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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이 어떤 서사를 빚는지 살펴보자. 시적 서사는 소설적 서사와 달리 논리적 인과성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 인물 성격의 일관성이라거나 플롯의 개연성 등을 따지지 않는다. 시적 서사는 오히려 언어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등장인물 대신 이미지들이 등장하며 인물들간의 갈등 대신 이미지들이 충돌하여 새로운 국면을 전개한다.
시와 소설은 우리가 일상어라 부르는 산문에서 분화되어 특장화된 장르이다. 그래서 산문 쓰는 이는 통섭적 노력의 일환으로 시와 소설 공부를 등한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시와 소설을 일방적으로 추수한다거나 오로지 그 틈새에서만 자기 정체성을 발견한다거나 단지 공통적인 측면을 이용해서 접목만을 시도한다면 결국 시와 소설의 아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문에는 원형만이 가질 수 있는 사유의 힘이 있다. 그것은 언어 자체의 근원적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좋은 시를 읽으면 깊은 사념에 빠진다. 시가 우리의 철학적 사고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나는 몇 편의 시에 나의 철학적 사유의 흔적을 남겨 보았다. 철학이라고 하면 무슨 대단한 의미를 천착하려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여기서의 철학이란 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직관과 통찰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시를 해설하거나 분석하거나 평가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내 식으로 읽고 내 나름의 기쁨을 얻고자 할 따름이다. 그것은 시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 더 넓게 모든 예술 작품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기도 하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삶을 텍스트로 한다. 그래서 거기에, 그 텍스트들에 내가 쓰는 산문들의 근거와 의미가 들어 있기도 하다.
시와 산문(수필)은 산문시라는 공통의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 산문시가 일종의 교집합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영향력을 인지하고 양방향에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
시가 침된 이념과 시대정신을 상실할 때 그 공허함을 언어 유희로 떼운다. 언어의 가장 기본적 기능 중의 하나인 메시지 전달 기능을 잃는다. 메시지 자체가 없어질때도 있다. 이럴 때 시의 언어는 장식적, 추상적이 되며 고도의 난해함으로 치장된다. 시의 몌시지 기능만 고도로 강조되어 시가 획일화된 구호가 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언어의 순수성이라든가 미학적 기능만 추구한 결과이다. 어떤 시인은 현대시의 난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를 너무 정색해서 해석하려 들지 말고 적당히 무시하라는 조언을 했다. 난해함이 내용의 빈약함을 감추려는 일종의 위장 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반성으로 시는 산문 언어에 주목하게 되었다. 의도적일 수도 있고 본능적 자구책일 수도있다. 산문 언어의 일상성, 논리성, 합리성에 이끌린 것이다. 평범한 언어가 보다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강력한 서사에의 요구다. 고도로 상징화되거나 압축된 시인들의 언어는 스토리텔링에는 적합하지 않다. 압축이나 생략, 또는 비약적 은유 등으로 불가해해진 시들에 주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해석의 열쇠가 서사다. 그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추상미술에 주어진 희미한 형상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서사야말로 허공으로 증발하고 있는 시의 언어들을 다시 끌어오는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한 서사를 구성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제나 양식이 산문(에세이)이다.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아름다움이다. 또는 아름다움이라고 가정하자.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정의는 다양하고 그 함의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문학 장르 중에서 시는 아름다움에 가장 예각적으로 접근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들에서는 별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풍경도 맨 처음 보았을 때가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풍경이 매번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는 매번 새로운 것이 눈에 띄여야 한다. 또는 매번 새로운 각도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세속 사회는 사회적 통념으로 운용된다. 통념이야말로 그들에게 익숙한 유용한 도구이다. 이 통념에 균열을 내야만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래서 시인들은 통념으로 분류될 수 없는 자들이며 본태적 아웃사이더들이다. 우리는 시인들에게서 세상과 사물을 전복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배워야 한다.
수필이 내건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가 서정과 서사다. 수필의 특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고 수필의 지향점을 요약한 말이기도 하다. 서정은 시와 보다 친화적이고 서사는 소설과 보다 근친적이다. 수필은 아무래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근원적 욕망에서 출발한다. 흔히 내 이야기를 글로 옮기면 소설 몇 권은 나올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나를 화자로 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수필의 태생적 한계가 발생한다. 내 이야기는 내가 겪은 이야기며 나의 직접 체험이기 때문에 꾸밈과 거짓이 없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수필의 힘은 그 고백적 진솔함에서 우러나온다. 물론 논의가 거듭됨에 따라 글의 효능을 위하여 약간의 조정과 편집은 가능한 것으로 열린 결론을 맺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허구적 상상력은 봉쇄돼 있다.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인 상상력이 제한된다면 과연 수필은 어디에서 그 문학적 생명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일기나 수기, 또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등과 차별화될 것이며 그러한 자전적 기록들에서 문학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상상력은 여전히 현실을 이해하고 규명하며 의미를 천착하는데 유효하다. 수필도 상상력을 뺏기거나 제한받는다면 그 문학적 가치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벌판한복판에꽃나무하나가있소.근처(近處)에는꽃나무가하나도없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열심(熱心)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熱心)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나는막달아났소.한꽃나무를위(爲)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ㅡ이상, 꽃나무(전문)
우리는 나무와 끊임없이 교감한다. 아니 교감하려고 애를 쓴다. 나무는 아름다운 자태와 굳건한 모습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나무는 언제나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 곁을 지킨다. 나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동물과 달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영원한 수수께끼며 그들의 삶은 신비에 쌓여있다. 한 나무가 꽃을 피울 때 우리는 경탄의 시선으로 그 꽃을 바라본다. 나무는 온힘을 기울여 꽃을 피운다. 나무는 자신의 존재에 집중하는 실존주의자다. 나무는 고독한 유일자다.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만의 꽃을 피워가지고 서있다. 나무는 옆 나무에게로 갈 수 없다. 나무는 우주에 서있는 단독자이며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현자는 카오스 이전에 이미 우주화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고 전한다.
圓覺山中生一樹
원각산중생일수
開花天地未分前
개화천지미분전
非靑非白亦非黑
비청비백역비흑
不在春風不在天
부재춘풍부재천
(원각산중에 나무 한 그루 있어/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꽃이 피어 있었다네/그 꽃은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으며/바람도 없었고그 바람이 불어오는하늘도 없었다네)
ㅡ 광덕사 적선당 주련에 있는 칠언 절구 (졸역)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것은 카오스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존재의 심연이 두렵다. 우리의 삶이란 경계 짓고 구획을 나누고 구별하여 스스로 안심하고 비로소 안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꽃을 매개로 나와 식물의 경계가 지워지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 확고한 관념의 기반이 흔들리는 듯한 모호한 순간이다.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일컫는 것도 사실은 그러한 모호함에 대한 흉내요, 시늉이요, 열심으로 일삼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ㅡ 멜랑콜리아 / 진은영
어떤 그림이 그려진다. 이미지가 형성되어 우리의 감각을 건드린다.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다. 감각은 촉발되지만 그로 인한 어떤 행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장면은 바뀐다.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 이번엔 사막이다. 그는 신처럼 나타나 모래 위에 나를 그린다. 그는 나를 그려놓고 왜 물고기를 그렸다고 기억할까? 나와 물고기와는 어떤 유비가 있는 걸까? 나는 혹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심지어 신은 바람을 불러 나를 지우기까지 한다. 우리의 종교란 모래 위에 그렸다 지워버리는 신의 낙서 같은 건 아닐까?
또다시 장면이 전환된다. 이번엔 바다다. 사막에서 바다로 전환되는 장면 이동에는 어떤 설명도 없다. 단지 물고기라는 이미지만 공유할 뿐이다. 신의 낙서가, 아니면 신의 기억이 푸른 바다 속을 헤엄치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신을 만들어낸 우리는 또 얼마나한 낙관주의자들인가!
되새떼들의 하늘 / 정진규
오늘 석양 무렵 그곳으로 떼지어 나르는 되새떼들의 하늘을 햇살 남은 쪽으로 몇 장 모사해 두었네 밑그림으로 남기어 두었네 그걸로 무사히 당도할 것 같네 이승과 저승을 드나드는 날개붓이여, 새들의 운필이여 붓 한 자루 겨우 얻었네 秘標 하날 얻어 두었네 한 하늘에 대한 여러 개의 질문과 응답을 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지덕지 할 일인가 오늘 서쪽 하늘에 되새떼들이 긋고 간 飛白이여, 되새떼들의 書體여, 자유의 격식이여 몇 장 밑그림으로 모사해 두었네 가슴팍에 바짝 당겨 넣은 새들의 발톱이 하늘을 찢지 않으려고,
흠내지 않으려고 제 가슴 찢고 가는 그게 飛白이라네 하얀 피라네
황욱선생이 노년에 악필(握筆)로 글을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떨리는 왼손으로 붓 끝을 찍어누르듯 한 자 한 자 영혼을 기울여서 쓰셨다. 그 떨리는 붓 끝에서 웅크린 생명들이 태어났다. 나는 그 붓을 들어 석양녘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싶었다. 내 붓의 털들이 낱낱이 살아서 날게 하고 싶었다. 때로는 붓 끝을 거두어 종횡으로 날고 싶기도 했다. 자유는 이런 것이다. 소리없이 따르는 것이다. 수천 수만의 깃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때로는 흔적을 남기는 것들도 있고 빈 자리로 남는 것들도 있다. 우리는 그 비백의 헛된 궤적까지도 사랑한다. 이 군무는 오래가지 않는다. 석양의 빛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되새떼의 자유는 무한하지 않다. 화선지 한 장의 너비 때문이다. 붓은 화선지 밖의 세계는 모른다. 붓은 화선지 이면의 세계도 모른다. 붓은 뒤집힌다. 되새떼는 거꾸로 난다. 왼쪽에서 반전하여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내리꽂히다가 다시 솟구친다. 이 모든 것을 일념으로 한다. 이 모든 것이 화선지 한 장의 일이며 우리에겐 오로지 화선지 한 장의 삶만 주어졌을 뿐이다. 한정된 공간과 짧은 순간에 우리는 되새떼처럼 자유를 위하여 몸부림치다 죽는다. 죽음 앞에서 삶과 그 의미에 대하여 끝없이 반문한다. 묻고 또 묻다가 어둠 속으로 까마득히 사라진다.
늑대들이 왔다
피냄새를 맡고
눈 위에 꽂힌 얼음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얼음을 핥을수록 진동하는 피비린내
눈 위에 흩어지는 핏방울들
늑대의 혀는 맹렬하게 칼날을 핥는다
자신의 피인 줄도 모르고
감각을 잃은 혀는 더 맹목적으로 칼날을 핥는다
치명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먹는 것은 먹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저녁이 왔고
피에 굶주린 늑대들은 제 피를 바쳐 허기를 채웠다
늑대들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법으로, 날카로운 칼에 동물 피를 발라서 세워 둔다.
ㅡ 늑대들, 나희덕(전문)
늑대는 왜 울까? 배가 고파서 울까? 하울링은 꼭 배가 고프거나 어떤 고통 때문에 우는 울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낯설음, 외로움 그리고 끝없는 자기 확인의 표현처럼 들렸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늑대들은 울지 않는다. 저 칼날에 묻은 자신의 피에 도취된 늑대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을 닮지 않았나? 저 끝없이 소진되는 욕망, 끝없는 자기 위로와 자기 연민이 바로 우리들 모습 아닌가?
어렸을 때 내 피를 빨아본 적이 있다. 짭조름했다. 싫지 않았다. 눈물을 맛본 적도 있다. 짭조름했다. 싫지 않았다. 가끔 슬픔을 맛본다. 짭조름했다. 싫지 않았다. 인생 자체가 짭조름했다. 그렇게 싫지 않았다. 나도 이제 울지 않는다. 피와 슬픔의 맛에 길들여져 진정한 존재의 울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치대고 매만지고 꽉꽉 힘줘 주무르고
매만지고 주무르고 치대고
마사지를 받는 건 빵 반죽인데
머리가 시원해진다
치대고 매만지고 손끝이 바르르 떨리도록
하염없이 주무르고
무념무상
속속들이 하양
반드르르 매끄러운 반죽 덩어리
튕겨보고 눌러보고
손바닥으로 눌러도 보고
찰진 반죽 덩어리
두근두근, 이것은 실제의 감촉
아, 살의 감촉!
밀가루와 소금과 약간의 설탕과 누룩
그리고 물과 내 팔뚝의 힘!
사람도 만들 수 있을 듯!
누룩 냄새 발그레 피어오르고
ㅡ 반죽의 탄생 / 황인숙
음식을 만든다는 거, 요리를 한다는 거, 그것은 어쩌면 물질에 생명을 부여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 우리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에너지가 된다는 그런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식재료를 음식으로 만든다는 거, 거기에는 우리의 생명에 대응하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듯하다. 음식의 가장 근원적 형태가 빵이다. 빵을 빚는 과정이 어쩌면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처럼 신비롭다. 만드는 이는 오로지 팔뚝의 힘만으로 빵 반죽을 만지고 치대고 내리누른다. 팔뚝을 통하여 그의 온몸의 무게가 실리고 온 존재의 정성이 기울여진다. 이윽고 반죽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말랑말랑하고 탱탱해진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살 속에서 효모의 기운이 불그레한 꽃처럼 피어오른다.
사물과의 교감, 아름다운 애니미즘의 시, 아름다운 물활론.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종교는 싹트기 시작한다. 내가 있다면 나에 상응하는 존재도 있을 것이다. 빵이 있다면 반드시 빵을 만든 이가 있듯이. 나는 어떤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도 존재 자체를 사유할 수도 없다. 이 시는 어떤 범신론자가 신어게 바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기도다.
갈부던 같은 약수터의 山거리
旅人宿이 다래나무지팽이와 같이 많다
시냇물이 버러지 소리를 하며 흐르고
대낮이라도 山옆에서는
승냥이가 개울물 흐르듯 운다
소와 말은 도로 山으로 돌아갔다
염소만이 아직 된비가 오면 山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人家 근처로 뛰여온다
벼랑탁의 어두운 그늘에 아츰이면
부헝이가 무거웁게 날러온다
낮이 되면 더 무거웁게 날러가 버린다
山너머 十五里서 나무뒝치 차고 싸리신 신고 山비에 축촉이 젖어
서 藥물을 받으러 오는 山아이도 있다
아비가 앓는가부다
다래 먹고 앓는가부다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
ㅡ 山地, 백석(전문)
산은 우리에게 시원의 세계다. 우리가 강변에서 농사를 짓기 전에 우리가 뭇 짐승들과 더불어 살았던 곳이다. 강물이 발원하는 곳, 동굴이 있던 곳, 우리가 수렵채취하며 살았던 곳이 바로 산이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도시와 문명을 이루었지만 끊임없이 산을 찿고 산을 그리워한다. 우리에게 산은 어떤 의미일까? 야생의 삶? 원형으로서의 삶? 훼손되지 않은 삶? 자연 합일의 궁극적 삶을 의미하는 걸까? 그러나 문명에 길든 우리가 산으로 돌아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산은 곧 우리의 이상향이자 절망과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도 모른다. 나는 산마을에 살고 싶다. 문명의 변방, 다시 시원의 삶이 시작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 소와 말이 절대의 세계로 나아가는 곳, 그러나 그곳은 염소가 된비에 쫓겨 다시 인가로 도망쳐 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 염소의 모습은 뒤웅박 차고 싸리신 신고 아버지를 위하여 약숫물을 기르러 온 산소년의 모습을 닮았다. 나도 그런 산마을에 다래나무 지팽이처럼 슬그머니 기대어 살고 싶다.
좋은 시에는 시적 상상력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서사가 있다. 작은 세계가 있다. 나만의 통로가 있다. 나는 오늘도 시의 숲길을 산책한다. 시의 숲을 걷다보면 대자연의 음악 소리가 들리고 그 리듬이 느껴진다. 이 길은 누구와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궁극적 진리의 한조각이라도 발견하기 위하여 오로지 혼자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나의 인도자이며 도반이다. 그러나 내 걸음은 더디고 서투르며 나의 만행卍行은 많은 선인들의 그림자밟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삼보일배의 간절한 심정으로 내 느린 걸음을 탓하지 않는다.
시를 단지 풀어쓰는(paraphrase) 것만으론 의미없다. 그것은 단지 시의 의역이나 해설에 머물 뿐이지 산문의 독자성이라든가 산문만의 독특한 영역을 주장하기엔 미흡하다. 물론 산문도 시나 산문시와 공유하는 영역이 있다. 산문에서도 내재율이라든가 리듬감을 살릴 수 있고 각운이라든가 행갈이의 묘미를 살릴 수 있다. 더구나 우리말 특유의 사음보는 가사나 시조 등 장르 불문하고 두루 쓰인다.
장르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시는 이미 산문시의 형태로 산문의 영역을 분점하였으며 산문도 역시 시적 산문이라는 이름으로 시정신을 산문 미학의 본령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즉 시와 산문은 이미 어떤 지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르적 대립을 하거나 차별화에만 힘을 쏟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차라리 공유하는 부분을 깊이 천착하여 서로의 영역에서 각자의 언어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산문은 운문을 제외한 모든 풀어쓴 글을 통칭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시정신은 모든 문학을 관류하는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문학 정신을 일컫는다. 또한 모든 예술에 관통하고 있는 미의식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시는 모든 통념을 벗어나고자하는 노력이다. 새롭지 않으면 아름답지도 않다. 모든 아름다움은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단지 표현이나 기법 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새로운 시각이란 한 사람의 고유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기반한다. 새로운 시각은 새로운 정념이나 정동을 낳는다. 아웃사이더들의 고독이 보다 통렬하고 호소력 있는 슬픔과 우울의 미학을 전달할 수 있는 소이이다.
시는 시대정신이다. 시대정신은 역사처럼 끊임없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 만약 역사가 진보하지 않고 단순 반복되거나 퇴행한다면 시는 시대정신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물질만능주의나 전체주의가 시대정신이라면 시는 가장 비판적인 그룹의 선두에 서야 할 것이다.
왜 문학에 상상력이 필요한가? 있는 그대로의 경험과 사실적 묘사가 가장 진정성 있는 우리의 자산이 아닌가? 수필은 상상력 부재의 문학이 되어버렸다. 허구적 상상력은 용납되지 않는다. 수필은 내적 체험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다. 여기에 시적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우리의 삶은 고만고만하다. 획일화된 상투적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시적인 상상력으로 전복시켜야 한다. 처음 태어날 때처럼 삶은 낯설어야 하며 세상은 경이로워야 한다. 시정신으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며 모든 가치는 시적 미학으로 수렴돼야 한다.
시가 휘발할 수 있다. 지나친 언어 유희로 시가 공허해질 수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제련 과정을 겪어야 한다. 삶의 혹독한 시련을 온몸으로 부딪혀 겪어내야 한다. 다만 감각적인 언어만으론 시의 겉껍질만 빚어낼 뿐이다. 우리의 언어는 보다 단단하고 치밀하게 벼려져야 한다.
산문시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시부터, 아니 그 이전 가사라든가 사설시조 등에서부터 시에 산문성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산문 쓰시는 분들도 시인들과 함께 일종의 교집합으로 산문시라는 영역을 공유하고 있으며 산문에 시적 요소를 도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들은 왜 시에 산문성을 도입하려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요? 요즘 시가 너무 어려워져서 독자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들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가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거의 해체 수준에 이르렀다 해도 독자와의 불소통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학의 종언'이라는 시대 선언에 시의 난해성도 큰 몫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인들도 산문의 평이성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산문의 특징 중에 하나가 시보다는 산문이 이야기를 담기가 보다 용이하는 것입니다. 압축과 비약이 없는 일상적인 어법 탓이겠죠? 추상미술을 감상할 때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운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림의 제목은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림 앞에서 우는 여인이라는 제목은 그 그림 이해의 단서가 됩니다. 일그러지고 해체된 형상 속에서 희미한 여인의 형태를 발견하게 되고 곧 여인의 슬픔까지를 감지하게 됩니다. 시를 추상미술에 비유하건데 시에 짧은 서사가 있다면 시의 이해에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시가 보다 구체성을 띄게 되고 전달력을 얻게 됩니다. 물론 소설과 같은 복잡하고 거대한 서사를 시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아주 작고 단순한 이야기, 우리 주변에서 흔히 행해지는 철학적 담론들, 어떤 이미지로 전해지는 서사들, 사건보다는 고백들, 이러한 서사의 차용이 시를 산문쪽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서사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시에 담겨있는 서사는 서사 자체라기보다는 서사적 상상력를 촉발하는 이미지입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우리가 잘 아는 소월의 시입니다. 반짝이는 금모래빛과 갈대의 노래만으로 아름다운 강변의 정경과 시인의 유년 생활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어쩌면 이 시에는 현대인들의 꿈과 현실이 교직된 많은 이야기가 슬픔처럼 깃들어 있습니다. 백석의 '무너진 성문을 통하여 청배 팔러 오는 늙은이'나 '맥을 짚으며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흰수염을 길게 기른 의원'과 같은 인물들은 인물 자체가 선명한 스토리입니다. 저는 이러한 시적 서사를 '이미지 서사' 또는 '상징적 서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수필인들이 이러한 이미지 서사를 이미 잘 활용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나하면 이 영역에 우리에게 허용된 문학적 상상력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단 이미지가 이미지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미지만을 위한 이미지는 의미가 희박해질 수 있습니다. 자칫 시는 순수한 언어로 휘발할 수 있습니다. 그 언어들에 철학적 사유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그 철학들은 우리들의 삶과 현실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생의 철학이어야 합니다. 시적 산문은 단지 시를 풀이하거나 해설하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시정신에 철학적 담론을 담아 보다 적극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해석하고 또 한편 관념과 사유를 예술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시인들은 언어의 연금술사들입니다. 그들은 언어로 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시인들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실용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들을 조합하여 화학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언어들은 절제되고 생략되면서 놀라운 빛깔과 비상한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도약하기도 합니다. 다만 시가 언어 유희로 타락하거나 무의미한 실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산문시는 이를 경계하기 위한 최소한의 논리적 기틀이며 문법적 규약입니다.
시정신이란 모든 문학 장르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현대 시는 이 근원적인 힘에서 갈라져 나와 특화된 한 장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이나 모든 철학적 사유는 문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철학도 말과 글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크게 문학의 범주 안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문학(시정신)과 철학이 분화되기 이전의 보다 원형적인 표현의 욕구와 사유가 있었지 않을까요? 나는 그 근원적인 힘과 충동을 산문 정신이라고 봅니다. 현재도 많은 비평가들이 우리 문학에서 철학성의 부재를 거론합니다. 그것은 철학 논문이나 철학 관련 서적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근원적인 힘을 잃음으로써 어떤 풍부함을 잃어가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발원지나 지류와 맥이 끊기면 그 강은 곧 생명력을 잃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민족 문학에서도 산문 정신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판소리나 사설시조 또는 각종 민요 등에서 산문 정신은 자연스럽게 구현됩니다. 일정한 음보를 갖춘 시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삶의 철학이 유감없이 발현됩니다. 현대 시에 이르러서도 그 전통과 흐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중요 시인들이 산문시를 쓰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근원에 대한 무의식적 지향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생경하게 도입하거나 접목하는 것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지와 가지를 이어 붙인다고 한 몸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보다 근원적이 힘까지 돌이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뿌리가 있는 나무와 결합해야 가지는 비로소 그 나무와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시정신과 철학이 결합된 위대한 산문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인들은 어쩌면 피리부는 사나이에 홀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동네 아이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감각적이고 음악적입니다. 그들에게 철학은 다소 불순하고 이질적이고 지나치게 사변적입니다. 그것은 학문이나 논리이지 문학일 수 없습니다. 시인들은 묵은 언어의 때를 벗기면서 자기들만의 유리알 유희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시인들은 결코 사유의 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념이나 이론으로 설득을 시킬 수 있을 망정 감동은 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을 새롭게 보고 인식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물론 새로운 것이 있어야 새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가 갈파했듯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세 살이면 언어를 습득하고 다섯 살이면 세상 이치를 꿰뚫습니다. 새로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의 반복입니다. 극지나 오지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한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곳에 가도 사람이 사는 것은 비슷하고 인간은 그저 탐욕스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뭔가 새롭게 보기 위해선 이 세상을 한 꺼풀 찢어봐야 합니다. 겉껍질만으로는 이 세상은 진부하고 지루할 따름입니다. 겉껍질만의 세상은 감각적이고 통념적이며 상식적입니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입니다. 유쾌한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추한 것은 악한 것입니다. 불쾌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꺼풀을 벗겨보면 세상은 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합니다. 상식이 무너지고 가치가 전도됩니다. 가난하고 추한 것들이 고귀할 수 있습니다. 우울하고 비루한 것들이 신비로울 수 있습니다. 그 세계는 카오스이면서 동시에 유미주의의 세계일 수 있습니다. 그 세계는 무질서하면서 또한 아름다움으로 통합될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이 땅은 증오와 시기와 탐욕의 땅이 아니라 슬픔과 우울과 연민의 땅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땅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움을 재발견할 뿐아니라 재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단단한 겉껍질의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단단하고 강고한 겉껍질의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노예적 삶을 강요하는가. 아름다움에는 어떤 가치가 있으며 아름다움이란 가치가 과연 모든 가치들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을 지닐 수 있는가. 이러한 인식과 사유의 능력이 곧 철학이다. 발견과 인식이 통합된 우리의 원형적 능력을 나는 곧 산문정신이라 부르고자 한다. 산문정신은
우리의 인간성을 해방시킬 것이며 산문 문학을 당대 최고의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이 세기가 위대한 시대임을 증명해 줄 것이다.
인간 내면의 깊은 심연에 첨예한 시대 정신과 심오한 사상이 결합되면 위대한 산문 문학이 탄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산문 작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그의 신들메를 묶어줄 예언자가 나올 겁니다. 나는 신들메를 묶는 자의 신들메라도 묶어주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는 반드시 수필가라는 이름으로 탄생할 것입니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위대한 산문 시대의 도래'라는 말은 유예될 것입니다.