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데가 천국임네까?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루카 13,18).
멋진 말들이다
“Ama momentum.”(순간을 사랑하라)
“Carpe diem.”(오늘을 잡아라)
모두 ‘지금 여기’(hic et nunc)에 뿌리를 둔 말들이다.
1985년 9월 22일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께서 한국순교성인대축일에 평양을 방문해 미사를 봉헌하셨다.
그때 북한의 여동생과 이별하시며 “마리아야,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자
동생은 “오빠, 여기가 천국인데, 어데가 천국이라고 합네까?”라고 반문했단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는 삶의 전부가 된다.
인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건을 세 가지로 꼽는다.
하나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태양을 맴도는 별이며, 그 태양도 거대한 우주 체계를 도는 별이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종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동물이 진화한 또 다른 동물이라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고상한 예술 행위와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정교한 정치·사회적 제도들은 인간이 초월적 활동이 아니라 인간이 성적 파트너에게 환심을 사려는 욕망의 산물이라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이다.
하나를 더 꼽는다면 인간은 자기가 먹는 것과 같은 단백질 덩어리라는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적 유물론이다.
인간 정신을 하느님 우위에 두거나 그것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자기 존엄성 근거를 파괴하는 인간 비하적인 생각들은 ‘지금 여기’를 극단적으로 적용할 때 생겨난다.
‘지금 여기’를 절대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여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여기’(hic et nunc)가 소중하다면 ‘후에 저기’(illic et tunc)는 더 소중하다는 것을 부정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한계는 자신의 미래도 영원함도 스스로 정하거나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오빠, 여기가 천국인데, 어데가 천국이라고 합네까?라는 말이 진리라면 ‘오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여기’에 근거한 포이어바흐의 말대로 인간이란 자기가 먹는 것과 다르지 않은 단백질 덩어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규정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든, ‘후에 저기’에서든 말이다.
내 비록 불행 중에 울부짖고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신다면 불행으로 가득찬 내 삶이 하느님 나라이다.
그래서 성녀 소화 데레사께서 “예수께서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그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하신 것이다.
첫댓글 주님! 저희가 옳은일에 힘쓰게 하소서...아멘
내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하루하루를 살려고 성모님께 도움청하며 노력하겠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희망이네요!
절망을 넘어 희망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