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14 연중6주간 월 – 133위 060° 배문호 베드로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133위 060° ‘하느님의 종’ 배문호 베드로
이름 : 배문호 베드로
출생 : 1843년, 양제(당진시 순성면 양유리)
순교 : 1866년 12월 14일, 교수, 공주
배문호 베드로의 본관은 성주(星州)요,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시경’(時慶)이다.[1] 1800년의 청주 순교 복자 배관겸 프란치스코[1.1]는 그의 4대조(고조부)이고, 1868년의 서울 순교자 배화첨 베드로[1.2] 회장은 그의 조부가 된다. 그의 집안은 본디 충청도 면천 양제(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에서 살았으나, 프란치스코가 순교한 뒤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하였다.[2][2.1]
태중 교우로 태어난 배문호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이웃에 살던 고의진 요셉[3]과 친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박해를 받으면 함께 순교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뿐 아니라 배문호 베드로는 칼래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운 뒤 아내와 동정을 지키면서 고신극기에 노력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을 휩쓴 것은 칼래 신부가 이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음력 10월 8일)이었다.[3.1]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배문호 베드로와 고의진 요셉을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를 체포하였다. 이때 배문호 베드로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목천 관아에 이르러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 배문호 베드로는 요셉과 함께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하게 고백하였다. 또 관장이 “배교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밀고하라.”고 하자 “죽을지라도 배교는 할 수 없으며, 신자들도 밀고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십계를 풀어 설명하였다. 그들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옥에 갇혀 있을 때는 둘이 함께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 뒤 배문호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공주로 이송되었다. 도중에 일행은 서로 순교를 권면하면서 기도문을 소리 높여 화답하면서 외웠는데, 이 모습을 본 배교자 두 사람이 스스로 통회하고 포교들에게 자수한 뒤 함께 공주 진영으로 갔다고 한다. 한편 배문호 베드로는 모친에게 편지를 보내 “저는 어려움을 잘 참고 있으니, 저를 생각하시면서 아무쪼록 열심히 수계하시다가 제 뒤를 따라오십시오.”[4]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공주에 이르러 배문호 베드로는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였다. 또 하옥될 때는 고의진 요셉과 서로 위로하면서 순교 원의를 다졌다. 그런 다음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로, 배문호 베드로의 나이는 23세였다.[5]
배문호 베드로와 동료들이 순교한 뒤 그 시신을 강치운이 수습하여 소학골 인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6][6.1]
[註]__________
[1] 배문호의 본관은 그의 후손인 배석조(裵錫潮, 요셉)의 증언과 가승(家乘)에 따른 것이다(차기진, 「천안 일대의 교우촌과 공소」 III, 『교회와 역사』 제189호, 1991, 15면). 배석조 집안은 박해가 끝난 뒤 천안 부원골(현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로 이주해 살았다.
[1.2] 병인박해 시기(1866-1878년) 목천 출신 순교자(23명)
이 름 | 거주지 | (음)순교일 (나이) | 순교지(형식) |
김성회 바오로 | 목천 복구정 | 1864.4(46세) | 서울(교수) |
배문호 베드로 | 목천 소학골 | 1866.11.8(24세) | 공주(교수) |
최천여 베드로 | 목천 소학골 | 1866.11.8(45세) | 공주(교수) |
최종여 라자로 | 목천 소학골 | 1866.11.8(42세) | 공주(교수) |
고의진 요셉 | 목천 소학골 | 1866.11.8 | 공주(교수) |
채 서방 며느리 | 목천 소학골 | 1866.11.8 | 공주(교수) |
서완순 스테파노 | 목천 장자동 | 1866.(44세) | 공주(교수) |
서상욱 프란치스코 | 목천 장자동 | 1866.12(약20세) | 청 주 |
배 바오로 | 목천 소학골 | 1867.6.19 (61세) | 서울(교수) |
윤 바오로 | 목천 서들골 | 1867. | 청주(교수) |
김 사도요한 | 목천 복구정 | 1868.4(30세) | 서울(교수) |
배 안드레아 | 목천 소학골 | 1868.6.23 (35세) | 서울(교수) |
배화첨 베드로 | 목천 소학골 | 1868.5.17 (56세) | 서울(교수) |
최 안드레아 | 목천 소학골 | 1868.7(21세) | 죽산(교수) |
김 도미니코 | 북면 베장골 | 1869. | 죽 산 |
김인원 | 북면 베장골 | 1869. | 죽 산 |
조덕삼 시몬 | 목천 공심리 | 1870 (?) (38세) | 서울(교수) |
이 요한 | 목천 서들골 | 1871.3.19 | 서울(교수) |
이 베드로 | 목천 서들골 | 1871.3.19 | 서울(교수) |
이 프란치스코 | 목천 서들골 | 1871.3.19(21세) | 서울(교수) |
배명중(혹 배원성) 바오로 | 목천 소학골 | 1878.4.10 (50여세) | 서울(교수) |
배문보(혹 배일룡) 요한 | 목천 소학골 | 1878.4.10 (19세) | 서울(교수) |
김 아가타 | 홍산 방고개 | (36세) | (교 수) |
병인박해 시기(1866-1878년) 목천 출신 순교자(23명)
[2] 차기진,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 23-27면.
[2.1] 박해 이후 성거산 일대 교우촌 현황
호 | 이 름 | 소재지 | 설립년 | 설립자 | 신자수 | 기타 |
1 | 서덕골 | 목천면 송출리 | 1884 | 두세 | |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 거주지 |
2 | 먹방이 | 목천면 석천리 | 1888 | 두세 | 128 | |
3 | 소학골 | 북면 납안리 | 1888 | 두세 | 114 | 순교자: 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나자로, 최 안드레아, 배화첨 베드로, 배명중 바오로, 배문호 요한, 배 안드레아, 고의진 요셉, 채 서방 며느리 |
4 | 매일골 | 목천면 송출리 | 1895 | 퀴를리에 | | |
5 | 사리목 | 북면 납안리 | 1901 | 드비즈 | | 순교자 배문호 무덤 소재 |
6 | 석천리 | 목천면 석천리 | 1913 | 공 베드로 | 112 | |
7 | 도 촌 | 북면 납안리 | 1919 | 공베드로 | 110 | |
8 | 납안리 | 북면 납안리 | 1920 | 공베드로 | 51 | |
[3] 고 요셉의 이름 ‘의진’은 집안 기록에 나타난다(고길천, 「사기점골 고제환의 비문」, 필사본,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소장, 2006년 3월).
[3.1] 차기진, ‘한국 교회사 사적지 재발견’ : ‘치명일기’,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병인박해 치명자사적’, ‘우포도청 등록’의 자료로부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소학골 출신 신자들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분들은 다음과 같다.
①배 (바오로) : 배 안드레아의 부친, 목천 소학골 거주, 서울에서 치명, 62세(또는 61세) 1868년 6월 23일(또는 1867년 6월 19일).
②배 (안드레아) : 배 바오로의 아들, 서울에서 치명, 35세 1878년 4월 10일.
③배화첨(베드로) : 배문호 조부, 면천 사람, 목천 소학골 거주, 서울에서 교수형, 56세 1868년 5월 17일.
④배명중(바오로) : ‘우포도청등록’의 배원성, 배화첨의 차남, 목천 소학골 거주, 공주 질울로 이주, 서울 좌포도청에서 치명(致首), 54세(또는 50세) 1878년 5월 23일(또는 1878년 4월 10일).
⑤배문모(요한) : ‘우포도청등록’의 배일용, 배명주의 아들, 좌포도청에서 치명(致首), 19세 1878년 5월 23일.
[4] 『병인치명사적』, 6권, 2면. 이 내용은 전주 대성동(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살던 배경집 베드로가 증언하였다.
[5]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1번; 『병인치명사적』, 1권, 62면; 6권, 2-4면; 8권, 47면. 『병인치명사적』 1권의 내용은 진산 저귀골(현 충남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에 살던 배 안드레아가 증언한 것이다. 한편 『병인치명사적』 8권에는 순교 당시 배문호 베드로의 나이가 19세로 나오는데, 『치명일기』와 『병인치명사적』 1권에는 모두 23세로 나온다.
[6] 『병인치명사적』, 6권, 2면. 강치운은 그 뒤 청주 절골(현 충북 청원군 강내면 사곡리)에 살았다. 배문호 베드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무덤은 현재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경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차기진,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 32-35면).
[6.1] ‘치명일기’ - 배문호 베드로와 고(의진) 요셉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고 열심히 수계 생활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을 다하였다. 치명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아내와 의논하고 뜻을 지키며 강 신부가 준 철사 띠를 주야로 띠고 강(칼래) 신부에게 나아가 고신 극기하는 법을 배우더니 병인년 10월 초파일에 목천 포교에게 고(의진) 요셉과 함께 잡혀 관가에 들어가 배주배교를 강요받았다. “만만코 죽사와도 배반치 못하겠나이다.”하였다. 배문호는 십계명을 풀어 이야기하니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은 다하지 못했나이다.” 하자 즉시 하옥 2차, 3차 물고문에 형벌이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천주 배반하라 명하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과와 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경문 외우기에 자신만만하더라.
11월 초파일 공주로 끌려가며 경문을 소리 높여 읽었다. 창교배(인솔자)도 즐겨 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모양을 보고 즉시 통회하고 자원으로 따라와 공주 진영에 함께 들어갔다. 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로 나이는 2살 차이라고 하며 공주 감영으로 끌려갈 때도 어깨동무하며 성가를 불렀다고 하였다.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도무지 굴하지 않자 즉시 옥에 하옥,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니 배문호 24세이었고 (고의진) 요셉은 26세였다. 배문호는 모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를 따라오소서. 또 이르오되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를 꽂는데 필요한 것)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이 동곳을 보시며 생각하고, 나와 고(의진) 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 “사람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사는 강치운이가 찾아 묻었느니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