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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세운 일꾼들
삼상 16:6-13, 행 6:1-7, 마 25:31-46 / 인명진 목사
의사요 심리학자요 유명한 저술가인 스캇 팩은 그의 대표작 “아직도 가야할 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마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보다 마음의 태도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재능이나 환경보다도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문제가 연속해서 발생하기 때문에 문제를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바른 사람은 행복을 만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인생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행복한 인생=문제없는 인생이라는 공식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대표적인 오해는 행복한 교회=문제없는 교회라는 공식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이런 생각을 바닥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만나는 믿음의 인물들 중에 문제없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눈 닦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방주를 만들어서 새 세계를 시작했던 노아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주 비겁한 인간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요 해방의 영도자 모세는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 살인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은 남의 아내를 범한 파렴치한입니다. 한결 같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 손에 들려져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결코 문제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산적한 문제 앞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는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와 시각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바르지 않으면 없는 문제까지 만들어서 인생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교회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부르신 교회지만 문제없는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눈 닦고 한번 찾아보십시오. 처음 세워졌던 예루살렘교회도, 이방선교를 처음 시작했던 안디옥교회도, 소아시아의 선교 중심지 에베소교회도, 주님을 열렬하게 사모했던 데살로니가교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없는 인생이 없듯이 문제없는 교회도 없습니다.
미국은 청교도 신앙 위에 세워진 국가입니다. 그런데 나라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울 때마다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알았다는 것이지요.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고 영적으로 해결할 줄 알았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탄생했던 것입니다.
미국은 2백여 년의 짧은 역사 가운데 크게 4차례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중에서도 우리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는 대각성운동은 1850년대에 일어난 3차 대각성운동입니다. 남북전쟁으로 얼룩진 상처와 폐허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했습니다. 이 3차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어난 그것도 주일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적갱신운동이었습니다.
3차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중심인물이 디엘 무디 선생입니다. 그는 안수 받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은 주일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디 선생이라 말합니다. 그는 평신도로써 미국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가 집회를 열고 간 도시마다 YMCA가 생겨났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YMCA가 아니라 청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순수 선교회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것이지요. 이 YMCA운동에 영향을 받은 청년들이 우리나라에 목사, 의사, 간호사, 선교사로 들어와서 엄청난 헌신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젊은이 한 명이 무디 선생을 찾아와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는 무디 선생에게 다짜고짜로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그 동안 교회를 옮긴 것이 벌써 세 번째인데, 지금 교회도 문제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랬더니 무디 선생이 말합니다. “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한 군데 알고 있기는 한데 당신한테 추천해 주지는 못하겠소!”했습니다. 젊은이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해하면서 반문합니다. “아니 왜요?” 무디 선생은 답변합니다.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날부터 그 교회는 완전함이 깨어지고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여러분 교회의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은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는 해결하면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더 큰 문제를 양산해 낼뿐입니다.
교회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서 성장하고 문제와 함께 성숙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만나는 교회, 최초로 세워진 교회, 역사상 가장 좋았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세워진 교회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지만 특히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시작될 수도 없었고, 박해를 이겨낼 수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넘쳐 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이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 부활과 승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냥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둘로 갈라질 위기 앞에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핏 생각하기에 이런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완전한 교회, 성숙한 교회로 단정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없이 자라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란 성령을 받았다고 갑자기 눈덩이처럼 커질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연단되어지고, 자신의 모난 부분을 다듬어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믿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도 성령을 충만히 받기만 하면 그 순간 콩나물 자라듯 믿음이 자라나는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이야기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예루살렘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개인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한 계층이 구제에서 소외되면서 불평과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갈등이 심각하여 교회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질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때 교회는 더 이상의 문제를 만들거나 확대시키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그 문제를 효율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원칙들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해 나가면서 문제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관점입니다. 어떤 성도라도 또 어떤 교회의 목회자라도 자신이 직접 몸담아 섬겨 나가고 있는 교회가 완전하기를 바라고, 문제없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를 섬기고 있는 우리는 천사도 아니요 완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 받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잘 섬겨도 흠과 티가 있고, 아무리 잘 믿어도 우리에겐 언제든지 많은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고 예루살렘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약 2년도 못되어서 벌써 교회에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산 증인들이 있는 교회요,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사로운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려고 했던 바로 그 교회요, 사도들이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 아주 특별한 교회, 교회 중에 가장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교회의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인간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모인 곳에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이 문제를 영적인 눈으로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고, 믿음으로 이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점에서 본받아야 할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에 어떤 문제점이 생겼습니까?
1. 구제문제로 서로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교하는 문제로 교회가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배하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히브리 사람들은 혜택을 받았는데, 헬라파 사람들은 늘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주 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사회복지인데, 이것은 분배정의 문제입니다. 콩 한쪽을 잘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통째로 먹고, 어떤 사람은 콩가루도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원망했습니다. 이 일로 교회 안에 히브리파와 헬라파로 갈라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대개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조건이 비슷한 사람끼리 혹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뭉칩니다. 히브리파 사람들과 헬라파 사람들이 둘로 갈라진 것입니다. 주류 히브리파와 비주류 헬라파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 교회는 유대인들의 지독한 박해 속에서도 날마다 믿는 사람이 더해가는 교회였는데 분배 문제로 말미암아 교회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에도 보면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교회들이 한국교회를 돕기 위해 엄청난 구호물자를 보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를 공부할 때 보니 한국에서 필요한 물자가 10개라는 선교보고서가 올라오면 저들은 중간에 떼먹을 것까지 생각해서 12개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구호물자를 나누어 주는 교회에서 분배를 잘못하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50년 전의 일을 들먹이면서 6.25 구호물자를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을 차지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불평이 단순히 배급 문제에서 그치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 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되었고, 성도들 서로 간에 미움이 커져갔다는 점입니다. 아군이 적군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자들과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아군들끼리 전투를 벌일 지경까지 갔습니다. 더 이상 교회가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것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회가 매력적인 곳도 아니요,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넘쳐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 곳이 되고 만다는데 그 문제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2. 문제점은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만 행했습니다.
구제를 하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구제와 봉사를 위해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내적인 징표는 말씀과 예배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외적인 증거는 구제나 선한 증거를 통해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먼저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선교와 구제가 중요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결코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봉사하게 하는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예배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교회는 교회다운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말씀 전하는 것보다 구제가 우선되다보니 교회에 심각한 문제점이 생긴 것입니다. 성도들 서로 간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꾸만 나누어 주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싶고 드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자꾸만 받고 싶어집니다. 나중에는 섭섭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 이런 문제점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어떻게 이 문제를 대처했습니까? 사람이 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일꾼을 세웠습니다. 구제를 전담할 일곱의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처음 세운 일꾼들입니다. 교회가 처음 세운 일꾼은 그냥 자리를 준 것 아닙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준 직분도 아닙니다. 교회의 행정 하라고 세운 사람들도 아닙니다. 구제를 전담하기 위해서, 선교와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선교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꾼을 세우면서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현장을 잃어버린 직분, 섬김을 잃어버린 직분은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갈릴리교회는 처음 세운 일꾼처럼 선교의 현장에서 섬기는 사람을 찾아 세우려는 것입니다. 몸을 드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집사로 세웠습니까?
1.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도대체 성령 충만! 성령 충만! 하는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쉰 목소리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체험을 날마다 순간마다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영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교회 직분자들 중에 자기 고집과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 공간도 없고, 또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과 반드시 충돌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낮추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이지 않고, 자기 잘못이 잘 보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의 잘못은 크게 보이고, 자기 잘못이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임재의식이 가득한 사람은 자기 허물이 먼저 보이는 사람입니다. 공동체의 구멍이 보이면 자기 몸으로 그것을 막는 사람입니다.
2.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지혜로운 개인을 뽑았다기보다는 교회의 선택이 지혜로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일곱 집사로 뽑혀진 사람들을 보면 히브리 식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일곱 명 모두 가 헬라 사람이거나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주류인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주류가 자기 자리를 다 비워서 비주류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지혜가 없었다면 주류가 자리를 독식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혜가 없었다면 히브리파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지혜로웠기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로 구제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여 교회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성서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교회 안에 주류, 비주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외인이요, 나그네를 형제 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 아닙니까? 복음서 말씀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것, 나그네 된 사람을 영접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주류를 선택해서 주류로 받아들이고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고궁이나 오래된 성벽을 가보면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즘은 규격화된 벽돌이 공장에서 찍혀져 나오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돌을 깎아서 담장을 쌓거나 성벽을 수축했습니다. 그런데 성벽을 확장하거나 늘이려고 하면 새 돌만 깎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벽이 되어 있는 오랜 돌도 새 돌에 맞추어서 맞물려 깎고 자리 자리를 내어주어서 비로소 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초대교회는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의 돌이 되게 하기 위해 히브리파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내어주었고, 거기에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 집사로 뽑혀서 교회를 평화롭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3. 칭찬 듣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하는 일은 결국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생활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하여 말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자기 일 묵묵히 감당하여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말씀에서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 기름을 부으려고 기름병을 들고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요즘처럼 아들이 한 명이나 두 명만 있으면 좋을 텐데 이 집에는 아들이 여덟 명이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아들 엘리압부터 시작해서 일곱 번째 아들까지 다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께서 바로 이 사람이다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막내이자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은 들판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이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처음 세운 일꾼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심지어 제사장의 무리까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문제 앞에서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문제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하는 처음 교회 일꾼처럼 교회의 부족함을 메우고, 목회자들의 손발이 되어서 좋은 교회를 세워서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