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내시라는 특수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사고에 의해 또는 어렸을 때 개가 어린아이의 똥을 핥다가 고추까지 잘라먹어 고자가 된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인위적으로 고자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가난한 집에서 내시가 세도를 부리는 것을 보고 인위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고자로 만들었거나, 이성(異姓) 양자를 들이기 싫어한 내시들 가운데는 같은 성씨(姓氏)의 가난한 집안 아이를 사다가 거세를 했거나. 자기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개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견디지 못하여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은 중국과 달리 내시들이 결혼하고, 입양을 통해 아이를 두는 등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허가하고, 족보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내시들이 부와 권력 대신에 가정에 몰두할 수 있게 해서 내시가 권력화 되는 폐단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고, 또 내시들도 지킬 가정이 있으니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내시가 중국과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는데요, 중국의 경우 고환과 음경으로 성기 전체를 제거하지만 조선은 고환만을 제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입궁할 때 항아리를 가져가는데, 항아리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그 속에 자신의 고환을 보관하며 이 항아리는 내시감에게 보관했어요. 내시가 죽을 경우 해당 내시의 항아리에서 고환을 꺼내 봉합한 후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접하는 모습과는 달리, 내시들의 사회에도 고된 수련과 시험이 있었다고 해요. 승정원에 의해 사도목(四都目)이라 하여 년 4차례 인사고과를 받았는데, <상> <중> <하>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 근무 평점을 매겨, 10번의 고과 중 세 번 <중>을 받게 되면 곧바로 파직하게 되고, 연달아 10번을 <상>을 받거나 근무 일수를 채우면 품계를 올려주었습니다.
시험과목은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 가운데 한 권, ≪소학≫이나 ≪삼강행실도≫ 가운데서 한 권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각각 세 곳씩을, 잘 읽고 해석하면 ‘통通’ 특별 근무 일수 2일을 쳐주고, ‘약통弱通’ 대충 해석할 줄 알면 근무 일수 1일을, ‘조통(粗通)’ 다시 말해 잘 읽고 해석하지 못하게 되면 반일을 쳐주었어요. 하지만 ‘불통不通’, 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경우에는 근무 일수 3일을 감하였습니다.
이렇게 2권 6곳 가운데 다섯 곳에 ‘통通’을 얻게 되면 품계를 올려주고 시험을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35세가 되면 시험을 면제시켜 주었다고 해요. 즉, 이 나이가 되면 이제 공부를 가르치긴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내시제도는 갑신정변(1884년) 때 폐지되었으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끝나는 바람에 다시 부활되었다가, 갑오개혁(1894년) 때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