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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64 : 신원수(女, 1918年 9月20日生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 |
*최초증언일: 2001. 9. 14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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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들을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기름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나의 가족 15명과 최순이, 이송상의 유해가 우키시마호에 같이 승선했다가 배가 폭파당하고 나서- |
나는 일본에서 살다가 잠시 귀국한 이화상과 결혼하고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편은 고베 사노미야에서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한국인 인부를 모집하여 아오모리현 오미나토로 갔다. 남편은 아오모리에서 지하방공호나 포대, 지하군수공장 같은데서 굴을 팠고, 비행장 활주로 공사장에서 일했다. 나는 남편이 일하는 공사장 근처에 식당을 차려 한국인 인부들에게 밥을 지어줬다. 식당일은 동서들하고 같이 했다. 반찬 만들 재료가 없으니 일이 많지는 않았다. 끼니마다 백여 명 정도가 밥을 먹었다.
남편의 4형제 이경상, 이화상, 이송상, 이상준 가족이 일본의 같은 마을에서 생활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려고 우키시마호에 탔다. 남편의 형수 최순이는 일본에서 병환으로 사망했고, 동생 이송상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를 포함한 나의 가족 15명과 최순이, 이송상의 유해가 우키시마호에 같이 승선했다. 배가 폭파당하고 나서 나는 딸 정자를 안고 있다가 작은 구조선을 타고 살아났는데 남편은 아들을 구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기름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우키시마호의 침몰로 시어머니 박보안, 시숙 이경상, 조카딸 이징자, 남편 이화상, 아들 이의웅, 조카 이진치까지 가족 6명이 죽었고, 동서 최순이, 시동생 이송상의 유해도 그 때 잃었다. 생존한 가족은 시숙의 아들인 이원필, 이형필, 내 딸 이정자, 남편의 제수 박정순, 남편의 동생 이상준, 남편의 제수 손병례, 조카 이형원, 조카딸 이청자들이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으나 일본이 저 모양이니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쪼록 일본이라는 나라가 우리들에게 사죄하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악몽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세월이 무상하고 억울한 심정은 달랠 길 없다.◼
[필자가 신원수씨 댁을 방문한 날 다른 가족들은 멀리 있어서 자리를 같이하지 못했다. 가족들의 생존자 개인기록부를 하나하나 작성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그 가족의 희생은 가계도에 표시된 그대로 필자가 조사한 피해자 가운데 가장 많은 가족이 승선하여 가장 많은 가족을 잃었다. 3대가 승선하여 3대에 걸친 가족이 우키시마호 폭침 당시 희생당했다.]
생존자 신원수씨가 진술한 가족 가계도.
이들은 모두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다가 5명의 가족을 잃고,
최순이와 이송상의 유골을 모시고 오다가
마이즈루만 기름바다에서 잃었다.
▣증인-65 : 이정자(女, 1943年 9月24日生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 | |
*최초증언일: 2001. 9. 14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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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파산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
부산광역시 해운대해수욕장 마을에서 한복을 짓는 신원수(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64호)씨의 딸 이정자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반가워했다. “우키시마호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세 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살아났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셔서 알고 있다. 어머니는 가족을 잃던 그 때를 회상하며 일생 동안 가슴 아파하셨다. 배가 파산될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늘 말씀하셨다. 반드시 해결돼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