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5. 17
너를 위한 레시피
脣亡齒寒(순망치한)
보라
린,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생고기를 보면 눈을 찌푸리게 돼. 특히 음식 방송에서 싱싱한 소고기라며 카메라 앵글을 가까이 할 때마다 미간이 모아져. 그 방송에 나온 게스트들은 마블링이 흘러넘친다면서 감탄사를 연발해. 그럼 나는, "흥 당신들이 과연 도축과정을 다 보고도 그런 감탄을 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리지. 웃긴 건 나도 고기를 먹으면서 저런 소리를 한다니까. 고기를 먹지 않는 넌 길을 걸어 다니며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져. 길을 조금만 걸어봐도 주변에 고깃집이 넘쳐나잖아. 어떤 고깃집 간판에는 돼지가 엄지를 치켜들고 있기도 하지. 돼지를 잡아먹는 곳인데 돼지가 엄지를 치켜들고 웃고 있다니. 이보다 기괴한 그림이 있을까 싶다. 아마 작년에 널 만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웃는 돼지 얼굴을 보고는 그저,'저기 고기는 맛있나 보네'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
"아 배고파"
"나도"
"비오는 날이라 그런지 짬뽕 먹고싶다"
"크으 짬뽕 짱이지"
"음..김치전도.."
"난 마라탕"
"와 더 배고파지는데?"
"아 아구찜도 먹고싶다"
"...“
우리 서로 먹고 싶은 걸 나열하던 순간 기억나? 나는 당연히 채식 가능한 음식들로 말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너니까. 같은 음식을 이야기하더라도 서로 상상하던 게 달랐겠지. 그러다 내가 무심코 아귀찜 이야기를 했어. 아귀찜 단어가 내 입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의 이야기는 끊겨 버렸었지. 당연히 너는 공감 할 수도 없었을거야. 아귀찜을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왜 튀어나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야. 다행히 그때 우리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었어. 너의 당황한 표정이 아직도 생각나.
우리 종종 같이 밥도 먹잖아. 난 너랑 같이 밥 먹는 게 좋아. 너랑 같이 있으면 나도 자연스레 채식을 하게 되거든. 채식 식당을 가고 나도 채식 도시락을 싸가게 되지. 서울 곳곳에 채식 식당이 숨어있다는 것도 너와 함께 다니며 알게 되었어. 너와 함께 요리를 하다 보면 멸치육수가 없이도 충분히 깊은 맛을 낼 수 있고, 고기가 없어도 감칠맛이 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지. 생각해 보니 너는 요리를 참 잘해. 기본적인 거 말고는 레시피 앞에서 어버버 거리는 나와 다르게 말이야. 잠시 고민하다가 뚝딱 만들어 내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어. 그 능력도 채식을 하며 생겨난 건지 궁금하다. 아 참, 이번에 네가 담가서 준 명이나물 잘 먹고 있어. 엄마가 먹어보더니 너는 손이 야무진 것 같데.
대부분은 좋았지만 가끔은 너의 완고한 비거니즘이 싫기도 했어. 늦은 저녁, 모두가 배고파지고 있는데 주변에는 채식 식당이 없었어. 그럼에도 채식 식당을 찾아 헤맸지. 늦었는데, 다들 배고픈데, 채식식당을 위해 계속 걸어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었어. 난 배고프면 짜증이 쉽게 나거든. 배가 고플 때는 짜증이 났지만, 배가 든든할 때는 그런 너의 확고함이 궁금해지더라. 어떻게 하면 어디서든 그 가치관을 지킬 수 있는지 말이야. 나는 내 모든 것에 확신과 확고함이 없어. 너는 비건만큼은 누구보다 확신하고 확고하더라. 여전히 나는 채식을 지향하기만 할 뿐 제대로 할 의지도, 용기도 없어. 다만 비거니즘이라는 주제를 접하게 된 뒤로 나에게 달라진 점이 있어. 내가 먹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나로 끝나지 않다는 걸 차근차근 깨닫게 되었지. 내가 전에 다녔던 학교에서 밥 먹기 전마다 외쳤던 구절이 있었어.
‘이 음식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저 밥 먹기 전 규칙이라고 생각했거든. 저 구절을 외치지 않으면 밥을 못먹었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먹는 소, 돼지, 닭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길러지고 죽임당하는지를 다룬 ‘카우스피라시’영화를 보고, 내가 마시는 커피가 저기 먼 나라에 사는 어린이 친구들이 피땀 흘려 키운 콩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편하게 먹기 위해 담아온 플라스틱들이 분해되어 알바트로스 배 속에 들어있고, 누구는 먹방을 하며 혼자서 10인분을 먹지만 누구는 한 끼조차 먹기 힘들다는 사실들을 하나 둘 접하게 되었지. 그것들을 접하고 나니 내가 절대 세상과 독립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걸 의식하게 되었어.
린, 너와 함께 한옥으로 첫 여행을 갔던 날, 그곳을 운영하신 분이 만들어주신 떡국 있잖아. 그 떡국 알고 보니 멸치육수였잖아. 그 사실을 알고 너는 무지 화가 났었지. 난 사실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어. 사실 웬만하면 어쩔 수 없었겠지라고 생각하며 다들 넘어가는데 너는 그날 밤까지 화가 나 있었잖아. 늦은 저녁, 채식식당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을 상황이 닥쳤을 때도 어떻게든 비건을 지키는 너를 보며 유연성이 없다고도 생각했어. 그런데 린아, 너를 보면 볼수록 느끼지만 너는 참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더라. 남이 실수하면 괜찮아~라고 말해주면서 본인이 실수하고 부족한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하더라고. 게다가 배려가 몸에 배어있어서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해 주는 너였지. 그런 네가 비거니즘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확고하고 양보하지 않는다는 건 유연성이 없는 게 아니라 어쩌면 다른 사람은 못 느끼고 있는 걸 네가 느끼고 있어서 아닐까 싶었어. 그게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각과 느낌이 너만의 비거니즘을 이끌고 가는 것 아닐까. 여기저기서 지구가 망가져 간다고 떠들어대지만 그걸 정말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는 사람들은 드물잖아. 그런 것처럼 동물권, 비거니즘에 있어서 내가 못 느끼고 있는 걸 너는 마음과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아.
후,
나는 언제쯤 완전한 비건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 사실 내가 그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럼에도 내가 자꾸 이쪽으로 기웃거린다는 건 나도 무언가 느끼고 있는 거 아닐까. 있잖아. 나는 현실적인 문제로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되면 눈물부터 나와. 답답하고 속이 막히는 것만 같아. 내가 마치 쇠사슬에 묶여버린 느낌이랄까. 나에게 자유가 없다는 느낌이 나를 미치게 해. 이런 마음들로 인간에게 묶여버린 동물들을 생각해 보게 돼. 소들은 어땠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학교가 시골이라 젖소를 보며 학교를 등하교 했었거든. 멀리서 바라보면, 넓지도 않은 우리에 참 많은 소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어. 그 당시에는 그저 소똥 냄새가 심하다고만 생각하고 지나갔었지. 그런데 몇 년 뒤 그곳에 구제역이 돌아서 그 소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렸어. 아마도 어디 깊은 산속에 묻혀버렸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자신들의 삶조차 자연의 순리대로 살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답답하고 슬펐을까 싶더라. 이러한 마음들이 나를 비거니즘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줘.
린아 고마워. 내가 다른 생명체에 고통을 쉽게 넘기지 않게 해줘서. 그리고 네가 유연성이 없다고 생각한 건 취소할게. 어쩌면 정말로 유연성이 없는 건 생태계가 망가지고, 동물들이 피눈물을 흘려도 아무렇지 않게, 꿋꿋이 소비하는 사회 아닐까. 요즘 들어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 뒷모습만 봤을 땐 아기가 태워져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가보면 다 강아지더라. 요즘은 반려견, 반려묘들이 죽으면 화장도 해준다는 걸 알았어. 화장한 뼛가루를 구슬로 만들기도 하더라고. 그런 거 보면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해. 같은 동물인데 처지가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왜 어떤 동물은 좁고 더러운 우리에서 한 발짝도 꼼짝 못 하는 삶을 살고, 어떤 동물은 걸어 다닐 수 있는 팔, 다리가 있음에도 유모차를 타고 다니는 삶을 사는 걸까. 나도 모르겠어. 이 문제는 또 세상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걸까. 아마도 너는 계속 머리로만 고민하는 나와 다르게 네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우리가 먹는 밥상들을 고민했던 거겠지. 다들 ‘나’만을 위한 레시피를 만드는 세상에서 너만큼은 동물과 지구를 위한 레시피를 만들어온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