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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부안능가산
삼한시대 변한의 왕궁 터였다
전북 땅 곰소를 지나 한쪽으로 내소사고 다른 북편을 거슬러 오르면 이내 부안 개암사에 이른다. 변산8경인 개암고적이 그동안 무척 그리웠다함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천혜의 산속에 자리한 개암사를 배경한 우금바위에서 바라보이는 서해와 호남평야가 시원시원하다.
철 지난 개암사 벚꽃길을 음미하다 또 다른 풍물 돌길과 철 이른 단풍나무터널에 적신다. 내소사엔 전나무숲길이 명물이지만 이곳 개암사는 철철이 벚꽃길과 돌길과 단풍터널이 줄지어져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능가산 개암사 일주문을 지나 반드시 건너야 하는 불이교를 맞닥뜨린다. ‘불이’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선과 악도 둘이 아니며 유와 무도 둘이 아니며 공과 색 또한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오묘한 불가의 깊은 가르침이다.
세상 만물의 이치가 곧 하나라는 뜻을 던져주는 다리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건넌다.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개암고적이라 불릴 만큼 변산의 비경 개암사의 역사가 깊다. 대웅보전을 배경으로 눈에 또렷하게 드는 우금바위에서 역사를 풀어본다.
백제부흥운동의 근원지가 우금바위다.
가장 가깝게 676년 원효와 의상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정도며, 문화재청에서는 「부안향토문화지」를 빌어 634년백제무왕35년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궐을 절로 고쳐 지었다 함으로써 이 시기를 개암사 창건으로 보고 있다.
개암사의 터가 삼한시대 변한의 왕궁터였다.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백제부흥운동이 일 때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받들고자 최후의 항쟁을 벌였던 주류성이 우금산성이다. 이때 충남 한산이 주류성이었다는 비등한 설도 있다.
일명 울금산성이라고도 하는 우금산성을 백제부흥운동의 주류성으로 보는 건 이 바위 큰 굴 하나가 복신의 굴이라는 것이다. 의자왕의 조카이자 사촌동생이기도 한 복신은 이 부흥운동 주동자였다. 복신에 의해 부여풍이 백제왕으로 추대됐으나 숨겨진 저의가 드러나 끝내는 부여풍에 죽임을 당했다.
백제 최후 항전을 벌였던 역사적 현장이 이 우금산성이다.
우금바위에 이러한 전설이 있다. 동굴 세 개 가운데 가장 큰 굴을 원효굴 또는 원효방이라 하는데 백제부흥운동의 복신굴로도 명명한다. 이 굴 밑에 물이 괘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다. 원효가 이곳에 머물고서야 샘물이 솟았다.
다른 하나는 부사의방이라 하는데 약 1300여 년 전 진표율사가 이곳에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는 수행에서 익힌 죽염제조법이 오늘날까지 불가의 스님 사이에 전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변산4대 명찰의 하나
개암사의 중건 사적에서는 고려 숙종 때 원감국사가 절을 크게 중창하였으며 당시 개암사는 황금전을 중심으로 고루 갖춰진 전각이었거니와 연못 속에 핀 대나무 꽃이 서로 비추는 빛깔의 투영에서 마치 극락세계를 보는 듯했다고 적시했다.
주지 재안스님은 부산 사람이 왔다며 유달리 반기면서 대웅보전보물292호 가운데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1636년 계호선사가 중건한 이 대웅보전은 개암사에 현존하는 당우 가운데 가장 오랜 전각이라는 운을 떼며 중후한 말씨로 변산 4대명찰 개암사의 창건역사를 비롯해 소상하게 잇는다.
개암이라 함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격을 피해 이곳변한에 성을 쌓을 때 우 장군과 진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면서 동쪽을 묘암,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대웅보전 법당을 에워싼 20여 용과 봉황에 대해서 하나하나 주목하며 그 의미를 새겨준다. 이에 처마에는 화려한 연꽃을 조각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의 조선 중기 대표적인 건축물의 하나라고 했다.
연꽃을 겹겹이 피운 화려한 공포는 개암사 대웅보전과 숭림사 보광전, 정수사 법당이 한 범주인데 특히 숭림사 보광전과는 전체적 기법이 거의 같다고 한다. 지역적으로 멀리지 않아 같은 계보의 목수 작품일 수 있다는 문화재청의 시각이다.
주지스님의 말대로 살피면 살필수록 이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될 만큼 깊이가 점점 솟아났다. 천장 곳곳 가운데를 향해 꿈틀대는 크고 작은 용이 다른 절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마치 살아 꿈틀대는 표정도 몸짓도 다양했다.
듬직한 굵기의 비뚤비뚤한 나무 몸통을 용의 몸으로 삼아 그것이 대들보를 이룬데다 용머리 위에 봉황을 태우거나 여의주를 물게 한 기이한 용이다.
불단 닫집 속 세 마리 번용이 똬리를 틀고 매달렸다. 이 또한 여의주를 물고 있다.
낮에는 저처럼 예술이다지만 인적이 끊기는 밤이 되면 온통 용이 꿈틀거릴 것만 같은 으스스한 일면도 인다.
크고 작은 용들이 모두 석가모니를 우러러 그 가르침 앞에 경의를 표한다는 거룩함에 잠시 으스스했던 느낌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후덕하면서도 농을 섞은 덕담에 어느 누구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수를 쓴 주지스님은 일일이 살포시 안은 등을 두드려주자 보살들은 그제야 웃음 짓는 방긋한 표정으로 법당을 나선다.
응진전 마당에 영산회괘불탱 및 초본보물1269호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응진전 안에 소장하고 있는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불교의식 때 내 거는 매우 큰 크기의 괘불이기에 쉽게 마주하기 어렵다.
보통 원본의 크기와 같은 괘불초본이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데 두 측면을 지닌 개암사 괘불탱과 초본은 그래서 보물로서의 가치가 더욱 크다.
괘불을 상설 전시하는 곳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통도사성보박물관 그리고 진주 청곡사로 알려져 있다. 개암사 괘불이 어느 때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전망이 있다는 말들에서 비록 여기서 못 보는 오늘이어도 희망을 열어놓을 만하다.
개암사 괘불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양옆으로 섰다. 뒤쪽에 다보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과 앉아있는 두 구의 작은 불상이 그려져 있음을 이미 자료에서 살폈었다. 조선 승려화가 의겸이 참여한 18세기 중엽의 양식적 특징을 드러낸 뛰어난 작품이다.
지장전 법당에 있는 석불좌상은 부안 청림사 절터에서 옮겨온 불상이다.
목과 몸체가 두 동강이었던 것을 근래 복원한 이 불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림사 터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보물급 고려동종은 달리 내소사에 소장되고 있다.
1400년 역사를 지닌 개암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지장기도도량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잠시 개암사의 특산품으로 명성이 높은 개암죽염을 맛보고는 너도나도 “하나 더” 북적댄다. 우금바위에서 전수된 죽염이 오늘날 개암죽염이다. 청정해역인 변산반도 곰소염전에서 생산되는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을 삼 년 이상 자란 대나무 통 속에 넣고 소나무장작만으로 여덟 번 반복하여 굽는다. 마지막 아홉 번째 소나무에 송진을 뿌려 가열을 한껏 더 높이면 소금이 녹아 흘러 이른바 ‘자색보물소금’이 탄생한다.
개암죽염의 효능 요체는 바로 대나무의 유효성분과 천일염의 미네랄과 결합하는 데서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최상의 원료와 굽는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