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현. 인언민
덕산의 유명한 교우 촌 출신 순교자
이보현 : 1773〜1800, 세례명 프란치스코. 해미에서 매맞아 순교
인언민 : ?〜1800, 세례명 마르티노, 해미에서 매맞아 순교
충청도 예당평야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덕산의 ‘황모실' (지금의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은 박해 시대의 유명한 교우 촌이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당진의 합덕읍에서 고덕과 덕산으로 가는 샛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고덕면 못미처 오른편으로 보이는 한적한 농촌 마을이 바로 황모실 이다.
1799년에 이미 순교자를 탄생시킨 황모실 곳에서는 1839년에 다시 순교자 전 베드로를 탄생시켰으며. 1857년 12월에는 메스트르(J.Maistre, 李) 신부가 이곳에서 선종하여 묻혔고, 1863년 9월에는 랑드르(J.Landre, 洪) 신부가 또 이곳에서 선종하였다. 1861년 이래 황모실 교우 촌은 하부 내포 지역의 사목 중심지였다.
▲ 이보현은 심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어도 그의 시신은 아주 싱싱하고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박해 시대의 유명한 교우 촌 황모실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은 1773년에 황모실의 부유한 양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꼿꼿하였지만 약간은 고집스러워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유명하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왼 그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자 정욕을 마음껏 발산시켰고. 어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이보현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스무 살이 조금 넘어섰을 때로. 덕산 용머리(지금의 충남 삽교음 용동리) 출신의 황심을 만나고부터였다. 황심은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누이동생과 혼인하게 함으로써 신앙의 결실을 더욱 굳게 해주었다.
이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이보현은 즉시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하여, 오래지 않아 조용하고 단정해진 처신으로 모든 이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는 결혼할 마음이 없었으나 어머니의 권유에 순종하여 이에 따랐다. 그 뒤 이보현은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하여 황심을 따라 논산 땅 연산으로 이주하였고, 1795년에는 지방 순방에 나선 주문모 신부를 자기 집에 모셔 와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갈수록 그의 열심은 더해 갔다. 그가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얼마 동안 고향을 떠나 산중에 들어가 생활하였다는 말까지 전해 오는데, 산속에서 나물만 먹고 사는 동안의 의미를 그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였다고 한다.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금욕을 실천하든가 순교함으로써 목숨을 바치든가 해야 할 것이다. 이것만이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방법이다.”
금욕하든가 순교하든가
1797년의 정사 박해로 인해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이보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신자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보현은 오래지 아니하여 자신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이것이 마지막 잔치이니,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대접해야 한다”고 이르면서 술을 많이 담그라고 하였다. 과연 이틀 후에 포졸들이 나타나 “네가 천주교 신자냐”고 묻자, 그는 서슴없이 “그렇소. 내가 천주교 신자요. 뿐만 아니라 이틀 전부터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포졸들을 후히 대접하고 나서 체포되어 연산 현감 앞으로 끌려갔다.
연산 현감은 이보현이 체포되어 오자 즉시 법정을 차리고 문초를 시작하였다.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
“제 선생과 동료들은 제 고향에 있습니다.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몇 권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 중요한 문제를 다룬 책이기에 사또께 바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내게 보일 수 없단 말이냐?”
"그 책들은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하느님께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또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현감은 이 대답을 듣고는 매우 기분이 상하여 혹독한 매질을 시킨 후 옥으로 끌고 가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감사에게 보고하고 하명을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공주 감사는 이보현을 그의 고향을 관할하는 해미로 넘기도록 명하였다. 이곳에서 이보현은 인언민(마르티노)이라는 열성적인 신자를 알게 되었다. 해미에 도착하자마자 영장은 “무슨 이유로 네 부모와 조상들의 산소를 버리고 500리나 되는 연산 고을에 가서 살았으며. 또 어찌하여 그 고약한 도를 따름으로써 국왕이 금하시는 것을 하느냐” 고 문초하였다.
이에 대해 이보현은 “성교(聖敎)를 모욕해서는 안됩니다. 또 하느님은 우리의 대군 대부(大君大父)이시므로 공경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영장은 형리들에게 갖가지 형틀을 준비하도록 한 뒤 “모든 것을 숨김없이 자백하라”라고 거듭 추궁하였다. 그러나 이보현은 죽더라도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며 꼿꼿하게 버티었다.
한나절 이상 고문을 받는 동안 이보현은 여러 번 까무러쳤지만 굴복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영장
은 그에게 큰 칼을 씌워 옥으로 도로 데려가도록 하였다. 비록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나
마음만은 만족스럽고 기뻤다. 그는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자신이 늘 하던 대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수난의 신비를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두 번째 문초 때도 이보현의 태도가 바뀌지 않자, 그의 끈기에 놀란 영장은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죄인이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답을 내려보냈다.
마침내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영장이 판결문을 디밀자. 이보현은 너무 기쁜 표정으로 그것에 서명하였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행동에 놀라 서로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다시 옥으로 끌려간 이보현은, 다음날 아침 사형수에게 주는 음식을 기쁘게 먹은 뒤 징-터로 끌려나가 조리돌림을 당하고 몹시 매를 맞았다. 망나니들은 제각기 거적을 앞치마 모양으로 두르고 오랫동안 힘을 다하여 매질을 가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려 놓고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799년 12월 15일(양 1800년 1월 9일)로,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며칠 후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때 보니, 이보현의 얼굴은 그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싱싱하고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또 많은 비신자들이 이를 직접 목격하였고, 그리고 그중에서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황사영을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뀐 인언민
한편 같은 옥에 있었던 인언민(印彥敏,마르티노〉은 덕산 용머리(지금의 충남 삽교읍 용동리 1구의 ‘주래' )의 교동 인씨(喬桐印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 집안은 남인 출신으로 지방에서는 꽤 유명한 양반이었으며 부유하기도 하였다. 성격이 온순하고 꼿꼿한 인언민은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과 교류하면서 일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덕산 용머리는 교회의 밀사 황심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고, 이 지역에는 이존창의 전교로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다. 또 그 이웃에 있는 ‘배나드리’ 교우촌(용동리 3구)은 1817년 1()월 해미 포졸들의 습격으로 민첨지 (베드로)와 손연욱(요셉) 등 한 마을의 신자 모두가 순교한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인언민도 입교 이전에 이미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황사영은 179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바로 그 무렵 서울로 올라가 그를 만난 인언민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받아들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언민은 조상들의 신주 단지를 강물에 던져 버리고, 맏아들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맏아들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 두고. 둘째 아들은 신자들 중에 명성이 높던 집안의 딸과 혼인시켰다.
이렇게 주변을 정리한 인언민은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는데, 그때 신자가 아닌 그
의 친척들은 그가 왜 그렇게 괴상한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에 인언민은 그들에게 이유를 솔직히 말해 주면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였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언민은 공주 영문(營門)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스스로 천주교 신자라는 것과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령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는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1799년 겨울,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그는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으므로 역참(驛站)에서 역참으로 역말을 타고 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인언민은 이보현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두 사람은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에도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어쩔 수가 없게 되자 영장은 인언민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관례에 따라 마지막 음식을 인언민에게 갖다 준 형리와 망나니들은 그를 옥에서 끌어내 사형 집행에 나섰다. 형을 받는 동안 그는 “그렇구 말구.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하느님께 바치는 거야” 하고 여러 번 되뇌었다.
마침내 망나니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치자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가 부서졌다. 이러한 형벌로 1799년 12월 15일(양 1800년 1월 9일) 인언민은 목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