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태수의 자기 위안.
자기 위안인지 처절한 체념인지 모를 목소리가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고, 태수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속내를 마주하며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생존을 위해, 그리고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 자조 섞인 진실은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어느 날 방과 후, 교장실로 조용히 불려간 태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교장실 안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와 함께, 은근하면서도 단호한 눈빛을 빛내는 교장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태수 군,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 네."
교장 선생님은 넌지시 서류 봉투를 책상 위로 밀어 밀었다. 그 안에는 갑철 어머니가 학교 측에 맡긴 발전기금에서 특별 배정된 장학 증서와 함께, 앞으로 고등학교 생활 동안 기숙사비와 수업료, 심지어 참고서 구매비까지 전액 지원된다는 파격적인 제안서가 들어 있었다.
"이건."
"이름 모르는 사람의 뜻이기도 하고, 우리 학교의 소중한 인재를 버려둘 수 없다는 재단의 결정이야. 자네는 오로지 학업에만 집중하게. 다른 경제적인 걱정은 이 교장이 책임질 테니."
교장 선생님의 묵직한 음성과 함께 내려진 실질적인 지원 덕분에, 태수의 짓눌리던 가슴 한구석에서 거대한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는 듯했다. 매달 월세 걱정과 생활비 압박에 시달리던 가난의 고통에서 비로소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경제적인 족쇄가 풀린 태수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공부. 그리고 또 공부."
제4장 태수와 갑철의 변화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묘하게 얽혀갔다.
교장실을 통해 전해진 자본과 지원을 등에 업은 태수는 더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공부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묵묵히 책상에 앉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해진 시간에 책을 펼쳤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그날 배운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시험을 볼 때마다 태수의 이름은 늘 상위권에 올라왔고, 마침내 전 과목 올백이라는 눈부신 성적까지 거머쥐었다. 반 아이들은 태수를 바라보며 감탄했고, 어떤 아이들은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가장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갑철이었다.
한때 교실의 중심에서 누구보다 당당하고 거칠 것 없어 보였던 갑철이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익숙했지만, 누군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갑철의 시선이 자꾸 태수에게 머물렀다.
태수는 특별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책을 펼치고, 선생님의 설명을 받아 적고, 모르는 문제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풀었다.
그저 평범한 공부였다.
그런데 갑철은 그 평범한 모습을 이상하리만큼 자주 바라보았다.
'쟤는 왜 저렇게까지 하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도 답을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기도 했다.
"공부를 그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지만 그 말은 점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태수가 문제를 풀고 있으면 갑철은 괜히 옆눈으로 힐끗거렸다. 태수가 노트 한쪽에 중요한 내용을 정리해 놓으면, 갑철은 다음 날 자신도 모르게 비슷한 자리에 줄을 그었다.
태수가 문제를 틀린 뒤 빨간 볼펜으로 틀린 이유를 적어놓는 모습을 본 날에는, 갑철의 책에도 처음으로 빨간 줄 하나가 생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갑철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음 한구석에 누군가의 모습이 조금씩 스며드는 것.
태수는 갑철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이렇게 해."
"너도 공부해야 해."
그런 말을 한 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조용한 성실함이 오히려 갑철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거친 폭풍처럼 교실을 휘젓던 전학생의 손에 어느새 볼펜이 쥐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책상 위에 놓여 있기만 했던 책이 조금씩 펼쳐지기 시작했고, 펼쳐진 책에는 어느 순간부터 밑줄이 하나둘 늘어났다.
쉬는 시간에도 갑철은 예전처럼 무조건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지 않았다.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나가자고 해도 잠시 망설이다가 책장을 한 번 더 넘겼다.
그리고 누군가 물었다.
"갑철아, 너 요즘 왜 이렇게 공부하냐?"
갑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심심해서."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조차 솔직한 대답이 아니었다.
갑철은 아직 몰랐다.
자신이 왜 태수를 자꾸 바라보는지.
왜 태수가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지는지.
왜 태수의 성적표를 볼 때마다 묘한 자극을 받는지.
질투인지, 자존심인지, 동경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태수의 조용한 뒷모습이 갑철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흔들림은 아주 천천히 갑철을 바꾸고 있었다.
누구도 손뼉을 쳐주지 않는 변화였다.
누구도 "갑철이가 달라졌다"라고 말해주지 않는 변화였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변화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요란한 선언도 없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좋은 모습을 닮아가는 것.
어느 날 갑철은 공부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태수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문제를 풀고 있었다.
갑철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자신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펜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교실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변화 하나가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태수는 모르고 있었고,
갑철도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다만 한 사람의 성실한 뒷모습이 다른 한 사람의 삶에 조용히 길을 내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갑철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작은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훗날 갑철의 인생을 바꾸게 될 아주 작은 씨앗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