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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이 지나고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날이 잦아지는 가운데 온갖 곡식에 살이 오르고 윤기가 더해지는 곡우가 다사로이 오가는가 싶더니 이윽고 입하와 소만이 또 바삐도 찾아온다. 영지산 배알과 뒷동산에는 참꽃과 개나리가, 동구밭에는 능금꽃과 탱자나무꽃이, 마실에는 살구꽃과 복사꽃 오얏꽃 앵두꽃 배꽃 등이 만발했던 분강촌 산야와 강변에는 시나브로 새로운 절기를 맞아 작고 앙증맞은 빨갛고도 선홍색 빛을 띠는 명자나무꽃을 필두로 문배나무 달맞이꽃 민들레 써구새꽃 애기범부채 붓꽃 나리꽃 조팝나무 이팝나무 아카시아꽃 찔레꽃들이 다채로운 무지개빛 색깔로 온천지에 꽃도배를 한다. 이름하여 계절의 여왕 5월이다. 찬란한 5월이 어김없이 도산골에도 찾아와서 이 골 저 골 산간벽지를 마구 꽃동산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도산국민학교 아침 교무 회의에서 중요한 안건이 있는가보다. 봄소풍 장소를 결정하는 억수로 중요한 회의거리가 있단다. 여러 선생님들이 교무실에 빙 둘러 앉은 가운데 퇴계종택 차종손이신 이근필 교장 선생님께서 의견을 물으신다.
"봄소풍 계절이 다가 왔니더~ 워데로 가면 좋을지 우리 선상님들 마카다 의견 좀 내어 보소~"
원로이신 이원륜 선생님께서 좌중을 쭉~ 훑어 보고는 이윽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신 후에 한 말씀을 내놓으셨다.
"지난해 봄에는 청량산에 시딱 갔다 왔고 또 가을에는 도산서원에도 예주륵 댕겨 왔으니 이번에는 부내(분천동, 분강촌) 강변이 좋을 듯 싶니더~ 애일당 분강서원 농암종택도 있고 강물이 넘실거리는 분강 둔치 옆에는 아름다운 물레방간과 전설이 주렁주렁 서린 여러 방구들도 널려 있고 또 양수장 옆에는 디기 우거진 울창한 솔밭 쑤(숲)도 있고 강변에는 왕버들과 수양버들이 줄지어 나자빠져서 커다란 그렁지도 있고 아이들이 모예 가지고 수건돌리기와 숨은 보물찾기 그리고 말뚝박기와 닭싸움, 마실 대항 기마전도 할 수 있는 널따란 잔디밭과 모래 더미까지 있으니 뭐 더 궁한 게 하나도 없을 듯 싶니더~ 더부면 강물에 풍덩 뛰어 들어가서 멱을 감을 수 있는 억쑤로 시원코 맑은 분강도 그득하게 흘러싸니 이게 바로 금상첨화가 아이면 뭐이껴? 하여간에 볼거리가 옳케로 천지 삐까리씨더~ 다들 안그러이껴? 모도 웟뜨이껴?"
교장 선생님께서 이원륜 선생님의 말씀을 다 들으신 후 다시 주변을 돌아보시며 질문을 이어 나가신다.
"나는 좋니더만 다른 선상님들도 혹시 의견이 있으면 마카다 내어 보소~ 이재일 선상님은 워예 생각하니껴?"
"부내 동네 최고씨더~ 부내 맨치로 좋은 동네가 또 있을라꼬요. 대끼리씨더~ 사시사철 깊고 푸른 낙동강이 마실 앞으로 철철 넘치게 흘러뿌고 조각배도 여기저기 마구 떠 있고 하얀 물새들과 물 찬 제비들도 통소와 구여울 위로 휙휙 날라다니고 물레방간과 양수장 푸른 언덕 잔디밭에는 누렁소와 집토끼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아 정겹게 씀바귀를 뜯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궐 같은 고택들이 즐비한 동네 한가운데에 고즈넉이 터전을 잡은 우리 이모님 댁도 있고 뭐 무릉도원이 따로 없니더~"😊🤗😁
"알았니더~ 그런데 이재일 선상님은 어예 그래 풍경 묘사도 잘 하니껴. 마치 시인 같니더. 자~ 또 누구 더 없니껴? 어! 하마터면 건너뛸 뻔 했니더~ 저기 풍금 옆 자리에 계시는 새신랑 같은 우리 강위기 선상님도 한 말씀 해볼라이껴?"
"지는 도산 온 지 오늘로 이레 밖에 안됐심더~ 사실 워데가 워덴지 도통 모르겠심더~"
제대를 하자마자 스물다섯살 청춘의 나이로 급히 연락을 받고 첫 부임지인 토계로 청바지에 빨간 티를 걸치고 후다닥 도산 학교로 뛰어오다시피 한 강위기 선생님은 아직도 도산골이 생판 익숙지 않아서인지 모든 것이 먹먹하기만 하단다. 당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연고지에 있는 안동교대를 나오셨지만 강위기 선생님만은 본가가 창원인지라 대구교대를 나오셨다. 선생님은 이틀 전 인사차 우리 반 교실에 오셔서 대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셨다. 궁산벽촌에 사는 촌놈인 우리들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한국 섬유산업의 일번지인 엄청 큰 도시이자 능금의 고장인 대구가 얼마나 굉장한 곳인지 그저 머리로만 상상을 할 뿐이었다.
우리는 도산골에 살면서 한 번도 전기불 같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하여간 대구는 큰 도시인데 그곳에는 전기불도 있고 자전거도 많고 차도 많고 집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점방도 널려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칙칙푹푹 소리를 내는 기차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예주륵 놀라워 하며 선생님이 딴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도 분명한 것은 대구가 토계 번화가보다는 훨씬 더 큰 도시인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대구에 꼭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저기 배구공 안고 기시는 우리 배구부 코치님인 이재호 선상님은 왜 아무 말쓰미 없으싱껴? 하실 말쓰미 그케도 없니껴? 아이면 배구 시합이 코 앞에 드리미러서 긴장이 하도 깊어서 그러이껴? 지는 도산 학꾜 배구부를 위해 밤낮없이 충썽을 맹글고 있는 이재호 선상님께 억쑤로 감읍하는 바 크니더~ 참으로 디기 고맙니데이~ 그라고 이번 시합에선 부디 단칼에 녹쩐 학꾜 아들과 안동 용쌍 학꾜 아들을 아주 시다이 쫌 크게 무찔러주소~ 이태 전에 우리 도산골 아들이 갸들한테 완패를 당해서 디기 분핸니더~ 지가 교장한 이래로 그케 대참패를 당한 건 처음이씨더~ 워옛든지 부디 그저 큰 승리를 시원하게 맹글어 주소~ 그란데 이재호 선상님은 글쎄 봄소풍을 워데로 가면 될란지 한말씀 시딱 쫌 해 보실라잉껴?"
"아이고 교장 선상님요. 뭐 그 그런 걸 뭐할라꼬 시시만큼 삐삔네로 그케도 예주륵 다 문니껴? 지가 일쩐에 부내 사는 배구 선수 종구 갸가 공일날 연습을 빵꾸 내고 안나왔낄래 자전차 타고 부내까지 갸 잡으러 안간니껴~ 근데 도산서원부터 아이고~ 참~ 갱치가 월매나 씨먹하게 조튼지~ 부내 동네 삽지껄인 애일당 앞에 도착하이 풍경이 하도 조아서 고만 부내 간 목쩍도 마카다 잊어뿌고 신작로에서 덩실덩실 막춤을 마구 쳐댄니더~ 교장 선상님요? ~옹헤야~ ~옹헤야~ 그 노래 아니껴? 지가 그 노래를 연거푸 2절까지 세 번이나 강각 밑에서 마구 불러 재켠니더~ 그러코나이 고만 기가 빠져서 장가질뻔 핸니더~ 봄 갱치가 월매나 마구 흐드러젼는지 아이고 참~ 고마 배구고 나발이고 뭐고 그냥 부내 동네서 쭉 눌러 앉아 살고 시펀니더~ 갱밴에는 마구 왕버들이 쭐루리 하게 줄남생이처럼 서 있고 영지산 중턱 애일당 아래 팽두낭구 밑에는 농암방구가 떡 나자빠져서 누워 있낄래 지가 고만 타고 간 자전차를 도랑섶에 시다이 팍 쳐밧뿌고 바우 위로 마구 올라가서 벌떡 누워 자뿌랜니더~ 월매나 조튼지요~ 배구고~ 종구고~ 뭐고~ 고마 한참 똥안 농암방구 위에서 그냥 쿨쿨 자뿌랜니더~ 근데 잠껼에 워데서 누가 콕콕 시다이 찌르며 갑짝시리 무다이 마구 깨우길래 놀래서 월른 일라보이 고게 글쎄 분강에 사는 하얀 물새떼들이 아이고 뭐잉껴~ 선상님들요? 부내 아들(아희들)을 관찰해 보면 갸들이 시방 단합과 협똥심은 섬마 의인 아들보다 쪼끔 부실해싸도 글찟기 고거 하나만큼은 예주륵 다 끝내주니더~ 도산골에서 최고씨더~ 산천이 이케도 멋쩌 버리고 갱치가 억쑤로 조타 보이 농암 선상의 강호 문학의 심지가 갸들한테로 마카다 쭐루~리 하게 대물림 됐따 카디더~ 교장 선상님요? 지는 고마 요 정도까지만 할라니더~ 부내 야기는 해도 해도 끝도 없니더~ 지 답뼌이 옳케로 지대로 된니껴~"
"말쓰미 없기로 도산골이 알아주는 이재호 선상님께서 저케도 부내 자랑을 가지끈 하시능 걸 보이 참말로 부내가 어지가이 좋키는 좋은갑씨더~ 재호 선상님은 부내가 그케도 좋티껴? 부내가 이원륜 선상님 고향 마실인 대세(단천) 보다도 억쑤로 더 좋타는 말잉껴? 원륜 선상님께서 저기 떡 버티고 계시는데 고 말씀 책임질 수 인니껴? 그케서 종구 갸는 잡아 왔따는거이껴? 안 잡아 왔따는거이껴?"
"지는 고기 대해서는 시방 여기써 말 안할라 카니더~ 언급을 일쩔 회피할까 싶니더~ 선상 생활이 아직도 30년이나 마이 남았는데 대사(단천)를 박하게 말하면 그 뒷깜당 절때 못하니더~ 한참 연배가 위이신 대세 사시는 이원륜 선상님께서 저 쪽에서 떡 버티고 보시는데 말쪼심 몸쪼심 다 해야 하니더~ 다만 지 고향 마실인 가사리(가송) 하고는 비까 비까 하이더~ 그라고 물레방간 왕버들 숲에 꼭꼭 숨어 있던 종구 갸는 단번에 잘 잡아서😢😭 자전차 앞에 확씨리 태우고 둘이서 교가에다가 애국가에다가 새마을 노래에 이어서 옹헤야~를 2절까지 합창해싸며 학꾜까지 무사히 잘 잡아 완니더~"
"저쪽 창가에 탁꾸공을 보게또에 뿔룩하게 이빠이 간수하고 계시는 탁꾸부 코치님인 남시창 선상님께서는 한말씀 안주시고 뭐하니껴? 탁꾸공이 봄소풍보다도 좋타는 말잉껴? 아이면 설마 이전에 근무했뜬 울릉도 섬이 도산골보다도 낫따는 말잉껴?"
"아이고 교장 선상님요~ 그게 아이씨더~ 지는 밤낮없이 탁꾸부 생각만 하느라꼬 시방이 봄이 아이라 오뉴월인쭐 알안니더~ 오뉴월에 안동써 탁구 시합이 안 인니껴? 소풍 야기가 나왔시니 지도 한술 거들라카니더~ 부내하면 뭐니 뭐니 해싸도 분강이 지존이 아잉껴?
부내 마실은 거시기 분강을 정쩜으로 배산임쑤가 가지끈 쫙 펼쳐져 인니더~ 분강이 동네 삽지껄에 있는 애일당 밑에서 농암방구를 마구 휘돌아 쳐서 마실 허리인 물레방간 앞을 유유히 지나 마실 꼬리인 통소와 구여울을 넘쳐 나서 부포로 쫙 흘러싸며 부내 동네와 빠이 빠이를 하는 형상이씨더~ 지가 택리지를 안봐도 훤하이더~ 부네 마실은 거시기 시작부터 끝까지 분강이 주인공이씨더~ 하늘에서 까꿀로 보면 고무신 같은 돛단배 모양이 되니더~
부내 동네와 평행선을 그으며 흘러싸는 분강의 널따란 강변에는 시퍼스름한 잔디밭이 주단처럼 쫙 깔려서 거시기 뭐 소풍놀이 하기에는 여호첨익이씨더~ 도산골에서 최고라 이 말이씨더~ 한마디로 대낄이라 이 말이씨더~ 오죽 분강이 조으면 부내 출신 강호가도의 거산인 농암 선상과 토계 출신 성리학 거봉인 퇴계 선상이 분강에 배를 띄우고 소풍 유람을 안했을니껴~ 족질간이신 도산골 두 성현께서 나라님이 읍소하다시피 내린 갓끈까지도 헌신짝 버리듯 마카다 물리치고 분강 위에 조각배를 둥둥 띄우시고 소풍놀이를 하며 탈속적인 삶을 살다 간 사실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예주륵 다 아는 역사씨더~ 교과서에서 배운 어부가 농암가도 다 부내 동네 분강에서 만들어젼니더~ 도산서원 앞에 그득히 고인 도산5곡인 탁영담이 출렁거려서 마구 넘쳐 나면 바로 밑에 있는 도산4곡인 분강에 사는 고기들과 물새들과 방구들이 마구 조아서 덩실 덩실 막춤을 추며 널따란 강호 도화지에 빼어난 시가를 짓고 기가 막히는 산수화를 멋떨어지게 빚어냈따 아잉껴~ 고런 분강촌으로 봄소풍을 안가면 뭐 뭐 도대체 뭐 워옌단 말잉껴~ 하토로 치면 봄소풍을 부내로 결쩡하는 일은 꾸짜를 놓는 거나 마찬가지씨더~ 지가 이케까지 유씩하게 택리지까지 들먹이며 부내 동네를 추천 해야 되니껴? 너무나 지당한 곳이라서 회의깜도 못되니더~"
"남~ 남~ 남 선상님요. 거시기 쫌 지발 쫌 참으소~ 고 고 고만 하면 된니더~ 그케 흥분만 토하지 마시고 워옛든지 마음을 쫌 조자앉치소~ 발언권을 안좄으면 큰일 날뻔 핸니더~ 유학과 향교와 전례문화까지 박씩하신 우리 남시창 선상님다운 디기 멋찐 부내 동네 해설이언니더~ 한마디로 강추한다 이 말 아잉껴? 농암 선상 만년에 퇴계 선상과 퇴계 선상 행님 되시는 온계 선상까지 분강에 모예서 노를 저으며 선상음악회를 하고 거시기 강물 위에 섬처럼 둥둥 떠 있는 자리방구 위에서 문학과 학문을 담론했따는 사실은 바로 부내가 소풍놀이를 하기에는 적껵이었따는 것을 옛날 성현들까지도 확씨리 입쯩을 했뿌랬따는 바로 고말 아잉껴? 남 선상님요~ 지가 한 말이 옳케로 된니껴?"
"선상님들요? 소풍 장소에 대한 또 다른 의견은 더 없니껴? 있으면 누가 말씀을 더 내 보소?" 교장 선생님께서 재차 질문을 던지신다.
공책에 무언가를 한참 받아쓰기를 하고 있던 임대호 교감 선생님께서 교무실 천장과 마루바닥을 아래 위로 쫙 둘러 보시고는 이윽고 부내 동네 예찬을 절정으로 끌어 올리시며 백미를 딱 찍어버린다.
"선상님들요 모도 마카다 잘 들어 보소. 아들(아희들)이 좋아하는 대로 하시데이~ 영천이씨 대소가 마실인 농암 선상 부내 동네는 본새 산수가 희한하고 기가 막히게 멋찌니더~ 물레방간 둔덕서부터 시다이 마구 자빠져 있는 왕버들 우거진 낙강의 갱치는 솔거와 김홍도가 살아와도 고대로 그릴 수 없니데이~ 학교에서 잰걸음으로 가지껏 시다이 시딱 걸으면 반나절 거반 안돼서 도착 안할니껴~ 아카시아꽃과 솔낭구 숲이 억쑤로 우거진 신작로 가로수길은 아이고~ 참말로~ 말도 못하게 디기 좋니데이~ 일쩐에 남시창 선상님하고 이안(예안) 장터서부터 이십 리 길 걸어오면서 단디 봔는데 그림 그림 이런 그림 없니더~ 딱 한마디로 산천 풍광이 정선의 산수화 저리 가라꼬 하디더~ 고쯤되이 겸재 선상이 "계상정거도(현재 일천원권 지폐 뒷그림)" 왼쪽 끄트머리에 부내 마실을 멋뜰어지게 딱 안 그렸쓸니껴! 모도 안그러이껴? 워디 내 말이 맞으면 가마이 있지 말고 박쑤👏라도 마구 가지끈 쫌 시다이 쳐 보소~ 모도 뭐 뭐 뭐하니껴~ 박쑤 안치고요~"
"😄😅😂🤣~ 👏👏👏👏👏👏👏~~~"
"잘 알안니더~ 소풍 장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듯 싶니더~ 다들 모도 들은대로 고대로 정하시더~ 지가 시방까지 교장하면서 소풍 장소가 오늘처럼 만장일치로 딱 한 뻔에 결쪙나뻐린😄😁 적은 일찍이 없언니더~ 모도 고맙니더~ 마카다 애잡싼니데이~ 혹시 그래도 봄소풍 장소에 대해서 더 하실 말씀이 있는 선상님은 또 없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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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면 더 이상 이견이 없는 걸로 알고 아예 여기서 부내 동네로 대못을 꽝 박았뿌시더~ 아침 조회 때 아이들한테 소풍 날짜와 장소를 단디 알려 주고 부모님께도 똑바로 전달하라고 일러 주소. 모도 그리 알고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카다 끝내시더~"
오늘 등굣길은 엉망진창이 됐다. 배구선수를 하다보니 연습 때문에 맨날 늦게 집에 와서 피곤에 쩌려서인지 매일 녹초가 됐다. 급기야 오늘 새벽에는 나도 모르게 이불에 누런 그림을 그려 놓아서 할아버지께서 머리에 키를 덮어 씌운 채 옆집 효잠할매 댁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일갈하셨다. 하지만 4학년 체면에 갈 수가 없어 오히려 심술을 부리다가 누나한테 따끔하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아침에 그렇게 부산을 떨다 보니 십 리 등굣길이 자연히 또 늦을 수밖에 없었다.
애일당 아래에서부터 뜀박질이 시작됐다. 가슴에 돌려 맨 책보자기 안에 들어 있는 필통에서 몽당연필 삼형제가 삼삼 칠박수를 마구 쳐 댔다. 배암이골(°병암)과 °삼바꼬(삼밭골)를 지나 도산서원 앞에 다다랐는데 시사단과 강나루터 앞에 어정거려야 할 섬마와 의인 아이들이 한 녀석도 안 보여서 애간장이 다 탔다. 아이들을 싣고 건너오는 나룻배를 여기서 만나지 못하면 이건 학교에 가나 마나 지각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 사진1은 1975년 수몰 전 도산서원 강 건너 섬마에 있던 솔밭 전경이다. 솔밭 속에는 소각인 시사단의 모습도 보인다. 가장 이상적인 등굣길은 섬마 시사단의 마당인 솔밭 아래에서 출발한 나룻배가 맞은편 도산서원 강나루에 도착할 무렵에 부내 아이들이 이곳을 통과하면 정말 여유롭고 한가로운 등굣길이 되었다(사진은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도산국민하교 54회 졸업생인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사진2는 2018년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안동댐 수몰마을 생활사 아카이브 사진전"에 전시한 사진이다(2018.12.11~15. 잃어버린 고향, 다시 찾은 마을, 장소: 안동군 와룡면 행정복지센터 2층). 사진의 제목은 "나룻배를 타고 미실장터로 향하는 박시골 우지마 여인들"이다. 사진3은 안동시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주관한 "2022 옛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이명석 선생이 출품한 "1960년 풍산 마애리 나루터" 모습이다. 두 개의 사진에 등장하는 강나루터 전경과 나룻배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유년시절 도산서원 정문 아래 강나루터에서 강 건너 시사단이 있는 섬마 마을을 무던히 오가던 그 나룻배 풍경과 영락없이 닮았다. 그리움이 가득히 묻어나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사진이다. 사진4는 1969년 당시 도산서원 맞은편 강 건너 솔밭에 있던 시사단 전경이다. 사진1의 솔밭 속에 매우 작게 보이는 시사단을 가까이서 촬영한 모습이다. 이원길 선생이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기증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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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해져서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앞만 보고 냅다 뛰고 또 뛰었다. 조동골, °참남배로, °뱅기장, °의인 앤떼이 가설극장 공터와 술도가, 계남고택 앞을 그믐밤하늘에 먹구름 흘러가듯이 휙휙 지나서 도산우체국 앞에 이르니 숨이 차서 목구멍에서 단내가 풍겼다.
백운점방 마루에 널려 있는 어깨동무 보물섬 뽀빠이 라면땅 크림빵 새우깡 크라운산도 오란씨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이발관과 면사무소 자생당약방 도산지서 앞을 삼십육계 줄행랑치듯 지나 토계 다리를 마구 뛰어 건너 교문 앞에 겨우 도착했더니 어~ 이게 뭔시람...😟😫 운동장에서 토까이뜀을 하고 있어야 할 아이들이 왠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문 중앙에서 남시창 선생님께서 곤봉을 빙글 뱅글 돌리시며 저승사자처럼 지각생을 떡 기다리고 있는 모습만 한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도산 학교 군기대장이자 바른생활 훈장이셨다. 훈육 도구로 사용한 매는 주로 가을운동회 때 매스게임 기구로 사용하던 반질 반질 하게 닳은 곤봉과 짜리몽땅하고 통통하게 살찐 가벼운 목봉이었다. 목소리는 제트기처럼 날카로우셨고 몸태는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였던 양정모 선수처럼 탄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마디로 빈틈없는 양반이셨다. 오죽하면 목실골 재수가 등교할 때마다 함께 따라 오는 백구마저 학교 정문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무서워서 꽁무니를 빼거나 마구 오줌똥을 설설 싸는 광경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시먹하고 의뭉스러운 토계 삽살개 땡칠이도 선생님 앞에서는 뒷걸음질 치거나 도망가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억수로 좋아했던 지각과 중간학교에 대해서는 협상과 타협을 절대로 해 주시지 않는 매섭고 강직한 성품이셨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선생님이 참 좋았다. 알고 보면 곰살궂으시면서도 한정없이 잔정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까지 김성년 소사 선생님께서 수업을 시작하는 종을 치지 않아서인지 찰나의 여유는 남아 있었기에 자연히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의인 창우와 영순이 철연이 옥순이 양평에 사는 용철이 그리고 부내 아이들까지 대여섯 명이 가까스로 잽싸게 교문을 통과해서 사지를 벗어나며 운동장으로 쏙 들어왔다. 기사회생하듯 모두가 연신 한 숨을 "후유~" 하며 크게 내쉬고 있었다. 남시창 선생님은 매우 아쉽다는 듯이 우리를 노려봤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렷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는 첫 수업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지각을 벗어나서 운동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땡~" 하며 일 교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마구 울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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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속 지명고찰 : 병암, 삼바꼬, 참남배로, 의인 앤떼이, 뱅기장
♤병암 : 병암은 농암 선생의 여섯째 아들 매암 이숙량(1519~1592)공이 건립한 소각이다. 병암의 옛날 위치는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오른편 200여 미터 지점인 일명 토째비골 안에 있었다. 병풍 같이 이어진 서취병산 중간 즈음 깎아지른 벼랑 위에 지은 정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유년시절에는 터만 남아 있었다. 벼랑지고 어두컴컴한 골이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음산한 분위기가 새로운 지명인 토째비골을 낳게 되었다. 병암(골)이 부르기 쉬운 언어의 역사성을 좇아서 배암이골이 된 것이다. 병암 아래는 넓고도 여울진 푸른 낙강이 분강촌 마을 앞으로 흘러들었다. 농암은 이를 분강이라 이름 지었다. 병암에서 농암 선생과 퇴계 선생이 함께 노니신 역사도 있다. 삼밭골은 일명 삼바꼬라고 불렀다. 삼이 많이 나서 붙여진 지명이다.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선착장 바로 오른편 언덕배기 주변 일대이다.
♤삼바꼬 사진 설명(caption) 및 출처 : 1970년대 권오진 선생이 계모임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야유회를 간 모습이다. 분천동에서 신작로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이 지점이 바로 정확히 삼바꼬(삼밭골: 삼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 지대이다. 1970년대 수몰 전 필자가 유년시절 분천동에서 살 때 도산국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매일 이 신작로로 등하교를 했다. 이 위치를 좀더 정밀하게 조명해보면 옛날 도산서원 아래 샅골 입구(사진에서 보이는 장소는 옛날 샅골 앞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아래 100m 지점이다) 아래 100m 지점이다.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아래 강가에 있는 선착장 입구 오른편 100m 지점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오른편 상단에 나무 울타리 속에 있는 초가집이 있다. 하얀 플라타너스 나무 기둥 뒤에 있다. 유년시절 우리가 매일 보았던 산 아래에 있던 바로 그 집이다. 현재 도산서원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는 내리막길 모롱이(석간대) 아래 지대이다. 유년시절 필자가 배구선수를 한 관계로 방과 후 연습을 하다가 늦게 집으로 올 때 10리 길 가운데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가옥이 이 집이었다. 어두컴컴한 저녁 무렵에 낙동강 강가를 따라 귀가하는 신작로 길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이 지점에 오면 가옥에서 흘러나오는 호롱불 때문에 적잖이 안심이 되곤 했다. 여기서 500m 정도 아래로 내려가면 우리 부내 동네 삽지껄인 애일당이 산중턱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애일당은 조선시대 때 농암 선생이 부모님을 효성스럽게 모시기 위하여 지은 정자 이름이다. 지금은 완전히 수몰되어 사라진 마을이다. 현재 도산서원 진입로 아래 낙동강 강물이 가득히 고여 있는 지역이다. 분천동은 "도산구곡" 가운데 도산4곡 지점에 위치했었다.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 그림 속 왼편 상단 산과 강이 길게 접해져 있는 지역이 옛날 분천동 동네였다. 위 사진은 권오진 선생이 경북기록문화연구원(GACC)에 출품한 작품이다. [사진 출처 : 경북기록문화연구원(GACC)]
♤참남배로 : 참남배로는 의인 맞은편 넓고 긴 여울이 끝나는 지점에 걸쳐져 있던 청소깝 외나무다리 아래 신작로 모롱이 오른편 위에 높이 솟은 벼랑(벼루, 베랑, 깎아지른 낭떠러지) 지대이다. 참남배로는 참나무가 있는 벼루 혹은 벼랑 내지 베랑을 뜻한다. 벼랑은 낭떠러지 지형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을 의미한다.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벼루라고도 한다. 또 베랑은 벼랑의 경상도 방언으로 가파르다는 말이다. 즉, 참남배로는 참나무가 있는 참남베랑 내지 참남벼루라는 뜻인데 언어의 역사성에 의해서 발음하기 쉬운 참남배로로 변형되어진 것이다. 참남배로 아래에는 신작로 길이 있고 길 밑에는 표풍(회오리바람)이 빙빙 도는 검푸른 색깔이 나는 무서운 깊은 소(沼)가 있었다(아래 참남배로 사진 참조).
♤두번째 사진 강건너 중앙 하얀색 원 왼편으로 두번째 작은 골짜기가 조동골이다. 흰 원 주변과 아래 위로 바위로 된 비스듬히 경사진 낭떠러지 지대를 참남배로라고 불렀다. 이 바위산 아래 모롱이가 진 지역과 신작로가 만나는 지대를 사람들은 참남배로라고 했다. 사진을 강건너에서 찍었기 때문에 참남배로 아래 굽이진 모롱이 길이 직선으로 된 신작로처럼 보인다. 두번째 사진은 첫번째 사진의 참남배로 지역만 확대해 놓은 것이다. 첫번째 사진 강건너 오른편 첫번째 골짜기의 바로 우측 지대이다 (사진 출처 : 1970년대 의인에 살았던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 이영순 친구. 사진을 촬영한 시기 또한 수몰 전인 1970년대이다). 첫번째 사진 왼쪽 상단 산중턱에 하얀 띠 모양으로 이어지는 도산서원 진입로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눈앞에 두고 분강촌 동네 앞을 통과하여 도산서원으로 가는 신작로가 마을과 함께 강물 속으로 수몰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1974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다이너마이트를 통해 바위산을 폭파(발포)하면 큰 돌덩이가 산 아래 마을까지 휙휙 날아왔었다. 마을 청년들이 공사를 돕는 일을 하며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현재 온혜로 넘어가기 직전 우측 도산서원 진입로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뚫려 있는 길이 바로 첫번째 사진 상단 가장 왼쪽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띠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그 당시 공사 현장의 바로 그 모습이자 그 길이다. 지금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농암가비를 막 지나서 위험하게 나 있는 산중턱 길 아래로 강물이 가득히 적수되어 있는 지역이 옛날 수몰 전 분강촌(부내 혹은 분천동)이었다. 분강촌 동네 앞으로 직선으로 나 있는 신작로를 따라서 애일당을 지나 산 아래로 난 500여 미터 정도 의 구불구불한 강길을 걸어가면 도산서원 정문이 나왔다. 신작로 옆으로는 낙동강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굽이쳐 흘러 갔고 왕버들과 소나무가 도산서원까지 가로수로 형성되어 있는 운치가 넘치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신작로 길 아래에는 농암선생의 농암바위가 있었고 낙동강 위에 있는 영지산에는 농암의 애일당과 강각에 이어서 병암골(배암이골)과 삼밭골(삼바꼬), 석간대, 전골(샅골) 등이 수몰 후 지금 있는 도산서원 선착장까지 병풍처럼 둘러싸며 수려한 산천을 비경으로 수놓았었다. 첫번째 사진 제일 왼쪽 강 끝에서 500여 미터 더 내려가야 소풍의 종착지인 분강촌 물레방간 잔디밭 강변이 나오고 또한 사진 제일 오른편에서 강길을 따라 다시 1km 정도 더 올라가야 토계와 도산국민학교가 나온다. 하지만 아름다운 낙동강 언덕을 따라 십 리 길을 걸어가는 봄소풍 나들이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의인 앤떼이 가설극장 공터 : 이곳은 의인 번남 바로 맞은편 강건너 즉, 토계 술도가 바로 아래 낙동강 쪽으로 완만히 굽이진 곳에 있던 잔디밭을 말한다. 이 잔디밭 공터에 드물지 않게 가설극장이나 유랑악단이 와서 도산면민들에게 영화나 서커스를 보여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의인 번남 앞 여울 속에 있던 "앤떼이"라는 말은 일본말로 "둑"이나 "보"나 "언덕"을 이른다. 옛날에 의인 번남 앞 여울 물 속에 족히 가로 50여 미터 정도 되는 시멘트 "보"가 길다랗게 놓여 있었다. 한여름 하굣길에 더울 때 멱을 감기 위해 들어가서 자세히 보면 둑을 쌓은 것처럼 물 속에 둔덕이 좁고도 길게 강을 가로질러 의인 쪽으로 쳐져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앤떼이'라고 불렀다. 앤떼이는 일본말이다[えんてい '언제(堰堤)' 혹은 '제언'이라고 한다. 한자 음은 '둑 언', '둑 제' 자이다. 일본어로는 "앤떼" 라고 읽는다]. 즉, 흐르는 물을 막아 가두기 위해 만든 둑이라는 뜻이다. 이 앤떼이는 일제시대 때 지대가 낮은 분천동(분강촌)으로 물을 보내기 위해 물 속에 보(물막이, 보막이)를 설치해서 수면이 높아진 물을 신작로 오른편 수로를 통해 분천동까지 흘러보낸 내력을 안고 있다. 따라서 앤떼이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용어이다. 일제가 물이 부족한 분강촌에 물을 공급하여 더 많은 농산물을 강탈하기 위한 책략과 복심에서 건립한 목적이 좋지 않은 조형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1927년 조선수리조합령을 발표하여 조선반도에서 더 많은 식량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대대적인 수리개량사업(관계수로정비사업)에 착수했다. 이 술책의 일환으로 의인 앞 강물 속에도 앤떼이가 설치된 것이었다. 분강촌 앞에는 사시사철 낙동강물이 넘쳐났지만 동네가 강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서 농수가 항상 많이 부족했다. 당시에는 발전기가 없던 시대라 전근대적이고도 원시적인 방법으로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분천동까지 신작로 좌우편으로 농수로를 만들어서 농수를 공급한 것이다. 이후 1960년대 말에 비교적 현대식인 양수장이 마실 앞 강변에 건립되어 부내 앞들(전평) 논밭에 마치 핏줄처럼 여러 갈래로 물길을 만들어서 강물을 보냈다. 수로가 부내 동네가 끝나는 청고개와 수로미(수루뫼)까지 가서야 끝이 났다. 의인 앤떼이가 설치된 여울 바로 위에는 퇴계구곡이 시작되는 지역으로 넓은 강물이 마치 나룻배나 고무신처럼 모여 있는 사련진이 있다.
♤뱅기장 : 비행기장은 도산서원과 연관되어 만들어졌다.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두 번 이곳을 방문했다(1964.10.14, 1970.12.8). 첫번째는 사업착수를 위한 방문이었으며 두번째는 준공식 때였다. 의인 번남 앞 강건너 즉, 토계 술도가 아래 앤떼이 맞은편 바로 위 신작로 오른쪽에 길을 따라 넓고도 길게 만든 비행기장(뱅기장)은 1차 방문 때 만들어졌다.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돌개바람이라도 불면 뽀얀 모래 먼지가 한정없이 일어났다. 여기서 1km 정도 내려가면 도산서원이 나온다. 신작로 왼편은 낙동강이 길을 따라 굽이굽이 같이 흐르고 오른편에는 참남배로에 이어 조동골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 일곱 번째 그림 오른쪽 끝 지점(강물 왼쪽)인 산모롱이(참남배로)를 돌아 나가면 비행기장이 나오고 뱅기장 끄트머리 신작로 오른편 낙동강 여울 속에 의인 앤떼이가 있었다. 그림 중앙에는 도산서원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제일 왼편이 분강촌, 중앙이 도산서원 그리고 서원 위에 있는 첫 번째 골 지명이 조동골이고 강 끝 지점인 산모퉁이를 돌아서 직진하면 뱅기장에 이어 의인 앤떼이가 나온다.
♤그림 및 사진 설명(caption) : 사진1~4는 도산국민학교 본관 전경이다. 1918년 개교되어 유구한 역사를 지녔지만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수몰되어 산너머 단천 신교정으로 이전하면서 학생 수가 급감했다. 하루 아침에 터전을 잃은 수몰민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더하여 1980년대 중후반부터 더욱 가파르게 진행된 이농 현상과 저출산에 따른 학령 인구 감소로 급기야는 1993년 폐교되었다. 이 도산골에서 숱한 독립지사(독립운동가이자 청포도 시인 이육사 선생이 도산국민학교 1회 졸업생)가 쏟아져 나오고 한국 정신문화가 창달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빛나는 조상의 얼과 고매한 선비의 기품이 뿜어내는 청량한 정기와 기운에 기반한 산물이었으리라. 사진4의 운동장에 산만큼이나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가득히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사진5는 1976년 안동댐 준공을 눈앞에 두고 촬영한 사진이다. 우리가 등교하던 신작로가 참남배로 앞까지 강옆으로 선명하게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왼쪽을 보면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만든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산속에 공사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우리들은 이 신작로를 따라 1975년 1학기까지 토계에 있던 도산국민학교를 다녔었다. 2학기부터는 수몰을 앞두고 산너머에 있는 온혜국민학교를 다녔다. 사진은 수몰 전이라서 그런지 옛길과 옛전경이 그대로 보인다. 사진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왼쪽 낙동강 강둑 길을 따라 아래로 500여 미터 내려가면 분강촌(부내ㆍ분천동)인 우리 마을이 있었다. 토계 학교에서 사진에서 보이는 강둑길 십리를 따라 내려오면 봄소풍 종착지인 분강촌 애일당 아래 물레방간 넓은 강변이 있었다(사진5 출처: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도산서원 아래에서 섬마로 건너가기 위해 여울 위에 놓았던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장마기에 큰물에 사라진 채 외나무다리를 걸었던 돌무더기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수몰을 앞두고 강가 위에 만든 선착장 시멘트 접안대도 보이고 있다. 지금 도산서원 주차창 아래에서부터 강가까지 계단식으로 만들어 놓은 선착장 구조물이다.
사진6은 현재 도산서원 강건너편에 있는 시사단 전경[분강촌 족친 이오연 할배 촬영(2023.7.15), 도산국민학교 54회 졸업]이다. 사진7은 섬마 상공에서 강건너 도산서원 쪽을 촬영한 드론 사진 혹은 항공사진인듯 싶다. 필자의 큰 형님께서 보내왔지만 촬영자는 미상이다(2023.10.29). 사진 속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가운데 바로 앞에 있는 시사단과 함께 강건너 오른편 동취병산 중턱에 위치한 도산서원과 왼편 샅골 석간대 위에 있는 주차장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사진8은 1975년 수몰 전 도산서원 강건너 섬마에 있던 솔밭 전경이다. 솔밭 속에 작은 누각인 시사단의 모습이 보인다(사진6,7과 사진8 사이의 물리적인 시간 간극은 48년이다). 지금의 사진7 자리에 수몰 전 사진8이 있었다. 1975년에 촬영한 희귀한 사진이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두고 시사단이 수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975년에 10여 미터 높이로 단을 만들고 그 위로 이 누각을 옮겼다(사진 출처: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사진6을 보면 도산서원 건너편 섬마는 완전히 수몰이 되었지만 옛날 솔밭에 있던 시사단은 높은 단을 만들어서 그 위로 옮겨 놓아 이렇게 지금까지 그때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림1~3은 학교에서 분강촌까지 봄소풍 가는 길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낙동강(낙강, 낙수) 강변을 따라 나 있던 신작로 등굣길이다. 세 개의 그림 전부 다 왼쪽 끝이 분강촌이다. 그림1의 왼쪽에는 한문으로 분강촌과 분천서원, 애일당, 서취병, 병암 등 옛날 부내 문화 유적들이 표기돼 있다. 서취병은 도산서원 왼편에 있는 석간대(지금 주차장 뒷산 지대)부터 애일당까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산의 이름을 말한다. 도산서원 오른편 산은 동취병이라고 했다. 병암은 삼바꼬(삼밭골) 아래 토째비골 안에 있었던 옛날 정자(누각) 이름이다. 삼바꼬는 도산서원 아래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입구 왼쪽 신작로 위에 있던 왼딴 집과 밭과 골과 언덕 주변을 말한다. 옛날에 삼나무가 많아서 삼밭골이라는 지명이 붙었지만 언어의 역사성으로 인해 발음하기 쉬운 삼바꼬로 변천한 것이다. 병암은 "선성삼필(매암 이숙량, 매헌 금보, 춘당 오수영)"로 알려진 농암의 여섯째 아들인 매암 이숙량 공이 지은 작은 암자였다. 이곳에 농암과 퇴계가 함께 들르기도 했다. 매암은 선조 때 왕자사부이자 문사이자 처사이자 의병활동을 하다가 처연히 세상을 떠난 순국지사이기도 했다. 선성삼필이란 동방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제자 가운데 문필이 뛰어난 삼인을 말한다. 선성은 예안의 옛날 지명이다. 분강촌은 조선 중기 문신 농암 이현보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영천이씨 집성촌이었다. 이현보는 농암가, 어부가 등 많은 강호시가를 남겼으며 사후 지방유림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분강서원을 창건하였다. 분강촌과 도산서원 일대는 산천이 수려하여 도산국민학교에서 십 리 길이나 되었지만 이곳으로 자주 소풍을 왔다. 특히 문화 유적이 많은 곳이어서 70년대에도 관광객과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림1~3을 자세히 보면 산천의 전체 구도가 거의 모두 흡사하다. 그림3의 제일 왼쪽 분강촌에서 출발한 학교 등굣길은 그림 제일 오른쪽 산모롱이를 돌아서 앞서 왔던 거리의 반 정도를 더 가야 도산국민학교가 있었다. 그림1은 월탄 김창석이 1710년 경에 농암 선생 고향마을인 분강촌을 그린 "분강촌도"이고 그림2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1746년 그린 "계상정거도"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후학을 가르친 도산서원 주변의 풍광을 그렸다. 그림 제일 왼편 산과 강이 길게 접해 있는 곳이 봄소풍을 간 물레방간이 있는 분강촌이다. 계상정거도는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이다. 그리고 도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분강촌 바로 위에 학교 가는 길목에 도산서원이 있었다. 그림3은 이호신 화백의 2008년 작품인 "도산서원" 이다. 사진 중간에 집적해 있는 고택들이 도산서원이다. 위에 있는 모든 사진과 그림은 도산국민학교에서부터 분강촌까지 봄소풍 가는 십 리 길 주변 전경과 풍광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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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내 아이들과 타잔 아이들은 단골 지각생~"
그런데 고개를 돌려 교문 바깥을 내려다보니 파란 논과 청보리 밭 사이 학교로 올라오는 언덕 길에 배오지 매내 장구목 말구산 목실골 가둥지 토꾸바들에 사는 타잔 아이들이 죽을 힘을 다해 뛰어오지만 오늘도 영락없는 지각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무리에 있어도 전혀 놀랄 일이 못 되는 원천 땅재 아래 사는 흥구가 오늘도 타잔 아이들과 함께 용맹무쌍하게 동무들 앞에 서서 무리를 진두지휘 하며 폼을 잡고 뛰어오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어쩐담... 저렇게 폼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올 때가 아닌데... 흥구는 학교에서 비교적 멀지 않은 땅재 밑에 사는데도 오늘도 늦잠을 잤는지 아니면 아침에 쟁기로 한 마지기 밭을 갈고 나오는지는 몰라도 여하간에 타잔 아이들을 통솔하며 딴에는 앞장을 서서 개선장군처럼 씩씩하게 일등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목실골에 사는 재수 옆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백구도 함께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풍경이자 도산 학교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용필이와 유국이 주희 건수 재순이 매화 미화 위순이는 아침인데도 얼굴에 온통 소나기를 맞은 듯이 땀으로 범벅져 있었다. 오늘도 야들은 아마 어제마냥 산더미 같이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가득히 서 있는 저 넓은 운동장에 앉아서 귀를 잡고 아장아장 돌아야 하는 토끼뜀을 면하지 못할 듯 싶었다. 험하디 험한 타잔 길을 장딴지가 터질 정도로 울고불며 학교에 온 것만도 칭찬받을 만한 일인데 저렇게 또 졸구리(종아리) 운동까지 시키는 것을 보니 구경 하는 우리 또한 덧정이 떨어질 정도였다.
이따금씩 교실에서 일 교시 수업을 하는 중간에 고개를 들어 운동장을 내다보면 언제나 부내 아이들과 타잔 아이들이 단골 지각생이 되어 운동장을 사이좋게 돌고 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등굣길 십 리가 코찔찔이들에게는 언제나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부내 매내 개목 장구목 배오지 목실골 말구산에 사는 아이들은 유난히 지각을 많이 했다. 야들은 오매불망 반공일날만 기다리며 학교를 다니는 눈치였다.
내일부터는 "등굣길에 삼바꼬와 조동골 앞에서 버들피리를 만들어서 불고 노는 놀이는 하지 말고 재바르게 등교해야지..." 하는 생각을 오늘 수업시간에도 반성하듯 수십 번 되뇌였다. "아니야... 많이 늦으면 아예 삼바꼬 밑에 있는 토째비골이나 도산서원 삽지껄 공글 속이나 아니면 의인 강가 뱅기장 옆 운애네 청보리 밭 속에서 중간학교나 하면서 학교에 나오지 말아야지..." 하는 못된 생각도 살곰살곰 기어나오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알고보면 모두가 토끼뜀이나 곤봉질 때문에 드는 생각이었지만 중간학교를 안하면 어찌 달리 피해나갈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도산골 아이들 성향을 살펴보면 분강촌 아이들이 가장 씩씩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제일 용맹한 아이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일명 타잔 동네 아이들이다. 매내 개목 장구목 배오지 말구산 목실골 아이들은 매일 산 넘고 숲을 헤치고 강을 건너고 또 산 넘고 들을 가로질러 등하교를 하는 타잔 아이들이었다. 야들의 등하굣길은 타잔이나 다름이 없어서 타잔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용맹하고 날렵하고 선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위대한 타잔의 후예들이 이곳 도산골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옷만 다 입었고 "오~오~오~~" 하는 고함소리만 안 질렀다 뿐이지 이리저리 재바르게 뛰어다니는 모양새는 타잔과 영락없이 흡사했다. 그만큼 야들의 등하굣길은 정말 안쓰러울 만큼 험하디 험했다. 매내 사는 용필이는 언젠가 통화에서 매일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배오지 강섶에서 하나를 까먹고 학교에 온다고 했다. 아침에 꽁보리밥을 먹은들 무슨 힘이 나며 그 높은 산골에서 강까지 내려오면 이내 배가 꺼진다는 얘기였다. 용필이가 배구선수를 하다가 그만둔 이유도 알고 보면 결국은 이놈의 멀고 먼 등하굣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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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골 등하굣길 진풍경/ 강 건너 산 넘고 들 지나 논밭길 사이로
목실골과 말구산을 험하게 나와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 산 넘고 들을 지나 학교로 간다 낙동강을 따라 개목 장구목 매내 배오지 아희들도 총총히 내려온다 붉은두들 아래 흥건히 고인 원천못에 새벽강 안개 자욱하다 천사마실 내살미 여울소리에 왕모산과 싹실에 사는 토째비 가족도 잠을 깬다
창연한 원천 동리 들녘에 수박꽃 청포도꽃 감자꽃 메밀꽃 해바라기 무성히 피었다 땅재 구길에 소낭기 굴밤낭구 싸리나무 숲이 고즈넉하다 윷판대 양진암 방앗간 토계다리 지나서 논밭길 사이로 하늬바람 맞으며 살방살방 학교로 올라간다 교감사택 백구가 교문으로 졸랑졸랑 마중을 나온다
우람한 플라타너스 울타리에 매미소리 요란하고 널따란 운동장 하늘에서 고추잠자리가 자꾸 매암을 돈다 양철 지붕 우물가에 주전자 바께쓰 방티 다라이 오봉 바가치 대걸레 엉켜 있고 당번들이 왁자지껄 펌프질을 해댄다 자하봉 산비탈에 모랑모랑 아지랑이 따시한 햇살이 귀신교실에 그득하다 묘목장 미루나무 포플러 꼭대기서 까치가 "까악까악" 운다
선상님들이 신나는 여름방학 기별 알리려 다사스레 교실로 온다 시커먼 제무씨 산판차가 대나무 소쿠리에 누런 옥수수빵을 안다미로 싣고 크락션을 "빵빵~" 울리며 정문으로 들어선다 소사 아저씨가 마구 종을 치며 점심시간을 알린다 분단장들이 막춤을 추고 부산 떨며 돌차간 빵 타러 몰려 간다
하계천 굽이돌아 토계다리 방앗간 양진암 지나 윷판대 땅재 넘어서 원천 붉은두들 오르내리며 대사 배오지 개목 장구목 매내 말구산 목실골 가둥지 토꾸바들 사는 타잔 아희들이 집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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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농암 할배가 보우해 주셨는지 가까스로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소사 아저씨께서 사시나무 떨듯 종을 울려 대었다. 천만 다행히도 지각을 다스리는 학교 뒷산에 사시는 자하봉 산신령님께서 남시창 선생님 편이 아닌 우리들 편이었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순하디 순한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로 선녀처럼 사뿐 사뿐 들어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함박 웃음까지 짓고 계셨다. 무슨 좋은 소식이 있는가보다. 온순하신 성격이지만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우리 4학년 1반 김옥근 담임 선생님이다.
"여러분 오늘도 학교 오느라 수고했어요~
반장~ 인사부터 해요"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시인껴~"
"그런데 영희와 윤칠이 옆에 자리는 왜 여러 개 비어 있나요?"
"선생님~ 타잔 아이들이 오늘도 저기 운동장에 있는 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남시창 선생님과 함께 사이 좋게 토끼들을 쫓고 있어요~"😁😅😂 데설궂은 원근이가 아주 친절하게 뒷설명을 해주었다.
"자~ 여러분! 기쁜 소식이 있어요. 봄소풍 일정이 드디어 잡혔어요. 이번 5월말 반공일날이고 봄소풍 가는 장소는 분천동 애일당 아래 물레방간 강변이라고 합니다. 종구네 마을이기도 한 분천동으로 정했답니다. 오늘 집에 가서 소풍 날짜와 장소를 부모님께 자세히 알려 주시고 여러분도 함께 기억하세요. 모두 아시겠죠~"
"네~~ 와~ 신난다~"
♤그림 및 사진 설명(caption) : 도산국민학교가 봄과 가을에 즐겨 찾는 도산골 근처에 있는 3대 소풍 명소이다. 사진1은 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 속에 정자로 그려 놓은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원이다(사진 출처: 도산서원 별유사로 계시는 이동채 선배님이 보내주셨다: 2023.10.21). 그림2(1992년 이택 선생이 수몰 전 분천동을 그린 "분강도"이다)는 분강과 애일당과 농암종택과 분강서원과 물레방간과 양수장 강변 푸른 솔밭이 있던 아름다운 분강촌이고 사진3과4는 청량산 안에 있는 청량사이다. 청량산은 산세가 빼어나서 영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린다.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청량사는 663년 신라문무왕 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도산국민학교와 도산서원과 분강촌(분천동, 부내)이 내 인생에 미친 아름다운 가치와 맑은 정신은 이루말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은혜와 축복된 삶을 선사했다. 아! 그리운 산천이여! 고마운 도산골이여! 언제나 보고 싶은 벗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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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한 하늘 아래에서 훈민정음을 못 알아듣다니..."
소풍가는 전 날 밤에 마음이 설레어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도합 여섯 근이나 요동을 쳐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되었다. 그리고 한걱정도 되었다. 그저께 선생님께서 비가 올 지도 모르니 우산을 꼭 준비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쩡한 날이 어째서 소풍날만 되면 매번 비가 오는 거야~😓😥 거 참 희한도 하데이 ~"
지난주 공일날에 토계 예배당에서 만난 조동골에 사는 영팔이 행님이 했던 말도 자꾸만 거슬리게 떠올랐다.
"야들아~ 우리 도산 학교가 소풍갈 때마다 비가 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데이~ 뭐 잉꽈응뽀 아이가~ 내살미 가는 묘목장 아래 거름더미에 사는 학교 지큼이 큰 구랭이를 소사 아재가 잡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말로~ 고때 이후로 일 났뿌랬떼이~"
"근데 영팔이 행님요~ 잉꽈응뽀가 뭐이껴?"
"니는 반장하면서 잉꽈응뽀도 모르나~ 야가 큰 일 날 아 네~ 니 공부 쫌 단디 하그래이 ~"
"네~. 그 근데 행님요~ 혹시 인과응보가 아잉껴?" "아이다~ 니는 모르면 가마이 쫌 있그래이~ 확씨리 잉꽈응뽀 맞따~ 비오는 날 구랭이가 목욕한다는 말이데이~ 니 뭘 쫌 알아도 옳케로 단디 쫌 알그래이~ 내가 하도 근심이 돼서 하는 소리떼이~"
"😖🤐😴네! 네~ 행님요~ 잘 알았니더"🤪🤑🤯
달포 전에는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로 알게 되어 펜팔을 하고 있는 서울 반포국민학교 주웅이에게 "우리 학교는 분천동 우리 마을로 소풍을 간다"는 편지도 썼다. 그리고 자랑 삼아 우리 마실은 퇴계 이황 선생이 "살았었던" 도산서원 근처 동네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답장에 "도산서원에 퇴계 선생이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내가 편지를 쓸 때 "살았었던" 이라는 말을 잘못 써서 "살아 있는"으로 적어서 우리 도산골 퇴계 할배를 500살까지 살아 계시게 만드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나는 주웅이에게 소풍 준비로 "콩과 땅콩을 볶고 밤도 삶고 이안(예안)장에 가서 강냉이도 튀기며 소풍 준비를 보름 전부터 차곡차곡 하고 있다"고 했더니 답장에서 "소풍 준비를 왜 보름 전부터 하느냐?"고 하며 또 "소풍을 왜 너네 마을로 가느냐?"고도 물었다. 그리고 "소풍을 가는데 왜 콩과 땅콩을 볶고 밤을 삶느냐?" 하며 몹시 의아해 했다. 편지 끝에는 "이안장은 또 뭐냐?"고도 물었다. 주웅이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하나도 모르는 눈치였다.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도산골에 사는 나도 다 아는 말인데 서울에 살면서도 이 말을 모르니 "학습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도대체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들었다. 대한민국 한 하늘 아래에 사는데도 공용어인 훈민정음을 이렇게 못 알아들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편지 글에서 서로 간에 아구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건 누구의 잘못이람...😫😢😭
나도 어린 탓에 상황에 맞는 정확한 설명이 잘 안되는 대목이어서 답장에 그냥 "콩과 땅콩은 볶으면 맛이 가장 좋은 과자가 되니 너도 한 번 볶아서 실컷 먹어라~"고 얼버무렸더니 다음 답장에서 또 난데없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은 초콜렛"이라며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을 대며 딴 소리를 했다.
"앵~ 그런데 초콜렛이 다 뭐여~ 그게 밥 종류여! 국 종류여! 떡이여! 아니면 생선이여! "
드디어 소풍날이 다가왔다. 도산국민학교를 출발하여 술도가를 지나 의인 앤떼이로 내려가는데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서늘한 강바람이 신작로로 불어오는데 느낌으로 비바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었다. 급기야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위로 무지개가 걸쳐지고 다리 아래 여울 위로 피래미들이 팔딱팔딱 솟구쳐 올라 강중백이를 몇 번 치는가 싶더니 이내 소낙비가 후두둑후두둑 소리를 내며 방울방울 떨어졌다. 분명 햇볕이 나는데도 비가 오는 것을 보니 아마 오늘 천사 마실 내살미 싹실골에 사는 젊은 호랭이 호돌이 놈이 장구목에 사는 이쁜 색시 호순이에게 장가를 드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늬바람이 강바람과 섞여서 신작로로 불어오자 언덕에 줄지어 하얗게 핀 아카시아꽃들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막춤을 추더니 이내 하얀 꽃송이를 송이송이 만들어 함박눈처럼 신작로에 가득히 뿌려 주었다. 일대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윽고 빗방울이 조금씩 더 굵어지면서 갑자기 요란스럽게 "쏴아~ 쏴아~ 쫘르륵쫘르륵~" 의악새 타는 소리를 내며 한바탕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이내 챙겨 간 구멍 난 담녹색 낡은 비닐 우산을 황급히 펴고서는 혜옥이부터 찾았다. 혜옥이는 다행스럽게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옹알거리며... 가슴 졸였다.
"혜옥아~ 이제 때가 온 거야~ 하늘이 맺어주는 거야~ 외면하지 마~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면 돼... 이 도산골 마라치가 다 지켜줄게. 아무 주저말고 너는 그저 '이재일 선생님께서 안계화 선생님의 대따 시원한 양산 속으로 도산골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사뿐사뿐 마구 뛰어서 들어가신 것처럼' 이 담녹색 나의 비닐 우산 속으로 살방살방 예쁘게 그저 다소곳이 들어오기만 하면 돼... 그러면 도산골 학교 생활도 소풍길처럼 행복하고 이후 인생도 아예 걱정하디를 말어~"🤗😍🤩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녀석이 혜옥이에게 우산을 갖다 주고는 그리고 살갑게 펴 주는 충격적인 장면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비록 도산골이긴 했지만 그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구나" 하는 무서운 세상 이치를 냉정하게 깨닫게 되었다. 거침 없는 고속도로 행보에 큰 장애물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자신만을 믿고 너무 방심했던 탓이었다. 세상살이에는 늘 지뢰가 사방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외시 하며 그저 낙천적으로만 생각해 온 것이 엄청난 화근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마디로 짝사랑 관리에 소홀했었다는 얘기다. 그때 받은 엄청난 상실감과 자괴감으로 한동안 산과 강과 나무와 바위를 바라보며 사색하고 동시를 쓰고 소요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다 뭔 시롬...🤑 그 녀석은 단지 그냥 혜옥이 사촌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누구에게 감히 도전장을... 도산 학교 달리기 선수이자, 배구 선수이자, 밀양대 감자꾸지 레시피 보유자이자, 1.2.3.4학년 줄반장 그랜드 슬램 석권자이자, 부내 동네 꼬마들 리더이자 그리고 우리 동창생 가운데 왕초인 섬마 동인이와도 유일하게 맞짱을 뜨는 도산골 분강촌 동자 마루치한테 누가 감히 도전장을 내는거야...
비행장을 지나 참남배로를 돌아나가자 퇴계선생이 굽어살피셨는지 다행히 소낙비가 금방 그쳤다. 그리고 동요 몇 곡을 군가처럼 부르고 나니 또 금방 도산서원 앞을 굽이돌아 부내 우리 마을 애일당 아래에 있는 물레방간 강변 푸른 잔디밭 종착지에 도착했다. 언덕 옆으로 흐르는 넓고도 파란 낙강의 시원한 강바람이 웃으며 우리들을 손님처럼 맞이해 주었다. 태양이 영지산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한 것을 보니 점심 시간이 되자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 소풍 온다는 특급 정보를 워디서 구했는지 풍선 장수와 지게에 환타 콜라 칠성사이다 오란씨를 가득 싣고 와서 파는 음료수 장수와 등짝에 아이스께끼 통을 매고 어름과자를 파는 하드 장수까지 마구 몰려 와서 물레방간 주위를 빙빙 돌며 소풍 분위기를 팍팍 돋구었다. 나는 얼른 칠성사이다 한 병을 사서 책보자기 속에 꼭꼭 숨겨 두었다. 이건 점심 때 우리 선생님께 드릴 내 순정의 징표였다. 그리고 숨겨 놓은 칠성사이다를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강물처럼 잔잔해지며 그지없이 행복해졌다.
♤그림 및 사진 설명(caption) : 문학산책 속 봄소풍 종착지인 애일당(愛日堂, 1512년 중종7년 농암 이현보 건립, 위 사진)과 분강촌(아래 그림) 전경이다. 애일당 아래에 물레방간 푸른 잔디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다. 위 사진과 그림 속 분강 중간 오른쪽 산 밑에 보이는 오목한 지대에 있는 정자가 애일당이다. 그림 속 분강 강변 물레방간에서 양수장 언덕을 따라 푸른 잔디밭과 울창한 솔밭("수"라고 함: 소나무 숲)이 길게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지고 있다. 사진 중앙, 강가 오른편에는 농암 선생의 호(號)가 되는 큰 "농암바위"가 보인다. 사진은 안동대륙사진관 월파 윤수암 선생이 1960년대에 촬영한 애일당(왼편 정자)과 강각(江閣)의 모습이다(오른편 정자). 그림은 유산 김영환 선생이 2014년에 그린 "분천마을도"이다. 애일당은 농암 선생이 분강(낙동강이 분천동 동네 앞에서 그득히 고여 있는 형상을 농암은 "분강"이라고 불렀다) 기슭에 지은 누각이다. 부모님께서 연로해서 하루하루 가는 날이 안타까워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강각은 원래 애일당 정자 아래 분강 강가에 지었지만 농암 당시 큰 홍수에 허물어져서 애일당 위에 재건했다. 강각은 한국 강호 문학을 태동시킨 강호시가의 요람지이다. 애일당 보다 작은 소각이다. 이 강각에서 농암과 퇴계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농암의 "어부가"도 여기서 탄생했다. 애일당 아래 분강 강가에는 농암의 호(號)이자, 농암의 대표적인 시작(詩作)인 "농암가聾巖歌"의 유래가 되는 농암 바위(일명 이색암耳塞巖)가 있다. 분강촌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완전히 수몰되었다. 이곳에 있던 농암종택과 분강서원, 애일당과 강각 그리고 운곡리에 산재해 있던 여러 정자 등 농암 선생의 문화 유적들은 2004~2005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농암 문화 유적 복원사업(농암종택 복원사업)으로 인해 2007년 가송리로 이전하여 옛날 구도로 모두 재현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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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순정이 베르너의 '들장미'로 분강에 울려 퍼지고~"
도산구곡을 굽이굽이 거침없이 역행하며 흘러 온 낙수는 부내에 와서는 잠시 여독을 풀고 쉬어가는 정거장으로 삼았다. 분강촌에 이르러서는 거친 강물이 크고 널따란 조각배 같은 지형에 모아지면서 수려한 분강을 만들었다. 산야가 아름답고 노닐 수 있는 누각이 많고 재미나는 민담과 전설이 주렁주렁 달린 동네이다 보니 강물인들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리오~
점심 시간이 되자면 아직도 거반 한 시간 경은 남아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서 선생님께서 니치(niche) 이벤트를 진행하셨다. 모두가 푸른 잔디밭 왕버들나무 그늘 아래에 둘러 앉아서 흘러가는 비취색 강물을 바라보며 쉬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우리들을 보시며 말씀을 내놓으셨다.
"이 아름다운 강변에서 누가 멋진 노래를 들려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우리들을 빙 둘러 보셨다.
그런데 갑자기 일순간 조용한 정적이 돌며 어찌된 영문인지 손을 드는 아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반장인 나는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좋은 왕버들 무대를 해치고 싶지 않아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머리 속을 스쳐 갔다. 반장으로서 느끼는 일종의 책임감이라 할까 아니면 이 서먹한 상황으로 인해 우리 고운 선생님을 실망시키면 안된다는 아름다운 순정의 마음이라 할까.
"선생님~ 제가 불러도 될까요?"
"그래~ 반장부터 한 번 불러 보거라"
나는 지난해 늦가을 보름달이 훤하게 비추던 분강 언덕 양수장 푸른 잔디밭에서 여러개의 남포등에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마치 연등처럼 소나무 숲 가지에 주렁주렁 걸어 놓고서는 동네 4H 활동을 하는 형님들과 누나들이 무용을 하며 가르쳐 준 노래가 머리 속에 번뜩 선곡으로 떠올랐다. 베르너가 작곡한 번안곡 "들장미"였다.
"선생님. 들장미를 부를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하렴. 여러분~ 모두 박수로 종구 노래를 맞이해 주세요"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봄 햇살이 무성한 물레방간 푸른 언덕에서 사모하는 고운 선생님을 앞에 두고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며 왕버들 가지에 앉아서 놀고 있는 하얀 물새들과 눈을 맞추며 애일당 소나무 숲에서 산들산들 불어오는 하늬바람을 맞으며 한 소절 한 소절 들장미를 부르고 있자니 하늘에서 작은 요정들이🧚♀️🧚🧚♂️ 분강에서 만들어 온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고운 아지랑이 포말들을 물레방간 파란 잔디밭으로 소록소록 뿌려주는 동화 같은 세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마 들장미 가사를 지은 볼프강 괴테도 젊은 시절 쉬트라스부르크에서 프리데리케라를 사랑할 때 요정들이 뛰어 노는 아름다운 들판에서 빨갛게 피어나 있는 들장미를 바라보면서 어여쁜 그 소녀를 생각하며 순결한 마음으로 이 시를 써 내려 갔으리라.
푸른 초원에 갓 피어난 청초하고 어여쁜 들장미를 바라보는 순정의 맑은 눈빛과 가슴 속에서 솟아나오는 신비한 꽃향기에 취해서 빨간 들장미 곁을 떠나지 못하고 하염없이 꽃송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덧 청춘은 강물처럼 흘러갔으리라.
아~ 양수장 푸른 언덕 솔밭에 울려 퍼졌던 볼프강 괴테의 애련미 가득한 들장미 싯구여~ 아름다운 선율로 분강 통소와 구여울 위로 날려 보냈던 베르너의 애잔한 멜로디 빨간 들장미여~
그 향기에 취해서~
정신없이 보누나~
장미화야 장미화야~
들에 핀 장미화야~"
♤그림 설명(caption) : 봄 햇살이 무성한 물레방간 푸른 언덕에서 사모하는 고운 선생님을 앞에 두고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며 왕버들 가지에 앉아서 놀고 있는 하얀 물새들과 눈을 맞추며 애일당 소나무 숲에서 산들산들 불어오는 하늬바람을 맞으며 한 소절 한 소절 들장미를 부르고 있자니 하늘에서 작은 요정들이 분강에서 만들어 온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고운 아지랑이 포말들을 물레방간 파란 잔디밭으로 소록소록 뿌려주는 동화 같은 세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림 및 사진 설명(caption) : 낙강 속에 안치된 전설의 물레방간 풍경을 처연하게도 그림으로 살려 냈다. 위 그림은 전 화랑교육원 원장인 분강촌 화가 족친 이택 선생이 필자에게 직접 그려 준 수몰 전 1950년대 물레방간 주변 전경이다. 사진은 1964년 여름 물레방간 아래 분강 둔덕에서 이택 화가가 촬영한 사진이다. 수몰된 부내 물레방간과 분강 빨래터 주변을 담고 있는 남아 있는 유일하고도 희귀한 사진이다. 사진 왼편에 엄청나게 큰 왕버들나무와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푸른 낙강이 보인다. 강물 너머로 낙동강 강변에 줄지어 서 있던 섬마 아랫 지대에 있던 포플러나무가 보인다. 큰 왕버들나무 오른쪽에 강물과 맞닿아 있던 빨래터가 있었다. 사진 오른쪽 물가에서 쳐다보는 작은 아이들도 이제는 일흔의 나이가 되셨다. 그리움이 물씬 풍겨나는 애수 가득한 풍경이다.
♤분강촌 물레방간 봄소풍 때 소년이 베르너의 들장미를 부르며 작은 가슴 속에 순결하게 그렸던 50여 년 전 나의 고운 은사님이셨던 김옥근 선생님의 당시 모습이다. 선생님께서는 그 시절 우리들이 배구선수와 탁구선수를 하며 마땅히 먹을 것이 없어서 허기져 힘겨워 할 때면 양호실과 붙어 있던 숙직실에서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굶주린 우리들을 보살펴 주셨다. 다음에 뵐 때면 들장미를 한다발 안겨 드리며 그리고 베르너의 "들장미"를 부르면서 우리 선생님을 오래오랫동안 꼭 포옹해 드리고 싶다.
♤영상 설명(caption) : 유년시절 분강촌 물레방간 푸른 강변 잔디밭에서 흘러가는 분강을 바라보며 하얀 물새들과 눈을 맞추며 불렀던 하인리히 베르너의 "들장미"를 아내 앤과 함께 불러 보았다. 그 옛날을 그리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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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두가 둘러 앉아 시시만큼 준비해 온 찬합의 군음식과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고구마 감자 장떡 옥수수 삶은달걀 시루떡 볶은콩 땅콩 찐밤 튀밥... 어떤 아이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김밥에 노란색 단무지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어떤 아이가 자생당약방 내영 공주였다. 순둥이인 내영이는 동무들이 하나 둘 김밥을 다 가져가는데도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이자 착한 혜옥이가 다가가서 자기 도시락을 농갈라 먹는 고운 마음씨를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행동을 하는 혜옥이가 후광효과로 다가와서 한층 더 예뻐 보이기만 했다. 그저 혜옥이가 꼼작거리는 모든 행동이 다 이뻤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재일-안계화 선생님처럼 마음씨가 착한 혜옥이에게 장가를 들게 해 달라고 물레방간 왕버들나무 신에게 읍손하며 소망을 빌었다. 이쁘고 선하고 들장미 같이 순결한 도산골 소녀 우리 혜옥이...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사진1은 봄소풍의 종착지인 우리 동네 분강촌(부내, 분천동) 물레방간 푸른 잔디밭 위에 있던 아름다운 애일당(愛日堂) 전경이다(아래 정자). 애일당 위에 정자는 강각(江閣)이다. 애일당 아래 낙동강 강변에 푸르게 펼져져 있던 물레방간 잔디밭으로 봄소풍을 왔다(안동대륙사진관 월파 윤수암 선생이 1960년대 촬영한 애일당 경관).
사진 2는 애일당 주변 풍광을 강 건너 즉, 섬마 아랫 지역에서 촬영한 것이다(애일당 강 건너에서 촬영한 전경). 일제강점기 때 관청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작가는 미상이다. 애일당 아래 긴 수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인(의촌리) 앤떼이(보막이 혹은 물막이)에서 시작된 수로를 분강촌까지 완성한 후 준공 자료를 남기기 위해 촬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는 1927년 조선반도에서 더 많은 식량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관계시설정비사업(수리시설정비 및 개량사업)에 착수했다. 사진2의 낙동강 위에 보이는 긴 시멘트 수로도 이때 착공된 것이다. 수로를 만든 후 준공 자료를 남기기 위해 관청에서 사진을 찍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3은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으로 추정된다(선생구거계상촌先生舊居溪上村). 겸재 선생이 "계상정거도(현재 일천 원권 지폐 뒷그림)"를 그린 시기인 1746년 경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낙동강을 따라 분강촌까지 오는 봄소풍 십 리 길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제일 왼쪽이 분강촌이고 중앙 지역은 도산서원이고 제일 오른쪽은 조선시대 때 단천 왕모산성 주변에 있었던 월란사 일대이다. 그림 제일 왼편인 분강촌에서 중앙에 있는 도산서원 오른쪽 아래 천연대까지는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여기서부터 단천 월란사 주변까지는 산천을 압축해서 넣되, 풍광이 뛰어난 갈선대 및 월란사 주변을 중심으로 화폭에 담았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다. 분강촌에서 토계번화가 위쪽 자하봉 산비탈에 위치했던 도산국민학교까지가 십 리 길이고 학교에서 단천 월란사까지도 족히 2km가 되는 만큼 화폭에 담은 전체 거리(분강촌에서 단천까지)는 6~7km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다(그림3을 터치하여 확대해보면 지역을 더욱 상세히 알수 있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세 개의 사진 모두 분강촌 봄소풍 무대이다. 사진1은 1512년 농암 선생이 건립한 애일당(愛日堂) 아래 분강 강변이다. 왼쪽 우거진 솔나무 숲 속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인 고풍스러운 애일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애일당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농암 선생이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니 흘러가는 날들이 안타까워서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낙강 벼랑 위에 고즈넉이 지은 아름다운 정자이다. 하루 하루 가는 세월을 소중하게 여기며 부모님과 연로하신 종친 노인들 그리고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마실 노인이면 누구나 이곳에 와서 즐겁게 소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농암 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은 "구로회(九老會)"로 이어졌으며 농암 사후 임금이 내린 시호 "효절공(孝節公)"과 가훈이 되는 "적선(積善)"이 탄생하는 단초가 되는 누각으로 작용했다. 우리 후손들은 선조 임금이 내린 적선을 가훈으로 받들고 있다. 나는 농암 선생의 16대 손이다.
사진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애일당 아래 강변에는 푸른 잔디밭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었고 강가에는 물레방간과 왕버들과 수양버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들은 이곳에 봄소풍을 왔다. 사진 속 사람들은 둘째 누님(오른쪽 두번째 분자ㆍ1974년 겨울) 동창들이다. 모두가 분강촌 종친들이다. 사진2는 양수장 아래 푸른 솔밭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 이곳 울창한 소나무 숲에 남포등을 걸어놓고 동네 4H 활동을 하는 형님들과 누나들이 무용과 동요를 가르쳤다. 사진 속에 아이들은 재술이 아재(왼쪽 첫번째ㆍ1970년 8월)와 동생들이다. 분강 강변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다. 솔밭 오른쪽으로 넓고 깊은 분강이 고요히 흘러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분강촌 사람들이 이름하여 "통소"라고 부른 지역이다. 강물이 넓다란 통처럼 깊고도 우묵하게 형성된 지형을 따라 지명이 붙여진 것이다.
오뉴월이면 안개꽃이 무성하게 피고 지던 분강에는 그리운 추억들이 강물 속에 많이 묻혀 있다. 3학년 어느 초여름날이었던가. 우리 동네 분강촌 친구 집에 혜옥이가 놀러를 왔다. 그때 친구들과 더불어 마실 앞 분강 강변으로 산보를 나갔다. 강가에는 하얀 지붕을 이고 있는 양수장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강 언덕에는 선대들이 옛날부터 방풍을 위해 심어놓은 수백 살 먹은 우거진 솔나무들이 무성한 솔밭 쑤를 이루고 있었다. 솔밭 속에는 마치 파란 주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푸른 잔디밭이 둔치를 따라 널따랗고도 길게 통소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리는 동심의 무대가 동화처럼 펼쳐져 있던 아름다운 분강 강가에서 아카시아 잎과 씀바귀를 잔뜩 뜯어와서 감실이 속에 내가 애지중지 키우던 검은 토끼와 흰 토끼들에게 먹이를 나눠주며 정겨이 웃던 아련한 기억도 추억의 편린으로 그립게 날리고 있다.
둔치 아래로 은빛깔색으로 반짝이며 흘러가던 아름다운 분강에 얽힌 유년시절의 추억과 잔상들이 애틋한 그리움으로 평생 동안 내 삶의 주변에서 쉼없이 서성거리며 얼마나 깊은 애수와 향수들을 자아내게 했던가.
나는 유년시절 분강 주변에 있던 물레방간과 통소와 양수장 강가에서 혼자서 낚시질을 즐겨 하며 적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강을 바라보며 먼 곳에 사시는 부모님의 안부를 강물에게 물어볼 때면 여울진 구여울 강물은 언제나 부드럽고 인자한 소리로 곧잘 대답을 해주곤 했다. "영원의 눈을 가진 푸른 저 강물은 어디로 흘러 가는 것일까. 저 강물이 다다르는 먼 산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어느 때는 이렇게 소요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반나절을 넘기는 때도 있었다. 낚시질을 하며 턱을 괴고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어 있는 소년의 모습이 적이 떠오른다.
사진3은 실거랑 건너 천방둑 안에 있던 넓은 솔밭이다. 시원한 그늘과 풍광이 아름다워서 소풍놀이 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서 봄소풍을 온 예안중학교 학생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선생님 뒤편 오른쪽 학생이 재술이 아재이다. 예안중학교 2학년 시절인 1971년 모습이다.
세 개의 사진 모두 분강촌에 살았던 종친 재술이 아재가 소장하고 있다. 필자의 분강촌 수필을 애독하시는 아재가 수몰 전 자신이 직접 촬영한 옛 부내 사진들을 대부분 보내주셨다. 수필과 옛날 사진들이 함께 어우러지니 사실감과 더불어 추억들이 더욱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위에 있는 사진들은 두번째 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0~1974년 사이에 촬영한 것이다. 세 개 사진 모두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작품이다.
사진4는 토계번화가 도산지서 앞에 있던 자생당약방(권영진 선생님) 큰 따님인 내영(58회 동창) 공주가 1973년 3학년 때 부내(분천동) 애일당 아래 물레방간 강가에 봄소풍을 와서 이재일-안계화 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한 전경이다(사진출처: 58회 권내영). 오른쪽 아이는 내영이의 동생 두현이다. 내영이는 현재 예천에서 아름다운 우리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공익사업에 헌신하고 있다(사단법인 경북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 예천군지부ㆍ지부장). 동생 두현 선생도 안동의 지역문화유산 계승과 발전을 위한 공익단체인 세계유산콘텐츠센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1972년 2학년 때 우리들의 담임 교사였던 이재일-안계화 선생님 내외분께서는 현재 대전에 계신다. 종종 소통을 하면서 정겨운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유년시절 분강 강변에서 있었던 봄소풍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전경이자 그리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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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당첨과 같은 숨은 보물찾기에 환장을🤣 하고~"
점심 시간이 끝이나자 학년별로 반별로 준비해 온 다채로운 이벤트와 게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반은 "숨은 보물찾기" 이벤트를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점심 후에 미리 물레방간 주변을 돌며 왕버들나무와 갈대숲과 바위와 모래와 잔디밭 속에 보물 이름을 적은 종이를 꼭꼭 숨겨두셨던 모양이다.
"자~ 지금부터 숨은 보물찾기 시간이에요~ 꼭꼭 숨어 있는 보물들을 재미나게 찾아 오세요~"
아이들이 일제히 보물을 찾기 위해 "와~" 하고 고함을 지르며 이리저리 사방팔방으로 날뛰고 헤매며 눈을 부릅뜨고 난리법석을 떨며 마구 설쳐 댔다. 화폐만 아닐 뿐이지 요즘으로 치면 로또 당첨과 흡사한 이벤트였다. 보물과 학용품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지폐 역할을 했다. 재미도 있지만 빈난했던 시절이라 학용품을 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최고의 보물은 크레파스였다. 특히 대왕 24색 왕자파스와 20색 신신파스는 아이들을 환장하게 만드는 멋진 보물이었다. 재바르거나 꾀가 많은 녀석은 두 개 내지 세 개까지 보물을 주워오기도 했다. 보물을 잘 찾으려면 보물을 숨긴 지형을 간파할 수 있는 혜안과 안목이 뒷따라야 한다. 이를테면 "그러려니 한 곳을 쉬이 지나쳐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아니 그러려니 한 곳에 꼭 있는 것만도 아니었다". 수양버들나무 위에 홍수 때 떠내려와서 걸려 있는 비닐 속에 보물을 싸서 숨겨 놓는 선생님의 지혜는 단연코 백미이자 압권이었다. 이런 것은 십중팔구 크레파스와 연결된 보물이었다. 하지만 돌맹이 밑에 묻어놓는 보물은 목실골 재수가 학교 올 때 함께 따라 오는 백구도 쉬이 찾아서 공책을 탈 수 있는 허접한 장소로 통했다. 이런 곳은 선생님께서 그냥 학용품을 적선하기 위한 배려 차원의 보물이었다.
보물찾기에는 아이러니 한 면이 있었다. 다시말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장소를 그냥 지나치면 큰 낭패가 따르고 또 있을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 오래 머물면 아니 없고 그냥 아까운 시간만 보내는 격이었다". 시간 대비 손 안에 넣을 수 있는 보물의 확률을 본다면 분명 제로섬 게임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상상력으로 찾는다면 어째어째 기시감이나 데자뷔가 통하는 게임인 것 같기도 했다. 살방살방 세상을 유심히 그리고 찬찬히 살피는 구석이 있는 부내 유혁이와 독서력이 대단해서 추리력이 뛰어난 목실골 미화가 보물찾기 왕이 되었다.
설레발 치며 건성건성 마구 돌아다니는 부내 용규는 오늘도 몽당 연필 한 자루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좋아서 희희낙락 하며 행복해 했다.
자칭 숨은 보물찾기의 왕이라고 말하는 용규는 괴상망측한 비법으로 보물찾기를 했다. 하여간 얄궂은 데가 많은 시먹한 놈이었다. 딴에는 서취병산 병암에서 배웠는지 아니면 갈선대 아래 월란사에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희한한 도술로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괴술을 보이는 듯 했지만 끝내 찾아 낸 수확물은 언제나 거의 맹탕과 허탕 수준에 불과했다. 용규의 그럴듯한 괴술을 근 50여 년 만에 이곳에 적나라하게 폭로하고자 한다. 우선 까만 때가 누렁지처럼 퇴적된 왼손 바닥을 넓게 단단히 펴고 그 위에 입 안에 고여 있는 온갖 침을 예주륵 다 뱉은 다음 오른손 검지 중지 두 손가락으로 죽으라고 "탁" 친 후에 침이 튀는 방향으로 가 보면 보물이 있다는 해괴망측한 논리였다. 용규 말에 의하면 눈을 감고 가도 거기에는 무조건 보물이 아예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설왕설래 하면서도 정말 있을지도 모를 보물을 갖고 싶은 마음에서 용규가 가르쳐 준 대로 기대 반 의심 반으로 눈을 부릅뜨고 때꼬장물 저린 손 바닥에 온갖 침을 뱉어 놓고는 죽으라고 두둘겨 보았지만 한 두 번은 맞고 여덟 번은 꽝이었다. 그러면 용규는 한 두 번 맞은 결과를 가리키며 "그것 봐라 내 신통술이 맞지 않느냐?" 하며 의기양양 해 하는 식이었다. 그건 신통술과 관심법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맞게 돼 있는 논리였다. 네 번 가운데 한 번, 열 번 가운데 한 두 번은 무조건 맞아 떨어지는 것이 산수 시간에 디기 어렵게 배운 주사위 던지기 수업의 골자인 확률 변수가 아니었던가.
순진한 도산골 아이들이 나름대로는 자기 지혜를 짜내어서 분주하게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당수 아이들이 기대 심리에 현혹되어 긴가민가 하면서도 용규가 가르쳐 준 괴법대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 사방에 침을 튀기며 분강 둔덕을 마구 설치며 헤집고 다녔다. 그 당시에 코로나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다면 도산지서에 당장 잡혀갈 용규였다. 소풍 온 아이들이 마구 침을 날리고 튀기며 여기저기 돌아치는 바람에 난데없는 쇠파리만 물레방간에서 큰 잔치가 났다며 쌍나팔을 불고 튀는 침을 마구 받아 먹으며 생난리를 쳤다. 참으로 보기 드문 희한한 진풍경이었다.😁😂🤣
나는 소풍 때마다 그 짓을 따라 하다가 쫄딱 망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자꾸 하다보면 나중에 어느 때는 입 안에 침이 하나도 없어져서 목이 말라 쓰러질 것만 같았다. 급기야는 물레방간 빨래터로 내려가서 분강에 엎드려 강물을 꿀꺽꿀꺽 삼키며 마른 목을 축이기도 했다. 하여간 용규는 유년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비범한 구석이 억수로 많은 아이여서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에 딱 맞는 녀석이었다. 아예 그 프로를 위해 태어난 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자살궂은 용규가 참 좋았다. 그와 한 동네에서 산다는 그 자체가 코미디이자, 희극이자, 행복이었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사진1은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생들이 1976년 도산서원에 봄소풍을 와서 도산서당 좌측 축담 위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담임이신 장필모 선생님의 모습도 보인다. 오른쪽 제일 뒷편에서부터 왼편으로 홍위자, 다음 다음이 김순희, 금동길, 권세운, 이동용, 김명수, 김흥구, 박수갑 등 그리운 죽마고우들이 47년 전 도산골 천연의 도화지에 전설의 각명을 아로새겨 놓았다.
사진2는 1970년 도산서원 어귀 강나룻터 아래 강가에 봄소풍을 와서 촬영한 것이다. 뒤에 낙동강과 버들나무 섶이 보이고 있다(56회 백은주 선배 제공ㆍ백운이발관 자제분). 사진 속 좌측에 있는 류귀현 선생님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선생님은 1학년 때 담임이셨다. 넓은 운동장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참새들 마냥 우리들을 옹기종기 앉혀 놓고 동요를 부르시며 사뿐사뿐 무용을 하시는 선생님의 고운 모습은 말그대로 천사였다. 선생님은 5월의 흰 장미 같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오늘 같이 구름 한 점 없고 연파랑 하늘이 대지를 가득히 채우고 온갖 새들이 세상을 경외하듯 지저귀고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이는 날은 모름지기 달력에다가 "류귀현의 날"이라고 써 붙여도 좋을 듯한 ㆍㆍㆍㆍ우리들에게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오른쪽 분은 은주 누님 어머님이다. 좌측 첫번째가 은주 누님이고 옆에는 동생들이다. 선생님과 은주 누님의 어머님이 일가여서(성과 본이 같은 겨레붙이) 자주 어울리셨다고 한다(류귀현 선생님께서는 2022.12.21 향년 76세를 일기로 작고하셨다. 우리가 반백 년을 그리워 하며 찾았던 분을 이제는 영원히 그리워 하며 살게 되었다).
사진3은 53회 졸업생들이 1970년 5학년 때 청량산(청량사)에 소풍을 가는 광경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지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줄지어 가는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왼쪽 산 밑에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경이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 58회 졸업생들은 1973년 3학년 2학기 가을 소풍 때 청량산 청량사로 소풍을 갔었다. 그때 우리 학년 모두가 단체로 찍은 기념 사진을 분실한 것이 마치 유년시절의 애틋한 한 추억을 상실한 것처럼 여겨져서 안타까운 마음을 두고두고 지울 수가 없다. 그 속에는 조그마하고 귀엽고 선한 어린 가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사진4는 도산국민학교 58회 분강촌 아이들의 최근 모습이다. 세월이 거반 반세기나 흘러가다 보니 아이들이 어느새 이순을 눈앞에 둔 어른으로 변해 버렸다. 사진 오른쪽부터 숨은 보물찾기의 허당 황용규, 숨은 보물찾기의 달인 유혁이, 조태현 육성회장님 따님인 경숙이, 탁구선수 기린아 재향이, 만화 재주꾼 재웅이, 요조숙녀인 순옥이 모습이다. 강화도 해변가 유혁이네 전원주택에서 분강촌 향우회 때 정겹게 함께 한 기념 사진이다(2022.10). 나는 코로나 호흡 후유증으로 참석을 하지 못했고 다른 동무들은 일정이 맞지 않아서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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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박자 나버린 수건돌리기로 첫사랑은 부서지고~"
다음 이벤트로는 "수건돌리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친구들 간에 그리고 이성들 간에 호불호를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흥미 넘치는 재미나는 놀이였다.
혜옥이에게 노란 송월타월로 내 마음을 간절히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혜옥아~ 이 노란 손수건이 내 마음이야~ 오매불망 '노란 손수건' 같은 내 마음을 어여삐 받아달란 말이야~"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수건을 갖고 앞뒤도 안 재고 흥분해서 마구 내달리다 보니 그만 뛰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혜옥이 다음 자리에 앉아 있는 위자 등 뒤에 노란 손수건이 떨어지는 절대로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큰 변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위자~ 홍위자... 이게 뭐냐고... 너가 왜 거기에 앉아 있냐고! 아~ 이제 어쩌란 말이냐! 엇박자 나버린 이 소년의 순정을..."
하지만 와신상담 기다리면 기회란 또 오는 법이다.
두 번째 기회가 어렵사리 찾아왔다. 의인에 사는 창우가 내 등 뒤에 노란 손수건을 정확히 갖다 바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터졌다. 하지만 창우가 내게 수건을 갖다 바칠 건덕지는 전혀 없었다. 실은 내 옆 자리에 원천 사는 순희가 앉아 있었는데 창우 또한 날쌘 걸음을 멈추지 못해 평생 후회할🤣 일을 삽시간에 저지르고 말았다.
"창우~ 이 정신나간 놈아~ 내가 너의 맘 속구석을 모를 줄 알고... 얌전한 체 하는 놈이 부뚜막에 마구마구 먼저 기어올라 가고 있구나..."
"앵~ 그런데 지금 내가 남을 욕할 형편이 못 되는데..."
창우 마음이 어떨런지는 눈을 감고도 훤히 알 수 있었다. 내 처지가 그렇다 보니 남의 마음도 유리 알처럼 다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창우의 자책골에 힘입어 나는 또 한 번의 기사회생 할 수 있는 어려운 기회를 잡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일찍 수건을 놓고 갑자기 강바람까지 불어오는 통에 수건이 균형을 잃고 날리더니 그만 혜옥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재열이 등 뒤에 투척되는 엄청난 재앙이🤣 터지고 말았다. 자연 재앙도 아닌 타이밍을 놓친 완전한 인재였다.
아~ 엄재열! 너는 또 왜 그 자리에 있다냐!
재열이는 책상을 같이 쓰는 4학년 때 짝꿍이었다. 책상 위에 그어지는 38선 문제로 일년 내내 아옹다옹 다퉜는데 도무지 협상이 안되고 타협도 이끌어 낼 수 없는 천하무적 상대였다. 흡사 싱가포르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북미정상 같은 사이였다. 그 당시 책상 위에 긋는 상호 불가침 조약인 38선은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여유로운 책상 공간을 일년 동안 확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학기 초에 시작되는 협상 결과에 의해 결판이 났기 때문이다. 그게 잘못 되면 일년 내내 웬수처럼 지내야 했다. 손과 팔이 조금만 영공을 침범해도 바로 삔침 세례가 미사일처럼 무자비하게 날아오고 몽당연필과 몽당지우개가 길을 잃고 조금만 넘어가도 책받침 밀대로 바로 확 쓸어버리는 작은 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어떻게 하다가 또 재열이 등 뒤에 송월타월을 던졌을까... 나도 정신이 나갔고 송월타월도 완전히 미쳤나 봐..."😢🤣😭
두 번씩이나 노란 손수건이 마카다 헛 떨어지자 나는 망연자실 했다. 어쩐담...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인재가 낳은 대재앙이었다. 해피 반공일이 아니라 순식간에 블랙 반공일이 되어 버렸다.
"아~ 혜옥이와 이번 생에서는 다 글렀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마구 솟구쳐 올랐다. "혜옥이도 은근히 바랐을지도 모를 내 마음을 위자와 재열이에게 통째로 갖다 바치다니... 그것도 쌍다래끼로 두 번씩이나..."
두 번의 기회를 두 명의 아이에게 나 보란 듯이 투척하는 놀부 심보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혜옥이는 얼마나 실망하고 상심하고 원망하며 부서졌을까.
"혜옥아. 그게 아니야. 송월타월이 나쁜 놈이야. 그 노란 손수건이 미쳤단 말이야... 아니 강바람이 정말로 바람이 난 거라고... 홍위자, 엄재열이 아니고 옥이~ 혜옥이~ 바로 너란 말이야. 너! 너! "
나는 속으로 애원하다시피 중얼거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되뇌이는 아픈 독백은 고요한 분강 속으로 흩어졌다.
혜옥이는 소풍이 끝날 때까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싸늘하게 대했다. 착한 혜옥이가 저다지 무섭게 돌변한 것은 다 송월타월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내 평생 송월타월을 다시 쓰나 봐라...😤" 하며 가슴을 조자앉혔다. 그리고는 눈 앞에 서성거리고 있는 애먼 위자와 재열이만 대따 탓하고 나무라며 행악과 원망을 마구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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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자야! 재열아! 이렇게 48년 만에 진심으로 엎드려서 용서를 구한데이~ 그때 노란 손수건 사건 억수로 미안하데이~ 가만히 앉아 있던 착한 너희들을 마구마구 원망해서 시다이 미안하데이...😁😂🤣 다음에 동창회 때 만나면 맛나는 볶은 땅콩과 찐밤과 삶은 계란과 옥수수에다가 하얀 튀밥까지 왕창 다 사 줄게...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사진1은 1977년 2월에 졸업한 58회 동창들의 졸업 기념 사진이다. 단천 신교정으로 옮겨와서 첫 번째로 졸업을 한 31명의 학생들이다. 학생 수가 적어서 앨범 없이 달랑 졸업 사진 한 장이 전부이다.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도산국민학교 구교정이 수몰되어 산너머 단천에 신교정을 새로 짓고 5학년 2학기부터는 이곳에서 수업을 했다. 우리 분천동 아이들과 웃토계, 양평에 사는 아이들은 단천 신교정이 너무 멀어서 1975년 2학기부터는 산너머에 있던 온혜국민학교로 편입 되었다. 분천동에 살았던 나는 본의 아니게 온혜국민학교에서 졸업을 했다. 이런 사연이 있기에 평생 동안 도산국민학교를 더욱 더 연연해 했다. 사진2는 2017년 2월 안동에서 있었던 58회 졸업생들의 동창회 사진이다. 필자 또한 58회이다. 제일 오른쪽이 보물찾기 맹탕 허풍쟁이😜 분천동 황용규이다. 용규와 함께 한 유년시절은 희극 같은 나날이자, 행복했던 추억으로 기억된다. 사진3은 2020년 2월 안동에서 있었던 58회 졸업생 동창회 사진이다. 몇 명 되지 않는 친구들이지만 도산골 정기를 받아서인지 상업, 농업, 수산업, 운수업, 건설업, 전기업, 양축업 종사자와 이장, 통장, 반장, 동장, 서장(제일 왼쪽이 성주경찰서장을 지내고 현재 안동경찰서장으로 재직중인 내살미 이동승 친구), 세관장(평택 세관장을 지내고 현재 부산본부세관 심사국장으로 재직 중인 의인에 살았던 이갑수 친구. 옛날 이름은 수필 속에 나오는 창우이다. 창우는 일정이 맞지 않아서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4의 왼편에 넥타이를 맨 친구이다), 청년회장, 시인, 화가 등 직업도 다양하다. 종합하면 짐짓 어지간한 중견그룹 하나는 될 듯 싶다. 사진4는 2023년1월7일 안동에서 있었던 58회 동창회 단체 사진이다. 사진5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상호불가침 조약이 이루어졌던 협상 테이블인 1970년대의 책상 모습이다. 자세히 보면 38선이 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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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꽃이 눈송이처럼 하얗게 날리던 유년시절 봄소풍 신작로 길 그리워~"
이듬해 도산골은 안동댐 준공이 다가오면서 수몰 국면으로 급속히 접어들었다. 도산골 사람들은 반천 년을 지켜오던 세거지를 울부짓으며 떠나가기 시작했고 수려한 산천과 찬연했던 문화유산들은 마치 혼이 빠져나가듯이 황폐해져 갔다. 동심의 눈으로는 결코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들이 무자비하게 변하는 초유의 세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도산구곡의 절반은 태초에 있었던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30년 전 어느 늦가을날 저녁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혜옥이와 다시 만났다. 체스넛크래커를 닮은 단풍색 모자를 쓰고 고동색 빅카라 롱 트렌치 가을 바바리에 빨간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가을 머플러를 걸치고 멀리 있는 나를 어찌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며 새첩스럽게 그녀가 다가왔을 때 나는 그 옛날 송월타월 사건도 그리고 쉘부르의 우산 사건도 까마득히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늦가을 노을빛이 플라타너스 나뭇잎에 크레파스 색깔로 단풍 그림을 그리고 수은등이 점차 하얀 은빛가루를 연신 토해 내는 마로니에 공원의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학교에 임용되기 전에 기자생활을 12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외부 진행자로 라디오 방송을 공동 진행하고 있었다. 혜옥이가 워째 그 방송을 들었는지 편집국으로 소식을 건네 온 것이다.
그때 혜옥이가 생뚱맞게 한 말이 추억 속에 잠자고 있는 봄소풍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끄집어 냈다.
"야~ 노란 수건을 내 등 뒤에... 그것도 두 번씩이나 왜 놓지 않았니? 숙녀의 자존심을 뭘로 아는 거야? 사실은 기다렸단 말이야... 왜 그랬어!!! 지금이라도 말을 해 봐! 말을 해 보라구!!!"
"아니야~ 그게 아니었다고... 너는 남의 속도 모르고는... 그놈의 뜀박질... 그놈의 뜀박질이 박자를 못 맞춰서 산통을 다 깼다고..." 😄🤤😥
우리는 한참 동안 마주 보며 깔깔 대면서 웃었다. 그리고는 3학년 가을 소풍 때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청량산에 갔던 얘기며, 아름다운 분강촌 왕버들 우거진 물레방간 푸른 잔디밭 강변에서 씀바귀를 캐던 얘기며, 가을운동회 때 도산 마당 큰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펄럭이던 만국기와 공굴리기 박깨기 차전놀이 하던 얘기며, 개미들처럼 줄줄이 이어 서서 단천 신교정으로 학습 기자재를 나르던 얘기며, 배구선수와 탁구선수를 하며 김옥근 선생님께서 숙직실 부엌에서 간식으로 해주시던 찐빵을 정문옆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돌벤치에 앉아서 맛나게 먹든 얘기며... 또 이근필 교장 선생님, 임대호 교감 선생님, 이원륜 선생님, 이동후 선생님, 이동섭 선생님, 남시창 선생님, 류귀현 선생님, 이재일-안계화 선생님, 장낙진 선생님, 신순영 선생님, 김옥근 선생님, 강위기 선생님, 이재호 선생님, 장필모 선생님, 김성연 소사 선생님 등을 한 분 한 분 추억하며 도산 학교 얘기를 애틋하게 나누었다. 유년시절 도산골과 도산 마당 캔버스에 채색해 놓은 짙은 향수가 배인 기억 속의 애잔한 그림들은 무정하게 흘러간 세월의 부피에 바래거나 잊혀지기는 커녕 수목들의 나이테처럼 겹겹이 그리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특히 단천 신교정으로 학습 기자재를 줄지어서 옮긴 후에 도산골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 즈음에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야! 울지 마~ 바보같이 울기는..."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눈물이 흘러나와서 따라 울었다. 그녀가 가을 해바라기가 그려진 노란 손수건을 건넸다. 그 옛날 노란 송월타월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유년시절 분강촌 낙강 강변에 무성하게 줄지어선 왕버들나무의 길다란 가지가 푸른 강물에 드리워져 있던 아름다운 물레방간 빨래터 풍경과 파란 잔디밭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늦은 밤 혜화동 성당 저녁 종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어둠 속으로 쓸쓸하게 걸어가던 혜옥이가 다시 돌아와서 배시시 웃으며 농스럽게 말했다.
"야! 이종구~ 내가 한 번 포옹해 줄게. 어이구 이쁜 녀석~ 건강하고... 잘 살아야 해~ 알았지~ 살아보니... 서울 생활이 만만치 않더라... 도산 학교가 늘 그리워..."
"야~ 너가 누나야... 말하는 것 하고는... 응... 알았어... 너도... 건ㆍ강ㆍ해...😢 그리고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누나처럼 오랫동안 등을 다독이고는 다시금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이내 시야에서 금새 사라졌다. 혜옥이는 미술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그리워 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피천득 선생님의 "인연"》 중에서]
나는 도산 마당에서 2년 동안 혜옥이를 보았고 20년이 지난 후에 한 번을 더 만났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마지막 만남은 아니 만났어도 좋을 듯 싶었다. 그리움의 미학은 추억만큼 아름답다.
아~ 양수장 푸른 언덕에서 흘러가는 아름다운 분강을 바라보며 사모했던 선생님 앞에서 그리고 순정 어린 마음으로 청초한 첫사랑을 그리며 불렀던 유년시절의 애잔한 멜로디 베르너의 들장미여~
일월은 구름 속으로 달이 가듯이 쉬이 흘러 갔다. 유년시절 정겹던 도산 마당에서 흥구와 해수와 석철이와 종익이와 유국이와 응구와 순희와 창우와 용필이와 내영이와 재수와 재순이 용규 윤칠이 재향이 위자 유혁이 재열이 미화 매화와 선희 옥순이 용철이 동승이 낙구 택윤이 재락이 영순이 철연이 운애 동운이 영란이 은희 송자 금숙이 위순이 재웅이 영희 동용이 호윤이 기종이 영일이 수철이 건수 세운이 정숙이와 금향이 헌철이 명옥이 수갑이 옥화 종희 갑연이 금숙이 경희 병점이 혜경이 명숙이 옥현이 순태 명수 경식이 정미 상원이 현서 영자 숙이 주식이 옥희 성찬이 동길이 종미 원근이 규환이 미향이 화자 영자 갑윤이 수완이 주희 용춘이 동인이 도윤이 순옥이 경신제 그리고 미영이와ㆍㆍㆍ 벌써 별이 된 동무들과 선생님들과 추억의 일기장을 함께 썼다는 것은 아름답고 은혜롭고 축복받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물 속으로 사라진 터전으로 인해 상처받은 신산한 영혼은 평생 동안 삶의 뒤안길을 서성거리게 만들며 언제나 유년시절의 주변을 맴돌게 하고 있다. 오늘처럼 실록이 더욱 푸른 빛을 띠고 교정에 녹음이 수북히 짙어진 5월이 가득찬 날이면 도산 학교 봄소풍 생각으로 스산해지는 마음을 가누기가 힘들다.😢
괴테의 "들장미" 시에 음색을 입힌 하인리히 베르너의 인생은 ["봄 한철 격정을 인내" 하고 떨어진 "분분한 낙화"《이형기의 "낙화" 중에서》] 처럼 짧았으나 강렬했다. 그는 생전 84곡을 작곡했는데 이 가운데 백미가 분강촌 물레방간에서 울려 퍼진 들장미였다. 베르너는 서른세 살에 요절했다. 그는 세상과 작별하면서 아름다운 들장미 소녀 프리데리케라를 그리며 눈을 감았으리라.
모든 것이 흘러갔다. 세월도 강물도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따라 영원 세계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지친 넋은 옛 기억을 붙잡고 상념의 종을 울리고 있다. ["영원한 눈길을 한 지친 강물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 간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추억에 머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도 흘러간다... 날이 가고 달도 흘러 가고 가버린 시간도 옛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중에서》].
혜옥이도 갔고 나의 청춘도 흘러 갔다. 도산골 의인 여울 앞 강변 위로 길게 펼쳐진 신작로에 눈송이처럼 휘날리던 하얀 아카시아 꽃잎도 강물따라 흘러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느 봄날에 일어난 일장춘몽 같고 그저 꿈결처럼 아련하기만하다.
내일 공일날은 류귀현 선생님과 김옥근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그 옛날 유년시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듬뿍 받으며 어리광을 잔뜩 부릴까 보다.😢😭 그리고 위자하고 재열이한테도 전화를 해서 "그 옛날 봄소풍 때 왜 거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느냐"고 또 생떼를 부리며 마구마구 야단을 쳐 줄까 보다♧.😁😂🤣
-The end-
♤모든 것이 흘러갔다. 세월도 강물도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 따라 영원 세계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지친 넋은 옛 기억을 붙잡고 상념의 종을 울리고 있다. ["영원한 눈길을 한 지친 강물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 간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추억에 머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도 흘러간다... 날이 가고 달도 흘러 가고 가버린 시간도 옛사랑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아 있다"]
♤사진 종합 설명(caption) : 사진1과 2는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인한 수몰로 폐허가 된 토계에 있는 도산국민학교 구교정 잔해이다. 단천으로 이전한 신교정 또한 1993년 학령 인구 감소로 폐교되었다. 45년만에 찾아간 옛교정의 운동장은 여전히 넓었다. 한때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애잔하고 쓸쓸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청포도"의 저항시인 이육사 선생이 1회 졸업생이다. 사진3(1970년대의 원천마을: 출처는 경북기록문화연구원)은 1975년 봄이 가고 있는 어느 초여름날 단천 신교정으로 전교생들이 줄지어 서서 학습 기자재를 옮기던 원천마을 앞 도로와 동네 주변 전경이다. 이 목가적인 마을에서 이육사 선생이 태어났고 그의 대표적인 시작인 "청포도"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현재 이곳 마실에 육사 생가와 이육사 시비 공원 그리고 이육사박물관이 있다.
사진3의 마실 앞으로 나 있는 직선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붉은 흙으로 된 언덕길을 "붉은두들"이라고 한다. 원천못 왼편 언덕길인 붉은두들은 붉은 흙이 단천 마을까지 연결되어 있을 만큼 지형적으로 이색적이다. 사진 왼쪽 아래에 보이는 경사진 언덕길은 "땅재"이다. 땅재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홀로 있는 초가집이 58회 동창생인 김흥구네 집이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두고 그 전 해인 1975년 1학기 말경에 토계에 있던 구교정의 학습 기자재들을 단천으로 이건한 신교정으로 전교생들이 개미들처럼 줄을 지어 옮기는 대역사가 이루어졌다. 토계 구교정에서부터 시작하여 퇴계 선생 묘소가 있는 앞길을 지나 땅재를 넘어 원천 마을앞 직선길을 통과하여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원천못의 오른편으로 접어들면 작은 천방둑 길이 나타나고 그 둑방길을 타고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단천 신교정에 다다른다. 이 둑방길은 단천으로 돌아서 가지 않고 바로 질러서 신교정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차도가 아닌 시람들만 걸어다닐 수 있는 매우 작은 길이었다.
사진4, 5(도산초등학교 58회 카페방, 이동운의 아름다운 풍경)는 도산국민학교 신교정이 자리한 도산구곡 가운데 7곡에 해당하는 단사(단천, 대사, 대세) 마을의 수려한 주변 풍광이다. 단사협은 선계의 경계라고 할 만큼 고산정이 있는 8곡과 더불어 도산구곡의 백미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사진4의 중앙에 있는 파란 건물이 도산국민학교 단천 신교정이었다. 신교정은 1993년 폐교되었다. 사진6,7,8은 도산국민학교 구교정에 마지막으로 근무하셨던 교원 세대이다. 사진6의 좌측 상단 분은 이근필 교장 선생님(현재 퇴계종택 종손, 필자의 동창생인 경신제 아버님)이고 우측 하단 분은 임대호 교감 선생님이다. 필자의 동창생인 미영이 아버님이다. 사진7의 제일 윗 줄 왼쪽에서 두 번째 분이 이원륜 선생님이고 두 번째 줄 제일 왼쪽 분은 이재일 선생님이고(세 번째 줄 제일 왼쪽 분은 이재일 선생님의 부인이신 안계화 선생님이다. 내외분께서는 우리 58회 졸업생들이 2학년이었을 때 1반과 2반 담임을 맡으셨다) 세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분은 류귀현 선생님이다(58회 졸업생들의 1학년 때 담임). 사진8의 제일 아래 왼쪽 첫 번째 분이 남시창 선생님이고(58회 졸업생들의 4학년 때 담임) 세 번째 안경 쓰신 분이 강위기 선생님(58회 졸업생들의 5학년 때 담임)이다. 4학년 때 우리 담임이셨던 김옥근 선생님은 사진8의 두 번째 줄 제일 오른편에 계신 분이다. 사진10은 경희대학교 연구실에서 촬영한 필자의 모습이고 사진11은 2020년 2월, 58회 동창회 모임 때 안동댐 "낙강물길공원" 징검다리에서 위자가 담아준 필자의 모습이다.
도산골 도산 학당에서 선생님들이 가르치신 인ㆍ의ㆍ예ㆍ지는 도산의 얼이자, 정신이었다. 이 지면에 계시는 선생님들과 우리는 봄소풍을 가고 가을소풍을 가며 도산 마당에서 애환을 함께 했다. 낙동강 천삼백 리 가운데 가장 수려한 풍광을 지닌 곳이 도산골이다. 청랭한 얼과 문화도 찬연하지만 아름다운 산천이 무릉도원이나 다름없었다. 도산골 아이들은 은혜롭게도 유년시절 도산구곡의 절반을 봄소풍 가을소풍으로 유람하는 축복을 받았다. 도산골 골짜기마다 은둔했던 토째비들은 희화적인 동화와 설화로 정서를 살찌웠고 산천에 깊이 뿌리를 드리운 노송과 큰바위들은 신령스러운 기운과 정기를 주었으며 도산구곡에 널려져 있는 문화 유적 속에는 선대들의 빛나는 얼이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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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epilogue)
"그리워 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나는 도산 마당에서 2년 동안 혜옥이를 보았고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한 번을 더 만났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마지막 만남은 아니 만났어도 좋을 듯 싶었다. 아름다운 그리움은 추억만큼 아름답다.
오늘처럼 봄 빛깔이 곱거나 혹은 어느 늦가을날 나뭇잎이 바랜 색조로 늙은 빛을 띠는 계절이 오면 어디에선가 저 멀리서 조지 존슨이 슬픈 사연을 쓰고 제임스 오스틴 버터필드가 음색을 넣은 "매기의 추억"이 자꾸만 스잔하게 들려온다. 조지와 매기 그리고 유년시절이 그립게 떠오르며...
["추억이 어린 경치를 바라보려고 옛날 그 언덕에 오늘 다시 올랐다 그리운 매기.
개울이 흐르고 낡은 물레방아가 돌던 먼 옛날 우리가 함께 뛰어놀았던 데이지꽃 향기가 가득한 이곳에.
푸르던 나무는 언덕에서 사라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개울의 물소리도 낡은 물레방아의 모습도 옛날 우리들이 듣고 보았던 그대로구나.
매기 오늘 나는 그대 없이 홀로 여기에 다시 서 있소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가 모든 것은 꿈처럼 아련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아름다운 데이지꽃 향기와 잊을 수 없는 그대와의 추억은 내 늙은 눈 속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구려.
그리운 매기 나는 오늘 그대 없이 이 텅 빈 동산에 다시 올라 와서 먼 옛날 함께 뛰어놀던 그 개울과 낡은 물레방아와 짙은 향기 가득한 데이지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떠올리고 있소"]
아~ 양수장 푸른 언덕에서 흘러가는 아름다운 분강을 바라보며 사모했던 선생님 앞에서 그리고 순정 어린 마음으로 청초한 첫사랑을 그리며 불렀던 유년시절의 애잔한 멜로디 베르너의 들장미여~
♤영상 설명(caption) : 볼프강 괴테의 "들장미" 시에 아름다운 음색을 입혔던 하인리히 베르너의 인생은 "봄 한철 격정을 인내" 하고 떨어진 "분분한 낙화" 처럼 짧았으나 강렬했다.
아내 앤이 연주한 베르너의 "들장미"- - - 아! 그리운 유년시절이여~ 속절없이 강물처럼 흘러갔구나.
첫댓글 그 누구도 상상만으로 쓸수 없는 추억을 사실적으로 억수로 잘 썼니더. . .
잘 보고 있어요
어릴적 학창 시절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동심의 세계로 빠져 드니더~
고맙니더~
좋은글 올려 줘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으니 그 시절 그리워지고 마음이 애잔해진다. 나중에 폐교된 단천 신교정으로 도시락 싸서 봄소풍 가을소풍 가재이~
와우~작년에 올린 글인데 벌써 2천 클릭이 넘었네
["부내 동네 최고씨더~ 부내 맨치로 좋은 동네가 또 있을라꼬요. 대끼리씨더] 이제는 가고파도 갈 수 없는 아름답고 그리운 동네지~
에세이 속에 나오는 선생님들께서 봄소풍을 읽으시고 옛날을 무척 그리워 하시며 메시지를 보내온 것을 읽자 하니 눈물이 납니다. 이제는 연세가 정말 많으신것 같습니다. 우리 동창회에서도 그리고 친구들도 종종 안부 인사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와! 수십년, 아니 100년을 되돌린 교정사진과 풍경들!! 그리고 어느 동네나 꼭 있던 흔한 이름 영팔이.... 어찌 이리 생생한 기억을 갖고 계시나요!!! 산넘고 개울넘고.. 학교로 고고씽.. 비오면 물이 불어 학교도 못가던 시절의 얘기.. 참 그리운 옛날입니다.
😢😢😢😭
에세이 속에 등장하는 이재일 선생님의 메시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