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 95년 6월 22일 화요공부방 - 정전 예순째 시간
□ 제3 수행편
제8장 참회문-2
오늘 황원공 교우님이 꼼꼼하게 잘해서 제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지난 주에도 강연자가 잘 해서 제가 딴 이야기만 하다가 만 것 같은데
괜찮죠 그렇게 해도?
- 네
참회란 무엇이에요? 참회란 성주 참왼가?
- ㅎㅎㅎ
보통 참회 반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뉘우침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알아채는 것, 인정 하는 것, 그리고 어떤 대가를 달게
받는 것입니다. 눈물은 눈에서도 나오지만 가슴에서도 나옵니다. 여러분
가슴에서 눈물 흘려보았습니까? 참회란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제가 미국에 다녀와서는 달라진 점은 손을 잘 씻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누칠을 해서 깨끗이 씻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손이 깨끗한 것
같은데 씻어보면 깨끗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손으로 코도 만지고
콧구멍도 쑤시고 눈도 만지고 뭐를 집어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감기도 잘 걸리고 뭐가 생기기도 합니다.
참회는 언제 하는 것아 가장 빠른 것입니까? 잘못 했을 때 바로 하는
것이 제일 빠르죠? 그런데 잘못 한 줄 알아요? 참회는 잘못 한 줄
알았을 때가 가장 빠릅니다. 때로는 10년 전의 것도, 때로는 20년 전의
것도.. ‘아, 내가 잘못했었구나…’ 라고 알았을 때, 즉, 가장 빠른 참회는
알아챘을 때입니다.
여자들은 시기 질투가 장점이면서 단점입니다. 예전에 TV 사극을 보면
원래 궁녀로 들어 갔다가 임금에게 잘 보여서 후궁이 되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뭐죠?
- 장희빈
장희빈이 왕비의 인형을 놓고 쿡쿡 찌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시기 질투 때문에 이 세상이 발전이 안되고 있습니다. 개인은 물론이요,
이 세상의 큰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시기 질투를 넘지 못하면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시기 질투를 받으면 보통 사람은 포기를 합니다. ‘내가
이런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서 무엇 하러 이 일을 악착같이 하겠느냐.’
라고 하면서 접어 버립니다.
TV 드라마 허준을 보면 허준이 정당한 일을 하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잖아요? 목숨을 빼앗길 경우도 생기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도 얼마나 그릇이 컸으면 세상에 임금이 시기 질투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런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
마음 속에 시기와 질투가 많습니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가 있고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자기와 비슷한데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어이
씹어버립니다. ‘그것은 잘 한다고? 그것은 잘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아니야’ 라고 하면서 씹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탐심이요 치심입니다.
또 오해를 해서 얼마나 많은 해가 있었습니까? 여러분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 에 몇 번 체크를 했습니까? 그 과실을 말한 것이 다
허공에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잘못되면 남을 얼마나
탓했습니까?
은혜 입을 것은 모른척하고 때로는 챙겨야 할 것도 안 챙기고, 때로는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도 합니다. 때로는 가난한 자, 때로는 부족한 자를
무시하고, 때로는 오만하고, 때로는 교만하고. 때로는 할 일이 있어도
모른척하고 나태합니다. 또 시치하거나 낭비하고 책임전가를 합니다.
약자일수록 참회가 잘 안 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말하면 방어 기제가 나와서
어떻게든 정당화 시킵니다. 또는 자신의 잘못을 말한 사람의 다른
단점을 확대 재생산해서 자신의 잘못보다 그 사람의 잘못을 두드러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은 잘 모릅니다.
아상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결점을 가리고 자신을 잘 보이기에
급급합니다. 또는 습관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성질이
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또는 몰라서 짓는 죄업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몰라서 짓는 죄업이 왜 큰 죄라고 합니까? 잘못한 줄을
몰라서 참회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 라고
합니다.
어저께 삼삼회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잘못한 것이 많아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 사람에게 참회문을 독경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을 부라리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참회 할
것이 있냐’ 고 대들었답니다.
계문을 체크할 때, 어떤 사람은 계문에 체크를 5개 하고 어떤 사람은
10개를 했다면 10개 체크한 사람이 죄를 더 많이 지었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일치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정 반대로 5개 체크한 사람이 더
죄를 많이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알지 못한 경우입니다.
말로 짓는 죄가 참 큽니다. 대종사님께서 어떤 제자가 말을 잘못하니까
말 한마디로 몇 천생을 사람 몸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아니면
그 말 한마디로 축생보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몸으로 짓은 죄는 잘못한 줄 알고 받아들이는데, 마음 속으로
또는 말로 지은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상처가 엄청납니다. 제가
여러분을 나가 떨어지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드릴까요? 거의 백발백중 나가 떨어집니다.
하나는 귀에다 대고 ‘너만 알아라. 이 사실을 너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고 하면서 누구의 험담을 하면 교무님이 한
시간 설교한 것보다 그것을 법문처럼 믿습니다.
다른 하나는 전생의 업력이 밀려오면 거의 다 나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99.5%는 거의 다 그렇습니다. 그 업력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인연의
업력입니다.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 자기의 서원이나 신(信)입니다. 법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판단의 기준이 있는데 법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회도 안 되고 판단의 기준도 없습니다.
신이 없는 사람은 자행자지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 내
입장에서의 생각입니다.
제가 잘못 공부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옆 사람은 죽겠다고 하는데
자신은 마음 공부를 하니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기적 마음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어긴 계문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무지하게 많은데…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명균이가 강연회 한다고 등갈비를 먹으러 갑시다 라고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 신문에 보셨죠? 고기 한 점이 내 입에 들오려면
엄청난 환경오염이 됩니다.
그리고 원불교를 믿는 사람은 육도 윤회를 믿는 것입니다. 육도 윤회는
축생의 세계가 영기질로 놓고 볼 때 나와 하나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으려면 진정 참회하고 먹어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먹을 때 수많은
복을 짓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드시고, 그 대가도 받을 생각을 하고
드세요.
자신의 건강이 안 좋거나 잔칫집에 갔는데 어쩔 수 없다든지 그것밖에
없는데 먹으라고 한다든지 하면 먹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직접 만난
고기를 찾아서 등갈비륾 먹으러 가자고 하는 해야 합니까? 이것이
모르니까 자신이 참회도 안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권장하죠. 우리가
모르고 짓는 것이 참 많습니다.
참회는 업력을 녹이는 용광로 라고 합니다. 성불의 기초요, 견성의
첩경이다. 중생 구제요, 중생의 가장 큰 희망입니다. 그것은 참회를 통해
새 길로 다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입니다.
무시선법은 삼학의 종합이고 참회문은 신앙과 수행이 종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회를 하려면 먼저 신앙심으로 사은의 은혜를 알아야 참회가
됩니다. 사은의 은혜를 모르면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만 참회합니다.
그러나 사은의 은혜를 알면 자기 스스로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스승의 날에 최소한 전화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안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내가 마음에 섭섭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제원아. 네가 청년들에게 젊은 청춘을 받쳤다고,
잠깐 몇 년 도와주었다고 그렇게 상을 내는가 본데? 너는 너에게 다
바친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연락을 하고 섭섭하지 않게 하였느냐?’
저에게 전화를 안 한 그 청년보다 제가 더 잘못한 놈이었습니다.
사은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으면 뻣뻣해집니다. 참회를 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여러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잘못한 줄 모르면 참회가
안 됩니다. 인과와 영생에 대해서 모르면 참회가 안 됩니다. 그래서
급선무가 인과와 영생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둘째, 경계에 따라서 우리가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나도 너도 실수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참회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잘못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모두 다 참회해야 합니다.
교무는 참회 안 하고 여러분만 참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잘못
많이 합니다.
셋째, 중근병에 든 사람도 참회를 잘 안 합니다. 또 무식해도 참회를 안
합니다.
참회문이 너무 기니 여러분이 헷갈리는 데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참회문은 음양 상승의 도다. 우주를 놓고 볼 때 음양 상승이라고 표현을
했고, 우리 인간으로 놓고 설명을 할 때는 인과라고 합니다. 즉, 우주
만유의 본원으로서는 음양으로 설명한 것이고, 제불 제성의 심인이나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놓고 볼 때는 인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상생 상극의 업력을 벗어나서 죄복을 자유로 할 수 있다. 제가 저번 주에
상생과 상극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는데, 상대적 상생과 절대적
상생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상대적 상생입니다.
그것은 항상 짝하는 세계, 집착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상생은
상극도 넘어서고 상생도 넘어선 상생입니다. 이렇게 해야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저에게 어떤 사람이 ‘교무님은 제가 이 교당에서 갑자기 사라져도
상처를 받지 않겠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왜?’ 라고 물으니,
‘교무님은 마음의 진공한 자리에 바탕 하니까 상처를 안 입을 것
아닙니까?’ 이런 나쁜 놈이 있습니다.
- ㅋㅋㅋ
상처 입습니다. 제가 마음이 여려서 3일 간 잠을 못 잔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일생 동안 가지고 가거나 내생까지 가지고 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의 자리에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신앙에 바탕 한
수행이 동반 되어야 합니다.
참회라 하는 것은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보이다. 어떤 사람은 참회를 한다면서 자기를 비난하고 난
역시 안 된다면서 자학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새 생활로 개척하는 유무
자리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선도를 행한즉 구업은 점점 사라지고…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점점 사라집니다. 신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고…
여기서 신업은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새로 또 악업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저는 불을 켜면 확 밝아진다는 표현이 좋습니다. 본래 어두운 것이
아니라 불만 켜면 밝아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본래 무명이 아니라 불만
켜면, 자성의 혜광을 따라서 반드시 없어진다 는 것입니다.
죄는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라… 죄도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복도 본래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여기서 마음은 분별성과
주착심의 마음입니다.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라. 아주 중요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 라고 했습니다. 탐하면 어두워지고 진심이 나면 캄캄해
지고 치심이 나면 어두워집니다. 무명과 참진치는 한 덩어리로 엮여
있습니다. 이 탐•진•치 때문에 죄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탐•진•치가 업을 짓게 되고 그 업을 받은 사람은 분해서 치고 받고
합니다. 한 사람의 탐•진•치의 마음에 의해서 상대를 열 받게 하고 바로
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것을 갚을 때 그것을 정업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갚는 행위가 사참이고 이런 잘못을 해결하는 것이
이참입니다. 사참은 냉수이고 이참이 불입니다.
솥 가운데 물이 끊는데 위에 냉수를 붓는 것은 외적인 참회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탐•진•치로 잘못을 해서 어떤 사람이 열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사죄하고 때로는 기도도 해서 다양하게 참회의 방법을 쓰는 데
이것이 사참입니다. 이 사참은 외적 방법이고 무척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참회라고 하면 외적으로 나타난 사참을 이야기
합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 놈의 혀를 잘라 버릴까?’ 또는
‘이 놈의 손, 발을 잘라 버릴까?’ 라고 합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 안에 있는
탐•진•치가 원인입니다.
이참과 사참을 병행하는 것이 대승의 참회요 불조의 참회입니다. 대승의
참회와 불조의 참회는 이참과 사팜을 병행하는 것이고, 안팎으로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두 쪽에 다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참은 하지 않고 잘못했다고 하면서 일시적으로 냉수만
가져다 붓습니다. 그런데 안에 근원적으로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탐•진•치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죠. 그래서 탐•진•치를 해결하는 길이
바로 삼학 수행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은 삼학심으로 대치하는 것
입니다.
중생의 삶은 삼독심의 삶이고 불보살의 삶은 삼학심의 삶입니다. 탐심과
진심은 외적으로 나타나 자기와 남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치심은 안에
숨어 있어서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모릅니다.
강연하라고 하면 자신은 강연 못한다고 합니다. 강연을 못한다는 것은
치심 때문에 그렇고,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고, 못 났다고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부끄러워할 자리에 부끄러워 안 하고 부끄러워
안 할 자리에 부끄러워하는 것이 알고 보면 다 치심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어 놓고 자신은 은혜를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회 할 줄도 모릅니다.
계문을 잘 보면 보통급, 특신급은 사참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상전급의
계문이 주로 이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사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 된 종교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이참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상대방은 성질이 나 죽겠는데……. 아니죠 반드시 사참도 해야 합니다.
두 배로 갚아줘야 합니다.
불이 안에서 타고 있는 줄 모르고 위에다 냉수만 붓고 있습니다. 처음에
물이 뜨거워진 것은 불을 넣어서 땠기 때문에 물이 뜨거워졌는데 그
불을 빼지 않고 위에 냉수만 갖다 붓는 것은 일시적 참회입니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탐•진•치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시적 참회밖에 안 되고 계속
잘못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탐•진•치를 없앤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육신이 있기 때문에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또는 욕심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죄업이 됩니다. 마치 빛과
그림자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다 보면 반드시 업이 같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정책에 다 박수를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생계를 잃을 수도 있고 너무 상심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의 큰 일을 하려다 보면 반드시 어두운 부분들이 있게
됩니다.
대종사님께 어떤 사람이 ‘몇 생을 닦고 깨달으신 분이 왜 아프십니까?’
라고 물으니, 뭐라고 대답 했어요? ‘나는 도를 알고는 죄를 안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나서도 짓는다. 때로는 부지중에 말 안 듣는 제자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두드려 패서 억압을 했다.’ 하고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제자를 막 혼내면 혼난 제자가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
같죠? 그 상황을 들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상당히
위안을 얻었습니다. 내가 충고를 하면 성질 내면서 눈 부라리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법문에도 ‘충고를 달게 받을 정도만 되도 그 사람의
공부는 일취월장 한다’ 고 했습니다.
요새 세상에 누가 충고를 해 줍니까? 겨우 들리는 말이 긍정적으로
감사하면서 웃으면서 살고 칭찬하면서 살자고 합니다. 전부 다 그
소리만 하고 다닙니다.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켕기는 것을
감추고 모른 척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죽음의 공포가 두렵고 생각하기
싫으니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내 안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칭찬만 한다면 누가 충고해 줄 것입니까?
사람은 책을 보면 자극을 많이 받습니다. 법회도 마찬가집니다. ‘교무님
설교를 들으니 가슴이 아파요’ 라고 하는 사람이 제대로 입니다. 내가
한 설교를 듣고 가슴이 안 아프고 좋기만 했다는 사람은 진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법회는 자신의 탐•진•치를 점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만 주면 다들 고개를 숙이고 예쁘다며 환영합니다. 제가
어릴 때 착각한 적이 있습니다. 담배 심부름을 갔는데 담배가게 주인이
저를 보고 너무 잘 생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제가 잘 생긴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순수해서 믿어버렸는데 그 아줌마가 다른
사람에게도 다 그랬습니다. 자기집에 와서 담배를 사가라는 것이죠.
친구간에도 정말로 할 말이 있어도 못 꺼내고 덮어버리고 긍정적으로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 는 소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친하다면, 진짜 그 친구를 위한다면 과연 그렇게 하면 될 것인지..?
내가 친구에게 충고를 하거나 사실대로 말을 했을 때 그 결과를
두려워하는 마음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별로 안 친하니까 포장하거나
겉으로 웃기만 하고 꼬드기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좋은 인연이
되고 서로 은혜가 됩니까?
교무와 교도간에 서로 말 못하고 적당히 웃고만 다니고 칭찬만 하거나
격려만 해준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방법일까? 그것이 과연 진급시키는
길일까? 그것이 과연 깨끗한 그릇을 만들어서 그 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담을 수 있을까? 죽음의 공포를 외면하고 싶고 자신의 잘못을 외면 하고
싶은 마음으로 칭찬만 원하고 칭찬해주는 곳만 쫓아다닌다면 그런
마음으로 성불할 수 있을까?
다음은 공덕과 결과입니다.
<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 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을 임의로 하고 ->
천업은 우주의 음양 상승, 육도의 윤회, 춘하 추동 등이 다 천업입니다.
그런 천업이 온다고 할지라도 내가 마음 공부를 잘해서 또는 사리
연마를 잘해서 대책을 세우면 천업을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겨울이 와서 날씨가 춥더라도 내가 집을 지어서 보일러를 때면 안
춥습니다. 육도 윤회의 이치가 있더라도 내가 마음 공부를 잘해서 내가
나 자신을 진급 시켜버리면, 그것이 천업을 임의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겨울 추위에 벌벌벌
떨고 있는 거나, 옷만 하나 겨우 걸치고 있다면, 천업의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 >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무님 글은 참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는데요? 분명히 미운 것은 있고 사랑할 것도 있고 취할 것도 있고
버릴 것도 있는데, 어떻게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습니까? 말은 좋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
어떻게 말없이 살고 티없이 살아요?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거에요?
어떻게 하라는 거에요? 살다 보면 미워할 것도 있고 취할 것도 있고
옷도 사야 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에요?
이것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아직도 공부 길을 못 잡은
것입니다.
진공(眞空) |
묘유(妙有) |
X . X. X. X |
취할 것, 버릴 것, 미워할 것, 사랑할 것 |
현실 세계에서는 분명히 취할 것, 버릴 것, 미워할 것, 사랑할 것
있습니다. 그러죠? 그런데 이 문장은 없고, 없고, 없고, 없다는 소리죠?
여기도 상대적 상생과 절대적 상생이 있다고 했듯이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짝 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럴 것 없고, 없고, 없고, 없다. 그러면 없다는
이야기이냐? 그 없는 마음의 취할 것 취하고 버릴 것 버리고 미워할 것
미워하고 사랑 할 것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성불을 깨쳐야 이것이
가능합니다. 분명히 우리 마음은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것이
우리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이 분명히 듣고 있지만 있으면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없느냐?
없으면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이것에 가늠을 잡아야
합니다.
< 삼계 육도가 평등 일미요, 동정 역순이 무비삼매라, >
그렇게 되면 삼계의 육도가 평등 일미가 되고 동정간에 무비삼매가 된다.
< 고도 고가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라 내 외 중간에 티끌만한
죄상도 찾아볼 수 없나니, >
내 외 중간을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여기가 내
입니다. 그리고 바깥이 외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가 중간입니다. 내라는
것은 육근 작용입니다. 육근(내)이 육경(외)을 만나서 육식(중간)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알아 들어야 하는데 모른 사람이 몇
사람 있을 것 같습니다.
육근은 안이비설신의를 말합니다. 더 쉽게 말하면 눈, 귀, 코, 혀, 몸,
의식. 이것을 육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육근이 육경을 만납니다.
육경은 성향미촉법이라고 합니다. 눈은 색을 만나고 귀는 성을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보고 몸은 촉감을 느끼고 의식은 시비,
판단을 말합니다. 이것이 각각 식을 일으킵니다. 눈이 색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알 식자 입니다. 그래서 내 외 중간에 하나도 티끌만한
죄상이 없다. 죄상은 죄의 형상이므로 죄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근 - 내적으로 나의 육근은 습관입니다. 죄상이 없다는 것은 탐진치도
제거 되었고 내 안의 습관도 제거 됐다는 것입니다.
육경 - 대타적으로 육경은 인연인데, 죄상이 없다는 것은 주위의 인연도
청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육식 – 육식이 사실은 제구식까지 들어갑니다. 내 마음에 식을 일으키는
마음이 분별에 떨어지고 시기 질투심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더
들어가서 제칠식, 제팔식까지… 제팔식은 아뢰아식이라고 하고 일명
무의식세계라고 이야기합니다. 또는 함장식이라고 합니다. 제칠식은
기억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의 기억에 습관 든 기억이 다 안에 저장 되어
있는데, 죄상이 없다는 것은 더 들어가서 제팔식까지 다 정화가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이참과 사참을 병합해서 심신작용을 삼학 수행을 통해서 맑히고
밝히고 훈훈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인 것이고 비로소 죄업을 마친 것입니다. 죄업을 마쳤다는 것은
이렇게 했을 때 죄업을 마치게 된다 라고 해도 되고 사실 새 생활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승의 참회는 이참과 사참을 병행하는 쌍수하는 참회를
말합니다. 나타난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근원적인
탐진치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이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 이참은
잠재의식까지도 정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의점입니다.
글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왕왕이 출현하여 계율과 인과를 중히 알지
아니하고 날로 자행 자지를 행하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무애행이라하여
불문을 더럽히는 일이 없지 아니하나니,
이런 사람은 공부를 좀 하다 보니 자성의 분별이 없는 자리, 이 진공
자리만 아는 것입니다. 이 묘유 자리까지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애행이 되는 것입니다. ‘살면 뭐하냐? 곧 죽을 텐데.. 내가 어디 있냐?
나라는 것이 원래 없는데… 미움도 없고 사랑도 없구나..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구나..’ 하면서 없는 자리에 빠져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첫째, 자성의 분별 없는 줄만 알고 분별 있는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유(묘유)와 무(진공)를 초월한 자리를 모른 것입니다.
무에 빠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업는 것만 알기 때문에 걸릴 것이 없는
마음으로 무애행을 행해서 큰 죄업을 짓기 쉽습니다.
둘째, 견성하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견성을 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이
있죠? 견성은 10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성불은 990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대종경에는 견셩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왔는데 하나는
국문의 본문을 아는 것과 같다. 하나는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는 것과
같다. 또 하나는 자기 등에 보물을 지고 다니다가 비로소 자기 것인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견성을 하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면 속지 않을 뿐이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수가 먹줄과 잣대를
얻었다고 해서 집이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죽어라 일을 해야 집이
지어질 것 아닙니까? 견성을 했다는 것은 대소의 이치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견성을 해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습관과 업력입니다. 습관과
업력을 견성을 했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불하기
위해서 스승을 찾고 더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습관과 업력을 정말
힘듭니다. 업력이 다가오면 백발 백중 거의 다 쓰러집니다.
그 다음은 습관, 그것은 쉬운 것 같습니까? 특히 나이 먹은 사람은 잘
안 됩니다. 철석 같이 굳은 습관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 교화를 해서
습관이 굳기 전에 손을 봐야 합니다.
견성 후에는 참회도 수행도 필요 없다는 사람이 있지만 번뇌와 착심이
동시에 소멸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성불을 해서 삼대력을
얻었다고 할 지라도 마지막 관문이 있습니다. 정업입니다.
정업은 상대처가 권능이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정업도
삼대력이 있다면 가벼운 것은 소멸 시킬 수 있고 중한 것은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예로 내가 대타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공양을 했거나
많은 사람에게 복을 지었을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옹호를 해주기
때문에 쉽게 그 업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당사자가 반성하고 있으니 처벌하지 말아달라고 주위 사람들이 탄원서에
사인을 하죠? 여러분은 탄원서에 막 사인을 해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니까 잘 안 써줍니다. 그 사람이 진실로
반성하느냐, 또는 그 사람이 평상시에 덕을 베풀었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와 같습니다.
성불해서 받는 정업도 내가 대중에게 많은 복록을 지으면 그 대중의
공력에 의해서 내가 사참을 할 때, 가볍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수행을 통해서 내 자력을 양성해서 정업이 왔을 때 쉽게
받는 길, 또는 가볍게 받거나, 바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성불을 했어도 정업이 남아 있고, 견성을 하면 습관과 업력 착심이 남아
있고, 설사 무(진공) 자리에 떨어져도 유무 초월의 참 도를 아는 것이
아니니, 참회는 무 자리에 떨어진 사람도, 견성한 사람도, 성불 한
사람도 참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업을 경하게 할지
말지니라 고 알려주셨습니다.
질문 하세요.
n 질문과 답변 =========================================
Q_김혜관 : 참회를 하면, 참회가 된 줄을 자기가 압니까?
A_교무님 : 그것도 자기의 업력과 상에 따라서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Q_김혜관 :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A_교무님 : 그 기준은 법의 기준이고 스승님과 주의의 선지식이 기준을
제시하고 객관화 시켜서 스스로 판단하거나 대타적으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참회가 안 됩니다. 자신의 탐심 진심 치심이 무명과 아상에
얽혀서 모든 판단이 자기 주관으로 됩니다. 예를 들면 성질이 나면
어두워집니다. 그러면 자기 주관으로 되어 모든 판단이 마비가 됩니다.
교당 나왔다가 사라진 사람들 거의 다 진심 때문입니다. 아상과 화 난
마음이 딱 얽히면 무명으로 가려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도
윤회로 다시 강급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참회가 되겠어요?
참회가 안 됩니다.
그래서 참회는 자기가 알아챘을 때 참회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심이 있으면 법의 기준을 통해서 법으로 대조를 해서, 아, 내가
잘못했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 신심이 사라지거나 없으면 자기의
자존심이 나와 착심에 걸려서 그것을 법으로 대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승을 멀리 합니다.
일반 기업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당사자를 불러서 무슨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해 라고 하면 먹고 살려고 말을 듣습니다. 종교가에서 말을
듣습니까? 종교가에서 말을 듣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자기의 서원과
신심 밖에 없습니다. 신심이 없으면 누가 말을 들어요?
기업에서는 잘라 버릴 수 있고, 강봉 시깉 수 있고, 아니면 전근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종교가에서 무슨 권한이 있어요? 자기가 안
나오면 끝나 버립니다. 자기 서원이 무뎌지거나, 신심 없으면 아무
효력이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가까이 있어서도 천리 밖입니다.
자 질문하세요. 감사합니다.
타이핑: 박오연
편 집: 김정원
950622_화공_60_제3 수행편_제8장_참회문-2.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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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마음공부방 ◆
950622_화공_60_제3 수행편_제8장_참회문-2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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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09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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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연교우 정원교우님 고마워요 짝짝짝....................................................................
이제는 진도를 맞출 수 있습니다. ^^ 그 동안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