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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의 경이로운 힘과 의미 찾기
강 돈 묵
dmkang892@hanmail.net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커다란 것일까, 아주 작은 것일까? 만약에 커다란 힘이라면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많은 질문 끝에 얻은 결론은 아주 작은 것이 그 밀알이 된다는 생각이다.
훅 불기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 작은 씨앗이 무거운 흙더미를 치밀고 올라오고, 그것은 자라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온전히 구실을 다한다. 작은 것은 눈을 틔우는 순간부터 왕성한 존재감을 가지고 수필가들의 시선을 끌어간다. 아주 하잘 것 없는 것이라 해도 작가의 가슴속에서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 지구를 끌어안을 힘을 발휘한다.
연민에 찬 수필가들은 이런 미미한 것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 성향이 있어서, 그것을 그냥 흘려버리지 못한다. 그것에 깊은 관심의 촉이 닿아 밤을 새우며,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수필가는 커다란 유혹보다는 남들이 보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의 하찮은 것에 애정 갖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 애정은 종내에는 아주 사소한 것에 커다란 생명을 얹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룩한 행위로 표출된다. 그러니까 이것들의 양육에 정열을 쏟고, 성숙되면 세상 밖으로 ‘이렇게 키웠소.’하고 내보이는 사람이 수필가다. 수필을 휴머니즘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것도 어쩌면 이런 데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필가들의 이 사소한 것에 대한 애정의 방법은 각기 다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심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르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일반인들에게서도 같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작가들에 있어서는 더 예민하게 작용한다. 작가들은 대상을 바라봄에 직관에 의존하기보다는 심안을 통해 내면에 함유되어 있는 본질을 찾는 데에 관심이 더 많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처지에 따라서 현실을 인식하는 편리한 동물이다. 이는 이기와는 좀 다르다. 생존의 욕구에서 비롯된 세상 바라보기이다. 이때에 현실은 바라보는 자세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작가적 안목으로 말한다면 이는 대상에 대한 ‘수용자세’라고나 할까.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것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은 현저하게 다르다. 여기에 작가의 존재 의미가 있다. 가령 하나의 고철 덩어리를 바라봄에도 공학도의 자세는 제련소에 보내면 강철과 연철이 얼마나 나올까를 분석하고, 경제학도의 자세라면 이를 고물상에 보내면 얼마를 받고, 다시 마진을 붙여 얼마에 팔 수 있는가를 헤아린다. 이처럼 사물은 대상을 바라보는 수용자세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또 한 작가에 있어서도 바라보는 순간의 정신적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상큼한 기분으로 대상을 바라보면 아주 선명하도록 밝고 활발하게 보이지만, 반대로 우울한 기분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칙칙한 빛깔을 띠며 어둡고 둔한 모습으로 몸을 비틀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결국 사소한 것에 민감한 애정을 갖고 있는 수필가들에게 있어서 대상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수필가들은 이러한 미미한 소재에서 본질을 찾아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흥미를 갖기 때문에 가치 있는 수필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사소한 것이라 해도 수필가의 손을 거치면 우주의 질서를 찾기도 하고,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본질을 찾고자 하는 작가는 ‘낯설게 하기’에서 출발한다. 하나의 글감을 바라봄에 추상화되고 단순화된 일상의 눈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처음 지각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기왕에 보아왔던 것, 이미 있었던 것, 이미 경험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처음 접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래야 그는 신선하게 접근해오는 글감을 읽을 수 있고, 글감이 제 속에 들어 있는 본질을 드러내려 몸부림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때에 작가의 삶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내면에 들어 있는 잣대로 대상을 인식하기에, 작가의 삶은 수필에서 크게 의미가 있다. 그 삶이 가치 있는 삶이냐, 그렇지 못한 삶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작가가 해석한 어떤 삶이냐가 중요하다. 그 어떤 삶이 다른 이와 차별화하여 대상을 발칙하게 해석해내고, 치밀한 구성을 보태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를 이룰 때에 하나의 온전한 수필은 탄생한다. 그래서 작가의 정체성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수필세계》에 게재된 수필에서는 사소한 것이 어떻게 성숙하여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소한 것이 어떻게 문학 작품 속에서 힘을 얻고 존재하는가, 또 그것을 어떻게 낯설게 보기를 하여 해석했고, 형상화했는가를 몇몇 작품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박기옥의 <삶은 디테일이다>와 최종의 <재롱과 조롱 사이>
우선 눈에 들어오는 박기옥의 <삶은 디테일이다>에서 한 부분을 취해 본다. 이 작품은 사소한 것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좌지우지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이 들면서 모아지는 생각은 우리 삶이 거창한 그 무엇에 휘둘리기보다는 지극히 사소한, 디테일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혼도 안 하고 공부로만 매진해 온 L이 생업에만 종사해 온 나에게서조차 기억하는 것이 시험성적인데 반해 지금껏 L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고작 자장면이나 지갑, 레이스 달린 속옷으로 축약되는 것이 우연이기만 할까. 두 사람의 어긋난, 정직한 기억이야말로 우연이라는 팻말을 건 각자의 좌표가 아니었을까.
운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본인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역동적인 그 무엇이 구름 위의 그 어떤 미지의 공간과 나눈 은밀한 교신을 우리는 혹, 운명이라고 부르고 있지나 않은지. 어린 시절의 사소한 관심과 자질구레한 선택들이 훗날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도 나에게 배달된 소중한 기회들이 꼬리를 감출 무렵에야 깨닫게 되니 이 무슨 신의 조화인지 모를 일이다. -박기옥의 <삶은 디테일이다> 끝부분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를 성인이 되어 40년 만에 만난 이야기다. 상대는 유복한 교육자 집안의 외동딸로 귀하게 자랐고, 유학을 거쳐서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논문 심사를 하러온 독신녀이다. 그에 반해 작가는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마치고 바로 결혼해서 아이를 넷이나 낳고 생업에 종사해 오는 대학원의 행정직 근무자이다. 그렇다고 하여 작가가 친구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거리감을 느끼는 처지도 아니다. 그녀는 그녀일 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들이 상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다. 친구는 작가가 시험성적을 물어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상대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며 ‘밥맛’이라고 일갈한다. 작가는 기억에도 없는 옛 이야기에 쿡 웃음만 터져 나올 뿐이다. 여러 형제가 한 방에서 기거하던 때라 친구와는 관심거리가 달랐던 것일 게다. 하지만 작가는 친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이 전혀 다르게 자장면과 지갑, 그리고 레이스 달린 속옷이다. 같이 공부하다가 점심때가 되자 자장면 먹으러가자며 지갑을 들고 나온 친구. 용돈이라고는 전혀 받아보지 못한 작가는 지갑에 놀란다. 또 대충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자장면을 먹는 작가와는 달리 손수건으로 입가를 꼭꼭 눌러가며 먹었던 친구. 신체검사를 위해 옷을 벗었을 때에 천사처럼 하얀 레이스가 달린 속옷을 입었던 친구. 이와 같이 서로 상대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 여기서 작가는 삶이 거창한 그 무엇에 휘둘리기보다는 지극히 사소한 것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운명도 본인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는 이 수필에서 사소한, 너무도 사소한 것들에 의해 우리의 삶이 꾸려지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최종의 <재롱과 조롱 사이>를 살펴보자. 이 수필에서도 처지에 따라 바라보는 대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분명 아이 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재롱’인데, 나이가 들어 노여움을 타는 노인의 눈에는 ‘조롱’으로 보이는 것이다. 몸은 점점 어린아이처럼 유약해지고, 자신의 삶이 마지막 환승역에 가까이 와 있다는 생각 속에서 사는 노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민감하여 마음 아파한다. 회한으로 가득 찬 허망한 세월과 다가오는 조급한 시간들이 노인을 스스로 무력감에 떨어지게 하고, 깊은 골짜기로만 몰고 가는 외로움이 너무도 도도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니, 매사에 신경질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일곱 살 아이의 재롱도 당신에게는 조롱으로 비친다.
아이는 할아버지를 놀리고 있었다. 뒤에 그 아이의 엄마로부터 들은 얘기다. 우리 애는 대가 너무 세다고 은근히 자식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그날 재롱 피우는 아이가 화내는 할아버지에게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일곱 살 된 애가 재롱을 피우는 것으로 말했지만 할아버지 눈에는 당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아이의 재롱이 조롱으로 비치는 것은 당신의 몸이 애처럼 유약해졌기 때문이었을까. 육신은 점점 쇠락해져 이미 아이만큼 나약했었는지 모른다. 나는 불현 듯 당시 할아버지 모습에서 쉽게 읽지 못했던 표정을 기억해낸다. 지금 내 나이도 바로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최종의 <재롱과 조롱 사이>에서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발이 묶이어 세상을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처지에 따른 수용자세는 통과하는 프리즘에 작용하여 대상을 변질시키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라보는 순간의 정신 상태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똑같은 벽인데도 어느 때는 밝은 흰색으로 보이고, 때로는 어두운 회색으로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사소한 이유로 하여 대상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이 글에서는 나이 들어 심신이 어린아이처럼 유약해진 노인의 삶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 ‘내 나이도 그때의 할아버지 나이’라든가, ‘꿈을 좇는 그 마음만으로도 의미 있는 세월’이라든가, ‘쓸쓸함 역시 축복의 시간’이고, ‘상념에 잠기는 것은 은총 받은 시간’이라는 지적들에서 쉽게 와 닿는다. 그리고 그 조롱했던 아이가 성장하여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기술은 노인의 이러한 행위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은서의 <유괴범이라니>와 박정자의 <구두 이야기>
박은서의 <유괴범이라니>에서는 사소한 차이로 사람이 얼마나 달리 읽히는지를 보여준다. 비타민 D의 섭취를 위해 팔다리를 드러내고 걷기를 시도했던 작가는 추위에 노출된 부분이 푸르스름하게 변하자 이를 포기한다. 특히 얼굴이 거뭇거뭇해지는 것은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볕을 가리기에 이른다. 벙거지 모자와 검정색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나머지는 머플러로 두르고는 같은 곳을 반복해서 계속 왔다 갔다 했으니, 아이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는 기술이다.
“저기요. 혹시, 유괴범 아니세요?” 벙거지 모자와 검정색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나머지 반은 머플러로 둘렀다. 그런 모습으로 같은 길을 계속 왔다 갔다 했으니 아이들의 의심을 받을만했다. 하지만 묵묵히 바닥만 보고 걷다 얼토당토않게 던지는 질문에 내심 놀랬다. 모자를 올리고 선글라스를 벗는 동작을 순식간에 했다. 또다시 재빠르게 코까지 올라와 있는 머플러를 턱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아니, 나 운동하는 거야!”
아이들이 공포를 느낄만한 것들을 다 벗긴 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나가요, 유괴범 같다고 했어요.”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여기 처음 왔는데요. 무서웠어요!” 박은서의 <유괴범이라니>에서
노출을 하고 걷기를 할 때와 가리고 할 때의 차이는 오직 더 감쌌다는 것 외에는 변한 것이 없다. 이렇게 사소한 변화에 바라보는 사람은 정상인과 유괴범의 현저한 차이를 내보인다. 이런 오해를 풀기 위해 얼른 모자를 올리고 선글라스를 벗는다. 또 코까지 올라와 있는 머플러를 턱 아래로 내린다. 그러자 아이들은 경계를 풀고 서로 걱정해 주는 사이로 바뀐다. 추위로 입술이 빨갛게 된 아이들의 감기를 걱정하고, 아이들은 다음에는 점퍼를 꼭 입겠다고 약속하며 손을 흔들고 간다. 작가도 덩달아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한다.
이와 같이 사소한 것들로 인하여 사람의 정체가 어떻게 달리 인식되는지, 또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글이다. 진정 우리의 삶은 커다란 어떤 것에 의해 그 정체성이 드러나기보다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 인해 규명된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놓이게 된다.
박정자의 <구두 이야기>에서도 같은 유형의 모습이 보인다. 우선 예문 한 대목을 살펴보자.
누구나 그녀를 보는 순간이면 구두로 시선이 간다. 작은 발에 예쁜 아동화를 신고 있어 눈을 끌기 때문이다. 봉사자들이 체중 30kg 남짓한 그녀를 전동 휠체어로 이동할 때면 목 뒤로 손을 받쳐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어쩌다 구두가 벗겨져서 땅에 굴러가면 내 신발! 하면서 당황스러워한다. 나는 구두를 땅에서 집어 조그만 발에 신겨주면서 혹시 자존감이 손상될까 조심스레 바라본다. 그녀가 도리어 환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그녀는 실내에서도 항상 구두를 신고 있다. 가느다란 발목에 걸려 있는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사람이 구두를 신는 목적은 발을 사용하여 땅을 디딜 때 발을 보호하고 편리하게 걷기 위한 수단이 아니던가? 그녀는 자신의 발로 땅 위를 걸을 수가 없는 장애자이다. 그녀에게 구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박정자의 <구두 이야기>에서
그녀에게 구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작가는 질문부터 던진다. 하지만 그녀에게서의 인식보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작가가 그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게 된다. 전동 휠체어에 의존해 이동하는 중증장애자인 k는 체중도 30kg에 지나지 않아 발도 발육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발에 예쁜 아동화를 신고 있다. 작가가 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오로지 이 예쁜 ‘구두’이다.
k의 구두 의미를 세상의 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작가는 이멜다의 사치와 권력욕에 찬 구두 이야기를 끌어오고, 열등의 허기를 채워주던 자신의 구두 이야기도 끄집어낸다. 그러나 둘 다 허망의 늪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멜다는 그 사치와 허영 때문에 종내에는 조국에서 쫓겨나고 말았고, 작가는 높은 굽을 고집하다가 퇴행성관절염에 걸려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직 k만이 자존심을 지키게 된다.
작가가 k의 구두에 대한 인식을 ‘자존심’으로 하게 된 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녀의 삶의 태도 때문도 아니요, 오로지 그의 장애에 대한 이해로 가능했던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수용자세에 의해 결정지어진 것이 분명하다. 대상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피조물일 뿐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소한 것에 의해 우리의 삶은 결정되고, 그 정체성도 드러난다는 엄연한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백명철의 <은사隱師>와 최해숙의 <봄날>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낯설게 하기’는 추상화되고 단순화되기 쉬운 시각에 족쇄를 채우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반복되는 행위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참신한 발견을 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늘 처음 접하는 일로 인식함으로써 발칙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로 정리한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단순한 글감은 문학적 글감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취택한 글감은 단순한 삶의 편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에 작가의 삶을 집어넣어 작가만의 해석이 내려져야 문학적 글감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선택된 글감이 함유하고 있는 내재적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 내재적 의미를 흔히 ‘본질’이라 말한다. 문학은 글감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 기록하는 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적는 것이 아니기에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백명철의 <은사隱師>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유명 인사들의 빛나는 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것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것은 절실한 삶을 토대로 나온 말이 아니고 세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한 데서 쏟아져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백명철의 수필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글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그것을 독자들은 찾아나서야 한다.
김 선생은 일찍이 양복점을 경영하던 능력 있는 사람이다. 남부럽지 않게 집도 가지고 아내와 자식을 건사하며 잘 살고 있었는데 기성복 바람이 불면서 사회에서 밀려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점포를 정리하고 주식에 손을 대어 돈푼이나 벌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IMF로 많은 손해를 보고 만다. 그 후 식당도 하며 두어 차례 사업을 벌였으나 재산만 탕진하고 만다. 백수로 쉬고 있다가 아내의 재봉틀소리에 깨어난다.
육십 줄이 들어선 어느 여름날, 낮잠에 빠진 그에게 재봉틀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의 아내가 낡은 옷가지를 이용해 방 윗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귀에 익은 소리. 돌돌거리는 그 소리는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금이 간 그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평안했어요.” 바로 그날, 그들 부부는 시장 모퉁이의 비어 있는 가게에 옷 수선 집을 열었다. 그의 아내는 식당도우미를 하며 몰래 모아 두었던 돈을 망설임 없이 내놓았다.
…<중략>…
언젠가 사소한 문제로 아내와 한바탕 크게 다툰 뒤 울적한 기분으로 김 선생의 가게에 들렀다. 마침 그는 점심 도시락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화제는 자연스레 부부싸움이 되었다. “아, 같이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서로 싸워요. 그냥 좋게 좋게 지내요.”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소란을 떤다는 듯 나를 쫓아내려 했다. 일어서기를 머뭇거리는 내게 빙긋 웃으며 ‘부부간에 술 한 잔 해 보라.’는 처방을 주었다. -백명철의 <은사隱師>에서
여기서 들리는 아내의 재봉틀소리는 자주 듣던 아주 사소한 소리이다. 그러나 양복점을 경영한 경험이 있는 김 선생에게 이 소리는 하늘의 소리로 바뀐다. 그래서 백수로 쉬고 있던 사람의 귀를 깨우는 커다란 계기가 된다. 좌절의 나락에 떨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아주 사소한 작은 재봉틀소리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 선생의 삶의 조언은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차분하게 가슴을 적시는 소리이다. 인간의 갈등 자체도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하잘것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크게 다툰 부부싸움도 냉정한 눈빛으로 보면 시답잖은 것들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빌미가 되어 못 참아하고 부부의 연에 차단기를 내리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런 때는 복잡하게 엉클어진 매듭을 세세히 풀려하지 말고, 술 한 잔으로 매듭 자체를 통째로 흐물흐물 녹여 버리라는 조언이다. 이렇게 단단히 쌓였던 앙금을 깨끗이 사라지게 하면 그만이란 것이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숨겨 놓았다. 이제 독자는 거창한 것들에 의존하는 것보다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의탁해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것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최해숙의 <봄날>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연서이다. 처음부터 사랑인 것은 없다. 시간도 지나고, 점차 관계도 깊어지면서 움트는 것이 사랑이다. 만약 조급하게 불타오른 사랑이 있다면 그의 종말도 쉬이 찾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대개의 경우는 무관심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눈빛이 함께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서로의 눈동자 속에 들어앉기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둘의 사랑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환치된다.
이런 사랑의 과정을 기술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작가는 둘의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을 도표에 그린 듯이 기술해 나간다. 이 사랑의 출발은 눈빛이 함께 했다는 아주 하잘것없는 작은 동작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사소한 것들이 밑거름이 되어 둘의 사랑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열매 맺기에 이른다.
제게 세상은 늘 잿빛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보고 다니다가 한숨을 푸욱 내쉴 때나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지요. 그런데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제게 눈길을 주었다고 했지만 기실은 제 눈길을 피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계의 변화가 제 안에서 펼쳐지더군요. 어느 날 꽃이 피는가 하면 어느 날은 비가 내리고, 어느 날 단풍이 드는가 싶더니 어느 날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고….말없이 흐르는 강물도, 강물에 낯을 씻는 하늘도, 하늘이 둥지인 구름도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그리 예쁜 걸 처음 느꼈습니다. 흙 한 줌 보이지 않는 담장 밑에서 당당히 꽃대를 밀어올린 민들레가 그리 고운 것도 처음 느꼈습니다. 꽃만 예쁘면 말도 않겠습니다. 꽃 진 자리를 환히 밝힌 둥근 달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최해숙의 <봄날>에서
여기에서 작중화자가 담담히 뇌까리듯 기술해 가는 상대는 누구일까. 독자는 작가가 글 속에 깊이 ‘봄날’을 숨겨놓았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가슴 속에 새기고 있는 사랑의 상대는 바로 ‘봄날’이거나 그 같은 존재를 모두 일컫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가로놓여 있음을 직감한다. 마음에 동요가 일면 우주 자연의 존재도 애인이 될 수 있다.
서숙의 <군인과 소설가>와 임형묵의 <밥>
서숙의 <군인과 소설가>는 격변기를 살아낸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군인과 소설가는 한 사람이다. 바로 작가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배를 곯지 않기 위해 군에 자원한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밥’으로 인하여 삶의 길이 결정된 것이다. 비록 젊은 날의 꿈은 소설가였어도 눈앞의 배곯음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작가는 한국동란이라는 시대적 비극이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삶의 돌파구가 되었다고 기술한다. 척박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만약에 전쟁이 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는 군인이 될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참전으로 아버지는 척박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전쟁이라는 시대의 비극이 아버지에게 삶의 돌파구를 열어 주었다는 것, 이것이 아버지 생의 첫 번째 아이러니다.
재산을 산판 사업으로 탕진한 부친과 열 명의 형제들 가운데 강원도 대관령 골짜기, 첩첩산골에서 어린 그는 늘 배가 고팠다. 군대에 가면 흰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에 이끌려 20살의 청년은 단짝 친구와 어울려 군에 자원했다. 9․ 28수복 시 그의 부대는 함경도로 갔고 1․ 4후퇴에 간호군의 신분으로 부대원을 따라 남하한 여자와 만났다. 남남북녀는 아들을 얻고 나서 결혼식을 치렀다.
-서숙의 <군인과 소설가>에서
아버지는 철저한 군인이다. 5․16군부 쿠데타 때 소위로서 말단의 자리를 차지해서 이 인연으로 여생을 살아간다. 쿠데타 세력에 연을 대고 종횡무진으로 활략한다. 경제적 토대도 마련하고,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도 적극 가담하여 실리도 챙긴다. 당연히 집권자에 충성했고, 그를 추종했다.
비위와 넉살이 좋은 아버지는 그 특유의 언변으로 남 앞에 서기를 즐겨했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에 잘 적응했고, 학벌도 대학원까지 갖췄다. 아버지의 자그마한 권력은 종횡문진이다. 전쟁통에 부역한 친척들을 구해주고, 병사한 군인도 근무 중 사망으로 처리해 가족들이 연금 혜택을 보게 하고, 오발사고를 낸 순경도 무마해 주고, 주위 청년들의 징집을 면하게 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에게는 그런 배려를 하지 않고 단호하다. 군에 아니 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아내의 서운해 하는 질타의 소리도 많이 듣는다. 이렇게 냉정해도 가족사랑은 지극하다. 밖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면 으레 식구들을 데리고 가서 맛을 보인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직 음식으로 통한다. 어려서 배곯음을 견뎌낸 까닭이다.
여기서 작가의 아버지는 한 인간에 멈추지 않는다. 격변기를 살아낸 그 세대들의 아픈 삶의 흔적이다. 밥 때문에 군인이 되고, 쿠데타에 동참하여 권력을 얻고, 그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부를 누리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배려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사람.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가족적이라서 자식들에게 공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후대인들은 연민의 정을 느끼며 고개를 숙인다. 작가는 한 시대의 특성을 꿰뚫어 사회를 읽어내고 있다. 아버지 삶의 궤적을 그려줌으로써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의 정체성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본질을 찾아 독자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임형묵의 <밥>에서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의 구비사항이 ‘밥’임을 내걸고 있다. 앞의 글에서 군에 입대하게 된 동기가 ‘배곯음’이었듯이 이 글에서도 밥은 인간의 생명과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서 출발한다. 사람의 삶은 모든 것이 ‘밥’에 연이 닿아 있다는 사고이다. 임형묵 작가는 <밥>이란 글에서 맨 먼저 떠올린 글감이 ‘배곯음’이다. 그리고 이어서 할머니의 사랑을 추억하고, 밥을 대신한 백설기와 개떡을 떠올린다. 그리고 밥과 연결된 여러 경구나 말씀을 내보이면서, 인간관계의 척도가 되는 밥 약속도 제시한다.
삼시 세끼 밥을 먹으면 ‘삼식이’요, ‘겁 없는 남편’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의 나이를 10년 단위로 나누고는 풍자와 해학을 들먹거린다. 여하튼 사람들의 입에서 밥이 빠지지 않는 것은 밥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밥을 위해 존재한다고나 할까. 밥 앞에 평등 없고 밥 앞에 체면 없다. 밥의 무게에 따라 추가 기울고 밥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쏠린다. 밥의 힘으로 밥을 얻지만 밥을 위해 투쟁한다. 밥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 -임형묵의 <밥>에서
인간과 밥의 긴밀한 관계를 주장하던 작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사랑에도 이 밥이 해결되지 않으면 깊어질 수 없고, 이내 무너진다는 생각을 펴고 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밥’은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인 것이다. 모든 것의 시발점은 이 밥이다. 이 밥은 음식을 총칭한다고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밥이 가지고 있는 힘을 ‘돈’에 연결한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상세히 제시한다. 욕망의 상징은 공통점이고, 돈이 경직되었음에 반해 밥은 유연하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이 글은 좀 산만하여 주제의 전달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나친 글감의 과다 선택이 끝내 수필쓰기에 장애가 된 듯하다. 글감을 좀 줄이고, 발칙한 해석을 통한 확실한 주제 설정이 이루어진 뒤 집필에 들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수필세계》에 게재된 수필에서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힘은 어떤 것인지, 또 사소한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얻은 결론은 큰 사건보다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여 지배해 나간다는 사실을 검증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문학적 형상화를 위해 작가가 노력한 흔적도 찾아보았다. 창작의 수고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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