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머루산 (순례지/성지)
간략설명: 태백산맥 줄기 포도산 꼭대기에 세워진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 131 부근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는 본래 진보군 동명 지역으로 예로부터 머루가 많이 나서 구머리 또는 포산(葡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양군 석보면에 편입되었다. 이곳 역시 노래산 교우촌과 같이 태백산맥 줄기인 포도산(帽帶山, 748m) 꼭대기에 있는 심산유곡의 마을로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다. 1801년 신유박해 후 충청도의 홍주, 예산 등 여러 곳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산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다래와 머루를 따먹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815년 초 청송 노래산 교우촌의 신자들이 체포된 지 며칠 후에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 교우촌까지 덮쳐서 모든 신자들을 붙잡아 안동 진영으로 끌고 갔다. 그때 체포된 신자들 중에는 용감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관변문서인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박사행 등 20명은 즉시 석방되었고 김시우, 최윤금, 심환, 김광억, 김홍금, 김헌동, 김광억의 처 분령(分令) 및 그의 아들 종건, 김홍금의 자녀인 김장복과 딸 작단, 김헌동의 아들인 갑득, 딸 시임, 정임 등 13명은 용감히 신앙을 증거했다고 한다.
김시우 알렉시오(金時佑, 1783-1816년)는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천주교에 입문했다. 고향을 떠나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살던 중 포졸들이 왔을 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하며 함께 체포해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안동에서 대구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약 2개월 만인 1816년 음력 10월 21일 이전에 굶주림과 형벌의 상처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로 미혼이었다.
이들 외에도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과부가 된 후 아들 종악과 함께 머루산에서 살던 이시임 안나(李時壬, 1782-1816년)도 을해박해 때 체포되었다. 당시 머루산에서 체포된 신자들 대부분은 옥사했지만 이시임은 안동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대구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갇혀 있던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 6명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김강이 시몬(金鋼伊, 1765?-1815년) 역시 머루산에서 교우촌을 일구며 살다가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과 함께 따로 조그마한 공동체를 이루어 몇몇 곳을 전전하던 중 강원도 울진 고을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金思健, 1794-1839년)와 함께 체포되어 안동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