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분이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이
하곡학에서는 어떻게 계승되고 해석되었는지 묻는데 뭐라고 답해야하나요?
하곡회원이라고 그런걸 물어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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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애가 물었다 "지금 사람들은 단지 부친께 마땅히 효도를 해야 함을 알고 형에게는 아우노릇을 해야 함을 알지만 실제로는 효도를 다하지 못하거나 아우 노릇을 잘못하기가 일쑤입니다 이에 비춰 보면 知와 行은 분명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에 양명이 대답하였다. "이는 이미 사욕에 의해서 知와 行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知行의 본체가 아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알면서 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바로 알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성현이 사람들에게 知行을 가르친 것은 바로 그 본체(양지의 知行 본체)를 회복하게 하자는 것이었지 그대들로 하여금 그처럼 멋대로 行하게 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학)에서는 진실한 知와 行을 지적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知行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색을 보는 것은 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것은 行에 속한다. 바로 그 아름다운 색을 보았을 때 이미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것을 좋아하게 된 것이지. 아름다운 색을 보고 난 후에 또다시 다른 마음으로 그 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악취를 맡는 것은 知에 속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은 行에 속한다. 그 악취를 맡았을 때 이미 스스로 자연히 그 냄새를 싫어한 것이지. 그 악취를 맡고 난 후 또다시 다른 마음으로 그 악취를 싫어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知와 行을 분류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知行의 본체이다. 즉 사욕에 의한 단절이 없는 지행의 본체이다. 성인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와 같아야만 비로소 진정한 앎이고, 만약 그러하지 않다면 알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고 가르쳤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하고 실질적인 공부가 되겠는가? 그런데도 지금 억지로 知와 行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나는 知行을 하나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또 무슨 뜻인가? 만약 지행설을 세운 종지를 모르고서 단지 知行이 하나이다 혹은 들이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이 또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습록>
어느 날 왕양명이 남진이라는 곳을 거닐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바위 위에 피어 있는 꽃을 가리키며, "선생께서 마음 밖에 사물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집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과 필경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왕양명은 "그대가 저 꽃을 보지 않았을 때에는 저 꽃과 그대의 마음이 다 같이 적막(寂寞)하였다가 그대가 저 꽃을 보았을 때에 저 꽃의 빛깔이 일시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니. 어찌 저 꽃이 결코 그대의 마음 밖에 있다고 하겠소?"라고 하였다.
사물의 형체와 빛깔은 마음의 지각과 인식에 의해 비로소 작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선생께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선을 좋아하는 것이 좋은 색깔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知는 行의 시작이고 行은 知의 완성이다. 성인의 학문은 단지 하나의 공부일 뿐이므로 知와 行을 두 가지 다른 일로 분류할 수 없다."
(知是行之始. 行是知之成. 聖學只是一傾工夫. 知行不可分作兩件事.)(전습록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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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비판
양명의 이론은 미색을 보고 악취를 맡는 것은 지(知)로, 미색을 좋아하고 악취를 싫어하는 것을 행(行)으로 보아, 보고 맡을 때 이미 스스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며, 보고 난 후에 다시 마음을 써서 좋아하고, 맡고 난 후에 다시 마음을 써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것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증거로 삼은 듯하다. 대개 인간의 마음 중에서 형기에서 발현한 것은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알고, 힘쓰지 않고도 스스로 할 수 있어 호오(好惡)가 있는 곳에는 외적인 태도와 마음이 동일하다. 그러므로 미색을 보면 곧 그 아름다움을 알아 마음으로 진실로 그것을 좋아하고, 악취를 맡으면 바로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아 마음으로 그것을 싫어하여 행(行)이 지(知)에 의탁해 있다고 해도 된다.
그러나 의리(義理)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배우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힘쓰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외적인 태도로 나타나는 것이 반드시 마음의 성실함에 바탕을 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선을 보고도 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선을 알고도 마음으로 진실로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선을 보고 나서는 스스로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가? […] 양명은 저 형기(形氣)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가지고 이 의리의 지행(知行)에 관한 설을 밝히려고 했으니 매우 옳지 않다. 그러므로 의리의 지행은 합하여 말하면 실로 서로 동시에 행해야 되며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된다. 나누어 말하면 지(知)는 행(行)이라고 말할 수 없고, 행은 지라고 말할 수 없다. 어찌 결합하여 하나로 할 수 있겠는가?(「傳習錄論辯」, 『退溪集』41-27ㄱ~28ㄴ)
이 글은 왕수인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이황은 지행합일설은 인간의 마음 중에서 형기에서 발현한 것을 근거로 지와 행이 합일한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의리(義理)의 영역에서는 형기에서 발현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와 행이 합일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도덕적인 행위에 있어서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유성룡의 비판
왕양명은 지와 행을 합쳐서 하나라 하여 주자의 설을 힘써 배척하였으니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 왕양명의 의도를 상고해 보니 아마 속된 학문이 밖으로만 치닫는 것을 경계하여, 이에 한결같이 근본 마음을 위주로 한 것이다. 대개 마음을 붙여서 강구하는 것을 모두 행이라 하였으니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곧음이 지나친 것이다.(「知行說」, 『西厓集』15-6ㄴ)왕수인의 지행합일설이 외물의 추구를 경계하려는 의도였다고 하여, 그 의의를 일면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곧음'이 지나쳤다고 말한다.
첫댓글 사람이 타고난 마음이 거울이라면,
거울 앞에 옳고 그르고 이쁘고 미운 모든 것이 오면
있는 그대로 비춰주겠지요.
그러나 거울이 더럽고 먼지가 앉았으면
제대로 비춰주지 못하지요.
우리 마음도 맑게 하면 모든 것이 비춰주겠는데
나의 욕심이나 나의 습관 때문에 매직 거울처럼
삐뚤어지거나 온전하게 비춰주지 못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보거나 들으면
곧바로 옳은지 그른지를 알면서도
나의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눈치보고
엉뚱한 대답을 지어내고 왜곡시키겠지요.
중요한 것은 내 거울이 맑고 밝고 깨끗한지를 알아야하는데요.
거울에 밝은 곳을 보면 되거나
또는 거울에 붙은 더러운 것을 떼어내면 되겠는데요.
퇴계 선생님께서 양명학을 비판하시면서
이쁘고 미운 것은 금방 알아내지만
의리는 배워야만 안다고 말씀하셨지요.
조금 지나친 말씀이지요.
눈이 이쁘고 미운 것을 알아보는 것은
눈에 판단하는 소프트웨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마음에도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도 금방 알아내지요.
옳고 그른 것이 복잡하더라도
차근차근 자세히 따져보면 금방 알아냅니다.
거울에 비췄더라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요.
배워서 아는 것도 거울을 자세히 보듯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배워서 아는 것은 나쁘니까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알면서도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고 고민이지요.
이런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니까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면서도 못하여 마음을 아프게 하는
크고 작은 고통들을
쇠절구공이로 찧어서 바람에 날려보내듯이 없애버려야지요.
이렇게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이 아는 대로
용감하게 행동하면 마음이 행복하겠지요.
더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알면서도 못하는 괴로움도 있고
알지도 못하는 괴로움도 있나봅니다.
이경룡 삼가 올림
먼 산 위에 핀 꽃은
꽃대로 피고 지겠지요.
사람은 사람대로 산 아래에서
태어나서 열심히 살겠지요.
꽃이나 사람이나 각기 살아가겠지요.
봄이 오면 새순 나오고 가을에는 시들듯이
살아야하는 마음을 서로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꽃이 사람을 보더라도
사람이 꽃을 보더라도 같겠지요.
그런데 왕양명의 제자는
자기 눈에, 자기 마음에 들어와야만
꽃이라고 여기는 장님이지요.
왕양명이 이제 눈 앞에 꽃을 놓으니
꽃이 보이냐라고 물은 말입니다.
상세한 답변 갑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