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은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38년이 넘은 어느 해 1월 2일이었다. 적어도 근 40년 가까이 되는 긴 세월이 지났지만, 내가 그 날이 1월 2일이라고 날짜를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날이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매우 특이한 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월 1일. 연말 공기단축이라던가 망년회에 분주한 연말연시를 보내고, 지금처럼 지칠 대로 지친 피곤한 몸을 숙소에 뉘여 온 종일 쉬고, 그 다음날 출근을 하려는데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현장이 거의 막바지에 와 있을 때라 외부공사 보다 실내공사가 많아서, 출근해도 작업을 진행하는데 별 지장이 없었으므로 나는 우산을 들고 숙소를 나서 현장으로 향했다.
눈이 와도 시원찮은 날씨에 비를 맞으며, 온전하게 완료되지 않은 먼지투성이인 철물들로 가득한 건설 중인 냉랭한 현장으로 출근하는 마음은, 정말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막 정문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누가 정문 처마 밑에 비를 맞으며 퍼질러 앉아 있었다.
아무리 난전인 건설 현장이라고 해도 해 떨어진 다음이라면 모를까, 새벽 출근 시간에 이러는 건 좀 보기 힘든 풍경이다. 안전모를 깊이 눌러 쓰고, 필경은 뼛속까지 시릴 그 난감한 겨울비를 온전하게 맞으며 앉아있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 시간에 거기를 스쳐 지나가는 1천명 이상의 사람들 모두가 그 풍경을 보며 혀를 쯧쯧 차며 지나갔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아침 조회가 끝나고, 연초에 출근한 몇 안 되는 인원으로 현장 인원배치를 하느라 간부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밖에서 오토바이 부릉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나가 보니, 잘 아는 경비실 영감이 야간근무를 마치고 퇴근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내가 모르는 누구를 태우고 왔다.
거, 누군지는 모르것지만 강짜가 무지하게 세구먼. 이른 새벽에 경비 서는데 누가 비에 흠뻑 젖어서 비틀 배틀거리며 그 어두운 새벽길에 출근하고 있길레, 저러다 쓰러지지 싶어 답삭 잡았더니. 술 냄새가 등천을 하지않겠남?
그래 개지구 대체 이 엄동설한 난전에 무신 썩은 말뚝이라도 하나 제대로 올곧게 박겠나 싶어 당장 뒤돌아서 집으로 가랬더니, 아, 글씨 안 가구 아침 내내 정문 추녀 밑에서 그 비를 다 맞으며 강짜를 부리고 앉아 있다가, 이제사 술이 좀 깨는지, 오늘 일을 여기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집에 가지를 않겠다는 게야.
찬찬히 그 풍경을 보고 있던 나는, 그때서야 아까 출근시간 정문에 술이 취해 쭈그리고 앉아 그 차가운 겨울비를 맞고 있던 그 사람이 저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주변에 있던 직원들도 모두 출근하며 그 기막힌 꼬락서니를 보았을 터이므로,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 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경비직원이 막무가내로 자기 할 말만 이쪽에 대고 일장연설을 해 대었다.
그래서 아침 출근 다 시키고 물어보니, 이 사람이 이 회사에 오늘 입사하기로 약조가 되어있다더구만. 퇴근시간 임박한 내가 자네 그 사정을 알아야 할 게 뭐냐구 했더니만, 이 치가 아주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업무 인수인계도 못하게 하는 게야. 연초부텀 이게 도무지 무신 일인지 난감했지만, 내가 마침 이 회사는 자네땜시 조금 아는 데다가, 후문으로 퇴근하는 길에 자네 회사가 있으니께 퇴근길에 데리구 왔네. 어째 잘 달래서 사람 맹글어 봐. 도랑치면서 가재 잡는다고, 일꾼이 공장만 잘 맹글어서 되간디? 공장 맹글면서 사람도 맹글어보고 그려야지.
아 아니, 영감님. 대체 이게 무슨… 그러나 경비 영감은, 가타부타 일언반구 이 쪽 얘기는 귀에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그 사람을 우리 사무실 앞에 부뤄놓고 오토바이 시동을 다시 부르릉 걸고서는, 자~ 그럼, 하면서 손을 까닥 들어 하직인사를 하고 사라지고, 회사직원들도 슬슬 내 눈치를 보더니 엇뜨거라, 도면과 공구함을 들고 현장으로 모두 부리나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결국 문제의 그 사람과 나만 덜렁 남았다.
쳐다보니, 아직 빗물 덜 마른 후줄근한 몰골에 게다가 술이 깨는지 가끔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노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과 측은한 마음 사이 묘한 생각에 빠져 한참을 헤메다가, 결국 이런 현장에서는 아무래도 흔한 잔정 가지고는 밥 빌어 죽 쒀서 시궁창에 쏟을 일 밖에 더 없지 싶어, 일단 내 마음부터 다잡았다.
앉으슈.
갈탄 난로 앞에 놓인 의자를 권했더니, 주춤주춤 다가가 몸을 오그려 앉는다. 참 기가 막힌 풍경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도 그 사람 맞은 편 쪽에 앉았다. 도대체 어느 잘난 군사가 이런 기가 막힌 사람을 우리 회사에 소개했는지 몰라도, 일단 그 군사부터 족쳐야 할 일이지 싶어, 대뜸 본론으로 들어갔다.
누구 소개로 오셨수?
… ….
누가 아저씨한테 이 회사로 가라고 그랬냐고요?
… ….
아저씨, 귀 잡쉈어요? 내 말 안 들려요?
아니, 거시기, …
거시기라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이요.
… …그냥 왔시유. 엊저녁 술집서 옆자리에 앉었던 사람들이 이 회사 얘기하는 걸 들었는디유. 그냥 그 당시는 그 회사에서 일하면 좋것다 하는 생각을 했었지유. 근디 사실 여기 흘러온지 며칠 되잖고 해서 딴 회사는 잘 몰러유. 경비가 묻길레 아는 회사이름이 그 밖에 없어서 그냥 엉겁결에 댔구만유. 죄송해유. 그럴 생각은 없었는디, 암튼 애기들 학비랑 마누라 약값땜시 일은 해야것구, 당최 아는 사람은 읎구,
그 때까지 그런 사설 긴 얘기 치고 영양가 있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그 사람 말을 내가 중간에서 뚝 잘랐다.
그려요. 여기 앉은 저도 애들 학비에 엄니 아부지 약값 벌러 이 겨울비 모질게 퍼붓는 날 일당 한 공수라도 더 벌어볼까 벌벌 떨어가면서 나왔어요. 여기 놀러 나오는 게 아니고 다들 그 때문에 나오지요. 근디 아저씨. 오늘 새벽부텀 술 억병으로 취해서 정문에서 비 맞아가며 앉은 경비 서 보시니께, 다른 사람들은 어쩝디여? 아저씨 같이 고주망태된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습디여?
아이구, 그건 지가 엊저녁에 취직도 안 되고, 비도 올 날씨고 해서 비관적으루다가 주머니 톡톡 털어서 무작정 마셔서 그런 거지, 이 팔용이 이름 석 자를 조상님 전에 걸구 맹세컨데유. 취직되면 그런 일 절대 없을 텡게 염려 놓으셔유. 증말이어유.
정말이었다. 나도 참 멍청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저 머리 허연 하늘같은 경비 영감이 이 사람 강짜가 세다고 했으면, 새파랗게 젊은 내 판단 접고 강짜 센 줄 진즉에 알아보고 아무 소리 없이 밀어내어버렸어야 했다. 결국 한 시간여 끈질긴 입실랑이 끝에 나는, 그 사람 말대로, 일단은 딱 한 번만 써 보시고 정녕 아니면 자르랑게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게 그렇더라도 다짐은 받아야 했다.
근로계약서 양식을 한 장 꺼내 인적사항을 적기 전에, 우선 하단에 큼지막하게 문구 하나를 넣었다. 나도 한두 번 당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은 술이나 여타 다른 부적합한 행동으로 개인 안전이나 작업상 위해가 있다고 회사에서 판단하여 해고 정리를 할 시, 이에 이의 제기없이 즉각 퇴사한다.' 끝에 (인)이 있었지만, 나는 기어코 그것이 아주 정당한 일이라도 되는 양, 주춤거리는 그 사람의 손을 억지로 당겨 우수무인을 택하여 손금도 선명하게 증거를 남겼다.
그건 그렇고, 전문직종이 뭡니까? 술 말고 아는 거 없는 그런 속 뒤집어지는 경우는 아니것지요이?
참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는디유. 기중 적성에 맞고 잘 하는 것은 모터수리나 공구수리구먼유. 일거리 있으면 맽겨 보셔유. 똑 소리 나게 고쳐드릴텡게.
공구수리라는 말에 나는 흠칫했다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 당시 우리는 장기간 공사에 따라 이리저리 현장에서 치이다가 골병든 공구가 한두 개가 아니었거니와, 비싼 수리비 때문에 본사에 기안을 올렸다가 몇 번이나 퇴짜를 맞았으며, 따라서 입고 공구는 많지만 근 50% 정도가 사용 불가이거나 부실한 공구라서 늘 공구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장에서 그런 내심을 솔직하게 밝혔다가는 좋은 기술자 여럿, 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성격 버리는 것을 자주 보아왔던 터라, 속으로 그런 마음을 꾹 누르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려요? 수리할 공구가 좀 있긴 한데, 뭐 아는데 중고 도매금으로 넘겨도 되지만, 아저씨가 정녕 그런 것에 소질 있다시니 허실 일거리 있나 좀 찾아 봅시다.
나는 대뜸 그를 공구실에 데리고 가서 구석에 동그랗고 못난 의자 하나를 그의 근무지로 지정해 주었으며, 별도의 작은 창고 안에 처박아둔 한 트럭 남짓 되고도 남는 고장난 공구들을 보여주었으며, 뭐 몇 개 안 되요 하며 목록 적힌 리스트 한 장을 그에게 건넸다.
목록별로 공구 다 테스트 하고, 어디 고장 났는지 명시를 하세요. 그런 다음 공구마다 수리에 필요한 부속품들이랑 소모품을 뽑아 봅시다.
나는 일을 크게 뚝 떼어 던져주고 일부러 관망했다.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진솔한 그의 실력을 평가하기 어렵다. 한 사흘이 지났으나 눈에 띄는 진도가 없다. 혼자 공구창고와 공구실을 들락거리며 종류별로 분류해 놓고 하나하나 테스트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5일쯤 지났나? 퇴근시간에 목록을 가져왔다. 검토해 보니 치밀하게 잘 체크가 된 것 같았다. 단지 종류별로 분류가 되지 않아 부품이나 자재 별로 집계만 나와 있지 않았을 뿐.
팔용씨. 이런 걸 보고 우리들이 뭐라는지 알어요? 배추장수 문서라고들 하지. 그저 그날 하루 달랑 쓰고 버려도 되는 그런 문서 말이오. 다시 문서에 칸을 질러서, 세로로 품목 규격 넣고 가로로 수리에 필요한 부속품과 소모품을 종류별 규격별로 다시 만들어요. 그는 다시 간이책상에 엎드려 볼펜에 침을 바르면서 끙끙거리며 서류를 다시 만들었고, 드디어 어느 날, 그 문서가 완성되어 사야 할 품목들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서류를 대강 들춰보니, 종류별로 참 다양하게 고장이 났다. 사야 할 부속품 종류들만 해도 근 100가지가 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파악해 보니 그래봐야 중요한 큰 부속 몇 개를 빼면 그리 비싼 것들도 아니고, 수량이 엄청난 것도 아니었다.
곧 큰 부속품 상회을 찾아가 견적 의뢰를 하였으며, 그것을 근거로 나는 다시 공구수리계획서를 다시 짰다. 결과는 예상 외였다. 예전에 짰던 외부업체 의뢰용의 그것보다 무려 75% 정도나 투자가 적게 들면서 효과는 그대로 거둘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일단 팔용씨 더러 거기 폐기로 분류된 공구들에 박혀 있는 쓸 만한 부속과 소모품들을 죄다 빼내어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공구들의 수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과연 그의 장담이 헛말은 아니었다. 공구수리는 얄팍한 기능 좀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치밀한 계산과 이론이 뒷받침 되어야 하며, 우선 오차 없이 정밀해야 된다. 수리하면서 손에 힘을 얼마만큼 주는 가에도 공구 작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므로, 그는 그런 자료를 종이에 빼꼼하게 적어 놓고, 시험검사실에 가서 정밀측정 공구까지 빌려와 측정까지 해가며 꼼꼼하게 수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럴 경우 이런 말로써 상황을 표현한다. 간만에 물건다운 물건을 만났다ㅡ. 이 때다 싶어 난 빨리 몇 가지 까탈스런 부분에 대한 자료검토를 더 한 다음, 본사로 두툼한 근거자료들을 붙여 아예 소설책을 만들어 공구수리계획서를 발송했으며, 일주일쯤 지나 본사에서 검토가 다 되었는지 연락이 왔다. 금액 단위가 조금 커서인지 사장께서 직접 전화를 하셨다.
정말 이 만큼 절감이 가능한 건가?
사장은 나에게 암만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의심나시면 업체별 전화번호가 거기 다 적혀 있으니까 시장조사 다시 한 번 해 보시죠?
벌써 다 해 봤지. 가격은 맞고, 그런데 그건 그렇다쳐도 수리를 누가 한다는 거야? 공사다망하신 자네가 할 것은 아니잖아?
누가 하든 품값 더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거기 신경쓰지 마시고, 자금 확보나 빨리 좀 해 주세요. 빨리 일 시작하지 않으면 그 나마 그 인걸 간 데 없을 공산이 큽니다.
알았네. 금액이 좀 커서 사나흘 기다려야 될 걸세. 물건 먼저 당겨 쓸 수 있으면 갖다 쓰게. 그리고 정말 그 정도 금액으로 끝내면, 내가 가만있지는 않을 테니 그리 알고, 암튼 수고 좀 해 주게.
팔용씨에게 그 일의 자초지종을 전하자, 그는 희색을 만면에 가득 머금고 손에 탄력을 붙였다. 그 때부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나는 사람 하는 짓이 아무리 개망나니라고 해도 세상 어딘가 한 군데는 꼭 쓸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역으로 보자면, 개망나니짓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찾지 못해서 그럴 개연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은, 그런 일을 개인이 세상에서 손쉽게 찾기란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을 찾기 힘든 이유는 그런 일이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흔한 일이 아니고, 반드시 사전준비를 거쳐야 이루어질 그런 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찾고 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세상 사는 재미의 근본을 만드는 매우 중요한 일이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팔용씨가 그 때 그런 일을 통하여 술을 끊었는지 어쨌는지 사실 나는 자세하게 모른다. 근로계약서에 그리 다짐을 받긴 했지만, 그런다고 사람의 심성이란 것이 어느 날 천지개벽 하듯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나로서는 , 그가 아무리 금주의 완벽한 실행에 대하여 나에게 침 튀기며 자랑을 했다손 치더라도, 고개는 주억거려 줄지언정, 그 말을 100% 믿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가 술을 마시고 일을 하는지 감시하지도 않았다.
그래봐야 그것은 한 순간, 그것에 대한 궤도수정의 필요성에 대한 의미 부여이거나 다짐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서 현재의 개망나니를 어느 날부터 갑자기 성인군자가 되어라는 식의 요구를 해서는, 그나마 조금 될 것도 아주 안 될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정녕 그것이 필요하다면 나로서는 그것을 단계적으로 고칠 수 있도록 가끔 옆에서 도와주는 일이나 가능할 뿐……. 팔용씨와 나는 어느 날, 모자라는 부속품과 소모품들을 사러 퇴근 후 시내에 갔다가 늦어서, 문이 거의 다 닫힌 시장 돼지국밥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그가 저녁을 몇 숟갈 들더니 깨작거리는 눈치를 보였다, 그런 것에 민감한 나는 즉각 그의 마음을 넌지시 떠보았다. 팔용씨. 소주 생각나서 그러시죠? 아 아녀유~ 그럴리가유. 그냥 입맛이 좀 없어서 그런 거지 딴 건 없시유. 그는 마지못해 밥 한 그릇을 비웠지만, 못내 소주가 아쉬운 듯 헛 입맛을 쩝쩝 다셨다.
다시 한 번 궤도수정의 의미부여를 할 시간이었다. 팔용씨는 어쩐지 잘 모르지만, 난 사람 사는 것은 날씨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해 떴으면 해지고, 해지면 달뜨고, 달 지면 해 뜨고, 맑다가 흐리다가 비 오다가 눈 오다가 환하다가 캄캄하다가, 그런 게 인생이라 생각한다 이 말이지요. 해가 좋다고 한 석 달쯤 비 한 방울 안 오고 해만 뜨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알어요? 댐박에 식물이 시들고 산불이 나고 먹을 물이 없어 고생들을 하게 되죠,
지금 같은 경우, 밥반찬인지 술안주인지 구분 안 갈 때는 이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해를 좋아하지만, 왜 늘 내 면전에 해만 떠서 있으면 모든 것은 다 좋다고 생각하는 바보 멍청이인가? 무엇이 좋다고 달랑 어느 것 하나에 목숨 걸지 말아요. 거꾸로 하나 뿐인 목숨을 위해 나에게서 주변으로 벗어나려는 그 힘들을 다 걸어요. 달랑 어느 하나가 그 정도 가치 있는 건 세상에 없어요. 지구가 가치 있죠? 그러나 그게 어느 무엇 하나로 가치가 있는 그런 것이요?
그는 그 후, 정말 미친 듯이 그 일에 매진하였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없이, 가끔 얼마나 진도가 나갔나 체크하러 들르거나, 소모품을 가끔 사다주는 나를 빼고는, 순전히 혼자 그 많은 공구들을 다 수리하였으며, 어느 날 드디어 그 일의 온전한 바닥을 보게 되었다. 나는 수리돤 공구 전부를 테스트 해 보았으며, 다시 그것을 상태별로 상,중,하로 구분해 두었다. 그 후 우선 큰 공구들과 마감작업에 필요하지 않은 공구들을 선별하여 몽땅 다 실어 본사로 보냈다. 며칠 후 본사 자재부장이 현장으로 전화를 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세상에 그런 장기간 공사를 끝낸 공구들이 이렇게 깨끗하게 손 하나 댈 필요 없이 수리되어 올라온 경우는 처음 봤어요. 정말 대단합니다. 기가 막혀요. 따봉입니다.
몰론 그 결과는 훗날 좀 낫게 두둑한 전별금을 보장하였지만, 그런 것은 기실 차후의 도약에 비하면 잔잔한 효과에 불과했다.
그러나 막바지에 걸렸던 그 공사는 그와 비슷한 시점에 곧 끝났고, 차후 공사가 오리무중인 가운데 아쉽지만 나는 현장의 법칙대로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는 현장에 연결해 주고, 발령날짜를 기다리는 가운데, 어느 날 전별회식을 하는 날이 왔다. 나는 이미 팔용씨를 보내기 전에 그와 술 한 잔을 하기로 마음먹고 정갈한 마음으로 회식장소로 갔다. 본사에서 올라온 간부들 때문에 저쪽 끝으로 밀려난 팔용씨를 불러, 모두에게 소개했다.
내가 만나 사람 중, 공구수리에 관한한 제1의 귀재이십니다. 이번 건도 여기 팔용씨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어요. 박수 한 번 쳐 주세요. 나는 분위기를 돋우며, 전체 건배를 제의했다. 모두들 괜찮게 끝난 공사와 대박을 터뜨린 공구수리 건에 대하여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가 흠씬 무르익어 갔다.
한 잔 거나해진 내가 팔용씨를 따로 불러 우선 모든 말에 앞서 술을 한 잔 먼저 따라 주었다. 그에게 술을 그토록 말렸던 내가 술을 권하자, 그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나 때문에 맘고생 많이 하셨을 거요.
아 아녀유. 고상은유. 오히려 변변찮은 나를 이렇게 믿어주신 것만 해도 어딘데유.
팔용씨. 내 뜻은 이게 아니지만 이렇게 헤어지게 되었소.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힘들고 까탈많은 난전의 현장에서 이렇게 웃는 낯으로 헤어진다는 건 참 기쁜 일이오. 그리고 팔용씨가 워낙 특출하시니까 우리 이렇게 헤어져도 곧 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그렇게 생각하고 한 잔 합시다.
나는 건배를 제의했고 그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러나 잔을 내려놓고 보니 팔용씨는 술을 입에만 대고 그냥 내려놓는 게 아닌가?
왜요? 나한테 뭐 삐친 거 있소?
아녀유. 한 동안 술을 입에 안 대다가 술 냄새를 맡으니 속이 역하네요.
그가 정말 술을 끊은 것일까 의아한 가운데 술좌석은 더 무르익었고, 끝내는 그 술집을 나와서 따로 몇 명이 다른 술집에 가자고 부추겼지만, 따라가는 것처럼 하다가 팔용씨와 이별하기 위해서 뒤로 빠졌다.
그냥 길모퉁이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안 받으려는 전별금을 손에 쥐어주고 가만히 안아 주었다.
지금부터는 우리 서로 한 동안 흐린 날이 될 거요. 세상이 원체 그런 곳이니까… 그러나 흐리다고 술이나 마시고 앉아있지 마세요.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니까. 우선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다시 그 해가 뜬다는 걸 끊임없이 믿어야 하고, 그리고 그 해를 흐르는 세월에 관계하지 말고 열심히 또 무언가를 하며 또 그 해를 기다리는 거요. 그래줄 수 있겠소?
그는 울먹한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나는 그가 내 시야에서 어둠 속으로 완전하게 사라질 때까지 그 쪽을 쳐다보며 눈을 꿈벅거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정말 한 동안 내 앞이 줄곧 흐리기만 했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날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그 말을 한 게 나라는 체신 때문에 오히려 술만 마시면 그에게 했던 그 말들을 생각하며 내 머리를 긁적거렸고,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찮게 드디어 팔용씨가 반드시 필요한 그런 일을 발견하였다. 우선 나는 그가 살던 옛 동네를 수소문해서 근처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을 물었다.
글씨요~ 보자. 오륙년 전쯤 어디 까마득한 시골 경운기 수리센타를 한담서 떠났었는디, 동네 이름은 귀 설어 기억도 못하것구, 강원도라던가 경기도 북부라던가 어디라고 듣긴 혔는디, 내가 잘못 들은 지도 모르것구… 몇 번 이리저리 더 수소문을 하다가 지쳐서 결국 그만 두고 다른 사람을 찾았지만, 아직도 가끔 흐리고 술 생각나는 날이면,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팔용씨도 나처럼 아직 세상 어디 구석에서 다시 그 해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 音 정태춘 '서울역 이씨'
첫댓글 충청도 어디에서
농기구 수리센타 차려서 돈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거 같습니다. 충청도 말투라 고향 근처에 사는가봐유~^.^
곤이친구 오랜만입니다
자주 오세요
좋은글 자주 올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