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신앙고백비
돌에 새겨진 신앙고백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1
관련 옥산성당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산현2길 30-14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靑里面 三槐里)와 그 부근의 내서면과 공성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청리면 덕산리(德山里)의 서산 중턱에는 신자들을 처형한 ‘화형바위’도 있다.
이곳의 석단산(石壇山)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고백비(信仰告白碑)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에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고백비가 서 있는 삼괴 2리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金海) 김씨 집안 김복운(金福云)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 중 차남인 삼록(三錄, 도미니코, 1843-1935년)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참혹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86년 프랑스와의 한불수호통상조약(韓佛修好通商條約)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김삼록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직접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높이 127cm, 폭 39cm, 두께 22cm의 화강암에 전통적인 직사각형의 비석 몸체와 십자형을 하나의 돌로 깎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갓을 얹어 신앙고백비를 건립한 것이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상단의 십자형 안에 천주(天主)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비석 부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신앙고백비의 비문(碑文)과 해제(解題)는 다음과 같다.
天主聖敎會 聖號十字嘉 천주 성교회 성호 십자가 (十字嘉는 十字架의 오자)
第一 天主恐衛咸 첫째는 천주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모신다.
第二 敎化皇衛咸 둘째는 교황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三 主敎衛咸 셋째는 주교님을 받들어 모신다.
第四 神夫衛咸 넷째는 신부님을 받들어 모신다. (神夫는 神父의 오자)
第五 敎于衛咸 다섯째는 신자들(교우)을 받들어 모신다. (敎于는 敎友의 오자)
奉敎人 金道明告 (천주)교인 김 도명고(도미니코) 제작
癸卯生本(古)盆城(今 · 金海) 계묘년(1843)에 출생, 본관은 분성(김해) 金氏이다.
비록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서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을 이렇듯 담대하게 고백했다는 점에서 신앙고백비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신앙고백비가 교회 사적(史蹟)으로 공식적으로 고증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었다. 김삼록은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敎難)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