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정지상이 소년시절에 지은 것으로 전하는데, 일찍이 대동강 부벽루에 걸려 이를 본 중국 사신들까지도 모두
극찬했다고 합니다. 고려의 문인 이인로 (李仁老)는 그가 펴낸 파한집(破閑集)에 수록하고 극찬하였으며, 조선 초기
서거정(徐居正)의 시선집 동문선(東文選)에도 소개되었습니다. 조선의 대문장가 김만중(金萬重) 역시 그의 문집인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이 시를 唐나라 자연파 시인 왕유(王維)의 작품에 견주어 해동의 위성삼첩(渭城三疊, 王維의 시
送元二使安西)이라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음.
그는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부근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출생년도 미상이나 김부식과 거의 동년배?),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노(盧)씨 슬하에서 성장합니다. 어려서 부터 워낙 文才가 뛰어나 이미 5세에 '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누가 흰 붓을 가지고 강물 파도위에 乙 자를 썼을까)' 란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네요. 자라면서 시뿐만 아니라 글씨, 그림(詩書畵)에도 능했으며, 역학(易學), 불교, 노장(老莊)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도 입문하게 되는데, 인종(仁宗, 고려 17대)의 외조부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권신 척준경의 국정농단을 탄핵하여 유배시킴으로서 권력의 상층부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후 정치쇄신과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묘청 등과 뜻을 같이 함으로서, 개경 잔류를 주장하는 김부식 등 보수 기득권 세력과 번번히 부딪치게 됩니다.
대문장가이며 權臣인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김부식 초상화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속객부도처 등임의사처) 속세의 객이 닿지 않는 곳(절)에 오르니 마음이 맑아지네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산형추갱호 산색야유명) 산 모양 가을 되니 더욱 좋고, 강 빛은 밤에 오히려 밝구나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백조고비진 고범독거경)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 홀로 가벼히 떠가네
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자참와각상 반세멱공명)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위에서 반생을 功名을 찾아다녔으니
*말년에 松都 감로사에서 혜소라는 스님과 교유하며 쓴 시(甘露寺次惠素韻)로 완숙한 연륜이 느껴지는 절창이지요.
다만, 3구가 당나라 이백의 敬亭山 이란 시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뭇새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구름 홀로
한가로히 떠가네)를 빌렸다 하여 말이 없지 않으나, 그 정도를 표절이라 하기는 좀 뭐하네요.
*蝸角 : 蝸角之爭, 즉 달팽이 뿔위에서 다툼이라 뜻. 莊子에 나오는 말로,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혜왕(魏惠王)이
제(齊)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하자 대진인(戴晉人)이라는 현인이 전쟁의 무모함을 달팽이 뿔위에서 다툼에 비유.
김부식은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역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4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합니다. 비록 일찍 사별했지만, 그의 부친이 송나라의 소동파(본명 蘇軾) 처럼 대문장가가 되라고 軾 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 주고 그 아우의 이름도 소동파의 동생인 소철(蘇轍, 唐宋 8대가)에서 따와 부철(富轍)이란 이름을 줍니다. 그는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여 대문장가가 되고, 더욱이 소동파도 이루지 못한 권신(權臣)이 되어 죽을 때까지, 아니 자식(金敦中) 대까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지요.
김부식과 정지상의 알력
김부식은 유학을 숭상하고 모화(慕華)사상이 깊은 보수파이고, 정지상은 오히려 노장사상에 경도되고 고토수복을 주장하는 개혁파이니 사사건건 부딪치게 됩니다. 더욱이 두사람은 일찍이 文名이 높아 詩에 대한 경쟁심도 남달랐다 합니다. 관직을 비롯한 거의 모든 면에서 앞선다고 자부하는 김부식도 詩에서 만은 정지상에게 주늑이 들어 있었지요. 한번은 정지상이 쓴 琳宮梵語罷 天色浮瑠璃(절간에 독경 소리 끝나니, 하늘빛 유리처럼 맑아지네)을 보고 탐이 나서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해 앙심을 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지상, 묘청의 난으로 엮여 피살
우유부단했던 인종(仁宗)이 개혁과 서경천도를 받아드리는 듯하다가, 김부식 등이 주장하는 개경 잔류에 다시 기울게 됩니다. 이에 절망한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는데, 그 배경과 난의 발발 그리고 진압되기 까지의 상세한 내용은 여기에 담기엔 너무 길고, 또한 아는 것도 별로 없기에 생략키로 합니다. 다만, 묘청과 같은 생각을 품었다 하더라도 함께 난을 일으킨 것도 아닌데, 개경에 머무르고 있던 정지상을 왕의 재가도 없이 살해한 건 다분히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자행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 뒤 사람들 사이에 억울하게 죽은 정지상을 동정하는 야화가 널리 퍼져 있음이 이를 잘 대변한다 할 수 있습니다.
이규보의 설화소설에도 등장
고려 최고의 글쟁이로 무신정권 시절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백운소설'에는 당시 저잣거리에서 회자되던 다소 황당한 두 정적 간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화창한 봄날 김부식이 문득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버들빛 천가닥 푸르고, 복사꽃 만송이 붉도다)' 라는 시구를 떠올리고 흐믓해 하였는데, 밤에 죽은 정지상이 나타나서 느닷없이 김부식의 뺨을 치면서, "네가 천가닥 만송이인지 세어 봤어?" 하더라나요. 그리고는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버들빛 가닥마다 푸르고, 복사꽃 송이송이 붉도다)이라 고쳐주었다고..
김부식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황당합니다. 그가 어느 절엔가 갔다가 해우소에 들렀는데, 정지상의 귀신이 김부식의 불알을 꽉 잡고는 묻길,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얼굴이 붉으냐?" 하니, "건너편 산 언덕 단풍이 얼굴에 비쳐서 붉다." 하였다나.. 이어서 불알을 당기면서, "이게 무슨 가죽 주머니냐?" 며 힘주어 잡아당겨 마침내 변소에서 죽게 되었다는 야그입니다.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이규보라는 글쟁이 손에 들어가 재미난 소설로 탈바꿈한 게지요.
김부식은 대문장가며 큰 정치가였지만
적어도 3가지 정도는 역사에 큰 죄를 지었다 사료됩니다. 첫째, 죽이지 말아야 할 대시인 정지상을 무단히 살해했다는 것. 그리고 三國史記를 저술하면서 멸실되어 사라지는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챤스에 지나친 사대주의적인 입장과 신라 편향(그는 신라의 후손)으로 썼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들(金敦中, ?~1170)의 버릇을 잘못 들이고 권력까지 세습함으로써, 아버지 벌의 무신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는 방자함으로 무신의 난을 촉발시켜 공포의 '백년 무신정권' 시대로 뒷걸음한 책임을 함께 져야 할 것입니다(필자 생각).
마지막으로 서정이 깃든 정지상의 절창 한 수(送人) 붙이면서..
庭前一葉落(정전일엽락) 뜰앞에 하나 남은 낙엽마져 떨어지고,
床下百蟲悲(상하백충비) 침상 밑엔 수많은 벌레소리 슬프도다.
忽忽不可止(홀홀불가지) 떠나는 임 붙잡을 수 없으니
悠悠何所之(유유하소지) 아득히 어드메로 가시는지
片心山盡處(편심산진처) 마음은 그대 떠나간 산 끝자락에
孤夢月明時(고몽월명시) 달은 밝은데 외로운 꿈만이
南浦春波綠(남포춘파록) 남포에 봄 물결 푸르거든
君休負後期(군휴부후기) 그대 오신다는 기약 잊지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