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33집 2003 ․제3권
존 힉, 그리고 종교대화의 문제** 본 논문은 2003년 울산대학교 교비 연구비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음.
김 진(울산대)
[한글 요약]
이 글의 목적은 존 힉의 종교철학에서 종교의 의미와 종교대화의 가능성 조건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데 있다. 힉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문화적 전통 속에서 경험된 신적인 실재들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종교대화의 가능성은 신적 현상들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신적 실재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힉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칸트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힉이 차용하고 있는 칸트주의적 전제들을 바탕으로 그의 종교철학적 주장들에 함축된 칸트주의적 요소들이 얼마만큼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를 살필 것이다. 칸트와 힉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로 힉은 기독교 중심적인 태도(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를 가지고서는 결코 다른 종교와의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다른 종교와 대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힉은 칸트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구성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각에서 실재 중심적인 시각으로의 변화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둘째로 칸트와 힉의 전회 방향은 서로 다르며 대립적이다. 힉은 칸트의 감각지각에서의 현상과 실재의 구분을 신 인식에 적용하였다. 힉의 의도는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적 혁명을 통하여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각을 신 중심적인 시각으로 변형하는데 있었다. 그 때문에 칸트의 선험철학적 의도는 종교 인식론으로 이행하게 된다. 셋째로 힉은 인류의 종교 경험이 실제로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종교적 경험이 초월적 실재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그 때문에 우리는 초월적 실재 자체와 우리가 경험한 초월적 실재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칸트의 의도와 반대된다. 힉은 세계종교의 다양한 신 인식이 하나의 공통적인 신 존재 자체에 대한 현상들이라고 이해한다. 여러 종교의 신 개념이 하느님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현상들이라고 본 힉의 주장은 신을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설정한 점에서 칸트의 의도로부터 벗어나 있다. 힉이 의도하는 종교대화는 실재중심적 다원주의의 지평 위에서 가능하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도덕중심적인 이성신앙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다. 힉의 하느님은 인간의 경험적 현상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다. 칸트에서의 신은 인간이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만날 수 있는 실재가 아니라 실천철학에서의 도덕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하여 요청된 존재이다. 넷째로 칸트에서의 신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요청된다. 그와 반대로 힉은 신을 칸트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칸트의 의도와 다르며 그 결과는 반칸트적일 수밖에 없다. 힉은 칸트의 테제를 그의 종교 인식론에 수용하였다. 힉의 결론적인 주장은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칸트가 말한 “하나의 (참된) 종교만이 있다. 그러나 수많은 신앙유형들이 있을 수 있다”라는 테제와 너무 유사하다. 여기에서 칸트가 말한 “하나의 참된 종교”(eine wahre Religion)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유형들을 가능하게 하였던 초월론적 정초근거, 즉 이 세계의 모든 신앙유형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종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힉은 이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힉의 칸트 이해가 근본적이지 못하고 충분하지 않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힉은 칸트의 도덕 지향적인 요청론적 종교구상을 경험-실재론적 지평으로 변형하였다.
주제분야 : 존 힉, 종교철학, 칸트주의 주 제 어 : 종교대화, 신 중심적, 요청
1. 문제제기
이 글의 목적은 존 힉(John Hick, 1922~)의 종교철학에서 세계의 다양한 종교현상들이 어떻게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를 살펴보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힉이 이해하고 있는 종교의 의미와 종교대화의 가능성 조건을 비판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힉의 근본적인 주장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문화적 전통 속에서 경험된 신적인 실재들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종교대화의 가능성은 신적 현상들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신적 실재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힉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칸트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힉이 차용하고 있는 칸트주의적 전제들을 살펴보면서, 그가 칸트에게서 수용한 것과 사상한 것들을 살펴본 다음에, 그의 종교철학적 주장들에 함축된 칸트주의적 요소들이 얼마만큼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힉이 칸트의 학문방법론을 통하여 새롭게 구축하려고 하였던 종교인식론의 의미와 한계를 비판적으로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힉의 칸트 이해는 매우 단순하고 자의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철학적 주장체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힉의 종교철학적 주제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기독교 중심주의의 대화전략들,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실재중심적 다원주의, 종교인식론과 종교적 진리의 문제들을 검토하면서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칸트의 테제와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기독교 중심주의의 대화전략
힉에 의하면 전통적인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표명을 달리 해 왔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단계적으로 소개하면서 종교대화의 가능 근거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힉은 다른 세계종교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표명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점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독교 중심주의 힉에 의하면 기독교 중심주의는 전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정점으로 하고 있다(Hick, John: The Second Christianity. London 1983, pp. 15-25. 앞으로는 SC로 약칭한다). 기원전 1세기에 오늘날의 이스라엘 영토에 살았던 유대인 남자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를 주님으로 섬기는 신앙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힉이 말하는 첫 단계는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단계”(the phase of total rejection)이다. Hick, John: God has many names. Philadelphia 1980, 1982, p. 29. 이하 GhmN으로 줄인다. 한국어판으로는 이찬수 역, ꡔ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ꡕ(도서출판 창, 1991)가 있다. 이러한 태도에 의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구원도 불가능하며, 죽은 후에 그들은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한스 큉이 말한 배타주의가 이에 속하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교회와 근본주의적인 개신교가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들은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서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6) 또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은 없다. 천하 인간에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은 없다”(「사도행전」 4:12) 등을 들고 있다. 로마의 가톨릭교회는 오래 전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vus)는 신조를 공표하였다. 1302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e VIII)는 “우리에게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의 교회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굳게 믿고 숨김없이 고백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도 죄사함도 없다. [...] 더 나아가서 모든 인류에게 로마 교황에 복종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Denzing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29th ed., No. 468f. Freiburg 1952; Hick, GhmN, 29. 그 후 플로렌스 공의회(Council of Florence 1438-45년)에서도 “이교도는 물론 유대인, 이단자, 종파분리론자를 막론하고 가톨릭교회 밖에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영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에 교회에 들어오지 않으면 ‘악마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못’에 빠지게 될 것이다” Denzinger, No. 714. 라고 선언하였다. 19세기의 개신교 역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GhmN, 27). 1960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Congress on World Mission)에서는 “전후 이래 십억 이상의 영혼이 영면했는데,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가 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 듣지도 못한 채 고통스런 지옥불로 들어갔다” Facing the Unfinished Task: Massages Delivered at the Congress on World Mission, Chicago III. 1960, ed. by J.O. Percy. 1961, p. 9; GhmN, 30. 고 선언하였다. 근본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 힉은 이와 같은 근본적인 거부태도는 잘못된 신론에 기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사랑과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죽은 절대 다수의 인류에게 구원을 거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만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대부분의 인류는 좌절과 고통 속에 방치될 것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거나 그분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다. 따라서 단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구원될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비롭고 거룩한 사랑의 하느님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당한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GhmN, 31). 타종교인의 구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신은 더 이상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일 수 없으며, 그러한 그리스도 역시 더 이상 그리스도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힉은 배타주의 또는 절대주의는 잘못된 신관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힉이 설명하는 두 번째 단계는 “초기 주전원(周轉圓)의 단계”(the phase of the early epicycles)이다. 힉이 여기에서 말하는 ‘주전원’(epicycle)은 첫 번째 단계의 배타주의적 태도를 지지하면서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제시된 비유이다. 본래 주전원이란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동설 체계에서 기존의 가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실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우주도(宇宙圖)에 첨가하였던 부수적인 궤도를 말한다. 그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원 궤도에 작은 궤도를 덧붙임으로써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존의 천문학적 가설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GhmN, 33).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사도의 로마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교회는 구원의 유일한 방주이니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누구나 홍수에 떠내려간다는 사실을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진정한 종교를 알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무지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주의 눈앞에서 이 문제로 인하여 유죄판결을 받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Denzinger, No. 1674. 그는 오직 가톨릭 신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가톨릭 교인일 수는 없으나, 형이상학적으로는 가톨릭 신자일 수 있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는 화체(transubstantiation)의 교리와 매우 비슷하다. 성찬식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는 경험적으로는 빵과 포도주 그대로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해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무슬림 등 타종교인은 경험적으로는 비기독교인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비가시적인 교회의 구성원으로 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GhmN, 31f). 그러나 힉은 이러한 태도가 여전히 가톨릭교회 중심주의로서 첫 번째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힉이 제시하는 세 번째 단계는 “후기 주전원의 단계”(the phase of later epicycles)이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힉은 이 역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모순되는 두 개의 주장을 동시에 정당화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기독교 안이나 밖에서 구원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 구원될 수 있는 사람들을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e Christen)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힉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종교일치적인 발언으로 보이는 라너의 주장 역시 초기 주전원의 단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GhmN, 34; SC, 80). 칼 라너가 주장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라너의 의도와는 반대로 다른 종교를 주축으로 하는 주전원도 생각할 수 있으며, 익명의 힌두인이나 익명의 무슬림도 정당하게 언급될 수 있다. 한스 큉은 라너보다 진일보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계종교를 일반적인 구원의 길과 특별한 구원의 길로 분류하면서, 기독교 교회는 아주 특별하고 이례적인 구원의 길이고, 다른 세계종교들은 보편적인 구원사 안에 있는 대중적이고 공통적인, 즉 일반적인 구원의 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힉에 의하면 큉 역시 대중적인 다수의 길을 그리스도를 향한 전(前) 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Neuner, Joseph(ed.): Christian Revelation and World Religions. London 1967, p. 52, 55-56; GhmN, 35, 69. 기독교 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큉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는 세계 종교인들, 즉 전(前)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고 선택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타종교인이 자신의 종교 안에서 안주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실존적으로 체험하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 중심주의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힉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입장으로의 전이, 즉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요구한다(GhmN, 36).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천문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사람들이 우주와 그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는 방식을 거꾸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도그마를 내던지고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하나의 행성이라는 근본적인 깨달음을 뜻한다. 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보편적인 신앙과 그로부터 나오는 종교가 처한 위치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변환을 포함해야 한다. 기독가 중심이라는 교리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모든 인류가 받들고 그 주변을 선회하는 중심이 되신다는 생각으로 전이해야 하는 것이다(GhmN, 36). 그러나 이와 같은 전이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존 힉 그 자신의 영적인 성정과정에 대한 소묘를 통하여 종교대화의 가능성 근거를 포착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 힉은 어렸을 때부터 우주의 인격과 살아계신 주님으로서의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18세 때에 동양의 신지학적 세계를 접하였고 대학시절에는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성경의 축자영감설, 창조와 타락, 성육신, 처녀탄생, 신성에 대한 자각과 기적, 예수를 통한 구원, 예수의 육체 부활과 승천, 재림, 천국과 지옥 등, 복음주의 신학의 교의체계를 모두 신봉하였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하여 에딘버러(Edinburgh)에 가서 성서연구와 철학에 전념하였고, 1958년에 처음 발표한 논문에서 베일리(D.M. Baillie) Baillie, D.M.: God was in Christ. New York 1948. 의 기독론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약 15년 후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여기에서 힉은 다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행위에 대한 믿음은 유일하게 참된 종교의 개념과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가 등의 새로운 종교철학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버밍햄(Birmingham)에서 타종교 공동체를 접하는 동안 정의와 사랑을 요구하는 보다 높은 신적 실재에 대한 인격적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생각은 특히 1962년에 출판된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의 ꡔ종교의 의미와 목적ꡕ Smith, Cantwell W.: 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 New York 1962, Minneapolis 1991. 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가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스미스에 의하면 종교생활은 축적적 전통의 흐름 속에서 규정된 신앙생활의 연속체였다. 이 사실에서 힉은 기독교 중심적 또는 예수 중심적 신앙유형에서 신 중심적 신앙유형으로의 전이를 시도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힉은 기독론의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모두 인정되는 동시에 그의 성육신과 역사적 부활까지도 문자적인 사실로서 신봉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 가능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근본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단지 신화적인 의미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기독론의 수정이 전적으로 요구된다. 힉은 역사적 예수가 이 땅 위에서 살았던 동안에는 결코 자신이 육화한 성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GhmN, 125). 역사적 예수에게서는 신적 자의식을 찾을 수 없으며,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나 성자가 된 것은 모두 부활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힉에 의하면 예수는 전적으로 인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생생하게 깨어 있었다. 따라서 힉은 성육신의 문제를 예수가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춘 인격체라고 독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육신의 사상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힉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인간의 삶 안에서 실현될 때마다 신의 사람이 그만큼 육화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GhmN, 58). 육화는 예수가 우리의 삶과 초월적 하느님 사이의 접촉점이라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화를 사실적인 전제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근본적인 이단일 수 있다(GhmN, 74). 그리고 이것은 예수가 하느님과의 유효한 접촉점이라는 사실은 오직 그만이 유효한 접촉점이라는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분이라고 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구원의 접촉점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신앙의 길을 비난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권할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GhmN, 75). 그리하여 힉은 기독교의 틀 안에서 신의 육화사상은 문자적이라기보다는 은유적(metaphorical), 즉 신화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GhmN, 58). 힉은 이처럼 기독론의 수정을 통하여 다른 모든 종교들의 구원관과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신학(a global theology)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론 그가 하나의 단일한 세계종교를 구축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이 기독교인들의 체험 자료를 해석하도록 고안된 이론들이라고 한다면, 세계신학 역시 인류의 종교체험을 해석하도록 고안된 이론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자는 기독교 이외의 모든 거대한 종교생활에서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여러 세대에 걸친 다수의 협력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힉은 세계의 서로 다른 종교들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추구되는, 성서적 전통에서의 ‘거룩한 일자’(the Holy One)와 우파니샤드에서의 ‘불이일자’(不二一者, the One without a second) 등이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의 서로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힉은 유대교의 아도나이(the Adonai of Judaism),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the Father of Jesus Christ), 이슬람의 알라(the Allah of Islam), 유신론적 힌두이즘의 크리쉬나와 쉬바(the Krishna and the Shiva of theistic Hinduism), 아드바이타 힌두이즘의 브라흐만(the Brahman of advaitic Hinduism), 대승불교의 법신 혹은 공(the Dharmakaya or the Sunyata of Mahayana Buddhism), 그리고 소승불교의 열반(the Nirvana of Theravada Buddhism)을 한꺼번에 ‘영원한 일자’라는 용어에 담아낼 수 있는 가를 스스로 묻고 있다(GhmN, 24). 여기에서 힉은 초월자에 대한 개념 사용과 관련하여 적어도 세 가지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종교철학자도 그 자신의 종교문화적 풍토와 언어사용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자신이 기독교적 절대자의 개념인 ‘하느님’을 사용하더라도 특별히 문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힉은 다시금 기독교적 언어사용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보다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인격적 존재로서의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 as personal)의 개념인 하느님(God)과 비인격적 존재로서의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 as nonpersonal)의 개념인 절대자(the Absolute)를 구분하고 있다(GhmN, 25). 성서의 야훼나 바가바드기타의 크리쉬나와 같은 인격적 신들은 순수 절대에 대한 신인동형론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는, 즉 인간에 의하여 경험된 절대자의 일부 형상이지만, 힌두교에서의 브라흐만은 인격성이나 다른 모든 속성을 초월한 비인격적 존재라는 것이다(GhmN, 36). 그리고 마지막으로 힉은 각각의 세계종교들이 말하는 현상으로서의 하느님과 그것들을 초월하여 있는 하느님 그 자체를 구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칸트와 힉의 근본적인 차이에 유의해야 한다. 칸트는 신의 존재를 경험적 지식을 통하여 접근할 수 없는 문제로 규정하였다. 칸트는 물자체가 이론적 인식 기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현상존재론의 문제를 신 그 자체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않았다. 칸트에서 신의 존재는 경험적 지식을 산출할 수 있는 지성의 대상 개념이 아니라, 지성 활동에 보이지 않는 초점으로서 방향성만을 제시하는 이성의 대상 개념, 이른바 이념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칸트는 신의 존재를 실천이성의 변증론에서 제기되는 모순구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요구되는 이론명제, 즉 ‘요청’(Postulat)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힉은 신은 요청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에 의하여 경험되며, 그것도 인간의 인식수단과 문화적 전통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무한하고 초월적인 신적 실재와 유한한 인간에게 경험된 실재 사이의 구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SC, 83). 이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힉은 종교신학에서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에서 태양계의 중심은 지구이고, 다른 천체는 모두 그 주위를 돌고 있다. 그러나 궤도에서 이탈한 별의 운동이 이 이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주전원의 개념을 도입하여 사실에 가깝게 설명하려고 고심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이 종교에서도 발생하였다. “그리스도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주장은 신학적 프톨레마이오스 논리이다. 기독교 신앙이 우주의 중심으로 간주되고 다른 종교들은 모두 그 주위를 도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힉은 각종 신앙이라는 우주의 중심은 기독교나 다른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이 빛과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반영하는 것이다. 힉에 의하면 지금까지 인류 전체를 향한 신의 계시는 아직 내려지지 않았으며, 인류사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개별적인 계시만이 있었을 뿐이다(GhmN, 71). 이는 증산교에서 말하는 선천시대의 종교적 한계와 같은 맥락에 있다. 계시체험과 종교 전통은 역사, 문화, 언어, 기후, 시기, 장소 등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의하여 조건지어짐으로써 서로 다른 종교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으며, 따라서 종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1980년 런던에 있는 유대교 공회의 초청강연에서 힉은 “각종 통로들은 모두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세계는 보다 풍요롭다” Jewish Quarterly Review 1985. 고 하였던 몬테피오레(Claude Goldsmid Montefiore)의 말을 되새기고 있다(GhmN, 40). “경험적 실체로서의 종교는 서로 다른 인간 심성들과 역사 조류들을 반영하는 인간의 문화적 형태들로서 이들 안에서 하느님(궁극자에 대한 우리 서구 용어를 사용하면)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종교 개념의 양태들로 예배된다.” Hick, John: The Reconstruction of Christian Belief for Today and Tomorrow, in Theology, September 1970, p. 404. 그리하여 힉은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영원한 일자는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다양한 형태의 다양한 인류문화 속에서 인식되고 있으며, 이들 다양한 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세계의 대종교들이라고 부르는 종교적 생활방식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GhmN, 59). 서로 다른 종교들은 신인동형론과 신비주의를 각각 다른 비율을 가지고 진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초월적인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서로 다른 응답들일 뿐이다(GhmN, 37). 이 경우에 각각의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은 자기의 신념체계만이 진리이고, 그로부터의 원근 정도에 의하여 진리치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독교만이 종교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전통에 따라서 ‘베다의 프톨레마이오스적 체계’나 프톨레마이오스식 무슬림 신학도 상정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다양한 프톨레마이오스 식의 종교체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4. 실재중심적 다원주의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신에 이르는 많은 길(many pathways)이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인식으로부터 종교 다양성(plurality)의 문제가 제기된다(GhmN, 40). 힉에 의하면 종교는 “초월적인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GhmN, 42)이다. 성서가 오류없는 신의 계시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역사적 상황에서 신의 임재를 체험하였던 신앙인들의 문화와 관련된 발언이다(GhmN, 131). 힉은 그러한 응답의 결과를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플로티노스의 일자(the One)와 우파니샤드의 불이일자(the One without a second)와 같이 신비주의 전통에서 ‘언어를 넘어서는 일자’(ineffable One)의 측면과 동시에 이스라엘이나 인도의 거룩한 일자와 같이 유신론적 체험의 일자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신성한 실재, 영원한 일자는 무한하여 인간의 사고, 언어, 체험의 영역을 넘어서면서도, 유한한 인간의 본성에 가능한 제한된 방법으로 반응하고 그 앞에 드러나며 개념화되고 조우하는 등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종교전통의 공통적인 근거이다(GhmN, 42). 힉은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은 너무 유신론적이어서 종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Hick, John: Towards a Philosophy of Religious Pluralism, in: GhmN, 90. 종교는 유신론적 전통뿐만 아니라 무신론적, 비신론적 전통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물론 힉은 ‘초월자’, ‘신성’, ‘다르마’, ‘절대자’, ‘도’, ‘존재자체’, ‘궁극적 신 실재(神實在)’ 등, 어떤 개념을 사용하든지 간에 전통 중립적이거나 전통 초월적인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GhmN, 91). 따라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지 간에 그가 서 있는 종교문화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며, 그 때문에 자신은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것을 직접적인 유신론적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한다. 신적인 계시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며, 인류 문화의 각 중심에서 다양한 형태로 생겨났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이나 인간의 삶의 모습에서 무한하고 초월적인 동일한 신적 실재, 즉 영원한 일자에 대한 다양한 인간의 반응인 것이다(GhmN, 53f). 따라서 진정한 종교다원주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한 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가정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GhmN, 56). 하느님은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지만 인격적 또는 비인격적 방식으로 다양한 인간의 심성에 의하여 인식되고 경험되는 초월적인 실재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자신들이 처한 문화적 역사적 관점에서 초월적 실재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하여 힉은 칸트의 경험이론을 원용하여 창조물과의 관계를 넘어선 영원한 자존자(the Eternal One in itself)와 다양한 문화적 상황 안에서 인류와의 관계를 맺고 있는 영원한 일자를 구분하고자 하였다(GhmN, 52). 이는 인간의 체험과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 깊이의 신성으로서의 하느님과 인간에 의하여 인식되고 경험된 하느님을 구분하는 것을 뜻한다(GhmN, 91). 우선 신성 내지 유신론적 종교 양태를 관장하는 인격자로서의 영원한 일자의 개념은 특정한 인간 공동체의 특수한 신격이나 인간의 문화사 속에서 인식되는 다양한 위격들을 반영하고 있다. 야훼(아도나이), 알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버지, 크리쉬나, 쉬바 등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드러나는 유신론적 종교에서의 다양한 신적 현상들이 여기에 속한다. 힉은 여기에다가 비신론적(nontheistic) 또는 초신론적(transtheistic) 종교 양태를 관장하는 비인격적인 영원한 일자 또는 절대자(the Absolute)의 개념을 별도로 상정하고 있다(GhmN, 52). 이것은 인간의 사상과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본래적인 영원한 일자, 즉 신 그 자체를 말하며, 비신론적 종교에서의 절대자 개념의 응고물인 동시에 영원한 일자에 대한 비인격적 의식이다. 여기에는 힌두교의 브라흐만, 소승불교의 열반, 대승불교의 공(Sunyata)이 있다(GhmN, 53). 힉은 이와 같은 실재 자체와 현상의 구분이 이미 여러 방식으로 관찰되고 있다고 말한다. 힌두교에서는 아무런 속성이 없으며 인간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는 니르구나 브라흐만(Nirguna Brahman)과 우주의 인격적 창조주이자 통치자인 이쉬바라(Ishvara)처럼 인간의 종교체험에 의하여 알려지는 사구나 브라흐만(Saguna Brahman)을 구분하고 있다. 에크하르트 역시 신성(Godhead, Deitas)과 하느님(God, Deus)을 구분하였다. 루돌프 오토는 샹카라 철학에서 브라흐만과 이슈바라를 구분하는 것이 마치 에크하르트가 지고의 하느님과 인격적인 주님(Lord)을 구분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하였다. Otto, Rudolf: Mysticism East and West. Merdian Books, p. 14; Hick, GhmN, 91. 유대교 신비주의자 카발리스트(Cabalist)들은 인간으로서는 묘사할 수 없는 절대적, 신적 실재인 엔 소프(En Soph)와 성경의 하느님을 구분하고 있다. 수피주의자들은 알 하크(Al Haqq), 즉 실재(the Real)는 인격적인 알라(Allah)의 근거가 되는 영원한 신성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폴 틸리히는 유신론적인 하느님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언급하면서, “하느님은 하느님의 상징이다” Tillich, Paul: The Courage to Be. Yale University Press. 1952, p. 190; Hick, GhmN, 92. 라고 말하였다. 또한 화이트헤드와 과정신학자들은 하느님의 근원적인 속성(하느님 자체가 가진 속성)과 그것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속성(세계를 포섭하고 그에 응답하면서 성립된 것)을 구분하고 있다. 고든 카우프만(Gordon Kaufman)은 절대적인 미지수 X로서의 신의 실체(real God)와 근본적으로 정신적, 상상적인 구조물로서의 신의 작용(available God)을 구분하였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포착을 넘어서는 무한 자존자로서의 하느님 자체와 인류와 관계하면서 구속주로 계시된 하느님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힉은 신 개념의 양극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체와 현상은 별도로 존재하는 두 개의 실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모든 종교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실재(the Real) 그 자체는 어떤 내용도 담지 않은 비어있는 것으로서 종교문화적 전통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힉은 이러한 구분이 칸트의 작업으로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칸트가 이론적 지식의 영역에서 인식될 수 없다고 못 박았던 초월적 이념(영혼, 세계, 신)을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 조건을 위한 명제로 요청한 사실을 중시하였던 히크는 신의 개념은 다양한 인간의 문화적 상황에 의하여 특별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드러나게 되며,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나 알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나 비쉬누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게 된다고 보았다(GhmN, 103-107).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출생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경향성이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구원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과 민족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Hick, Joh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New York 1973, p.104. 칸트에 의한 현상과 물자체의 구분법에서 착안하였던 히크는 신 그 자체로부터 인간에게 비쳐진 신의 다양한 모습들, 즉 “동일한 초월적 존재에 대한 다양한 자각”(GhmN, 83)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힉은 모든 위대한 세계종교들은 실재(the Real)를 인간의 다양한 문화적 태도로부터, 즉 인격적 또는 비인격적으로 접근할 뿐만 아니라, 실재 혹은 궁극자(the Ultimate) 서로 다른 지각과 개념, 그리고 반응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SC, 86). 힉이 신의 개념을 실재 그 자체와 인간에게 드러난 다양한 종교현상으로 구분한 것은 전적으로 칸트의 인식론에서 착안한 것이다. Hick, John: The conflicting truth claims of different religions, in: Philosophy of Religion. 4th Edition, New Jersey 1990, p. 118.
그런데 힉에 의하면 신은 우리들이 세계를 경험할 때와 유비적인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 사실에서 그는 칸트와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 한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은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을 접할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적 인식이 신 존재의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 힉은 사물적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영역에서도 초월적 실재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를 인식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현상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신에 대해서는 인식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 사실에서 힉의 입장과 구분된다. 그러나 힉은 칸트의 의도와는 달리 하느님은 인간에 의하여 경험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는 칸트의 인식론적 절차에 대한 설명을 종교인식론에 유비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사람들은 신을 체험하되 개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하고 구체적인 신적 형상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창조되지 않은, 우주의 창조자”의 개념과 같은 신성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은 신적 형상의 영역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GhmN, 105). 신의 개념을 특별한 하느님의 형상들로 구체화하는 것은 다양한 인간의 문화적 상황이다. 그리고 인간의 실질적인 종교체험을 알려주는 것은 이 형상들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상황에 맞는 이스라엘 하느님, 알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비쉬누, 쉬바의 체험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자들의 하느님관은 그저 하느님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예배는 환상이나 단순한 형상의 나타남에 직결되어 있는 것인가?(GhmN, 106).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하여 힉은 칸트가 본체와 현상의 구분을 통하여 경험적 실재론과 초월적 관념론의 결과를 동시에 낳을 수 있다고 한 사실에 착안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이며, 우리의 경험 밖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의 나타남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인식을 통하여 세계 현상을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특수한 인식기제들을 통하여 선택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는 하느님은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특수하게 제한된 종교 전통의 인식과 반응을 통하여 경험되고 생각된 인류와 관계된 하느님이다. 이로써 힉은 인격으로서의 하느님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모든 존재의 초월적 근거와의 참된 만남은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따라서 힉은 “인격적으로 경험된 하느님은 초월적인 신적 근원으로부터 유입된 정보에 대한 인간적 의식으로의 타당한 변형이다”라고 주장한다(GhmN, 109). 그러나 인간을 통하여 드러난 신의 인격성은 비록 그것이 신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상호작용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경험된 현상이 아닌가? 더 나아가서 힉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격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비인격적인 방식으로도 경험된다. 따라서 하느님은 유신론적 혹은 무신론적 형태를 모두 취하는 신적 현상들의 영역에서 인류에게 경험되는 신적 본체(divine noumenon)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힉의 주장은 여기에서 자체 함정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신 그 자체라고 여기는 것조차도 사실은 신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의 현상과 본체에 대한 구분은 처음부터 무의미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힉은 신적 본체와 신적 현상들 사이의 구분이 신론이나 신적 본성에 대한 설명을 저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한다. 하느님이 인간에 의하여 체험될 뿐이고, 그것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된다면 우리에게 본체 혹은 실제의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숨겨져 있는 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그 자체로서의 하느님과 나를 위한 분으로서의 하느님”을 구분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생각하였다. Feuerbach, Ludwig: The Essence of Christianity. Harper & Row, p. 17. 따라서 힉은 “무한한 신적 실재가 생각하고 응답하는 능력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제한되어 있고 조건적인 유한한 인간의 의식 안으로 침입해 오는 한에서만 그 실재는 인간에 의하여 알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GhmN, 110)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수용하면 인간의 하느님 체험의 다원성과 다양성이 인정될 수 있으며, 그로부터 어떤 종교 전통으로부터는 하느님이 유신론적 체험의 본체론적 근거로서 인격적이고, 다른 전통에서는 하느님이 신비적 체험 형태의 본체론적 근거로서 비인격적인 공(nonpersonal Void)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힉의 종교철학적 관심은 “교회 외부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이것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 6), “다른 누구에도 구원은 없다. 천하 인간에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은 없다”(「사도행전」 4: 12)는 등,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구원관을 수정함으로써 종교대화의 가능성 조건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유신론적 종교형태에 속하는 하느님(God)이나 인격적 존재로서의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 as personal), 그리고 무신론적 종교형태에 속하는 절대자(the Absolute) 또는 비인격적 존재로서의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 as nonpersonal)의 개념을 동시에 함축할 수 있는 새로운 절대자 개념을 찾으려고 고심하였다(GhmN, 42). 그러나 그는 새로운 절대자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플로티노스의 ‘일자’, 우파니샤드의 ‘불이일자’(不二一者), 신비주의에서의 ‘표현할 수 없는 일자’, 이스라엘이나 고대 인도에서의 ‘거룩한 일자’ 등, 전통적인 세계종교의 절대자 개념들은 신 그 자체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경험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어떤 종교의 신 개념도 완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어떤 길을 택하든 그것은 나에게로 이르는 길이다”(바가바드기타). 이 말은 히크의 종교철학적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시금 힉의 실재중심적 다원주의 사상의 본질에 이르게 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우주는 신을 중심으로 있는 것이지, 기독교나 다른 어떤 종교를 중심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상이한 문명들 속에서 성찰되었기 때문에 상이한 계시와 종교를 통하여 현현하는 것이다. 상이한 문화와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계시들이 나타날지라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신이 인간의 정신 속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면서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Hick, Joh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New York 1973, p.105: “하느님의 사랑이 범위에서 보편적이라면 그분은 인류에 대한 구원의 만남을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전 세계의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모든 종교생활이 그 분에 대한 인간의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관계의 일부분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신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힉의 종교철학은 폴 틸리히의 존재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틸리히의 기독교 중심주의적 입장에서는 크게 벗어나고 있다. 존 힉은 신의 개념을 어떤 특정한 인격적 신성의 규정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경험을 통하여 다양하게 인식되는 무한한 실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5. 종교인식론과 종교적 진리
경험으로서의 종교적 신앙은 무엇인가? ‘신을 아는 것’(knowing God)은 신앙에 의하여 신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인지(cognition)의 한 양태이지만, 대상적 존재를 지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신을 인지하는 것은 더 이상 신을 물리적 대상으로서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Hick, John: Religious Faith as Experiencing-as, i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Oxford 1973, pp. 37-38. 신앙이란 종교를 가진 인간이 신의 임재 가운데서 그의 삶을 기술하는 해석적인 요소이다. 신앙은 신의 활동의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고, 초월적인 신과의 계속적인 상호작용이다. Hick, Joh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Oxford 1973, p. 40. . 따라서 힉은 종교적 각성을 통한 경험은 일상적인 삶에서의 경험과 유비관계에 있다고 본다. Hick, Joh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Oxford 1973, p. 43. 힉은 종교적 인간이 그의 신에 대한 경험을 다루는 것은 그와 다른 사람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경험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Hick, Joh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Oxford 1973, p. 52. 종교적 신앙을 인식론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그것의 타당성이나 진실성 여부를 가리는 데 있지 않으며, 이런 문제들은 별개의 것이라고 본 것이다. 종교의 기본적인 신념은 초월적이고 신적인 실재들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힉은 종교사와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하느님이 언제나 인류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자 하였다면, 과연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상황 속에서 그분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다수의 초창기 문명은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각기 다른 계시를 필요로 하였던 것인가? 서로 다른 문화적, 역사적 상황 하에 있는 서로 다른 심성들과 그러한 계시들은 어떤 관련을 가지는가?” 둘째로 “신학은 과연 신적으로 계시된 지식의 본체인가, 아니면 종교체험을 심사숙고하여 얻은 인간의 해석인가? 어느 정도까지는 여러 종교 전통의 다양한 신학들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하느님은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비인격적일 수 있는가?” 신적인 성품이 모든 인간적 개념의 영역을 넘어서는 무한한 것이면서, 또한 나의 주님이자 동시에 모든 이를 위한 존재의 근거와 뿌리로 체험될 수 있는가?(GhmN, 38) 힉은 신의 특별한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전통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힉에 의하면 모든 종교 전통들은 하나의 동일한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면서 그것에 대하여 응답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다. Hick, John: The Philosophy of World Religions,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7, 1984, p. 231. 이것은 실재의 상이성보다는 인간의 인식 유형의 상이성에서 기인되는 현상이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의 문제는 대부분 개개인의 선택 문제라기보다는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는가에 달려 있다. 이집트나 파키스탄의 무슬림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무슬림이 되기 쉽고, 스리랑카나 버마의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교도가 되기 쉽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럽이나 미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 이처럼 종교인은 우연하게 태어난 그 세계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출생의 환경의 따른 종교적 확신의 상대성에 대하여는 GhmN, 61쪽과 SC, 78-79쪽을 참조하라. Hick, John: The Theological Challenge of Religious Pluralism, in: Christianity and Other Religions. Oxford 2001, p. 158; Hick, John: The Reconstruction of Christian Belief, i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Oxford 1993, p. 100. 힉의 이러한 생각은 캔트웰 스미스의 축적적 전통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동일한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응답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종교는 사회생활에 뿌리를 둔 문화현상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하느님에 대한 공동체적 응답이다(GhmN, 113). 인간은 원시적인 조건으로부터 시작된 변화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온 역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 역시 역사적 상황과 축적적 전통에 구속될 수밖에 없으며, 특히 그들이 속한 사회들 보다는 개인적 자유를 통하여 하느님에 개방적이었던 예언자들이나 성인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되었다(GhmN, 113). 역사의 초기단계에서 하느님은 자연과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로서 권능의 상징인 동시에 잔인하고 난폭한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말한 차축시대(axial period, 기원전 800년경)로부터 개인성이 출현하면서부터 궁극적 초월적 실재로서의 영원한 일자는 인간의 체험과 개념화를 넘어서면서 인격적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들의 존재 근거가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류의 모든 종교사가 증언하고 있는 신적 현상의 영역으로서, 신적 본체가 서로 다른 전통들을 통하여 체험된 것이다. 신의 실재 그 자체는 우리가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인간의 관점에서 경험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은 신에 대한 제한적 인식만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인간적 개념들로 이루어진 문화적 창을 통하여 종교사에서 발견되는 신을 의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GhmN, 67). 힉은 이처럼 다양한 종교체험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로 “나와 당신의 만남”(I-Thou Encounter)이다. 이는 인격적 존재와 의지로서의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을 말하며, 유신론적 종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GhmN, 92). 둘째로 “자연적 또는 우주적 신비주의”이다. 이는 온 세계나 우주를 신적인 실재의 현현이나 매체로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전체 세계 또는 전체 우주가 신적 실재의 현현으로 경험되는 자연신비주의 또는 우주신비주의는 유교나 도교와 같은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셋째로 “일자와의 합일”이다. 이는 유한한 피조물들의 체험들을 넘어서서 초월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경험하는 자아가 신적인 것과 합일되는 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방식에 의하여 종교체험을 하는 가에 따라서 그 경험의 내용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어떤 종교적 신들도 신 그 자체는 아니며, 단지 인간에 의하여 경험된 유한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GhmN, 95). 힉은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서 기독교 안에서의 다양한 교의 논쟁을 들고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인간적 형상들’(human images of God)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오랜 동안 논쟁을 거듭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혼란이 계속되었다. 힉에 의하면 예수는 분명 신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으며 신의 임재를 확신하고 모든 것을 신에 의존하였다(SC, 51-52). 힉은 예수처럼 신에 대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충분한 근거에 의하여 신을 믿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예수에 대한 응답을 중심으로 한 낮은 차원의 종교적 경험에 근거하는 사람들에게도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SC, 55). 따라서 예수의 모습은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 성육신하신 예수, 온화하고 부드러운 예수, 비천한 자를 높이고 권세 있는 자를 내치는 예수, 자기를 희생하신 예수, 하느님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는 영원한 신의 아들 예수, 우주의 그리스도 등처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격적 예수의 현존’(personal Jesus-presence)인 것이다. 역사적인 종교현상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초월적인 신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이라는 힉의 주장은 종교인식론에서의 몇 가지 문제점들을 노정하고 있다. 모든 종교 전통들이 예외 없이 동일한 신에 대한 상이한 경험이라면 모든 종교들은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도덕적, 사회적 위상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그 성립 시대나 교의체계, 신자들의 규모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하나의 공통기반을 갖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 상호간에 비교 우위성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종교들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런 것들은 무엇에 의하여 정당화되는가? 토템과 샤만과 같은 원시신앙과 불교나 기독교와 같은 세계종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바로 이런 사실들에는 종교인식론상의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신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삶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던 원리는 광기와 망상인가, 아니면 합리적인 신앙인가?(SC, 53 참조) 예수의 주장들이 신 그 자체에 대한 소명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들은 무엇인가? 성서가 계시의 통로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삶 속에 나타난 신을 다시 체험한 사도들의 신앙에 의하여 해석된 역사이고, 특정한 신앙으로부터 출발한 신앙 공동체의 전통이 축적된 결과일 뿐이다(SC, 59 참조). 실제로 힉은 기독교를 기원 1세기에 유대 지역에 살았던 예수의 삶과 사상에 기초한 신앙 운동체라고 해석한다(SC, 72). 이들은 예수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지만, 그것이 예수의 진정한 의도와 일치하는가는 확신할 수 없다. Hick, John: The Reconstruction of Christian Belief, in: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Oxford 1993, p. 92. 기독교의 중심 교의체계들은 예수의 의도와 관계없이 다양하게 해석되었고, 강력한 권력에 의하여 일의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본래적인 의도에서 벗어나거나 다르게 된 예수 공동체의 종교적 주장들이 합리적이라고 승인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절대적인 종교적 헌신이 있을 경우에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해도 좋은 것일까? 역사상 그 어떤 종교도 신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진술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인식의 한계는 동시에 종교진리의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어떤 종교도 완전한 진리주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종교든지 비도덕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진리주장을 고수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 척도를 제시하지 못하는 동안 계속해서 그 정당성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힉은 서로 다른 전통에서 서로 다른 형식의 예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일한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주장을 강화한다. 그는 세 가지의 가능성을 상정한다. 첫째로 존재론적으로 여러 신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이 세계의 창조주이고 세계의 근원이라는 신념과 상치된다. 둘째로 하나의 특정한 신앙공동체에서 예배하는 우리만이 신을 예배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에도 신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한 교회에서도 저마다 다른 신앙내용을 가질 수 있다.셋째로. 만물의 창조주는 하느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존재는 무한하고 풍성해서 인간의 인식능력을 초월하여 있으며,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사실상 하나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다(GhmN, 66f). 이 경우 배타적 구원관을 가진 기독교의 근본주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 인식론의 문제와 종교 진리의 문제가 제기된다. 복음이 다양하다는 사실에서 그것들 모두가 참일 수 없다는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 모두가 거짓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야기된다(GhmN, 89).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나의 종교만이 신적 실재에 대한 응답이고 다른 것들은 그저 인간적인 투사일 뿐이라는 주장으로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GhmN, 90). 종교 예배에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인격적 창조, 세계의 주님, 인간의 삶에서 살아있는 도덕을 요구하는 분으로 간주되는 보다 높은 실재에 마음을 열어 놓고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교회에서는 신을 신고 모자를 벗는데, 모스크(이슬람), 구드와라(시크교), 사원(힌두교)에서는 모자를 쓰고 신을 벗으며, 시나고그(유대교)에서는 둘 다 벗는다. 또한 초월적인 실재가 교회에서는 하느님(God), 시나고그에서는 아도나이, 모스크에서는 알라, 구드와라에서는 에코암카르(Ekoamkar), 힌두교 사원에서는 라마(Rama) 혹은 크리쉬나(Krishna) 등으로 서로 다르게 불리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를 지칭한 것이다(GhmN, 63).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시 실재에 대한 상이한 대답은 실재에 대한 부분적인 경험들을 반영하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필립 앨몬드는 각각의 종교들은 실재의 부분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Almond, Philip: John Hick's Copernican Theology, in: Theology, January 1983, p. 37. 그러나 이에 대하여 힉은 ‘부분’ 대신에 ‘방식’(way)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힉은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들이 실재에 대한 부분적인 경험이어서 그 경험들을 모두 합치면 실재 그 자체가 구성된다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각 종교들은 전체로서의 실재를 서로 다른, 그리고 고유한 방식으로 경험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는 종교적 전통들 사이에서의 가치서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힉은 분명히 “모든 종교 전통들이 동일한 가치나 또는 동일한 정당성의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Hick, John: On Grading Religions, in: Religious Studies 17, 1982, p. 451 and in: Problems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1985, p. 67. 그는 구원론적 체계에서 종교의 인지적 현상은 실재에 대한 경험이며, 이 경우에 실재에 대한 비전을 비교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은 이성이라고 보았으며, 그에 수반되는 종교의 실천적 현상은 양심이나 도덕적 판단에 의하여 평가될 수 있다고 보았다. Hick, John: On Grading Religions, in: Problems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1985, pp. 69, 79. 그러나 그는 이성이 세계종교의 우선순위나 등급을 매길 수는 없다고 물러선다. 그는 “우리는 위대한 세계 종교들을 이성의 도구나 수단으로 등급을 매길 수 없다” Hick, John: Problems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1985, pp. 80-81. 고 단정하는 동시에 “우리는 종교적인 현상들을 어느 정도 평가하고 등급을 매길 수는 있지만, 전체성으로서의 위대한 세계 종교들을 실질적으로 평하고 등급을 매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Hick, John: Problems of Religious Pluralism. London 1985, p. 86. 고 물러섰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전 세계의 하느님이라면, 우리는 인류의 모든 종교적 삶이 신에 대한 인간의 계속적이고도 보편적인 관계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Hick, John: Reconstruction of Christian Belief, in: God and Universe of Faiths. Oxford 1993, p. 101.
그러나 이러한 언급을 통하여 힉이 의도하는 것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의 개종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기독교가 타종교와 만남으로써 상호인정과 상호성숙을 도모할 수 있다고 보았다. Hick, John: An Interpretation of Religion. Human Responses to the Transcendent. Yale University Press 1989, p. 379.
다른 위대한 종교 전통의 비전과 경험과 사상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독교인에게는 큰 소득과 성숙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실재를 어떻게 경험하고 그에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볼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우리의 존재를 보존하게 되는 그 궁극적 실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우리가 불교와 비유신론적 힌두교의 다양한 형태들을 마찬가지 의미에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인간변혁의 그릇들로 간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시도된 그들의 명상과 방법들과 그들의 도전적으로 생소한 통찰로부터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실재와 관련한 인간됨의 다른 길들의 축적된 경험과 사상에 개방함으로써 각 전통 안의 삶은 놀랍도록 풍부해지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Hick, John: An Interpretation of Religion. Yale University Press 1989, pp. 379-380: “But on the other hand there are great gains and enrichments available to a Christian who is able to learn from the visions, experiences and thoughts of the other great religious traditions. To see how others experience and respond to the Real can only enlarge one's own awareness of that ultimate Reality in which we all live and move and have our being. [...] and if we regard the various forms of Buddhism and of non-theistic Hinduism as likewise authentic contexts of the salvific methods of meditation and form their challengingly different insights. Indeed life within each tradition can be enormously and thought of other ways of being human in relation to the Real.”
힉이 말하는 ‘성숙’은 “신적 실체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인식”이다(GhmN, 117). 초월적 존재는 그에 대한 자신의 제한적 비전보다 무한히 크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고, 그들이 나란히 마주 대하여 서 있게 됨으로써 신적 실재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인식을 향하는 데 서로가 도움을 줄지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상대방이 서로의 비전을 나누어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개의 비전을 동시에 갖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자극을 통하여 자신의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힉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일사불란한 통일신단의 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지 않고, 서로 다른 종교적 전통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실재에 대한 보다 풍부한 경험과 이해를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종교적 신앙고백을 보다 성숙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추구되는 것은 단일한 세계종교 이는 세계적 규모의 종교 획일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에 대한 상호이해와 상호연대성의 진전을 의미하는 동시에, 적대적인 종교제국이라는 상극적인 대립관계를 탈피하여 상보적 다원주의(complementary pluralism)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SC, 89). 힉의 신 중심주의, 실재 중심주의는 자신들의 종교에만 진리와 구원이 있다는 독자적 우월성을 지양하고 다른 종교전통들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존재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궁극적 실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한 이러한 주장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물론 힉은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며, 그가 악의 문제와 기독교 신학에서의 변신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보적인 다원주의의 결과가 절대악을 지향하는 일방주의 신학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서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가 아니라 다양한 전통들이 서로를 더 이상 경쟁적인 이념 공동체로 보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GhmN, 77). 5. 결론: 존 힉의 칸트주의적 전제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우리는 칸트와 힉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힉은 타 종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 변화 과정을 단계적으로 살피는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칸트적인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로마기독교와 보수적인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역사적인 사실로부터 1960년대 이후의 변화를 거쳐서 다양하게 전개되는 에큐메니칼 선교정책에 이르기까지를 다루면서, 이런 모든 태도는 여전히 기독교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태도에서는 결코 다른 종교와의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힉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대화를 진지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종교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그 다양한 신적 표상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신봉하는 것과 동일한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하느님 중심의 공통신앙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힉은 칸트가 학문적 주장 이전에 이성 그 자체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였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용어를 차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상의 유사성보다는 개념 사용의 유비적인 유사성만을 겨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방법론으로 구성주의적 이성인식, 즉 객관적 사실(현상적 자료들)에 대한 주관적 구성(선험주의)을 겨냥하고 있지만, 힉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시각에서 실재 중심적인 시각으로의 변화를 의도하고 있다. 둘째로 힉이 강조하는 신 중심주의에로의 전환요구는 현상에서 실재를 향하는 것과는 반대로 칸트의 구성주의는 실재로부터 제시되는 현상의 포착을 겨냥하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을 치닫고 있는 것이다. 힉은 칸트가 신을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힉은 이러한 칸트의 주장을 묵살한다. 그는 사물 그 자체와 현상들의 관계를 자신의 종교인식론에 도입함으로써 세계종교의 다양한 신 개념들은 하느님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다양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힉은 신 그 자체와 인간에게 경험된 신의 모습을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 도식으로 구분하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의 논점은 사뭇 다르다. 힉은 기독교의 종교 경험(현상)으로부터 실재 그 자체(물자체)에의 도달을 목표하고 있으나, 칸트는 물자체로부터 제시되는 현상의 주관적 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힉이 의도하는 종교대화는 실재중심적 다원주의의 지평 위에서 가능하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도덕중심적인 이성신앙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자체와 현상의 도식을 통하여 제시된 힉의 신 개념과 도덕법의 구속성 확보를 위하여 요청되는 칸트의 신 개념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다시 말하면 힉의 하느님은 인간의 경험적 현상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신 개념(이 경우에 힉의 신 개념은 이론철학적 지평 위에 있다)이지만, 칸트의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이 경우에 칸트의 신 개념은 실천철학적 지평 위에 있다). 역사적인 다양한 세계종교 현상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각인된 하느님의 모습들은 힉에게 하느님이 경험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은 그 지성능력의 한계 때문에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이론적인 주장도 펼칠 수가 없다. 칸트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들, 즉 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그리고 목적론적 논증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였다. 따라서 신의 존재 요구는 이론적인 방식이 아니라 오직 실천적인 방식, 즉 도덕적 주장의 구속성 확보를 요구하기 위한 조건명제로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칸트의 종교철학적 구상은 ꡔ실천이성비판ꡕ에서 요청이론으로 구체화되고 있으며, Kant, Immanuel: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Riga 1788, Das Dasein Gottes, als ein Postulat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 A223. 힉은 이러한 칸트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s.c. 칸트]에게서 하느님은 종교체험 안에서 만나는 실재가 아니라, 도덕의 동인으로서의 작용을 기초로 하고 이성에 의하여 요청된 어떤 대상이었다. 도덕적 의무의 실재는 완전선과 완전한 행복이 동시에 일어나는 최고선(summum bonum)의 가능성의 기초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실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신은 “행복과 도덕성의 완전한 일치의 근거를 포함하는, 자연 전체와는 구별되는 전체 자연의 원인”[...]으로 요청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간접적으로 세워진 하느님 관념과 규정적인 관념 기능들에 의해 우리는 “세계 내의 모든 질서가 마치 최고 이성의 목적에서 싹튼 것처럼 보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칸트에게서 하느님이란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요청되는 것이다(GhmN, 104-105).
칸트의 하느님은 경험 대상이 아니고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 요구되는 요청명제이다. 칸트가 신의 존재를 도덕적 요구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명제로 이해한 것과는 달리 힉은 하느님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살아계시면서 인간과 끊임없이 교섭하시는 최고의 초월적 존재로 파악하였다. 이 점에서 힉의 하느님은 헤르만 코헨의 하느님과 유사하다.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다루지만 힉은 그것을 종교인식론의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물론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던 사실에서는 칸트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만, 신의 현실성에 대한 종교적 체험이 타당한 확신이라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SC, 49-55). 힉의 종교철학은 경험적 사실 너머에 있는 실재중심적 다원주의라는 현상초월적 지평을 전제하지만 칸트의 종교철학은 도덕적인 의무 이행을 신의 명령으로 인식하는 이성신앙적 지평을 지향하고 있다. 넷째로 힉의 종교인식론과 종교적 진리주장은 이론적 지식의 준거 문제와 유비적인 반면에, 칸트의 그것들은 어떤 이론적 규정성도 갖지 못한다. 힉은 세계종교의 다양한 신 인식이 하나의 공통적인 신 존재 자체에 대한 현상들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감각적 인식에서 현상과 물자체의 개념을 구분한 칸트의 구상을 자신의 특유한 종교인식론에 원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칸트의 의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의 도식을 순수 인식론의 차원에서 제기하였다. 객관적으로 타당한 지식이 산출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각 외부에서 들어온 자료들이 우리의 직관 능력에 포착된 후에 오성의 논리적인 개념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칸트는 우리가 유한한 의식구조 안에 본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특정한 형상과 범주들로 세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고 그것의 현상일 뿐이다. 힉은 칸트의 이런 주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는데, 특히 현상과 본체의 차이성에 대하여는 적극 수용한다. 그러나 힉은 현상과 물자체의 구별을 순수 인식론이 아닌 종교인식론에 도입함으로써, 칸트의 의도와는 반대로 경험으로서의 종교적 신앙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힉의 주장은 칸트의 주장과 전적으로 구분된다. 칸트는 어떤 초월적 대상 개념들은 그 특성상 우리에게 결코 대상으로 나타날 수 없다고 규정하였는데, 그 가장 대표적인 유형이 하느님의 존재와 같은 초월적 이념들이다. 힉의 주장에 대하여 칸트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을 것이 분명하다. 칸트는 하느님에 대한 어떤 이론적인 주장도 성립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상과 물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초월적 이념’(transzendentale Ideen) Kant, Immanuel: Kritik der reinen Vernunft. Riga 1781, A 327; 1787, B383. 으로서 우리에게는 영원히 물자체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벗어나 있으며, 따라서 그 존재를 긍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전통적으로 유신론자는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고, 무신론자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였으나, 칸트는 이 두 주장 모두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 종교의 신 개념이 하느님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현상들이라는 힉의 주장은 신을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설정한 점에서 칸트의 의도로부터 벗어나 있다.
힉의 종교철학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칸트주의적 전제들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힉의 고유한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힉은 그의 다양한 종교학적 주장들을 가미하여 현대를 대표하는 종교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힉이 칸트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차용하여 그의 고유한 주장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그의 주장체계와 가장 유사하고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는 칸트의 명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힉의 결론적인 주장은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종교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신적 실재들의 현상들은 결국 하나의 동일한 초월적인 신 존재 그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힉은 바로 이 사실을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칸트의 명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칸트는 “하나의 참된 종교와 수많은 신앙유형들”을 언급함으로써 종교대화의 존재론적 지평을 이미 열어놓았던 것이다. 힉 역시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수많은 신앙유형들은 제각기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성립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칸트는 그의 유명한 종교철학 저서 ꡔ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ꡕ(179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의 (참된) 종교만이 있다. 그러나 신앙의 다양한 유형들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신앙유형의 차이로 인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서도 이 하나의 참된 종교와 만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이 혹은 저 종교에 속한다기보다는 이러한 혹은 저러한(유대교, 회교, 기독교, 가톨릭, 루터교의) 신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Kant, Immanuel: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 Riga 1793, S. 146.
여기에서 칸트가 말한 “하나의 참된 종교”(eine wahre Religion)는 분명히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유형들을 가능하게 하였던 초월론적 정초근거, 즉 이 세계의 모든 신앙유형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종교임이 분명하다. 칸트가 모든 종교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단일한 신앙체계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종교공동체의 통합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하였던 힉의 의도와 상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칸트가 말하는 “하나의 참된 종교”가 서로 다른 모든 신앙유형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일 경우에, 그것은 힉의 의도와 정확하게 일치할 수도 있다. 교회신앙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시대에 칸트의 이와 같은 발언은 가히 급진적,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칸트 학자들은 칸트의 이와 같은 발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연구하지 않았으며, 힉 역시 이 주장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그가 칸트의 이 주장을 알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의 독창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가 칸트의 이 주장을 모르고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의 칸트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힉은 칸트의 도덕 지향적인 요청론적 종교구상을 경험-실재론적 지평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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