기품이 중심을 이루면서
10대 제자상의 강렬한 리얼리즘이 포진하고 있는가 하면 팔등신의 늘씬한 몸매의 문수, 보
현, 제석천, 범천이 얇은 돋을새김으로 환상적, 이상주의적 자태를 보여주며, 11면 관음보살
은 여지없는 '미스 통일신라'로 석면을 뛰쳐나올 듯한 자세로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 감실의
제상을 둘러보니 지장보살은 의젓하고 유마거사는 열변을 토하는데 유희좌로 몸을 비틀고서
무릎에 턱을 괸 어여쁜 보살은 상기도 조는 듯 눈을 내리고 있다. 그 아련한 분위기에 나는
오랫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저 종교와 예술의 과학이 어우러진 지고의 최미라는
딱딱하고 의례적인 정의 이상 내릴 수 없었다. 내가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아서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때의 경험이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거부했
던 어떤 이상주의, 고전주의 미학에 내가 휘어잡히고 마는 순간을 느꼈다. 나는 그것을 거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 아무런 가식 없이 다가오는 미적 체험이라면 내가 굳이 아니라고
우길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고전의 심연으로 내려가 더 깊은 미의 철리
를 배워야 할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그때 내게 생각나는 한 구절의 경구가 있
었다. 고유섭 선생이 <우리는 고대미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서 던진 미술사적 화두
였다.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만(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
유흥준의 "우리문화유산답사기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