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姜世晃, 1713 - 1791)은 1772년(영조48) 61세의 늦은 나이에 영릉 참봉으로 관직에 오른 후 1783년 (정조7) 72세에 한성판윤에 오른 사람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꼽히는 강세황은 서울 남부 명철방 남소동(현 장충동)에서 태어났으며 만년에는 남산아래 회현동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과거 볼 나이에 잇달아 부모상을 당하고 형이 귀양가는 등 가정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과거보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초야에 묻혀 살다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영조의 배려로 1773년 61세의 늙은 나이에 처음으로 영릉 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김홍도(金弘道), 신위(申緯) 등 당대의 화가들을 가르쳤으며, 창작과 이론을 겸비한 사대부 서화계의 대가였다. 특히 명나라 화풍인 남종문인화가 조선 후기 화단의 주도 화풍으로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진경산수화의 발전과 풍속화의 유행 및 새로운 서양 화풍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예는 행서에 능했고, 그림은 산수와 화훼를 동등한 소재로 다루었으며, 만년에는 진경산수화와 묵죽을 즐겨 그렸다.
30대에는 이미 사선이나 대각선 구도에 의한 공간감의 효율적인 표현과 남종문인풍의 담백한 수묵과 담채의 사용을 통해 개성을 확립했으며, 40대에는 보다 사실적이고 생략적인 처리와 독특한 입체감 표현으로 감각적인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5 -60대의 절필기간에는 주로 평론 활동에 치중했으며, 70대에는 다시 창작활동을 재개하여 소박하고 담담한 소묘풍의 진경 산수와 더불어 채색이 배제된 수묵 위주의 격조 높은 문인화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강세황의 서화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청나라 북경에 까지 그의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본인 스스로 왕희지(王羲之)의 글씨, 고개지(顧愷之)의 그림, 두보(杜甫)의 시를 겸했다고 자부할 만큼 그림, 시, 서예에 뛰어났다.
조선시대 서울시장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류시원, 1997년, (주) 한국문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