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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42살 저주(滁州) 강학의 황권주의 사상과 농민 기의(起義)의 공맹 사상 투쟁
2021년 6월 14일
왕양명은 42살(1513) 10월 22일 저주(滁州)에 도착하여 남경 태복시 소경의 공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왕양명이 41살(1512) 12월 북경에서 출발하여 이듬해 2월에 절강성 소흥부에 도착하였고 여요현에 가서 머물며 6월 말에는 사명산에 유람을 가고 근무지 저주로 가지 않았던 현실적인 까닭은 유육 유칠(劉六 劉七) 형제 농민 기의군이 1512년 7월에 강소성 통주(通州, 현재 南通市) 낭산(狼山)에서 진압되었으나 잔여세력이 남아 치안이 불안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양명이 저주에 부임한 뒤 처음에는 저주 성 밖 2리 떨어진 들판에 건물을 짓고 거주하면서 군인과 백성 200여 호(戶)를 총소갑(總小甲)으로 편성하여 순찰하도록 하며 자신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농민 기의군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자 저주 성안으로 들어가서 건명니사(乾明尼寺) 폐허에 태복시 건물을 짓고 거주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저주에 있던 7개월 동안(1513년 10월 22일-1514년 5월)에 학생들에게 정좌공부를 가르친 곳은 주로 낭야산(琅琊山)의 양천(瀼泉)이거나 용담(龍潭)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아무 곳에서나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기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합니다. 왕양명도 저주에서 지은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찾아온 학생들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덕홍과 왕기(王畿) 모두 왕양명의 독자적인 강학 활동이 저주에서 시작되었고 왕양명 학술이 3번 바뀌는 출발점이 저주부터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왕양명이 저주에서 정좌공부 이외에 젊은 학생들에게 농민 기의에 부화뇌동하지 말라고 굳게 당부한 말입니다. 젊은 학생들에게 “외부의 유언비어에 유혹되지 말고 스스로 유가의 도덕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말라.(不患外面言誘,唯患諸生以身謗)”고 설득하고 효제예양(孝悌禮讓)을 실천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도시와 농촌에 사는 일반 백성의 젊은이들(閭閻小豎)이 학생들을 롤모델로 삼고 따를 것이며 그래야만 혼란한 사회치안이 나아질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유육 유칠(劉六 劉七) 형제의 농민 기의군이 진압된 뒤에도 잔여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어하려고 학생들에게 위와 같이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육(劉六, 劉寵, ?-1512)과 유칠(劉七, 劉宸, ?-1512) 형제의 농민 기의 경과를 보면, 형제가 정덕 5년(1510) 10월에 기의를 일으키고 정덕 6년 정월에 산동성 맹자의 고향 추현(鄒縣)을 점령하고 2월 27일에는 공자 사당이 있는 곡부(曲阜)를 불 지르고 파괴하였습니다.(『曲阜縣志』,卷29:秣馬於庭,汚書於池,祭器亦被殘毁。) 특히 공맹의 인의(仁義)가 지배층의 권위주의 통치를 정당화시켰다고 보았기에 파괴하였고 반유학(反儒學)과 반공맹(反孔孟)을 외쳤습니다. 유생 하세신(何世臣)과 마용(馬鏞)이 농민 기의군에 잡혔을 때 하세신은 유가의 덕목을 내세워 기의군을 설득하려고 시도하였고 마용은 기의군에 대들고 욕하였습니다. 기의군은 2명 모두를 죽였습니다. 공자와 맹자는 백성들에게는 성인이 아니었고 일부 지배층에게만 성인이 되었습니다.
북경으로 진격한 뒤에는 관료들처럼 명나라 무종 황제에게 간신들을 처단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무종을 사로잡아 죽여 명나라 왕조를 뒤엎어 끝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북경을 3번이나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남쪽으로 내려왔고 劉六은 黃州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고 劉七이 武昌에서 수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내려와 九江에서 싸우고 다시 7년(1512) 7월 18일에는 강소성 南通을 점령하고 근처 狼山에 근거하였습니다. 당시 명군은 彭澤이 陸完에게 군대를 증원해주고 남경과 남경 이동의 강남지역을 방어하였습니다. 7월 21일 명군이 남북에서 狼山을 협공하여 劉七과 齊彥名 등이 화살에 맞아 죽고 기의는 끝났습니다. 농민 기의군은 명나라 왕조와 공맹 사상의 인의(仁義)를 함께 뒤엎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백성과 평민 젊은이들은 유육 유칠 형제의 농민 기의를 적극 지지하고 참여하였습니다. 음식과 돈을 갖다 주거나 자원하여 참여하였습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원이 되려는 극소수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젊은이는 유학 곧 성리학을 부정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따라서 왕양명이 학생들에게 유가의 도덕 규범을 지키라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규범을 어긴다는 뜻을 불교에서는 “이신방법(以身謗法)”이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왕양명이 이런 말을 빌려 학생들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왕양명은 유가 출신 관료들의 허위를 반성한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육 유칠 형제의 농민 기의가 진압되었더라도 기의의 여세는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은 명나라 왕조와 공맹 유학을 부정하고 파괴하였습니다. 왕양명이 학생들에게 당부한 효제와 예양 도덕 규범이 과연 황제권을 이용한 지배층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난 일반 백성들을 설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실상 왕양명이 학생들에게 강조한 유가 덕목은 일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왕양명의 학술은 단지 일부 학생들에게만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왕양명은 나중에 유가 덕목을 일반사회에 억지로 뿌리내리려고 향약을 실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양명학이 폭넓게 일반 백성들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당시 대다수 관원은 농민반란의 이유가 일부 간신들의 횡포에 있기 때문에 황제에게 간신들을 제거하여 민심을 달래라고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왕양명도 41살(1512) 5월 자신의 무능을 탄핵하여 사직하겠다고 올린 상소문에서 황제 무과론(無過論)을 나타내고 간신들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황제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 중국사 연구에서 말하는 “황권주의(皇權主義)”입니다. 왕양명은 황권주의를 철저히 믿는 관료로서 농민 기의를 폄하하고 무시하고 진압하려고 들었습니다.
왕양명 학술의 정치사상은 사실상 황권주의 옹호이며 백성을 아끼는 맹자의 민본주의 사상이나 사회개혁 사상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명나라 양명학의 정치사상은 황제 무과론(無過論)에 근거한 황권주의(皇權主義)를 고수하였습니다. 일본은 명나라 양명학을 받아들여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삼았고 군국주의로 흘렀습니다. 사실상 일본 양명학이 명나라 양명학을 찬양하였던 까닭은 바로 왕양명의 황권주의 정치사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 명나라 양명학의 황권주의와 일본 양명학의 군국주의 둘에는 서로 상관관계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였으나 국왕은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여 전범 처벌에서 국왕을 제외하였습니다. 따라서 명나라 양명학 또는 일본 양명학에서 현대사회의 민주주의 싹을 찾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공자와 맹자를 타도하자는 요구와 구호는 아주 일찍부터 농민 기의에서 나왔습니다. 명나라 중기에 명나라 왕조를 흔들었던 유육과 유칠 기의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젊은이들이 철저하게 공자를 타도하고 파괴하였습니다. 물론 유물사관의 영향도 있겠지만 현재 중국 학계에서 주자학 연구 또는 양명학 연구가 왜 한국처럼 유행하지 않는가를 보여줍니다. 현재 중국학계에서 성리학은 주류 학술이 아니고 오히려 서양 근대 인문학이 주류 학술입니다.
현재 한국인들이 중국에 여행 가서 중국 젊은이들이 노인을 공경하지 않거나 노인들이 길거리에서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보거나 여성의 권한이 크고 여성의 직업이 다양하다는 것을 보고 중국에는 예절이 없다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지배층이 공자와 맹자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가혹하게 학대하고 구박하였다는 것과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공맹 유학을 반대하였는지를 알면, 중국 젊은이들의 가끔 무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농민의 반란과 기의를 오래 겪으면서 공자와 맹자의 도덕 규범의 허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조선 쇠망의 원죄가 성리학에 있다고 욕하는 정도이며 유가의 사회계급 성격과 권위주의를 철저히 비판하지 못하였고 개혁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에도 중국인들은 한국인 부부가 길을 가면서 남편이 앞에 부인이 아이를 안거나 업고 뒤에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아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한국인은 공맹의 유가 덕목 곧 경로 또는 남존여비 관점에서 현재 중국인들의 일상생활과 예의를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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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4건 (출처 속경남 『왕양명 연보 장편』 716-717쪽) :
1、錢德洪,『陽明先生年譜』
2、『王陽明全集』,卷九,「給由疏」
3、뇌예(雷禮),『남경 태복시 지(南京太僕寺志)』,卷十五,왕수인(王守仁)
4、뇌예(雷禮),『남경 태복시 지(南京太僕寺志)』,卷九,官倉、新街
1、전덕홍,『양명선생 연보(陽明先生年譜)』︰
겨울 10월에 저주(滁州)에 도착하였습니다. 저주에는 산수가 수려하고 왕양명 선생이 말을 관리하는 행정(馬政)을 담당하면서도 근무지가 저주 성에서 떨어져 있고 업무가 많지 않아 날마다 문인들과 함께 낭야산에 있는 양천(瀼泉)에 놀러다녔습니다. 달이 밝은 밤에는 용담(龍潭)에 수백 명이 둘러앉아 산골짜기에 메아리가 칠 정도로 노래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아무 곳에서나 질문하였고 대답을 들으며 기뻐서 노래하고 춤추었습니다. 주자학 중심의 과거시험을 공부하던 지식인들도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왕양명 선생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이 저주에서부터 많이 늘어났습니다.
1、錢德洪,『陽明先生年譜』︰
冬十月,至滁州。滁山水佳勝,先生督馬政,地僻官閑,日與門人遨游瑯琊、瀼泉之間。月夕則環龍潭而坐者數百人,歌聲振山谷。諸生隨地請正,踴躍歌舞。舊學之士皆日來臻,於是從遊之眾自滁始。
黃綰,「陽明先生行狀」:
明年癸酉(42세),升南京太僕寺少卿,從遊者日益眾。甲戌(43세),升南京鴻臚寺卿,始專以良知之旨訓學者。
2、『왕양명 전집』,卷九,「給由疏」︰
“황제의 은혜를 입어 남경 태복시(太僕寺) 소경(少卿)로 승진하였고 정덕 8년(1513) 10월 22일 부임하였습니다.”
2、『王陽明全集』,卷九,「給由疏」︰
“蒙陞南京太僕少卿,正德八年十月二十二日到任。”
3、뇌예(雷禮),『남경 태복시 지(南京太僕寺志)』,卷十五,왕수인(王守仁)︰
계유년(1513)에 남경 태복시 소경으로 승진하였다. 마침 저주(滁州)에서 떨어진 야외에 머무르고 한가하였기에 오직 양지를 후학들에게 가르쳤고 묻는 대로 대답하면서 반드시 본원을 깨달아 넓힐 것을 일러주었다. 항상 학생들에게 이르길 “바깥세상 사람들의 이런저런 유혹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나 자신이 올바른 도리를 훼손하고 있는지를 걱정하여야 한다.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효제(孝悌)와 예양(禮讓)을 실천하여야, 동네 아이들도 우러러 따르고 롤모델로 생각하며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게 되면 저주(滁州)의 풍속이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고 말하였다.
또 태복시 터가 저주 성에서 2리 떨어지고 풀과 갈대가 들판을 덮었기에 군인과 백성을 시켜 목마장 빈 곳에 집을 짓도록 하여 왕양명 본인이 거주하였다. 치안 관리를 위하여 총갑(總甲 : 명대 1里에 110戶가 있고 잘사는 10戶를 里甲으로 세워 부역 징발과 조세 징수를 위임하였다. 그런데 이것과 달리 왕양명이 110호 1리에 總甲 10명을 두었음)을 세워 서로 연락하고 성년 남자들이 돌려가며 순찰하게 하였다. 나중에 농민 기의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자 저주 성안에 들어와서 건명니사(乾明尼寺)를 태복시 건물로 개조하고 관청 건물을 세웠고 또 방어계책을 세운 것은 먼 뒷날을 고려한 것이었다.
雷禮,『南京太僕寺志』,卷十五,王守仁︰
癸酉(1513),陞南京太僕寺少卿。值留坰多暇,專以良知之旨訓後學,隨方而答,必暢本原。恒語諸生曰︰“不患外面言誘,唯患諸生以身謗。拳拳以孝悌禮讓爲貴,即閭閻小豎咸歆嚮慕,思有所表,則欲殊於俗,滁水之上洋洋如也。”
又因寺址距滁城二里,萑葦蔽埜,令軍民於馬場隙地自置房屋住。設總甲聯之,論丁巡警。及流賊蝟起,復即滁城尼寺改爲寺倉,建官廳所,而擘畫所遺,莫非遠慮。
4、뇌예(雷禮),『남경 태복시 지(南京太僕寺志)』,卷九,
관청 건물(官倉)︰
“태복시 관청 건물은 저주 성의 남문 안 좌소(左所) 오른쪽에 있다. 처음에는 송나라 시기의 건명니사(乾明尼寺)이었으나 정덕 9년(1514)에 농민 기의 때문에 태복시 소경 왕수인이 폐기된 건명니사를 태복시 건물로 개조하고 관청 건물 1동을 세웠고 저주에 들어오면 쉬는 것으로 삼았다.”
새 길(新街):
“새 길에 목감(牧監)이 말을 점검하던 옛터가 있다. 정덕 9년(1514) 농민 기의군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자 태복시 소경 왕수인이 저주 성 밖 2리 떨어진 곳에 군인과 백성 200여 집(家)를 소집하여 자신이 거주할 집을 짓도록 하고 총소갑(總小甲 : 總甲, 小甲, 火夫 포함)을 세우고 민호(民戶)에게 맡기고 날마다 순찰하고 농민 기의군의 침입을 방어하였고 민호에게는 조세를 면제하였다.”
雷禮,『南京太僕寺志』,卷九,官倉:
在滁城南門內左所右。初爲宋、乾明尼寺,正德九年,因流賊之變,本寺少卿王守仁廢寺爲太僕寺倉,建官廳一所,以備入滁憩息之地。
新街:
街俱牧監點馬舊地。正德七年(九年?),流賊蝟起,本寺少卿王守仁因寺居滁城外二里孤懸,招集軍民二百餘家,自置房屋居住,立總小甲,屬之照戶,按日巡警防護,本寺免其地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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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滁州)와 낭야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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