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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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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곰개나루는 담로였다.
김성진 추천 0 조회 5 10.12.04 0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곰개나루는 담로였다.

 

익산지역이 위치한 지역은 삼국 중에서도 백제의 땅에 속해 있었다. 백제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BC18년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아들이었던 온조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본래 백제는 마한의 한 나라였는데 백제세력이 강해지자 마한세력은 점차 위축되어갔다.

백제가 초창기에 세력이 강화하면서 국력을 키운 것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나름대로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백제가 충청도, 전라도에 있었던 모든 마한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여 영토로 편입한 것은 근초고왕 때인 4세기 후반 때인 것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좀 더 늦은 시기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는 국내외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도읍을 옮기는 것과 관련하여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한성시대와 개로왕의 전사로 말미암아 금강변에 위치하는 공주로 도읍을 옮긴 웅진시대 그리고 성왕에 의해 부여로 도읍을 옮긴 사비시대로 나눌 수 있다.

백제시대 익산지역의 역사는 지금까지 연구된 내용을 통해서 볼 때 30대 무왕(600-641)과 관련한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수많은 연구가 있어 왔으며, 이 시기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그리하여 무왕이전의 백제사에 있어서 익산은 공백기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1980년대 이후 활발한 연구와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서 부분적이나마 그 역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1986년 한 고등학교 학생에 의해서 웅포면 입점리 새터마을 뒷산에서 우연히 백제의 무덤 하나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무덤 안에서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관모와 드리개 등과 아울러 중국청자 네귀단지 그리고 백제토기와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이 무덤을 통칭 ‘입점리1호분’이라 하는데 이 무덤의 발견은 금강하류를 중심으로한 익산지역의 역사를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입점리1호분을 필두로 하여 입점리와 웅포리 일대에서 수십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이 중 38기의 무덤이 발굴조사되었다. 이 무덤의 형태는 대략 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분)과 굴식돌방무덤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돌덧널무덤은 그 조성시기가 5세기 중엽으로 보여지는데 이 무덤의 주인공은 익산지방에 살고 있었던 토착세력이나 지방호족 세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볼 때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과 관련을 맺으면서 지역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돌덧널무덤의 뒤를 이어 나타난 굴식돌방무덤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중앙세력과 관련을 맺은 지방세력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있어서 백제의 정치상과 관련하여 5세기 중엽 이후부터 5세기 후반까지의 기간에 통치하였던 백제의 왕들은 비유왕(455-472)과 개로왕(472-475) 그리고 문주왕(475-477)과 심근왕(477-479), 동성왕(479-501)이 해당된다.

먼저 비유왕은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여 남쪽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자, 신라와 나제동맹(433)을 체결하여 이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귀족세력이 강하여 강력한 통치체제를 이루지는 못했다.

이러한 비유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개로왕은 비유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와의 동맹을 계속 유지하면서 궁실과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대토목공사를 일으켜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벼슬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송에서는 좌현왕, 우현왕 등의 칭호를 지닌 작위를 내리고 있어 백제왕의 위치가 일약 대왕의 지위로 위상이 강화되었다.

한편으로 중국의 북조인 북위와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는데 도리어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의 침입을 당하자, 개로왕은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치 못하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만다.(475) 이때 왕을 비롯한 무수한 왕족들이 피살을 당하게 되어 백제는 중차대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때에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러 간 문주는 구원병 1만을 이끌고 한성에 당도하였으나 이미 왕과 왕후 그리고 수많은 왕족들이 죽임을 당한 후였다. 이에 개로왕의 뒤를 이어 한성에서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피살을 당하였고 13세인 심근왕이 왕위에 오르고 3년 만에 피살당하고 다시 동성왕이 즉위하였다.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동성왕5년(483)까지 정치권력을 장악한 귀족세력들을 한성에서 내려 온 귀족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은 이들 세력을 극복해 나가면서 새로운 세력을 등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여 갔다. 이때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세력은 백제 8대성 중 웅진지방을 중심으로 한 백씨(?氏)세력, 온양지역을 중심으로 대두한 연(燕)씨세력, 부여지역을 근거로 한 사(沙)씨세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금강유역을 기반으로 한 토착세력으로서 웅진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힘을 가진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5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이르는 과정의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금동관모를 비롯하여 금동제의 껴묻거리가 대량으로 발견된 웅포 입점리1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그것은 백제시대의 지방제도를 통해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밖에 없다. 백제의 지방제도에 대해서는 중국 역사책인 양서(梁書)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읍(邑)을 부르기를 담로(擔魯)라 하였다. 이 담로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것으로 이 나라에는 22개를 두었다. 그 담로에는 왕의 자제와 종족을 파견하였다.’라고 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와 같은 담로제도가 언제 실시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디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웅진시대 중 어느 정도 왕권이 안정이 이루어진 동성왕 때에 실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성왕 때 금강유역권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금강하류에 위치한 웅포지역의 세력도 중시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동성왕12년(490)에 백제는 중국의 남조인 제나라에 내치(內治)와 군사적인 공로를 내세워 작위(爵位)의 승급과 봉작(封爵)의 이전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요청에 관작을 지명과 관련하여 내리고 있는데 면중왕(面中王), 도한왕(都漢王), 아석왕(阿錫王), 매로왕(邁盧王), 팔중후(八中侯), 불사후(弗斯侯) 등에 왕 또는 후를 붙이고 있다. 또 왕17년(495)에 중국의 남조인 제가 북조인 북위와의 전쟁에서 군사적인 공로를 세워 관작을 신청한 것에 대하여 거의 비슷하게 지명과 관련하여 왕 또는 후를 붙인 관작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왕이나 후의 작위가 붙어있는 지명들은 담로제도와 관련된 곳으로 대체로 전라북도의 서북부와 남으로는 전라남도의 남부연안이 대상이 된다. 그중 매로는 익산시 웅포면과 가까이 있는 전북 옥구지방으로 알려져 있어 웅포 입점리1호분의 주인공은 매로왕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웅포면 입점리의 지명 중에는 어래산성(御來山城), 궁골과 같은 것이 남아있어 이러한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입점리1호분에서 발견된 청자 네귀단지는 제나라가 왕이나 후를 봉할 때 하사한 물품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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