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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李建昌) 선생,「망미헌기(望美軒記)」,『명미당집(明美堂集)』,卷十一︰
2024년 7월 21일
안녕하세요^ ^
보성군민께서 고향에 있는 망미헌(望美軒)에 관한 글을 보시고 말씀하시기에 번역하여 보내드립니다.
이건창 선생께서 보성군에서 지내시는 동안에 많은 분을 만나셔서 의견을 나누시고 또 젊은이들을 이끌어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이병일(李秉馹,1876-1928) 선생 집안사람들과도 사귀시고 젊은 이병일 선생을 가르쳐주셨답니다. 이병일 선생은 뒤에 일본에 유학하셨고 해방된 뒤에는 정치 1번지 종로구에서 제헌국회 의원을 지내시면서 국가발전에 공헌하셨습니다.
망미헌은 망미산 아래에 사시는 임씨(林氏) 집안에 있었고 이건창 선생께서 머무시면서 이름을 짓고 기록하셨습니다. 현재 임씨(林氏) 집안을 찾아보면 어느 분이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선녀가 망미산에 내려왔다는 전설을 비롯하여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 연기를 하늘에 올리는 제사(柴) 또는 멀리서 산천(山川)과 많은 신께 제사(望)를 지냈다는 뜻(『尙書、舜典』:望於山川,遍於群神)을 보면 아마도 옛날에 어떤 부족국가의 군장이 하늘과 산천에 제사(望)를 올렸던 곳 같습니다. 다만 이건창 선생은 망미산 전설보다는 유가의 정치사상을 얹어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건창 선생은 장자의 말처럼 귀양살이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하거나 또는 굴원의 『이소(離騷)』에서 미인(美人 : 月 또는 군주) 뜻을 빌려 임금을 그리워하기보다는 “신하가 귀양살이하는 먼 곳에서도 임금님을 바로 이끌고 백성을 아끼겠다.”는 신하의 올바른 태도와 의지를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유가 입장에서 유배 관원의 올바른 태도를 밝혔습니다.
소식(蘇軾, 1078-1085)은 신종 황제가 왕안석에게 신법 개혁을 맡기고 실행하였던 시기에 반대하여 모든 출로가 막혔습니다. 그의 아우 소철(蘇轍, 1039-1112)은 처음에는 신법 개혁에 동참하였다가 곧바로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소식은 죽는 날까지도 아우 소철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소식은 원풍(元豐) 2년(1079)에는 조정을 비방하였다(謗訕朝廷)는 사건(烏台詩案)에 말려들어 감옥에 갇혀 죽을 고생을 겪고 12월에 석방되어 황주(黃州)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고 행정업무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소식은 원풍 5년(1082) 7월 16일과 10월 15일 2번이나 적벽에 배 타고 놀러갔고 적벽부 2편을 지었습니다. 이 시기에 소식은 인생에서 가장 답답한 시절을 보냈기에 「적벽부」에 답답한 심정이 많이 담겼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희녕 2년(1069)부터 실행한 신법 개혁을 총결산하는 서하 전쟁에서 패전하자 원풍 8년(1085) 2월 신종 황제가 화병이 나서 죽고 철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철종이 즉위한 뒤에는 사마광과 함께 소식이 신법을 철회하는 구법당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소식은 「적벽부(赤壁賦)」에서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를 인용하면서도 오히려 장자 말처럼 태연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다시 말해 소식은 「적벽부」에서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은 각기 스스로 주인이며 나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1/1000조차 탈취하여서는 안됩니다. 양자강 강물에 부는 시원한 바람 소리를 귀로 듣고 산 위에 떠오르는 밝은 달을 눈으로 보는데 아무리 듣고 보더라도 누가 막지 않으며 듣고 보더라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조물주가 주신 무한한 것이며 나와 당신이 함께 즐기고 있습니다. (夫天地之間,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雖一毫而莫取。惟江上之清風,與山間之明月,耳得之而為聲,目遇之而成色,取之無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適。)”라고 읊어서 오히려 장자 말처럼 “어쩔 수 없던 상황을 알고 운명처럼 받아들여 마음을 평안하게 유지하여야 하며 이것이 마음의 지극한 경지입니다.(知其无可奈何而安之若命,德之至也)” 같은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사실상 소식은 「적벽부」 이 구절에서도 신종 황제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의 목표가 서하 침략이라는 욕심과 야망이 너무 크다는 것을 우회 비판한 뜻도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창 선생은 유가 정치사상 입장에서 소식의 억지 태연한 태도까지도 비판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은 조선시기에 좌천되거나 귀양살이하던 수많은 관원과는 달랐습니다. 첫째, 그들은 굴원이 『이소(離騷)』에서 군주를 달(月)처럼 그리운 미인(美人)이라고 읊었던 글을 인용하여 권력에서 멀어지고 쫓겨나서도 다시 권력을 얻으려고 임금께 구차하고 애절한 노래를 많이 지어 올렸답니다. 둘째, 귀양살이하면서도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처럼 또는 장자(莊子)의 말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이 겉으로는 태연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건창 선생은 유가의 적극적인 정치사상에 따라 임금님을 올바르게 이끌고 백성을 아끼겠다는 의지를 특별히 나타내셨고 위의 두 가지 태도를 비판하였습니다.
전주 이씨 덕천군파 가운데 이경직(李景稷, 1577-1640), 이광사(李匡師, 1705-1777), 이충익(李忠翊, 1744-1816),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이건방(李建芳, 1861-1939) 등 몇 분이 호남지역의 훌륭하신 분들과 교류하셨다고 합니다. 이건창 이건방 두 선생과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의 교류는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특히 호남지역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스님을 비롯하여 후사(後嗣) 스님들과 깊이 교류하셨다고 전해옵니다. 서울에 살면서(京華士人) 호남지역 지식인들과 서로 평등하고 우호적으로 교류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이광사 선생께서 신지도에서 지내시면서 일반 농민들과도 가깝게 지내신 것이 대표적입니다. 다시 말해 교류에는 서울과 지방이라는 차별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원문 가운데 글자 2자가 옳지 않아 바로잡았습니다.
東南隅其山曰望美⇒東南隅有山曰望美
若葉公所謂“無可奈何而安之”之說⇒若 莊公(莊子)所謂“無可奈何而安之”之說
보성군 군민으로서 고향에 관심을 가지시고 용기를 내주셔서 감동하였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이경룡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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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李建昌),「망미헌기(望美軒記)」,『명미당집(明美堂集)』,卷十一︰
보성군 치소(治所)의 옛날 성곽 동남쪽에 있는 산을 망미산(望美山)이라고 부르는데 산봉우리는 풍화되어 두루뭉술하고 아주 높지는 않다. (산에는) 소나무 대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숲이 그늘을 지니 귀엽도록 좋다. 보성군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전설에는 하늘에서 선녀가 이 산에 내려왔기에 산을 망미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 아래에는 개천을 연지(臙脂), 연못을 주렴(珠簾)이라고 부르는데 모두 선녀가 내려왔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내가 전설을 생각해보니 “아름답다(美)”는 뜻은 선녀가 내려왔으니 그럴듯한데 “바라본다(望)”는 뜻은 무슨 뜻일까? 아마도 조정에서 쫓겨난 관원이 마치 북송시기 소식(蘇軾,1037-1101,字子瞻)처럼 이 산에 왔다가 둘러보고 임금님이 계신 북쪽을 한없이 바라보았고 그래서 “바라본다(望)”는 이름을 넣었을 것인지도 모른다. 소식은 황주(黃州)로 좌천되었는데 북송 수도 변경(汴京)에서는 멀리 떨어졌으나 황주는 한수(漢水)가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하구(夏口, 현재 호북성 武漢市)와 무창(호북성 武昌)이 양자강을 남북으로 두고 있는 두 지역의 산천이 서로 엮어있는 곳이다.(황주는 한수가 양자강으로 흘러드는 하구와 무한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졌으며 「적벽부」에서는 “西望夏口,東望武昌,山川相繆”이라고 표현함.) 그런데 보성은 호남지역에서도 남쪽 끝에 있고 망미산 남쪽은 큰 바다가 수평선에 닿았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크게 출렁거리기에 소식이 「적벽부(赤壁賦)」에서 읊었던 “하늘 한쪽 끝에서(天一方)”라는 노래 가사에 어울리고 또 “답답한 내 마음(渺渺兮余懷)”이라는 노래 가사에도 더욱 어울린다.
내가 전에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은 하늘의 가족이기에(天屬 : 『莊子、山木』:“林回曰:‘彼以利合,此以天屬也。’”) 하늘의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 하늘이 내려주신 은혜와 사랑(恩愛)은 태어날 때부터 받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가까운 남녀 사이에도 부부끼리 구별이 있고 가까운 군신 사이에도 존비 계급이 있다. 어쩌다가 남녀의 부부 관계도 남처럼 벌어지고 군신의 존비 관계도 멀어진다. 남녀도 이별하였다가 다시 합하고 싶고 군신도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데, 벌어지고 멀어지는 현상은 사람 사이에서는 없을 수 없으나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것은 사람들 모두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과정에는 의리(義理)를 따라야 하는데 가까워지고 싶은 것을 감정(情)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남녀 또는 군신이 서로 애모하는 생각이 지나쳐서 어수선하게 슬프고 가슴 아파하거나 끈질기게 매달리면서 왜 멀어졌는지 왜 가까워지고 싶은지 까닭을 모르면 죽을 때까지도 의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여 예의를 지키고 마음을 정직하게 하여 절개를 지키면서 절대로 아첨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자신이 지키려는 뜻(屈原,「離騷」︰“長太息以掩涕兮,哀民生之多艱군주를 옳게 이끌고 백성을 아끼겠다는 뜻)은 슬퍼서 매달리는 감정보다 더욱 잘 나타날 것이다. 불행히 군주에서 멀어져서 남들의 수모를 받거나 남들의 비난과 음해를 받더라도 심지어 가족이 흩어지고 어렵게 지내더라도 더욱 단정한 예의와 정직한 절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과 다르게(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되어 장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知其无可奈何而安之若命,德之至也)는 이야기를 모방하여 행동하는 것도 헛된 명예와 들뜬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유가의 큰 윤리를 잘 지키겠다는 원칙은 고칠 수 없다.
임금님은 아주 커다란 궁궐에서 빛나는 옷을 입고 당당하신 분인데 신하가 감히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분(美人)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하늘처럼 높고 아버지처럼 엄격하신 임금님을 잠깐 잊고 일반사회 남녀의 노래 가사를 빌어 군신 관계에 빗대어 임금님을 미인(美人)이라고 지칭하다니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다! 대체로 임금님을 깊이 애모하면 말과 글 또 목소리와 얼굴에 나타나며 반드시 이런 마음 상태에서 애모하는 감정이 잘 나타난다. 다시 말해 굴원의 『이소(離騷)』 작품이 『시경(詩經)』을 이을 만큼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까닭이며 사마천이 『사기 굴원 열전』에서 ”굴원의 뜻(格君哀民)을 추측해보면 뜻의 밝음은 해와 달에 견줄 수 있다.(『史記,屈原、賈生列傳』︰“推此志也,雖與日月爭光可也。)”고 높이 평가하였다. 소식이 「적벽부(赤壁賦)」에서 군주를 애모하는 마음도 굴원과 같다. 이렇지 못하다면 신하로서 아침저녁으로 임금님 곁에 있더라도 임금님을 애모하는 마음은 오히려 드물다. 그러면서도 소식 「적벽부」의 글처럼 “하늘 한쪽 구석에 떨어져서 답답하다”고 말하겠는가!
내가 망미산 자락에 있는 임씨 집에 얹혀살았는데, 정자에 이름이 없기에 내가 망미산 이름에 따라 망미헌(望美軒)이라고 지었고 이름 지은 사실을 기록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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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建昌,「望美軒記」,『明美堂集』,卷十一︰
寶城郡治古城,東南隅其(有)山曰望美,嶞而不甚高。松筠楓栝之緡,隱映可愛。郡中相傳︰曾有仙女降此山,山以得名。山下有川曰臙脂,有潭曰珠簾,皆以此。
余思果如其說,卽名美可也,何云望也?乃亦有遷人逐客,如昔之蘇子瞻(蘇軾,1037-1101,字子瞻)嘗至於此山,旋而北望而不能已,因而名之歟!今不可知已。然子瞻之謫黃州,雖距汴京爲遠,猶在夏口、武昌山川相繆之間。若寶城者,湖南之窮界也,自此以外,惟大海接天,風濤滉瀁,可以謂之“天一方”矣,可以“渺渺兮余懷”矣。
嘗試論之,人有天屬,卽有天性。其恩愛鍾(彙聚)乎有生之初,無俟言也。若夫男女之間,內外截焉,臣主之際,尊卑逈焉。一日由內而托乎外,由卑而干乎尊。至別而合,至疏而密,其事爲人道之所不可無,人心之所共願欲,而其主義以爲情,乃有在乎天屬之外。其愛慕之思,芬芳悱惻,纏綿襞結,不知其所以然,而終身不能自解。雖其端莊以爲禮,正直以爲節,萬萬不肯爲側媚容悅之態,而其所以自持,乃逾見其深於情也。卽不幸或以此覯慍受侮,憂讒畏譏,以至流離困頓,而逾不能忘也。苟非其然,而强爲牽連,若葉公(莊子)所謂“無可奈何而安之”之說,則是特空名浮貌而已。安在其爲大倫而不可易也!
夫九重之居,七章之服,穆穆皇皇,何如人也!而乃敢私謂之美?忽然若忘,其如天之尊、如父之嚴,而乃以閭巷歌謠男女相悅之辭,比擬而指斥,無已褻乎!蓋其愛慕之深,發於言語文字、聲音色澤之間者,必如是然後可以曲盡其情。此屈原『離騷』之所以繼『三百篇』之作,而太史公贊之,謂與日月爭光者也。子瞻之賦,亦猶是耳。苟非其然,卽朝夕於君所,而乃心之罔不在者或鮮矣,况天一方之渺渺哉!
館于林家,在望美山之隅。其軒舊無名,余因山之名而名之,且爲記以自抒所欲言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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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영재선생께서 보성에 계실 때 머물렀던 집은 저의 중학 동창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감사합니다. 조봉익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