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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옛길 인문학적 고찰 세미나 자료집(2024.11.15)
철원 용양보· 정연리 금강산 철도· 두루미평화타운·평화전망대·소이산 전망대 탐방 1편에 이어 계속(사진과 기사, 칼럼)
<한겨레> 창간 35주년, 정전협정 70주년 기념 DMZ 생태평화기행을 다녀온 뒤, 강창광 선임 사진기자가 제일 먼저 금강산 철교위에서 참가자들이 손을 흔들고 있는 사진을 기사로 올렸다. 이어 김영희 편집인과 권혁철 통일외교팀장이 칼럼을 실었다. 이를 덧붙이며 이번 탐방 참가자들의 이모 저모를 이용필 선생의 동영상으로 본다. 이병호.
끊어진 90킬로, 금강산철교에서 [김영희 칼럼] : 칼럼 : 오피니언 : 뉴스 : 한겨레 (hani.co.kr)
금강산철교 위를 걷다보니, 당시 침목으로 이어진 짧은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998년부터 10년간 이어졌다가 기약없이 중단된 금강산 관광을 수십년 전엔 전차로 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아득하게 다가왔다... 평화를 이상주의라고 조롱하는 자들이야말로 전쟁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공상주의자일지 모른다.
6·25전쟁 전 철원~금강산 구간을 달리던 금강산전철이 지나던 철도교량이 15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정연리 마을에 앙상하게 남아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김영희ㅣ편집인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키로’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마을 정연리에는 이런 글귀가 쓰인 녹슨 빛의 금강산철교가 있다.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지만, 1931년 철원역에서 내금강역까지 개통했던 금강산선은 노면전차를 제외한 한반도 최초의 전철노선이었다. 총연장 116.6㎞ 구간을 하루 8회 운행했는데, 험준한 산골짜기를 통과하는 탓에 속도는 시속 30㎞도 안 돼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4시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시 쌀 한가마 값에 맞먹는 7원56전을 내고 타겠다는 사람들이 줄이어, 1936년엔 15만4천여명이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난 15일 한겨레가 창간 35년 ‘삼삼오오’ 기획 일환으로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마련한 1박2일 ‘DMZ(비무장지대) 생태평화기행’에 주주·독자·후원회원과 함께했다. 금강산철교를 걸으면, 당시 침목으로 이어진 짧은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1998년부터 10년간 이어졌다가 기약 없이 중단된 금강산 관광을 수십년 전엔 전차로 다녔다는 사실이 새삼 아득하게 느껴졌다. ‘힘에 의한 평화’만이 거론되며 전쟁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지금 현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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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철교 끝에 철로가 무성한 덤불 앞에 끊겨 있다. 김영희 기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체결 뒤 70년, 위태롭지만 전면전 없이 이어진 ‘차가운 평화’에 대부분은 익숙해졌다. 외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 중 하나로 대거 파괴됐던 철원군 비무장지대 일대와 민통선 마을에 가서야 그 70년이 계속 진행 중임을 깨닫게 된다.
민통선 안 철원평화전망대에 오르면 수풀 무성한 비무장지대가 바로 코앞이다. 곧 겨울을 나러 찾아올 기러기, 두루미들이 자유로이 철책을 넘나들고, 멸종위기종 44종을 비롯해 2710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가 냉전의 산물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재학생 2600여명으로 전쟁 전까지 전국에서 4번째 규모였다는 철원공립보통학교 터는 곳곳의 지뢰 때문에 고랭이나 부들이 자라는 너른 습지로 남아있다. 비무장지대 일원에 남북이 매설한 지뢰를 제거하는 데 480여년이 걸린다는 추정은 실현 가능한 일일지조차 까마득하다.
이번 기행엔 서울, 인천, 용인, 세종, 광주, 전주, 춘천 등에서 온 15살 중학생부터 80대 어르신들까지 30여명이 함께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겨레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이들이 많았다. 토요일 배달이 안 되는 지역이니 금요일치에 섹션을 만들어 주말에 남겨 읽게 해달라는 의견, 기사가 너무 어렵고 기계적 중립으로 느껴진다는 의견 등도 대화 자리에서 쏟아졌다. 한겨레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만큼이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 또한 짙게 토로했다. 예비역 육군 대위로 평화 관련 글쓰기를 하는 30대 참여자는 “전쟁을 신화처럼 이야기하고 신앙시하는 보수담론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며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 모두 보수정권에서 일어났는데 늘 화살이 되돌아오는 데는 한겨레 같은 진보언론이나 진보진영이 희생당한 젊은이들의 아픔을 제대로 껴안고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한겨레의 ’DMZ 생태평화기행’ 참가자들이 지난 15일 강원 철원군 김화읍 생창리 DMZ 생태평화공원 용양보(자연 습지형 호수)를 살펴보고 있다. 보 한가운데에 전쟁 후 DMZ 경계근무를 섰던 병사들이 오가던 출렁다리는 세월의 풍상에 낡아 지지대가 되는 철선만이 앙상하게 남아 가마우지 등 새들이 찾아오는 쉼터가 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전쟁과 군사적 긴장에 가장 먼저 젊은이들이 스러져가는 것은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 희생자가 집중된 건 협상이 시작된 1951년 7월쯤부터 협정 체결 때까지 2년간 벌어졌던 철원 등 중동부 일대 고지전이었다. 극심한 폭격으로 산이 아이스크림 녹듯 보였다고 외신 기자가 ‘아이스크림고지’라 이름 붙인 219m 높이 삽슬봉에선 수만명이 죽었다. 열흘간 고지 주인이 24차례 바뀌었던 백마고지에서도 국군 3500명, 중국군 1만명이 사망했다. 서로 양보를 전제로 해야 하는 대화 대신 2년간 ‘전쟁’처럼 협상을 끄는 동안, 고지전은 양쪽의 정치적 수단이 돼 승패 없는 전투를 처절히 반복해야 했다.
북핵 위기로 전쟁 위기가 고조된 1994년, 미국이 세운 영변핵시설 선제공격 계획은 전면전으로 번질 경우 발생할 사망자 추정치 앞에서 멈춰섰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후 자신이 공격을 만류했다고 주장했는데, 미국이 한국에 미리 상의하지 않았던 데 대한 대응으로 ‘한국군은 절대 협조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북한의 ‘불바다’ 발언에 맞선 강력한 대응 발언으로 긴장을 높였던 김 대통령이 위기의 순간 다른 모습을 보인 건, 이념과 관계없이 그가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대통령으로선 처음 인천상륙작전 전승 기념식에 참석해 “공산전체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자유세계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이라면 그 뒤에 가려진 처절한 고지전의 교훈을 먼저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철원에서 돌아오는 길, 평화를 이상주의라고 조롱하는 자들이야말로 전쟁이라는 현실을 외면하는 공상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편집인 dora@hani.co.kr
16일 강원도 철원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군 초소.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산한 평화’와 아이스크림 : 칼럼 : 오피니언 : 뉴스 : 한겨레 (hani.co.kr)
‘한산한 평화’와 아이스크림
[한겨레 프리즘]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굴종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한산한 평화로운 상황이 평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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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강원도 철원군 소이산 정상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논 위쪽 숲이 비무장지대이고 숲 근처 산들이 한국전쟁 때 고지전이 벌어진 곳이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한겨레 프리즘] 권혁철 | 통일외교팀장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굴종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한산한 평화로운 상황이 평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 19일(현지시각) 유엔(UN) 총회가 열리는 미국 뉴욕 프레스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전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진보 정부에서 안보 성적도 월등히 좋았다’고 발언한 데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그는 “압도적으로 힘에 의해서 상대방의 기만과 의지에 관계없이 구축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자, 며칠 전 갔던 아이스크림 고지가 떠올랐다. 나는 지난 15~16일 한겨레가 창간 35년 ‘삼삼오오’ 기획의 하나로 한겨레통일문화재단과 함께 마련한 1박2일 ‘DMZ(비무장지대) 생태평화기행’에 참가해 주주·독자·후원회원과 함께 강원도 철원 지역을 다녀왔다.
철원 민간인 출입통제선을 지나 남방한계선을 향해 올라가면 해발 219m 얕은 산인 아이스크림 고지가 보인다. 이 산은 원래 이름이 삽슬봉인데 아이스크림 고지로 더 유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엄청난 포격으로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는데 이를 목격한 외신기자가 아이스크림 고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나는 ‘아이스크림 고지’는 외신기자가 한국전쟁에서 죽고 다칠 일이 없는 자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별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산의 흙과 나무가 녹아내릴 정도로 폭격이 이뤄졌는데, 이곳에서 싸웠던 군인들의 몸은 온전했을까. 실제 이 지역에서만 4만~5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70여년 전 녹아내린 것은 산뿐만 아니라 젊은이의 살과 뼈였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 언론 기자라면 차마 아이스크림 고지란 ‘한산한 이름’을 붙이진 못했을 것이다.
아이스크림 고지뿐만 아니라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전쟁 휴전회담을 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에서는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다. 저격능선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와 함께 대표적 고지전이다.
저격능선은 철원 오성산 남쪽에서 남대천 부근인 김화 지역을 향해 뻗어 내린 돌출 능선이다. 이곳에서 1952년 10월14일부터 11월24일까지 국군과 중공군이 손실을 돌보지 않고 오직 ‘목표’를 탈취하기 위해 소모전을 감행했다. 42일 동안 ‘가랑잎처럼 쌓인 시체를 밟고…’(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비문) 혈전에 혈전이 벌어졌고, 2만~3만7천명의 젊은이들이 죽고 다쳤다. 저격능선은 규모가 작아서 능선 위에서 소대단위 기동만이 가능할 정도로 좁은 지역이다. 1㎢ 땅을 차지하기 위해 양쪽 군인들이 밀집대형으로 한꺼번에 희생된 것은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왜 한국전쟁 때 참혹한 고지전을 멈출 수 없었을까? “이 기간 벌어진 고지쟁탈전은 휴전협상 난국을 타개하는 수단으로 이용됐고, 양쪽은 군사적 승리보다는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하는 수단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공방전을 감행했다. 고지 하나를 탈취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는 기형적인 고지쟁탈전이 전장을 지배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70여년 전 고지전이 정치적 수단으로 되면서, 누군가의 귀한 아들과 남편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남북관계를 이기고 지기를 거듭한 고지전의 잣대로 보면 “겉으로 보이는 한산한 평화로운 상황이 평화는 아니다”란 대통령실 관계자의 스산한 말이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달 중순 철원 비무장지대 근처에는 ‘雖死不敗’(수사불패: 비록 죽을지언정 패배는 없다)란 구호판 옆에서 장병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기성세대가 이들에게 수사불패를 요구하기 전에, 더 이상 젊은이들이 휴전선을 지키다 피를 흘리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원 기행 뒤 ‘힘에 의한 평화가 진정한 평화’란 대통령실 관계자의 말을 듣고,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을 다룬 ‘카탈로니아(카탈루냐) 찬가’에 쓴 글이 생각났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 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nura@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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