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탄생과 독립전쟁
침공개시
아랍의 작전계획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남부로부터 강력한 이집트 육군 2개여단 1만 병력이 네게브를 석권한 다음 1개여단은 텔아비브를 향하여, 다른 1개여단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동쪽에서는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단 - 영국군 장교들이 훈련하고 참모역을 담당한 약 1만병력 - 이 요르단 강을 건너 유엔이 아랍국가의 일부로 규정한 팔레스타인 중부지역을 재빨리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장악하고 신도시를 포위하게 되어 있었다. 북쪽으로는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의 군대가 갈릴리를 분쇄 돌파하고, 하이파로 밀고 들어간 다음 해안평원을 따라 텔아비브로 진격하게 되어 있었다.
1주일 후, 아니면 늦어도 2주일 후면, 유대국가는 소멸되고, 그 시민들은 어느 아랍 지도자가 예언했던 대로 '몽고 대학살'의 희생자가 될 것이었다. 무제한으로 보이는 보급품을 확보하고, 약 2만 1500병력의 일선부대 (이스라엘 인들보다 훨씬 많은 인구 가운데서 차출한)를 휘하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집트의 파루쿠 왕과 트랜스 요르단의 압둘라 왕과 같은 아랍지도자들은 별로 걱정하는 빛이 없었다.
그들과 맞선 이스라엘군은 지하군대에서 끌어 모은 남녀 혼성군과 야전군, 지역방위군 등 약 6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숫자상으로는 아랍군을 능가했지만, 빈약한 장비로 전쟁을 시작했다. 1948년 5월 14일 현재 그들은 통틀어 겨우 1만정의 소총과 소총 1정당 50발의 탄환, 낡은 대포 4문, 그리고 3600정의 기관단총 밖에 없었다.
그 이전 몇 달 동안이나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전략은 결사적인 방어였다. 단 한 치의 땅도 사수하고, 각 정착촌을 요새화하며, 마지막 한 자루의 총에 한 발의 총탄이 남아 있을 때 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전술로써 이스라엘 인들은 아랍의 진격을 감속 시키고, 무기가 공급되고 신병들이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을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다. 운이 좋다면, 광범위한 공세를 취하여 침략군을 국경 너머로 몰아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전술이었으나,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이 전술에 생존의 가냘픈 희망이 걸려 있었고 승전의 희망은 더욱 희박했다.
5 월 14 ~ 15일의 밤중, 어둠을 틈타 이집트 침공군이 국경을 넘어 네게브 사막으로 진격했다. 대규모의 병력이 니림이라는 작은 유대인 정착촌 외곽에 집결했다. 그 마을의 무기라고는 17정의 소총, 경기관총 1정 그리고 기관단총 4정 뿐이엇다. 가시 철조망으로 에워싸인 이 마을에다가 이집트군은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뒤이어 4대의 전차, 여러 대의 장갑차와 자주포의 지원하에 수백명의 보병이 공격해 왔다. 정착민들은 보병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 올 때까지 사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집트군이 철조망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맹렬한 사격을 가했다. 별다른 저항이 없으리라 예상했던 농촌 출신의 이집트 병사들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이집트 장교들은 수차에 걸쳐 사병들을 재집결 시키고 돌격대를 편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진지를 공격케 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이집트 군은 니림을 우회하여 해안 도로를 따라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으로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남부 및 북부 전선에서도 니림 전투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아랍군 장교들은 그들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기를 주저하는 겁많은 전술가들임이 판명되었다. 쉽게 승리하리라 예상했던 그들의 부하 사병들은 완강한 이스라엘의 저항에 부딪칠 때마다 예외없이 혼란에 빠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다수의 아랍 정치가들, 특히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그 전쟁을 단시간에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식량, 군화, 무기의 구입비로 떼어 놓은 자금은 전장의 장병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정치가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갔으며 텔아비브를 향한 아랍군의 성공적인 개선행진으로 예상되었던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예루살렘 전투
오직 동부 전선에서만 아랍군은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 최고의 훈련, 우수한 장비와 엄한 규율을 갖춘 트랜스요르단의 아랍군은 신속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가 5월 19일 신도시를 포위했고, 5월 28일 구도시를 점령했다.
당시 이스라엘이 국가의 수도로 삼을 생각이었던 예루살렘 신도시에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랍군의 포탄들이 신도시에 쏟아지고, 보급선이 차단되자, 이스라엘령의 예루살렘은 아랍군의 공격이 아니면 굶주림에 굴복해야 하리라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거듭하여 이스라엘 군의 돌격대가 해안도로를 내려다 보고 있는 아랍군 진지들에 기습을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격퇴되고 말았다.
마침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인 들은 하나의 우회로, 아랍군단의 야포망을 돌아가는 길이 5 Km 의 도로를 개설하기로 결정했다. 계속되는 포격 속에서 염소마저 건너가기 어려운 지형에서도 도로건설 작업에 나선 이스라엘 노무자들은 굶주림으로 예루살렘이 항복하기 전에 도로를 완성하려고 시간과 숨가뿐 경주를 벌이고 있었다. 아랍군 장교들은 그 도로가 절대로 완성되지 못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포격 이외에 작업을 방해하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8년 6월 11일 아침, 이스라엘의 첫번째 수송차량대열이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새 도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24일간의 포위망은 뚫리고, 예루살렘은 구출되었다. 선두 트럭에는 고대 히브리의 기도문이 쓰여 있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잊는다면, 아 예루살렘아, 내 오른손이 그 솜씨를 잊어 버리게 하소서"
바로 그날 예루살렘은 구원되었고, 성지에서 전투의 아우성은 갑자기 멎었다. 유엔에서 격렬한 토론이 있은 후 아랍 국가들은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중재한 1개원 휴전안에 동의했던 것이다. (베르나도테는 1948년 9월 17일 슈테른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스라엘 분쇄에 실패한 아랍인 들은 그때부터 내분에 휘말려, 각국은 서로 상대방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렸다. 그와는 달리 이스라엘인 들은 그 휴전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최근에 수입된 무기들이 지급되었고, 새로운 단위부대들이 편성되었다. 이런 부대의 병력은 대다수가 유럽에서 온 선박에서 내린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는 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휴전에서 참패로
1948년 7월 8일 휴전기간이 끝나고 전투가 재개되었을 때, 사기가 떨어진 아랍군은 엄청나게 강화된 적군과 대결하게 되었으며, 10일간의 공세로 이스라엘 군은 전장을 휩쓸어 갈릴리에서 시리아, 레바논과 이라크의 전위부대들을 소탕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구 도로를 열었다. 이스라엘 군이 불과 1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에 목표를 달성하고, 남부의 이집트 돌출부로 관심을 돌릴 태세를 갖추었을 때, 유엔의 새로운 휴전조치로 일시 전투가 중단되었다. 1948년 가을과 겨울에 일련의 휴전협정 위반이 이스라엘 군에게 이집트 군을 공격할 기회를 주었다. 제일 먼저 이집트 군이 네게브 북쪽 가장자리의 돌출부에서 격퇴 당했고, 이어 그들은 네게브 중심부에서마저 참패하여, 이스라엘 군은 상당히 안정된 남부 전선을 학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독립 1주년 기념일이 될 즈음에는 중동에 새로운 강국이 생겨났음이 분명해졌다. 이스라엘은 살아남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영토를 약 3분의 1이나 확장했다. 그렇지만 이 생존 투쟁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약 6000명의 이스라엘인 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랍의 사망자수는 그보다 휠씬 많았다. 아랍인 들은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는 느낌으로 말미암아 패전의 쓰라림이 더욱 컸다. 그 뒤 4반세기 동안 이스라엘은 그 생존을 위협하는 아랍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3차의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엄청난 위험과 고통이 따르긴 했지만, 1948년에 시오니즘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하에서도 수세기에 걸친 꿈을 실현했다.
즉 역사의 유랑민족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에 영주할 안식처를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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