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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원(李昌源)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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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길보(吉甫)
생년 1588(선조 21)
졸년 1654(효종 5)
시대 조선중기
본관 한산(韓山)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이창원(李昌源)
1588년(선조 21)∼1654년(효종 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길보(吉甫).
부친은 좌찬성(佐贊成) 이덕형(李德泂)으로 가문이 대대로 부귀하였다.
계모(繼母)를 효성스럽게 모셨으며 교우관계가 돈독하였다.
26세에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로 처음 벼슬에 나가 교관(敎官)과 사예(司藝)를 하였고 과천(果川), 덕산(德山), 양성(陽城)에서 벼슬을 하였다. 유학으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였으며 한가할 때 거문고로 즐겼다.
[참고문헌] 朝鮮人名辭書
이덕형(李德泂)
[문과] 선조(宣祖) 29년(1596) 병신(丙申) 정시(庭試) 을과(乙科) 3위(04/19)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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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원백(遠伯)
호(號) 죽천(竹泉)
시호(諡號) 충숙(忠肅)
생년 병인(丙寅) 1566년 (명종 21)
졸년 을유(乙酉) 1645년 (인조 23)
향년 80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백(遠伯), 호는 죽천(竹泉).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호군 이오(李澳)이며, 어머니는 민원종(閔元宗)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1597년에서 1608년까지 봉교(奉敎)·정언·지평·수찬·부교리·헌납·전적·문학·집의·교리·부응교·사간·사예·사섬시부정·응교·시강원보덕·사도시정(司䆃寺正) 등을 거쳤다.
광해군 때에도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특히,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럽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인조 때는 한성부판윤이 되어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오르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에 호종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환도 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라 예조판서·판의금부사·지돈녕부사·우찬성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창한화(竹窓閑話)』·『송도기이(松都記異)』 등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덕형(李德泂))]
[진사]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6위(3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9명 [甲1‧乙4‧丙14]
전력 진사(進士)
관직 한림(翰林)
관직 찬성(贊成)
관서 기사(耆社)
문과시제 표(表):당이필청령한고귀성기부(唐李泌請令韓臯歸省其父)
타과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6위
기타 미수찬표(眉叟撰表)
계해반정이도승지입직위군병소집불굴슬 문인조거의시배왈비무살구약(癸亥反正以都承旨入直爲軍兵所執不屈膝聞仁祖擧義始拜曰臂毋殺舊若)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오(李澳)
[조부(祖父)]
성명 : 이회(李)
[생조부(生祖父)]
성명 : 이방(李浝)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언호(李彦浩)[文]
[생증조부(生曾祖父)]
성명 : 이언식(李彦湜)
[외조부(外祖父)]
성명 : 민원종(閔元宗)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신담(申湛)[文]
본관 : 고령(高靈)【補】
[처부(妻父)2]
성명 : 이승윤(李承尹)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이덕명(李德溟)【補】
형(兄) : 이덕순(李德淳)【補】(주2)
[가족과거]
자(子) : 이행원(李行源)[文]
[주 1] 거주지 : 『황명만력18년경인10월초6일상존호증광사마방목(皇明萬曆十八年庚寅十月初六日上尊號增廣司馬榜目)』(『청좌부군방목(淸坐府君榜目)』, 대전시립박물관)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안항 : 『황명만력18년경인10월초6일상존호증광사마방목(皇明萬曆十八年庚寅十月初六日上尊號增廣司馬榜目)』(『청좌부군방목(淸坐府君榜目)』, 대전시립박물관)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언호(李彦浩)
[문과]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위(30/36)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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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양충(養冲)
생년 정유(丁酉) 1477년 (성종 8)
졸년 기묘(己卯) 1519년 (중종 14)
향년 43세
합격연령 31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홍문관부응교, 사헌부장령,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양중(養仲).
이축(李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훈(李塤)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유청(李惟淸)이며, 어머니는 이령(李聆)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진사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09년 홍문관저작·부수찬이 되었다. 1511년 사간원헌납, 이듬해 사헌부지평, 홍문관부응교, 사헌부장령을 거쳐 의정부검상, 사간을 역임하였다.
1515년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홍문관직제학을 지내고, 1517년 대사간, 151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문묵(文墨)에 재질이 있었으며, 특히 전서(篆書)와 팔분체(八分體)를 잘 썼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언호(李彦浩))]
[진사] 연산(燕山) 2년(1496) 병진(丙辰)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60위(90/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6명 [甲3‧乙7‧丙26]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당(湖堂)
관직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연산(燕山) 2년(1496) 병진(丙辰)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60위
기타 전팔분선서(篆八分善書) 참을사훈(參乙巳勳)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유청(李惟淸)[文]
품계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補】(주2)
[조부(祖父)]
성명 : 이훈(李塤)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축(李蓄)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령(李聆)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윤회정(尹懷貞)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2]
성명 : 이종암(李終巖)
봉호 : 파징수(波澄守)
본관 : 전주(全州)【補】
[가족과거]
증손(曾孫) : 이덕형(李德泂)[文]
[주 1] 거주지 : 『정덕2년정묘3월25일문무잡과방목(正德二年丁卯三月二十五日文武雜科榜目)』(『충재선조부군급제방목(冲齋先祖府君及第榜目)』, 권벌 종가 전적(權橃宗家典籍)[보물 제896-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2] 부관직 : 『정덕2년정묘3월25일문무잡과방목(正德二年丁卯三月二十五日文武雜科榜目)』(『충재선조부군급제방목(冲齋先祖府君及第榜目)』, 권벌 종가 전적(權橃宗家典籍)[보물 제896-3호])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유청(李惟淸)
[문과]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8위(28/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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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직재(直哉)
시호(諡號) 공편(恭褊)
생년 기묘(己卯)【補】(주1) 1459년 (세조 5)
졸년 신묘(辛卯)【補】(주2) 1531년 (중종 26)
향년 73세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한성([京])【補】(주3)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대사헌, 한성부좌윤, 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직재(直哉).
이색(李穡)의 현손이며, 이숙야(李叔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축(李蓄)이다. 아버지는 참찬 이훈(李塤)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표연말(表沿沫)·유숭조(柳崇祖) 등과 사유(師儒)로 선발되었다.
1491년 지평이 되고 1493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한 뒤 다시 지평으로 강등되었다가 1497년(연산군 3) 집의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온건하게 처리하려다가 배척되어 영서도찰방(迎曙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연루되어 장(杖) 100을 받고 직첩이 환수되었으며 관노(官奴)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1506년(중종 1) 사헌부집의로 복직되고,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대사헌·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1년 황해도관찰사, 이어서 1513년에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폈다.
1517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는데, 1519년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등을 몰아내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우의정이 되고 한원군(韓原君)에 봉하여졌다.
1521년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유청(李惟淸))]
[생원]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2위(42/100)
[진사]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8위(5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甲3‧乙7‧丙23]
전력 사과(司果)
관직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문과시제 책문(策問)
타과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2위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28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훈(李塤)
[조부(祖父)]
성명 : 이축(李蓄)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숙야(李叔野)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보(李補)
봉호 : 효령대군(孝寧大君)
본관 : 전주(全州)【補】
[처부(妻父)]
성명 : 이령(李聆)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자(子) : 이언호(李彦浩)[文]
[주 1]생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거주지 : 『성화16년경자3월초3일사마방목(成化十六年庚子三月初三日司馬榜目)』(『세촌선생실기(細村先生實紀)』 卷之下, 李文佐, 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61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四(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이훈(李塤)
출생일 1429년(세종 11)
사망일 1481년(성종 12)
조선전기 공조참의, 한성판윤, 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초명은 이서(李墅). 자는 화백(和伯)·도옹(賭翁).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숙야(李叔野)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이축(李蓄)이며, 어머니는 형조판서 서선(徐選)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위이다.
1439년(세종 21) 11세에 처음으로 벼슬에 올라 사직이 되고, 수년 내에 정3품직에 올라 제용감·군자감의 판사를 거쳐 판전농시사가 되고, 1460년 공조참의, 1462년 한성부윤·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평대장이 되어 적의 진로을 차단하였다.
이듬해 경기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다스렸고, 이어서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성종 즉위에 공이 크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한성군(韓城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거쳐 의정부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소(安昭)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훈(李塤))]
이축(李蓄)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황해도(黃海道)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1452[임신(壬申)]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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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1402년(태종 2)
졸년 미상(未詳) (미상)1473년(성종 4)
시대 조선전기
왕대 문종(文宗)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첨지중추부사, 이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보(潤甫).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종학(李種學)이고, 아버지는 광주목사(光州牧使) 이숙야(李叔野)이며, 어머니는 한성부윤 봉유인(奉由仁)의 딸이다.
그는 16세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당시 제수된 관직은 계성전직(啓聖殿直)이었다.
그 뒤 사선주부(司膳主簿)를 거쳐 외직으로 광주판관(廣州判官)을 지냈다.
사헌부의 감찰과 호조의 좌랑 및 정랑, 전농시(典農寺)의 소윤을 지냈으며, 사헌부장령·지사간원사·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봉상시사(奉常寺事)·첨지중추부사 겸 지병조사를 거쳐 이조참의에 올랐다.
1453년(단종 1)에는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 해 9월에 사직하고서 고양(高陽)으로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축(李蓄))]
[관인정보]
관직명칭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관직등급 관찰사(觀察使)
관직이칭 해백(海伯)
부임년월 1452 [임신(壬申)] 임(任)
[도 정보]
도명칭 황해도(黃海道)
[기타]
기타 청선고해백초선(淸選考海伯抄選) (월정즉외안초선(月政則外案抄選))
[출전]
『평산부선생안(平山府先生案)』(국립중앙도서관[古2517-294])
이종학(李種學)
[고려문과] 우왕(禑王) 2년(1376) 병진(丙辰) 병진방(丙辰榜) 동진사(同進士) 17위(27/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C885D559B1361X0
자(字) 중문(仲文)【補】(주1)
호(號) 인재(麟齋)
생년 신축(辛丑)【補】(주2) 1361년 (공민왕 10)
졸년 임신(壬申)【補】(주3) 1392년 (태조 1)
향년 32세
합격연령 16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우대언, 첨서밀직사사, 동지공거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이다.
이곡(李穀)의 손자이며,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다.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다.
그 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다.
1388년 우대언(右代言)으로 요동정벌군이 출정하기 전 조병육정신(助兵六丁神:군사를 陰助하는 6정신)에게 초례(醮禮)를 행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기도 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89년(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는데, 아버지 이색이 정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두 해에 걸쳐 과거를 관장하자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하고, 이색이 탄핵을 받게 되자, 더불어 벼슬이 떨어지고 쫓겨나게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부자가 모두 청주의 옥에 갇혔다가, 마침 홍수가 나서 사면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원지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소환되었으나,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뒤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다.
이 해 조선이 들어서면서 정도전(鄭道傳) 등이 손흥종(孫興宗)을 시켜 이종학을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자기의 문생인 김여지(金汝知)가 판관으로 있어서 김여지의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으나, 장사현(長沙縣)으로 옮기는 도중 무촌역(茂村驛)에서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인재유고(麟齋遺稿)』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종학(李種學))]
[고려사마]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갑인(甲寅) 생원시(生員試)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관직 밀직(密直)
타과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갑인(甲寅) 생원시(生員試)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색(李穡)[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곡(李穀)[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자성(李自成)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중달(權仲達)(주4)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이춘부(李春富)(주5)
본관 : 양성(陽城)【補】
[안항(鴈行)]
형(兄) : 이종덕(李種德)【補】
제(弟) : 이종선(李種善)[麗文]【補】(주6)
[주 1]자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8월 2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자를 추가. “種學字仲文, 韓山伯 穡之次子”를 참고.
[주 2]생년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8월 2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졸년(1392)에서 “31”을 역산하여 생년(1361)을 계산함.
[주 3]졸년 :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8월 23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乘夜縊之, 年三十二.”를 참고.
[주 4]외조부 : 『양촌집(陽村集)』 卷之40, 行狀, [목은선생 이문정공행장(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5]처부 : 『한산이씨족보(韓山李氏族譜)』(1937) 권1, [黃面]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주 6]안항 : 『목은고(牧隱藁)』 碑陰記, [비음기(碑陰記)]를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이색(李穡)
[고려문과] 공민왕(恭愍王) 2년(1353) 계사(癸巳) 계사방(癸巳榜) 을과(乙科) 1[壯元]위(1/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774C0C9FFFFB1328X0
자(字) 영숙(穎叔)
호(號) 목은(牧隱)
시호(諡號) 문정(文靖)
생년 무진(戊辰) 1328년 (충숙왕 15)
졸년 병자(丙子) 1396년 (태조 5)
향년 69세
합격연령 26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학자.
이색은 고려후기 대사성, 정당문학, 판삼사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328년(충숙왕 15)에 태어나 1396년(태조 5)에 사망했다.
1352년(공민 1) 전제개혁, 국방계획,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고려의 향시와 원나라의 과거에 모두 합격하고 관료의 길을 걸었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신유학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여 조선 초 성리학 부흥의 길을 열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 세력과 맞섰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출사 종용을 끝내 고사했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이곡(李穀)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년(충목 4) 3월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 1) 4월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제과에 합격한 뒤 곧 귀국길에 올라 한산으로 돌아왔고, 같은 해 12월 통직랑(通直郞) 전리정랑(典理正郎)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 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윤정월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3월 사은사 윤지표(尹之彪)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구실로 1356년(공민 6) 1월 고려로 돌아와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吏部侍郎)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지제교(知製敎) 겸 춘추관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 겸병부낭중(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2월 국자좨주(國子祭酒), 7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7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한림학사가 되고, 1360년(공민 9) 3월 추밀원좌부승선 지예부사(知禮部事)에 이르렀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였다.
이후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2년(공민 11) 원으로부터 정동행중서성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에 임명되었고, 고려에서는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승진하였으며,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에 봉해졌다. 1363년 윤3월에는 1361년의 호종한 공으로 辛丑扈從功臣 1등에 봉해졌으며, 1365년 3월 첨서밀직사사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윤10월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예부시를 주관하였다.
1365년부터 시작된 신돈집권기 동안 그는 1367년 5월 중영(重營)된 성균관의 교육 부흥과 관련하여 12월 판개성부사로서 겸 성균대사성(兼 成均大司成)에 임명되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같은 달에 원으로부터 정동행성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에 임명되었고, 이후 삼사좌사, 삼사우사를 거친 후 이듬해 4월 친시(親試)의 독권관(讀卷官)이 된 것을 시작으로 1369년 6월과 1371년 3월 예부시의 시관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 20) 5월 지춘추관사로서 감춘추관사인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增修)하였으며, 7월 신돈 축출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에 봉해졌지만, 모친상을 당해 9월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기복(起復)되었으나 곧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하여 1373년(공민 22) 11월 면직되면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다.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名士)와 조선 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 제자들은 고려 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윤소종(尹紹宗)·권근(權近) 등 제자들은 조선 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은 조선 왕조 초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색(李穡))]
[고려사마] 충혜왕(忠惠王) 102년(1341) 신사(辛巳) 진사시(進士試) 2등(二等) (95/99)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관직 시중(侍中)
봉호 한산군(韓山君)
타과 충혜왕(忠惠王) 후2년(1341) 신사(辛巳) 진사시(進士試) 진사(進士) 2등(二等)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곡(李穀)[麗文]
[조부(祖父)]
성명 : 이자성(李自成)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창세(李昌世)
[외조부(外祖父)]
성명 : 김택(金澤)(주1)
본관 : 함창(咸昌)【補】
[처부(妻父)]
성명 : 권중달(權仲達)(주2)
본관 : 안동(安東)【補】
[가족과거]
자(子) : 이종학(李種學)[麗文]【補】
자(子) : 이종선(李種善)[麗文]【補】
[주 1] 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한산이씨]편(100쪽)과 『함창김씨족보(咸昌金氏族譜)』(1808)를 참고하여 외조부를 김요(金鐃)에서 김택(金澤)으로 수정. 김요는 김택의 아들임. 즉, 김요는 이색의 외숙임.
[주 2] 처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한산이씨]편(100쪽), 『양촌집(陽村集)』 卷之40, 行狀, [목은선생 이문정공행장(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과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4쪽]을 참고하여 처부 본관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이곡(李穀)
[고려문과] 충숙왕(忠肅王) 7년(1320) 경신(庚申) 경신방(庚申榜) 을과(乙科) 3위(3/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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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이운백(李芸伯)【補】(주1)
자(字) 중보(仲父)
호(號) 가정(稼亭)
시호(諡號) 문효(文孝)
생년 무술(戊戌)【補】(주2) 1298년 (충렬왕 24)
졸년 신묘(辛卯)【補】(주3) 1351년 (충정왕 3)
향년 54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한산(韓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죽부인전」, 『가정집』 등을 저술한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곡(李穀))]
[고려사마]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丁巳) 구재삭시(九齋朔試)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관직 찬성사(贊成事)
봉호 한산군(韓山君)
타과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丁巳) 구재삭시(九齋朔試)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자성(李自誠)(주4)
[조부(祖父)]
성명 : 이창세(李昌世)
[증조부(曾祖父)]
성명 : 이효진(李孝進)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춘년(李春年)(주5)
본관 : 울산(蔚山)【補】
[처부(妻父)]
성명 : 김택(金澤)(주6)
본관 : 함창(咸昌)【補】
[안항(鴈行)]
형(兄) : 이배(李培)【補】
형(兄) : 이축(李畜)【補】(주7)
[가족과거]
자(子) : 이색(李穡)[麗文]
[주 1] 초명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초명을 추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초명이 "이운백(李芸白)"으로 나옴.
[주 2] 생년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3] 졸년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4] 부 : 『목은집(牧隱集)』 行狀, [조선 목은선생 이문정공행장(朝鮮牧隱先生李文靖公行狀)]과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上 1쪽]에는 부명이 "이자성(李自成)"으로 나옴.
[주 5] 외조부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上 1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씨족원류(氏族源流)』 [한산이씨]편(100쪽)에는 "이춘년(李椿年)"으로 나옴.
[주 6] 처부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과 『함창김씨족보(咸昌金氏族譜)』(1808)를 참고하여 처부를 "김요(金鐃)"에서 "김택(金澤)"으로 수정. 김요는 김택의 아들임. 즉, 김요와 이곡은 처남 남매간(妻男男妹間).
[주 7] 안항 : 『한산이씨세보(韓山李氏世譜)』(1740, 장서각[K2-1807]) 권1, [1編中 3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